한산도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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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전투 목록
율포 해전
(1592년 6월 7일)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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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난중일기, 7월 초8일 기사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이 벌인 해전.

한산도 대첩
날짜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장소
조선 견내량 한산도 앞바다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조쇼쿠호 일본
지휘관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정운
어영담
김완
이영남
송희립
황세득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1]
병력전선 56척전선 73척
피해 규모3명 전사, 10여 명 부상.47척 침몰, 12척 나포
결과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확보
조선 수군의 승리.

《세계 4대 해전》
</br>살라미스 해전(B.C. 480년)
</br>칼레 해전(1588년)
</br>트라팔가 해전(1805년)
</br>한산도 대첩(1592년)
</br>
</br>학은 날개를 펴고
</br>학익진
</br>대선 36척 중 35척 격파
</br>중선 24척 중 17척 격파
</br>소선 13척 중 7척 격파
</br>왜군 8980명 사망
</br>적의 예기를 꺾고
</br>제해권을 장악하라
</br>ㅡ 불멸의 이순신 한산도 해전 예고1, KBS

학익진
</br>유인하여 섬멸하라
</br>어둠을 수정하고
</br>햇살을 이끄는 일
</br>피 흐르는 투쟁의 중심
</br>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br>ㅡ 불멸의 이순신 한산도 해전 예고2, KBS

1 배경

1592년(선조25),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의 육군 수송부대와 수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해안의 수군부대가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육군과 호응하던 수군부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잔존 수군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하게된다

2 전개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ㅡ 선조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1일(기유) 4번째기사

깨알 원균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이 약체임을 증명한 와키자카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 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왜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왜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루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2]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5~6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 수군을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이 전개되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매복을 의심 할 수도 있는 상황이였지만 와키자카 본인은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전투를 경험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조선군을 일본군 이하의 존재로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왜군 함대는 손쉽게 조선 수군이 던진 미끼를 물며 한산도 근해에 진입하게 된다,

어느 정도 물러나던 이순신의 함대는 해협을 지나 복병을 배치해둔 작전지역까지 진입하게 되자 마침 내 한산도 양옆의 섬에 배치시켜놓았던 전선들을 약 3개의 부대로 나눠 학익진의 날개를 길게 펼친채 일본 수군을 완전한 형태로 타격하게 된다.

마침 해협의 해류가 바뀌어 조선 수군이 해류를 타고 총통과 화기를 쏘며 전진하자 와키자카 부대 내의 주요 가신들과 부대들이 녹아내리듯 줄줄이 무너지게 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본인도 지휘선 내에서 화살에 맞는 등 부상의 위기를 당하게 되지만 속도가 빠른 다른 관선을 타고 김해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진다.

이후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400~200여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유기한 채 섬으로 도망쳤으며,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주요부대가 모두 격침당하자 방향을 바꾸고 김해로 도망쳤다,

3 결과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진출을 향한 야망에 사형을 선고한 전투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격파당한 일본군은 16일 안골포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되자 수군의 주력부대를 모두 손실하는 피해를 입게된다.

이에 더 이상 해상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 병신들 존나 못 싸우네.니들은 그냥 육지에 조선 수군 오면 해안 방어나 하셈" 이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되찾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수운으로의 진입에 실패함과 더불어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부산까지 습격당해 일본군이 해상요격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명나라의 남하와 더불어 일본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된다.

한편 전후 논공행상을 위해 비변사가 선조에게 포상을 논의했는데,

비변사가 한산도 대첩에서의 승리에 대한 상을 논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 수사(慶尙水使) 원균(元均)의 승첩을 알리는 계본(啓本)은 바로 얼마전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閑山島) 등에서 승리한 것과 한 때의 일입니다. 싸움에 임해서는 수종(首從)이 있고 공에는 대소가 있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차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적을 벤 것으로써 대략을 논하면, 힘을 다하여 혈전했음에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시 1등에 참여된 이는 마땅히 별도로 포상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첨사(僉使) 김승룡(金勝龍), 현령(縣令) 기효근(奇孝謹)은 특별히 당상(堂上)에 올리고, 현감(縣監) 김준계(金遵階)는 3품으로 승서(陞敍)하고, 주부(主簿) 원전(元㙉)은 5품으로 승서하고, 우치적(禹致績) 등 4인은 6품으로 승서하고, 이효가(李孝可) 등 13인은 공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소서. 만호(萬戶) 한백록(韓百祿)은 전후 공이 가장 많은데 탄환을 맞은 뒤에도 나아가 싸우다가 싸움이 끝나고 오래지 아니하여 끝내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극히 슬프고 애처로운 일이니, 또한 당상(堂上)으로 추증하소서. 배지인(陪持人) 박치공(朴致恭)은 3급(級)을 베고 왜적 한 명을 사로잡았으니 6품으로 승서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에 의하여 조처해야 한다. 원균에게는 가자(加資)를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균은 이미 높은 가자를 받았고 지금 이 전첩(戰捷)의 공은 이순신이 으뜸이므로 원균에게는 가자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ㅡ 선조 29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24일(신해) 2번째기사

선조의 노답 원균빠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4 기타

와카자카 야스하루가 영지 규모(약 3만 석고)및 동원전력(1500명)으로 큰 규모의 함대를 운용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논란이 존재한다.

다이묘들은 영지 1만석당 250명에서 무리하면 최대 500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하는것이 가능했는데, 실제 와키자카의 동원병력은 일본사료의 군역장에서 약 1500명 정도이며, 이는 이전에 참전했던 오다와라 포위전 등에서도 엇 비슷한 병력을 동원하기때문에, 와키자카가 갑자기 수천에서 만단위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나타날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사료는 일본 수군이 1만을 이끌고 나타났으나 한산도에서 약 9000명을 손실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실록의 기록과 더불어 이순신 휘하에서 일본의 포로가 된 제만춘이 증언한 기록 '병량조발건기'를 참고해서 9000명의 손실을 증언한다. 이를 두고 해당 사료는 일본에서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으나, 일개 포로가 기록한 개인의 기록물이 그대로 일본측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생각이다. 애초에 명량 해전 이후 일본군의 포로로 명량해전에 종군한 전풍상의 증언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으나, 당연하게도 일본측 기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해안에 남하하기 전 같이 경기도에 주둔하던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일부 병력을 양도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의 사료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다만 구키 요시타카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으로 키즈가와 구치 해전에서 대단위의 해상 병력을 전개한 것을 고려해 보면 지원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확실한 것은 와키자카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병력이 합쳐서 전개된 안골포에서보다도 많은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 근해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면 수군의 주력을 와키자카가 이끌게 되었고, 기타 용인에서 잡은 조선인 포로들과 스가다이라 등 소수의 병력이 와키자카에 합세한 것을 확인하면 최소 2000~3000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확실하며,[3] 수부들은 따로 일본 본토에서 징발하여 선박에 태워 보낸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비전투원(선원, 노꾼)들을 합쳐 대단위 병력을 동원했다는 설도 있다.

와키자카는 이 전투에서 실로 참담한 패전을 겪었음에도 이를 모두 정직하게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에 전했다. 허세는 기본이요, 무공은 마구 부풀리고 패배는 애써 축소했던[4] 당시의 무사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에피소드이고, 그 덕에 일본측의 한산도 대첩 전후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다.

패전 직후 와키자카는 조선군의 추격 선단에 쫓겨서 대선을 타고 무인도에 급히 상륙했는데, 조선 수군이 바로 몰려와 그 대선을 태워버렸고 와키자카와 부하들은 졸지에 육지에서 5km나 떨어진 무인도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자 그 배의 선장이었던 마나베 사마노죠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할복자살해 버렸고, 와키자카는 무려 10여일 간을 미역만 뜯어먹으며 섬에 숨어서 조선 수군이 철수하기를 기다렸다. 조선 수군이 철수하자 와키자카와 부하들은 자신들이 타고 온 배의 잔해를 뜯어 얼기설기 이어서 뗏목을 타고 필사의 탈출[5]을 감행했는데, 간신히 상륙할 즈음에 물러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이 쫓아와서 사격을 가해 겨우 상륙에 성공한 패잔병들도 일부 사살당했다고 한다.[6]

KBS 역사스페셜의 일본 측에서 바라본 이순신 상과 일본측의 이순신 관련 사료들을 탐구하는 에피소드에서 와키자카 가문의 현 당주인 와키자카 겐지 씨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와키자카는 이 날의 패배를 기억하기 위해 본국에 돌아와서도 집안 사람들이 한산도 해전이 일어난 날만 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먹지 않고 미역만 먹도록 했다고 하며, 그 전통이 자신의 대까지 남아있어서 자신은 한산도 대첩 날을 '집안 사람들이 미역만 먹는 날'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순신의 1인칭으로 서술되는 칼의 노래에는 마나베가 500여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무인도에 상륙했다가 나갈 곳이 없어서 할복 자살했고 병사들은 다 굶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1인칭인 소설의 형식 때문에 이순신이 얻을 수 있었던 정보의 한계를 고려해 실제 기록을 일부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탈출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기 때문에 이게 자연스럽다.

5 미디어 창작물

임진왜란의 해전 중에서도 명량 해전, 노량 해전과 함께 매우 유명한 해전이어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는 높은 확률로 등장한다.
다만 이 한산도 대첩을 띄워주다 보니 이순신을 상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덩달아 고평가되는 부작용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불멸의 이순신.

5.1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 옥포, 당포 해전에 이어서 다루었다. 그런데 앞의 해전의 장면을 너무 짜깁기한 느낌에 이순신의 거짓 퇴각 후 학익진을 펼치는 전략 표현이 미흡한 점이 흠이다. 더구나 이 드라마에서 원균이 용장을 가장한 민폐캐릭으로 묘사되는 만큼 이순신의 전략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출격해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이순신이 원균이 적선에 다가가기 전에 재빨리 본래 세운 전략을 실행하는 모습으로 나와서 실제 기록과 맞지 않는 모순이 나온다. 애초에 원균은 개전 초에 전함을 자침하는 바람에 정면대결을 하고 자시고 할 전력이 없어 그냥 이순신을 따라다니기만 했는데도...

5.2 불멸의 이순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3회 후반 ~ 74회에서 나왔으며 임진왜란의 전투 장면 중 가장 훌륭한 묘사로 꼽힌다. 위에서 언급된 소규모 함대를 통한 도발-유인, 일자진으로 가장한 뒤 거짓 후퇴하는 장면, 연합 수군의 쌍학익진 구성 등을 CG로 잘 표현했다. 이순신 역의 김명민과 함께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의 김명수장평 역을 맡은 조재완의 열연 또한 각각 인상적이다.

5.3 명량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의 프리퀄 격으로 바로 다음에 제작 예정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한산도 대첩이 될 예정이다. 가제는 한산 : 용의 출현.

5.4 징비록

징비록(드라마)에서 23화에 등장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재탕한 장면은 한 컷 나왔으며 대부분은 새로 찍은 장면들이 나왔다. 특히 지도상에서 학익진을 구현하면서 보여주는 전투씬은 문명 5의 전투를 연상하게 한다. 유인 과정은 생략되었지만 정황상 조총의 사정거리까지 오도록 유인하여 방심시킨 후, 함수를 돌렸다.

퇴각하나 싶었더니 페이크다 이 왜놈들아, 양 섬에 숨겨놓은 함대들로 학익진을 펼쳐서 포위했다. 학익진을 펴는 조선 수군을 보면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이게 무슨 진형이냐?"면서 멘붕. 그 뒤에 부장이 "계속 진격하면 아이고 맙소사 이제 우리 모두 죽었어저 진형에 포위당할 것 같습니다"라며 퇴각하자 하자 와키자카는 친히 칼을 빼들고 "죽고싶으냐"란 말과 동시에 "전열을 갖추라" 지시했고 이에 이순신포격으로 응수한다.

결과는 한 척 한 척 쌈싸먹혀 깔끔하게 지워졌고, 결국 함대가 박살나는 것을 벙찐 채 지켜보다가 부하의 간언으로 차분하게후퇴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순신은 곱게 놓아준 전용 샌드백과는 달리 이번에는 추격을 명하여 완전히 섬멸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4화에서 전후가 나왔는데, 히데요시는 빡쳐서 내관을 직접 베어버렸고, 섬에 표류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부하들과 있는 와키자카의 참상은 그야말로 일본군 망했어요 수준.미역 먹방만 나왔으면 완벽했다. 근데 거북선이 안 나왔잖아(...).

덤으로 옥포해전에 이어서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풀버전으로 나왔다.

5.5 임진왜란 1592

제2화에서 등장한다. 사천 해전 편처럼 근거리 직접 사격으로 묘사한 것 외에는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편. 그런데 전투 묘사에서 문제가 많다. 실제 한산도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위에 나온 것처럼 매우 미미했다. 그런데 이기남이 탄 귀선이 집중 사격을 당해서 이기남 등이 쓰러지는 등 거북선이 거의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로 큰 피해를 입는다. 또한 180도 선회 후 2차 포격을 가하기 직전 왜군이 도선을 시도할 정도로 너무 가깝게 접근한다. 아무리 근거리 사격이라지만 과장이 심한 수준.

당연하지만 판옥선과 거북선은 조총 사격 따위에는 뚫리지 않으며, 실제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은 학익진의 일제 포격으로 왜 수군의 진영이 한번 갈아 엎어진 뒤에 굳히기로 투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ㄴ 조선왕조 실록에는 사천, 당포, 한산도 해전에서 거북선이 먼저 돌격하였다고 나와있다.
  1. 할복(자살).
  2. 물론 명량 해전 때의 울돌목처럼 가공할 수준의 조류는 아니지만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3. 의외로 병력수가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만석의 다이묘치고는 꽤 많은 수이다. 예로, 수십만 석의 다이묘들이 일본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약 17만명이 동원되었다.
  4. 모범적인 무사라고 알려진 가토 같은 인물도 공을 부풀리거나 거짓보고를 하다가 걸리기도 했다.
  5. 물살이 어지럽고 빠른 한산도 근방의 해역에서 너덜거리는 뗏목을 타고 5km나 저어 갔다는 얘기다!
  6. 이후 와키자카는 죽어간 부하들을 생각하며 통분한 마음을 갖고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가 조선 수군의 정찰대를 몰살시켜서 분풀이를 했는데, 사로잡은 정찰대의 지휘관이 기적적으로 탈출해서 나중에 조선의 수군 장수가 되어 나타나자 전장에서 그를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는 후일담도 있다. 조선 수군 자체가 실로 살아있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