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일본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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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하야시 센주로 |
廣田弘毅 1878.02.14~1948.12.23
일본의 외교관. 정치인. 총리. 패전 후 사형당한 A급 전범 중 유일한 문관(文官)이다.
당시 A급 전범 중 사형당한 사람은 7명으로, 기무라 헤이타로, 도이하라 겐지, 도조 히데키, 무토 아키라, 마츠이 이와네, 이타가키 세이지로, 히로타 고키 이렇게 일곱 명이 처형되었다. 그 중 히로타 고키만 외교관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군인이었다.
후쿠오카 현 출생. 부모는 남의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었는데, 맡은 일을 열심히 해주자 자식이 없었던 주인 부부의 마음에 들어 아버지가 주인의 양자로 들어가 히로타 씨를 받았다. 어렸을 때 이름은 죠타로(丈太郞)였다.
히로타의 집안이 그리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죠타로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학비를 절약하려고 생각했으나, 당시 독일-러시아-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청일전에서 빼앗은 뤼순을 뱉어내자 그걸 보고 군인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다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종의 승려에게 조언을 듣기 위해 찾아갔다가 선종의 스님과 상담했을 당시에 "너는 스스로 자신에게 책임을 지며 스스로의 이름을 생각하라"라고 이야기 했고, 외교관으로 생각을 바꾸어 먹으면서 이름도 죠타로는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란 구절에서 넓은 식견을 뜻하는 "弘"과 강한 의지력을 의미하는 "毅"자를 따서 개명했고 '고키(弘毅)'라는 이름이 되었다.
히로타는 특이하게도 야쿠자와 연줄이 많이 닿아있었는데, 스스로 맺은 연줄인지 아니면 아버지 대에서 내려온 연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야쿠자에서 히로타에게 많은 도움을 준 건 확실한데, 히로타의 대학 학비도 지원한 것을 보면 꽤 깊숙히 연줄이 닿아있었던 듯 하다. 1906년 도쿄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그와 같이 들어간 동기가 요시다 시게루다.
1907년 베이징 영사관보를 시작으로 영국, 미국, 소련 등으로 부임하며 경력을 쌓았다. 대부분의 외교관들이 그러하듯 그도 시데하라 기주로의 협조외교론을 지지했고 한때는 시데하라 외교론의 중추로 불릴 정도로 신봉했었다.
1933년 사이토 마코토 내각의 외무대신을 시작으로 오카다 게이스케 내각에서도 계속 외무대신을 맡았는데, 오카다 내각이 2.26 사건에 의한 여파로 물러나자 그가 후임 총리가 된다.
사실 그는 오카다의 사임 직후 곧바로 총리로 임명되지 않았는데, 원래 쇼와 덴노는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으로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후임 총리를 맡을 것을 부탁했으나 고노에는 건강을 핑계로 빠져나갔고, 고노에 이후 이치키 기도쿠로 등 여러 원로들에게 후임 총리를 부탁했으나, 원로들은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이 사망한 5.15 사건과 2.26 사건을 보고 겁을 먹은 나머지 모두 거절했다. 결국 순번이 돌아와 외상이었던 히로타에게 조각을 권고했는데, 히로타도 거절하면 되겠지 싶어서 계속 거절하다가 사이온지 긴모치의 압력에 의해 반강제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히로타는 그렇게 총리에 취임했으나, 원래 처음부터 거론되던 후임 인선이 아니었고 가난한 평민 출신이었던데다 야쿠자와의 연계설도 떠돌고 있어서, 쇼와 덴노나 인선에 개입한 사이온지나 둘 다 마뜩찮아했다. 게다가 총리 취임 이후 히로타가 군부에게 끌려가는 듯한 인상까지 주게 되자, 히로타에 대한 정권신뢰도가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온건파였던 히로타는 일단 군부를 억제하기 위해 취임 이후 군부에 칼을 들이대기 시작했는데, 데라우치 히사이치를 포함한 정치군인 세 명을 현역에서 은퇴시키고, 숙군 과정에서 반발하는 장교 열다섯 명을 잡아다 처형시키는 등 처음에는 의외로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나 결국 지랄맞은 군부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국방 예산을 올려줬으며, 현역 무관이 군부 대신으로 입각할 수 있게 하는 등 완전히 기가 꺾인다.(...) 권력을 잡아보니 현실이 시궁창
결국 히로타 내각은 낮은 지지도와 강성 군부 때문에 1년도 채 못 채우고 11개월만에 사임해버렸다.
총리 퇴임 이후에도 계속 외교관 생활을 지속해,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맡았고 이후에는 추밀원 의원으로 재직했다.
패전 이후,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연합군에게 체포되었고 스가모 구치소에서 투옥되었고, 1948년 처형되었다. 여담으로 히로다의 아내는 남편의 재판 전에 자살했는데 자살한 이유는 우익단체에 관여한 그녀가 남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그런데 히로타가 A급 전범으로 분류된 과정이 석연치 않다. 일단 히로타는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도록 지시한 지도층은 아니었으며 그 외 여러가지 천인공노할 전쟁 범죄와도 연관성이 적은 사람이긴 했다.
사실 연합군이 히로타를 기소한 주 내용은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그 전 시기부터 전쟁 준비를 해오고 있었느냐 아니냐[1]에 초점을 더 두고 있었다. 물론 히로타보다도 더 전쟁에 관여하거나 참여한 전직 총리들[2]은 전후에도 많이 살아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종신형이나 징역형, 금고형을 당했을 뿐이었다. 결국 같은 동급의 죄목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은 사람은 히로타 고키 뿐이었다. 물론 히로타는 자신이 총리직을 수행할 당시 전쟁 준비를 묵인하였다고 스스로 자백했으며, 전직 총리로서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억제하지 못한 점, 그리고 고노에 후미마로와 도조 히데키를 총리로 추천한 원로 중 한 명이 히로타였던 것을 감안하면 무죄로 판결나는 것은 무리이긴했다.
게다가 쇼와 덴노는 전쟁의 최고 지휘자임에도 사실상의 면죄부를 묵인받았고, 전범으로 확실하게 족치려던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가 스스로 음독자살해버리자 전쟁에 협력했던 관료층에서 전쟁 책임을 질 사람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게다가 히로타와 야쿠자의 연계설도 전범으로 낙인찍히는 데 영향을 줬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가 버무려진 끝에 히로타는 A급 전범으로 규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리수에 대해서 그나마 개연성이 가장 강한 추측은 고노에 후마미로를 대신한 희생양이 필요했다는 것. 태평양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인 중일전쟁의 책임자가 될 고노에 후미마로가 자살해버린탓에 그 대신으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
당시 히로타에 대한 사형 선고는 일본으로 파견된 연합군 재판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게 갈라졌었다고 하고, 일본의 학자들은 히로타의 사형을 반대하는 서명을 연합군에 보내올 정도였으나 연합군은 결국 히로타 고키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히로타 스스로도 사형당하는 게 억울했는지 나중에 사형 집행 시기, 같이 사형당한 여섯 명은 '천황폐하 만세'를 각자 부르고 사형당했는데 비해 히로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죽었다. 어쩌면 달관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