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lary Putnam
1926년 7월 31일~2016년 3월 13일
목차
1 개요
1960년대 이후 현대 분석철학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심리철학, 언어철학, 수리철학, 과학철학에 기여한 바가 크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연구를 해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철학적 포지션이 자주 바뀐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것이 퍼트넘의 철학을 다소 난해하고 애매하게 보이게 만든 이유 중 하나다. 그의 철학은 칸트, 비트겐슈타인, 퍼스, 제임스, 듀이, 콰인, 크립키 등의 영향을 받았다.
2 생애
1926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 퍼트넘은 미국의 유명 번역가이며,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퍼트넘 일가는 1934년까지 프랑스에 살고 이후 미국 필라델피아로 돌아와 정착했다. 퍼트남은 센트럴 고등학교(Central High School)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한 학년 후배인 노엄 촘스키를 만났다. 이후 그들은 친구로 지내며 종종 만나서 서로 지적인 논쟁을 했다고 한다. 퍼트넘은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해서 학부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동문인 촘스키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을 잠시 공부하고 1951년 UCLA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논리실증주의자 한스 라이헨바흐인데 당시 퍼트넘의 철학적 입장은 알 수 없지만 이후 퍼트넘의 철학적 행보는 논리 실증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노스웨스턴 대학교 (1951-52), 프린스턴 대학교 (1953-61), MIT (1961-65)를 거쳐 1965년 하버드 대학교로 교수직을 옮겼다. 1962년에 결혼한 아내 루스 애나 제이컵스 (Ruth Anna Jacobs) 역시 웰즐리 여자대학교(Wellesley College)에서 철학을 가르친 바가 있다.
하버드에서 그의 강의는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제리 포더(Jerry Fodor), 네드 블록(Ned Block), 조지 불로스(George Boolos),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 하트리 필드(Hartry Field)가 있다.
3 견해
3.1 심리철학
3.1.1 다수실현 가능성
심리철학에서는 다수 실현가능성(Multiple Realizability) 논변을 제시한 걸로 매우 유명하다. 다수 실현가능성은 1960년 후반에 고전적 환원적 물리주의 심신이론인 유형동일론(type-identity theory)를 비판하기 위해 고안된 심신이론이다. 유형동일론에 따르면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 또는 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과 동일하다. 예를 들어 "고통은 신경섬유 C의 작용과 동일하다"가 그것이다. 그러나 퍼트넘에 따르면 고통은 서로 다른 신경적 시스템을 가진 개체들의 물리적 속성들과 대응할 수 있다.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인간의 고통은 신경섬유 C의 작용과 동일하지만 외계인은 인간과 동일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 고통의 작용은 신경섬유 C가 아닌 다른 종류의 물리적 속성일 수 있다.
물리적 속성이 달라도 만약 두 개의 개체가 동일한 기능적 속성을 가졌다면 두 개체의 심적 속성은 동일하다는 기능주의 입장은 이런 다수실현 가능성 논변을 함축하고 있다. [1] 퍼트넘과 그의 제자 제리 포더 역시 기능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런데 1980년대에 퍼트넘은 자신이 고안한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에 의해 자신이 고수했던 기능주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트넘의 기능주의 입장은 퍼트남의 영향을 받은 마, 데닛, 포더, 루이스 등에 의해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해왔고 이는 곧 현대 인지과학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3.2 언어철학
3.2.1 의미 외재론
전통적으로 철학에서는 의미라는 관념(notion)에는 외연과 내포가 섞여있다고 여겨졌다. 용어의 의미가 개념이라는 생각은 의미가 심적 존재 (entities)라는 함축을 가진다. 물론 프레게는 이러한 "심리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는 의미가 공적 속성이라는 속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개념을 심적 존재라기보다는 추상적 존재(abstract entities)로 규정(identify)했다. 그러나 추상적 존재를 "획득(grasping)"하는 일은 여전히 개인의 심리적 행위이다. 이 철학자들 중 누구도 말을 이해하는 일 (그 내포를 아는 일)이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동일한 외연을 가지지만 내포는 다른 용어에 대한 지적은 많았었다. 그러나 그 역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즉 두 용어가 외연은 다르면서 내포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의미의 검증주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는 카르납을 비롯한 철학자들은 용어에 대한 개념이 그 외연에 속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개념(내포)이 같으면 외연이 다를 수 없는 것이다.
퍼트넘에 따르면 전통적인 의미의 이론은 도전받지 않아온 두 가지 가정에 의존하고 있다.
(1) 용어의 의미(내포)를 아는 일은 단지 특정한 심리적 상태에 있는 문제이다.
(2) 용어의 의미(내포)는 그것의 외연을 결정한다.
이 두 가정은 의미 관념을 포함해서 어떤 관념에 의해서도 함께 만족될 수 없다. 전통적인 의미 개념은 잘못된 이론에 의지하고 있는 개념이다.
퍼트넘은 의미가 머릿속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그의 논문 "Meaning and Reference"에서 쌍둥이 지구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사례 1) 지구 vs. 쌍둥이 지구: “물” vs. “물”. H2O vs. XYZ. 평상 상태에서는 구분 안 된다는 가정 하에서, 처음 상대 지구에 방문한 사람은 상대 지구의 “물”을 보거나 듣거나 말할 때 지구에서의 “물”을 떠올릴 때와 같은 심리적 상태에 있을 것이며, 두 지구에서 “물”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의 구성원소를 알게 된다면 두 지구의 사람들은 서로의 “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할 것이다.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는 XYZ를 의미한다.” “지구에서 ‘물’이란 단어는 H2O를 의미한다.”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라 불리는 것은 명백히 물이 아니다.
(사례 2) 1750년경 가정. 각 지구의 오스카1과 오스카2는 자기네 ‘물’의 구성원소를 모른다. 그 둘은 “물”에 대해 같은 감정, 느낌,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1750년 지구에서 “물”이란 용어의 외연은 1950년에서와 같이 H2O였다. 1750년 쌍둥이 지구에서 “물”이란 용어의 외연은 1950년에서와 같이 XYZ였다. 오스카1과 오스카2는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은 ‘물’이란 용어를 다르게 이해했다.(물론 그들이 다른 이해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50년은 더 기다려야 했겠지만) 즉 ‘물’이란 용어의 외연(의미)은 화자의 심리적 상태 자체의 함수가 아니다.
지구에서 1750년과 1950년의 “물”의 외연이 어떻게 같은가? 내가 한 잔의 물을 가리키며, “이 액체는 물이라 불린다”라고 말할 때, 물에 대한 이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는 다음의 경험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즉, 내가 지금 가리키는 액체는 나와 언어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이 “물”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어떤 것과 특정한 동일성(sameless) 관계(x is the same liquid as y; or x is the sameL as y)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말이다. 이 sameL 관계는 이론적 관계이다. 즉 그 관계의 성립 여부는 과학적 탐구에 의해 탐구에 의해 결정된다. 이에 따르면, 1750년의 사람이 XYZ를 “물”이라 부르고, 50년이나 100년이 지나 그것을 “물”로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실이 그 사이 ‘물’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1750년의 사람이 XYZ와 지금의 물에 sameL 관계를 잘못 부여했을 뿐이다. 1750년이나, 1850년이나, 1950년이나, 우리는 미시간 강의 물을 가리키며 “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물”이라 불리는 것들은 sameL 관계를 만족하기 때문이다.
(사례 3) 지구와 쌍둥이 지구에서, 알루미늄과 몰리브덴을 서로 바꿔 부른다고 가정. 전문가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만, 일반인은 구분 못함. 그렇다면 지구의 금속학자는 쌍둥이 지구의 “알루미늄”을 몰리브덴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쌍둥이 지구에 방문한 일반 지구인은 쌍둥이 지구의 “알루미늄” 냄비가 알루미늄 냄비가 아니라고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인 오스카1과 쌍둥이 지구인 오스카2는 각 지구에서 “알루미늄”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동일한 심리적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스카1의 개인 방언에서 “알루미늄”의 외연은 알루미늄이지만, 오스카2의 개인 방언에서 “알루미늄”의 외연은 몰리브덴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화자의 심리적 상태는 그 말의 외연(의미)을 결정하지 않는다.
(사례 4) 일상에서, 나는 느릅나무(elm)와 너도밤나무(beech)를 구분할 능력이 없음에도, 나의 “느릅나무”의 외연은 다른 사람들의 “느릅나무”의 외연(즉 느릅나무 집합)과 같고, 나의 “너도밤나무”의 외연은 다른 사람들의 “너도밤나무”의 외연(즉 너도밤나무 집합)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나의 “느릅나무”와 “너도밤나무”는 외연이 다르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연의 차이는 우리 개념의 어떤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느릅나무 개념은 너도밤나무 개념과 정확히 같다면(둘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 어떤 이는 그 외연의 차이가 분명히 나의 심리적 상태에서의 차이에 의해 설명된다고 시도하려 할 것이다(아마도 단어의 스펠링이 서로 다르므로 같은 심리적 상태에 있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지구/쌍둥이 지구의 느릅나무/너도밤나무 스위치 가상 사례를 구성하여 재반박될 수 있다. 지구의 나와 쌍둥이 지구의 내 도플갱어가 똑같이 “느릅나무”를 말할 때 그의 심리적 상태는 나와 완전히 똑같겠지만, 전자의 외연(의미)은 느릅나무인 반면 후자의 외연(의미)은 너도밤나무이다.
즉 “의미”는 단지 머릿속에 있지 않다.
3.2.2 의미 이론
솔 크립키와 마찬가지로 퍼트넘은 의미에 관해서 인과적 지시이론을 주장한다. 거칠게 말해서 언어철학에서 인과적 지시이론이란 지시체가 단지 인과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이다.[2]
3.3 수리철학
퍼트넘은 수학적 실재론자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추상적 대상과의 대응을 통해서 수학의 실재를 주장하는 수학적 플라톤주의와 다르게 퍼트넘은 이런 추상적 대상과의 대응을 부정한다. 이런 그의 수리철학적 입장은 그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대상 없는 객관성 (Objectivity without objects)을 함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수학뿐 아니라 논리학과 윤리학도 객관적이라고 믿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객관성이란 플라톤 전통에 따른 대상과의 대응을 통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적 입장은 내재적 실재론으로 요약되며, 이런 애매한 포지션으로 실재론과 반실재론 두 진영 모두에서 종종 욕을 먹는다.
3.4 인식론
인식론에서는 통속의 뇌 사고실험으로 유명하다.[3] 통속의 뇌 사고실험은 데카르트의 악마 논증의 현대판으로 보면 된다.
3.5 윤리학
전통적으로 철학에서는 사실과 가치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졌다. 가령 사실은 물리적 대상 혹은 물리적 세계와의 대응으로 객관적인 진리인 반면 가치는 그런 대상 또는 세계와의 대응이 없기 때문에 주관적 영역으로 여겨져왔다. 이는 지식이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는 데이비드 흄의 전통을 따른 것인데 가치를 무작정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은 흄과 달리 흄의 전통을 따른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가치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런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은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의 비판으로 무너졌는데 (콰인에 따르면 분석명제 역시 종합명제에 의존한다) 퍼트넘은 이런 콰인의 논리실증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사실과 가치 역시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으며, 이 둘은 서로 얽혀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윤리적 입장은 그의 저서 Ethics without Ontology와 그의 에세이 모음집인 The Collapse of th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에서 찾아볼 수 있다. Ethics without Ontology에서는 그의 수리철학적 및 형이상학적 입장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3.6 신실용주의
1980년대에는 자신이 초창기에 고수하던 과학주의 (혹은 과학적 실재론)과 내재적 실재론 입장을 철회하고 실용주의를 주장하였다. 신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와 실용주의 문제에 관해서도 오랫동안 논쟁한 바 있다.
후기엔 위르겐 하버마스와 같은 대륙철학자들이 제기한 민주주의, 사회정의, 종교 등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그의 논문 및 저서에서 다루었다.
이에 관한 논의들은 그의 윤리학 논의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역시 그의 윤리적 저서인 Ethics without Ontology와 The Collapse of the Fact/Value dichotomy and Other Essays에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