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소년

개구리 소년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개구리 왕눈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b53310820ddceab2e50267b24263c8c.jpg
왼쪽부터 故 김영규, 故 박찬인, 故 우철원, 故 조호연, 故 김종식 군. 1990년대 초반을 살았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얼굴들일 것이다. 그만큼 광범위한 여론의 집중 속에 수색이 이뤄졌지만…


1991년 실종됐을 당시, 이들의 사진이 걸린 트럭 앞에서 가족과 후원회 회원 등이 행인들에게 소년들의 사진 등이 인쇄된 전단을 나눠주고 있다.

download.blog?fhandle=MDhBeTBAZnMy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C5qcGcudGh1bWI=&filename=4.jpg
개구리소년 실종 1년 후, 아이들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1]

1 개요

1991년 3월 26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학생[2]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 실종된 사건으로, 국내에서 발생한 실종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다. 소위 국내 3대 영구 미제 사건. 나머지 둘은 《살인의 추억》으로 영화화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그놈 목소리》로 영화화된 이형호 유괴 사건이다.

원래는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개구리 소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주우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도롱뇽을 잘 모르는 학생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도롱뇽을 티라노사우루스라도 되는 괴생명체로 오인할까봐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피를 주우러 간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 제50향토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정식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사건”이었으나, 2002년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이 되었다.

2 사건 발생

1991년 3월 26일은 전국의 광역/기초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3~6학년 어린이 6명 우철원(13·6학년/1979년 생), 조호연(12·5학년/1980년 생), 김영규(11·4학년/1981년 생), 박찬인(10·3학년/1982년 생), 김종식(9·3학년/1983년 생), 그리고 김태룡(10·3학년/1982년 생)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다. 조호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은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 놀라고 핀잔을 줬다.

6명 가운데 김태룡은 이때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고, 나중에 급히 아이들을 뒤쫓아 와룡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따라잡았지만, 산에 따라갈까 하다가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크게 보면, 그는 개구리 소년들 중 이 끔찍한 사건의 화를 면한 유일한 생존자이다. 엄마 말 잘 들어서 목숨 건진 셈.

우철원 군을 비롯한 5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갔다.

조호연의 형 조무연(당시 중학교 1학년/1978년 생)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는 김순남 아주머니가 9시쯤 아이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과 지나쳤다. 그때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하는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과 같은 반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철원이가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외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2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함승훈은 이 날 동네 형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그는 형들과 혼자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 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과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는 함승훈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 쯤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6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저녁 7시 50분에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샅샅이 산을 뒤졌으나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3 경과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 것이라는 일방적인 수사 방향을 정하는 짓를 범했다. 이게 이상한 짓인 이유는, 일단 5명의 아이들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던 데다, 애초에 5명의 아이들이 전부 일시에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당시 대통령 노태우의 특별 지시로 군인경찰이 총 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는 허위 장난전화가 빗발치기도 했고, 자기가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며 부모를 놀리는가 하면,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는 어린이가 자신이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해 부모들을 허탈하게 하기도 했다.

다행히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보자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당시 어린이들이 즐겨보던 만화, 비디오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 관련 광고가 삽입되었고, 그 외에 초코파이 등의 과자에도 개구리 소년 광고가 인쇄되었다.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의 《특별 생방송》(1991년 5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1993년 3월), KBS1의 《사건 25시》(1994년 6월)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1996년에는 실종된 김종식의 아버지인 김철규가 아이들을 모두 토막살해한 후 그 집에 암매장했다자칭 범죄 심리학자인 김가원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집안 곳곳을 파내는 촌극을 빚기도 했는데 결과는 참혹했다. 김철규의 집에서는 아이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해프닝으로 김가원은 재직 중인 카이스트에서도 해고되었고 심리학회에서도 제명되었지만, 그 뒤로도 끝없이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가 범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모 웹사이트에 카페를 개설해서 여론을 모으는 한편 소설도 썼는데 결과야… 나중에 유골이 발견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김철규 범인설을 주장해서 관련 책도 썼다. 희대의 불쏘시개니 보지 말자 다만, 2011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자신이 오판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해당 기사, 당시뉴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다. 또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3] 등이 제기되었으며, 심지어는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는 주장(나병 항목과 어린아이 간 빼먹기 참고)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는 듯 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10월 22일에는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씨가 아들의 실종을 술로 달래며 살던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 다른 부모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그런데...

4 결말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한 사람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구 육군 50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나중에 50사단은 북구로 이전했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여기서 경찰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정확한 부검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골만 봤으면서도,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는 순 엉터리 같은 추리만 남발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와룡산 기슭에 컨테이너를 두고 살던 할머니는, "아주 어린아이도 아니고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된 애들이 동네 뒷산에서 조난당하는 건 말도 안 된다"라고 항의했고, 김영규의 아버지 김현도 씨는 "바로 뒤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밤이 되면 주변 마을 불빛이 환한데 무슨 조난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기서 경찰의 병크가 또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켰다는 점이다.

실제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2002년에 유골에 대한 미스테리를 방영할 때, 실종된 소년들과 같은 연령대의 남자아이들을 모아, 어두워진 후에 와룡산에서 마을로 내려가게 실험했었는데,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기색은커녕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이 마을로 "대단히 쉽게" 돌아왔다(…). 아이들이 실종된 1991년 당시, 인근은 전형적인 농촌이었고, 주택가 및 아파트가 유골 발견 지점 인근까지 확대되기는 했다. 하지만 유골 발견 지점 인근 500m 근방에 수십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었고, 좀 더 바깥으로는 당시로서는 구마고속도로로 불렸던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지선이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앞에 있는 불빛을 보고도 마을로 못 내려왔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농촌이었던 이 동네의 아이들은 동네 뒷산 정도는 놀이터나 같을 정도로 산으로 자주 놀러 다녔기 때문에….

게다가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상태였고, 이 매듭의 형태나 강도가 잘 풀리지 않도록 잘 묶인 형태로, 보통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전문가나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을 타살의 근거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아이들이 추위에 떨다가 옷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증거, 매듭의 모양은 저체온증에 이성을 잃으면 설명되지 않는 이런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려 유족들의 화만 더 돋우었다.

병크스러운 것은, 1993년 3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찰조차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밝혔었다는 점. 아이들이 조난당한 상태였다면, 수천 명의 군경이 수색하는데 눈치도 채지 못했을까?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온갖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5년이 지난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으며 물론 현재로서는 진범이 잡힐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5 의혹

5.1 11년이 지나고서야 발견된 유골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 와룡산을 뒤졌는데, 11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m 정도의 야산일 뿐인데..[4]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라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닌, 당시에 존재하던 저수지에서 반대쪽 능선을 지난 '세방골'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으로는, 90년대 초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야산들 대부분이 녹화사업 전이라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1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뜨인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여진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인했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여론에서도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던 데다가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살해당하고 암매장 당할 가능성은 생각되지 않았고,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5.2 5명의 아이들을 살해한 수법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범인이 1명이었다면, 2, 3명의 아이는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 그 사이에 1, 2명은 달아날 수 있다. 이 때문에 범행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기 어렵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벌인 실험에서도 어른 1명이 5명의 아이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이 5명은 유약하고 운동부족인 요즘 아이들도 아니고, 깡통이나 작대기 들고 산과 들을 매일같이 뛰어다녀서, 운동성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시골 아이들이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 3대 영구 미제 사건 특집에서는, 범죄심리학자의 말을 통해 '아무리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5명이나 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축되는 면이 생긴다'는 분석과 범인이 1명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거나, 일시적으로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차에 아이들 중 일부를 먼저 발견하였고, 순차적으로 살해하였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5.3 함승훈이 들은 비명소리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분에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함승훈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함승훈도 사건 당일 개구리 소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와룡산에 갔었는데, 골짜기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것. 이후 유골이 발견된 2002년, 대학생이 된 함승훈은 다시 이 방송의 인터뷰에 응했었는데, 당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와룡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피살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 주장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말도 대중적으로 통용되지 않던 때라 이유없이 5명의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출, 혹은 부랑배나 폭력배 집단에게 노동력 갈취 목적으로 납치당했다고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는 바람에, 제보의 허울을 쓴 온갖 장난이나 오인 신고 등이 빗발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경찰력이 분산되기도 했으나, 그 어느 장난 전화도 살인, 즉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입에 담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사건 이후 몇 개월, 몇 년이 지나도록 실종 혹은 납치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구리 소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점은 당시 시대가 한 번에 다수의 어린이들을 살인한다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방증한다. 1명이나 2명의 어린이라면, 부모나 가족 관련 원한을 동기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으나…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만.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함승훈의 인터뷰를 계속 되뇌며 아들 걱정만 했다고 한다.

근데 위의 함승훈의 인터뷰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와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12시쯤 우철원과 같은 반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서로 만난 증언이 있으며, 2시쯤 김이수 아주머니가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고, 기타 12시 이후의 목격증언이 있기 때문. 다만 모두들 확실하게 증언을 하고 있으므로, 당시 누군가는 이들 증언을 토대로 정확한 수사를 해야 했지만 그 시기를 한참 전에 놓쳐버렸으니..

5.4 그 외

  •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는 50사단 사격장이 있었으며, 2002년 대구의 한 구두닦이방에서 30대로 보이는 한 손님이, "군 복무 중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 5명을 오발하여 1명이 즉사,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5명 전부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죽이고 은폐했다"는 말을 들은 구두닦이방 주인이 이를 제보한 바 있다. 하지만 50사단에서는 소년들이 실종된 당일은 임시공휴일이었기 때문에, 그 날은 사격 일정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당시 주임원사가 진술한 바 있다.[5] 하지만 사격장 오발 사망은 개연성이 낮은 가설이다. 미상으로 밝혀진 상흔이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이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을 했다는 30대 중반의 남성도 찾지 못하였다. 천하의 개쌍놈들 중 하나인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반드시 나타나서 자신이 관계자라거나 범인을 안다고 금품을 요구하거나,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90년대 말 전국을 경악시켰던 대구 아동 황산 테러의 경우도, 자칭 범인이라는 사람이 PD수첩에 나온다고 자수한 적이 있었다. 물론 장난으로 밝혀졌지만, 장난으로 밝혀지기 전에 계속적인 속보 방송과 생중계 준비까지 했는데… 결국은 특선 영화를 틀어주었다. 지금도 가끔 음모론이 나돈다. 여담으로 현재 대구 서문시장을 가면 웬 거렁뱅이 한 사람이 술에 취해서 군인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쏴죽였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 별로 믿을 것은 못되지만 이 사람이 떠드는 것을 보고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 좀 된다.
  • 살해방법과 같은 핵심 증거들이 영구미제가 되었기 때문에 발포설은 무작정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당시 사격장 근처에 묻혀있었다는 점과 시신이 매듭 묶기 전문가에 의해 매듭 묶기가 되어 있었다는 점, 상식적으로 범인 1명이 아이 5명을 동시에 제압하기 힘들다는 점[6]이 이 설을 신빙성을 더할 뿐이다.
  • 일부 소년들의 옷은 일반인이 거의 하지 못하는 정교한 매듭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 이 때문에 범인, 공범이 있을 경우 최소한 일부는 평소 포장 작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며, 임시 공휴일에 회사를 쉬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 인터넷에 떠도는 진범설은 사실 앞에서 이야기 한 김철규 범인설과, 2008년쯤에 타진요 사촌인 어느 재미 교포가 주장한 김철규의 부인 범인설을 조합한 도시전설이다. 고인드립은 자제하자.
  • 현 시점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증언한 바와 일맥상통한다. 참조 링크
  • 와룡산이 당시 우범지대였다는 설도 있다. 이하 전문.
난 대구시 서구에 위치한 서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학교는 당시 50사단(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죽전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와는 약간의 세월 차는 있다. — 난 30대 초반으로써 84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 하지만, 나도 중학교 때까지 와룡산 사격장으로 탄피와 더불어 유탄을 주우러 다닌 경험이 있다. 군부대 관계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당시 근처(서구 평리동 일대까지)의 초, 중학생들 중 탄피와 유탄을 주우러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예비군 사격훈련장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거기서 탄피를 주워 오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장담한다. 당시 꽤 먼 거리에 총 쏘는 곳이 있고, 총알이 박히는 쪽에는 모래주머니와 더불어 흙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생계곤란으로 방위병 훈련소집 면제되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실제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그야말로 당시의 기억대로이다.) 모아서 팔기도 하고, 목걸이나 기타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으며, 자랑삼아 필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에는 이곡동(당시 50사단 근처)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산새들과 토끼 등을 잡겠다고 와룡산에 많이 올랐었다. 지금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민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민가의 불빛이 보였고, 오솔길도 아래쪽으로 나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근처까지, 아니, 더 위쪽으로도 자주 놀러 가봤고, 해가 지면 내려오곤 했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소년들이 당시 날이 추워서 저체온증에 시달릴 정도로 추웠다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살지 않는 나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와룡산에 갔을 때, 해가 지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오곤 했었는데, 하물며 인근에 살면서 와룡산에 자주 오르락거렸던 소년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 그 소년들이 다른 곳에서 피살되어서 옮겨졌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봐서 추론해 본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도 어릴 때 와룡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러나 늘 재미나는 산행(놀이)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그리 높지 않은 야산형태이면서 깊숙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숲이 형성되기 때문에, 불량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릴 적 당시에 술에 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형들이 싸우는 것도 자주 목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씩은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곤 했었다. 술에 취한 채 담배를 물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주워놓은 탄피와 탄두를 모조리 뺏고, 때리기도 했으며, 엎드려뻗쳐 등 심한 기합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복싱을 시킨다며 우리 일행을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나무에 묶어놓고 괴롭힘을 당한적도 있었다. 난 그런 이들에 의한 살인이라 여겨진다. 물론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죽이게 되었고, 서둘러 암매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묶어놓고, 또는 무릎을 꿇힌 채 하체부분을 흙으로 덮어놓고(실제로 어릴 때 이렇게 당해서 거의 초죽음이 된 적이 있었다), 괴롭히다가 가해자들이 그냥 내려가 버리는 바람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절대 자연사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5명이 전부 다쳐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아래 희미하게 민가의 불빛이 보일 것이고, 또한 근처에서 거주하던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모여서 자연사할(저체온증으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와룡산 일대는 소위 우범지대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와룡산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허벅지에는 그때 와룡산에서 그들이 장난삼아 괴롭히며 도루코칼(하얀색, 연필 깎는 칼)로 찌른 흉터가(채 1cm도 안 되는 길이지만) 남아있다. 아마도 어릴 때 와룡산을 드나들어봤던 이들이라면, 현재의 경찰발표나 수사상황에 대해 어이없어하고 답답해하며 한숨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조금 수고가 되더라도 정확한 사인규명과 더불어 수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위 출처를 보면 알 수 있듯, 정식 인터뷰가 아니라 단순히 언론사 자유발언대 게시글이다. 즉 글 내용의 신뢰도가 보장되지는 않음을 유의하자.
  • 위 글을 읽고 '땅에 반쯤 묻히거나 서로 싸움 붙인 걸로 일어날 사건이 아닌데?'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위 글의 요지는 글쓴이의 구체적 경험담이 아니라, 불량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성인 1명이서 어린애 5명은 힘들다는 관점에서, 다수에 의해 행해진 범죄일 가능성에 초점을 둔 추측이라 볼 수 있다.

6 기타

MC 스나이퍼는 2집 《初行》에 《개구리 소년》이란 제목으로 추모곡을 써서 수록하기도 했다.

김영삼대통령이 취임할 당시 유행한 개그 시리즈에 이와 관련된 유머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직후, "개구리 소년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결의에 찬 발언을 하자, 기자들이 그게 누구냐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는데, 이에 김영삼 대통령이 숨을 잠시 가다듬고 차분한 어조로 曰, "월리…!"(...) 그리고 지금 시점에선 고인드립 유머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은 90년대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다. 이 작품은 그저 그런 아동 영화이고 뒤는 최루성 작품으로 변신했다. 감독이 에로물 전문 감독이라는 건 잊자. 이런 류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대대적으로 이슈화되고 소재가 되는 건 의외로 역사가 깊다. 박정희 전(前) 대통령 때 일어난 조두형 유괴 사건도 대통령 담화와 함께, 이미자가 가요의 제목으로 할 정도였고, 전두환 정권시절 실종 학생 이윤상 군의 경우는, 대통령 특별 담화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때 담화 내용이 참 전두환다웠는데 "(납치된 소년을) 살리면 너도 살고 죽이면 너도 죽는다"였다. 결국 전자의 소년은 시체도 못 찾았고 후자의 소년은 같은 학교 선생과 그의 정부(그러니까 섹스 파트너)인 여고생들이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물론 당시 전두환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범인은 수차례의 항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형이 선고되어 집행되었고,[7] 범행을 도운 여고생들은 구속되었다가 1명은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고, 다른 1명은 집행유예가 선고됨으로써 풀려났다.

이후 앞서 말한 심리학자의 가설, 즉 김철규가 범인이라는 설이 나오자,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라는 르포가 나왔고, 그 르포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가 기획 되었다가 중도에 여러 번 엎어졌지만, 결국 2011년 2월 17일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박용우가 주연이며, 사이비 심리학자 역에 류승룡, 김철규 씨를 모델로 한 캐릭터에 성지루가 기용됐다.

영화판은 개봉 전에는 그 사이비 심리학자의 책이 원작이라는 헛소문이 퍼져, 사건을 왜곡한 영화가 아닐까 하는 우려를 샀으며, 개봉 후에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며 담담하게 사건을 잘 풀어 나아갔다' VS '지루하고 알맹이가 없다'란 평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은 기승전결이 일관성 있게 딱딱 이어지는 극영화라기보단, 개구리 소년 사건 당일부터 시신 발굴과 법의학자의 분석까지 10여년에 걸친 일련의 진행 추이를 조명하는 모큐멘터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 주목받았고, 어떤 해프닝을 거쳐 왔는지는 영화만 봐도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다. 다만 논란을 피하고자, 상당 지명이 개명되었다는 점과, 주인공이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을 추적해 난투극을 벌이는 시퀀스는 확실한 픽션이니 이 점만은 유의.

이 영화에서 사이비 심리학자를 연기한 류승룡이 좀 지나치게 힘을 주고 열연해서인지, 거의 초반 주인공이나 다름없던 그가 끝내 사이비로 판명되어 극 중반에서 퇴장했을 때 허탈하다는 반응이 많다(…). 다른 영화였다면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가설을 증명하여 '끝내 진실은 승리한다'는 드라마를 연출해내는 것이 전형적인 전개였겠지만, 그가 사이비였다는 점은 뭐 빼도 박도 못할 팩트인지라. 어쨌든 사람 함부로 믿지 말자는 교훈을 준다(…). 영화상에서 사이비 심리학자의 성이 황씨여서, 유골이 발견된 뒤에 심리학자에게 낚인 주인공 PD가 "이 황구라 놈아!"라고 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이 영화 흥행은 전국관객 186만으로 그냥 그런 흥행이었다.

영화 개봉에 즈음해서 실종자의 가족들은 모든 걸 용서할 테니 나타나서 왜 그랬는지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저 절절할 따름.

대구 성서초등학교에서는 이들 소년들의 시체가 발견된 2002년까지 이들 5명의 학적을 유지시키고, 각 학년에서의 정원을 비워놓고 있었다. 발견 즉시 복학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2002년 이후 학적은 말소되었다. 물론 시신의 발견으로 아이들의 죽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대구의 자율형 사립고등학교계성고등학교가 당시 사건이 있었던 세방골 쪽 와룡산 기슭으로 이전했다.

7 SBS그것이 알고 싶다》의 분석

800회 특집을 맞아, 국내 3대 미제 사건의 두 번째 편으로 《개구리 소년 편》을 방송했다.[8] 《그것이 알고 싶다》는 이미 93년과 2002년에 이 사건을 다룬 바가 있었다.

방송은 아이들의 유골에 드러난 타살 흔적을 바탕으로 살해 도구를 분석하는 데 주력했는데, 여러 공구들을 토대로 실험해 본 결과 가장 유력한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것은 용접 후 생기는 찌꺼기를 끊거나 때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망치로 흔히 깡깡 망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구라고 한다.

또 초등학생 때는 이미 영구치가 자란 성인들과는 달리 6개월 단위로 치아 발육이 달라지는데 이 점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개구리 소년은 1991년 3월 26일에 실종된 후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6개월 이내에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두개골 하나는 돌에 눌려 납작하게 변형이 되어 있었는데 당시 부검에 참여했던 채종민 법의학자는 "뼈도 70~80%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있어야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며 이는 아직 뼈의 물기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돌에 눌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살해된 직후에 매장되었을 것이란 걸 말해준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경찰대 박지선 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은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획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흉기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우발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타깃을 소년들로 정한 것이란 점이다. 사실 아무리 범인이 성인이고 상대는 어린이들이라도 성인 1명이서 5명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를 때는 성인 범죄자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면을 보인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성인 1명이 한꺼번에 어린이 5명을 붙잡아두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볼 때 범인이 한꺼번에 5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순차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약간 떨어져 있었을 때 먼저 1~2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공포심을 안겨주었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향해 무차별로 구타해[9] 제압한 다음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범인의 수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복수(複數)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1명이라고 분석했다. 왜냐하면 범인이 복수일 경우엔 피해자 중 1~2명은 순종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런 점이 보이질 않는다는 데서 1명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명의 범인이 와룡산에 올라온 아이들을 보고 처음엔 5명이나 되는 줄 모르고 먼저 앞에 있던 1~2명의 아이를 죽였는데 알고 봤더니 일행이 몇 명 더 있었고 입막음을 위해 나머지 아이들도 뒤쫓아가 모조리 살해했다는 분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범죄심리학자 에릭 힉키는 처음엔 두개골에 찍힌 상처가 여러가지 형태라는 점을 미루어 범인이 복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시 한 번 두개골의 형태를 살펴본 결과 범인은 역시 1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범인을 1명으로 결론내린 이유는 유골에 난 잔혹성 때문이었다. 극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범죄자 2명이 짝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혹 5명의 소년을 제압하는데 조력자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인물은 2명이 아니라 1명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면 증거가 꽤 많이 남았을 것이고 시체를 매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에릭 힉키 박사는 범인이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하며 아이들의 옷처리나 묶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살해 경험이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장을 얕게 했던 것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힉키 교수는 이 사건은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이며 범인의 수는 1명이고 다시 살인을 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아마 체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10]"고 주장했다.

박지선 교수 역시 범인과 개구리 소년 5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돈을 노린 범죄라고 하기엔 진짜 범인은 단 1번도 돈을 요구한 바 없었고 원한에 의한 소행이라기엔 한 자리에서 5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조리 죽인 게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세방골에서도 가장 골이 깊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는 점과 가시 덤불이 많고 인근에 군 부대 사격장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을에 사는 소년들이 탄피를 모으러 자주 오르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현지 사정과 지리에 매우 밝은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년들을 살해한 이유는 단지 살인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이 방송에서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인과 흉기에 대해 내린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범인의 수는 1명으로 와룡산 일대의 지리와 사정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5명의 아이들을 살해했고 그 때 사용한 흉기는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접 망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91년 당시에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었고 거기서 해결을 할 길이 없어져 버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등장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로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을 즐기려고 무고한 어린이 5명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못할 일이었고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납치해가서[11] 앵벌이를 시키는 등의 사건이 많았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 찾기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각종 역, 터미널, 지하철 승강장 등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봐달라고 호소하던 수준이었다.

방송 말미에 진행자 김상중은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절대 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되며 범인을 계속 추적해야 하는 이유는 이 자가 현재도 우리들의 이웃인 척하고 살면서 또 살인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시청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8 참고자료

  1. 1992년 당시 4200만 원이면 상당한 거금인데,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 연봉이 1천만원대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2억은 족히 되는 거금이다.
  2. 당시에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라고 불렀었다. 초등학교라 불리기 시작한 시점은 1996년 3월 부터로, 1997년 2월의 졸업식에서 최초로 초등학교라고 적힌 학교명, 졸업장, 졸업앨범을 사용했다.
  3. 변종으로 아이들은 사실은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불러간 것이다라는 소리도 있다.
  4. 그렇다고 산이 가파른 것도 아닌 완만한 산인데다가 정상까지 올라가보면 그리 높지 않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올라가는 수준 밖에 안 된다.
  5. 일단 군 의문사 사건이라는 것이, 목격자가 수십 명이어도 그 수십 명이 전부 공범일 경우, 진실이 묻히는 경우도 있긴 하다. 허원근 일병 사건의 경우, 사람이 M16 소총으로 스스로에게 3발을 쏴서 자살했다는 말도 안 되는 진술을 목격자였던 전 중대원들이 30년째 번복하지 않고 있다. 딱 1명, 부사관에 의한 사살이라고 증언한 사람이 있었지만, 12번에 걸친 조사 끝에 결국 자신의 진술을 번복했다.
  6. 아이 3명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일이 있으면 2명이서 범죄를 저질러도 범죄가 탄로날 가능성이 높다.
  7. 사형이 확정되자 자신의 장기를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8. 즉, 이 방송은 801회 때 방영된 것이다.
  9. 조호연 군의 두개골과 박찬인 군의 두개골에서 구타를 당했다는 소견이 나왔고 김종식 군의 왼팔 뼈가 골절된 것으로 보아 왼팔을 들어 범인의 공격을 방어하려다 발생한 흔적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또 김영규 군의 상의가 심하게 찢어진 것으로 보아 범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찢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10. 물론 미제 사건이기 때문에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이 사건의 범인이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의 뜻은 그 뜻이 아니다. 연쇄살인사건의 범인들은 간혹 다른 사건으로 붙잡혀 이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경우가 많다. 일례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에 대해서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건의 범인은 아마 죽었거나 오래 전에 다른 사건으로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교수가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뜻이다. 다른 사건의 범인으로라도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의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11. 물론 전문적인 납치범이 아니라, 불량배 등이 아이들을 집에서 먼 곳에 데려가거나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억류하는 수준의 유괴. 가출한 아이들이나 가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