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무기체계


1 개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무기들과 그 무기들이 안습이 된 원인을 모은 문서이다. 이 문서만 본다면 이런 군대가 어떻게 전쟁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태평양을 아우르는 대규모 작전을 수행했는지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것이다. 그러나 전쟁 초반에 한정한다면 일본군이 사용한 무기도 그럭저럭 쓸만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무기들이 제대로 개량되거나 대체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은 일본의 공업능력 부족과 군부의 구시대적 사고 방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2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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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도망쳐! 강력한 중전차가 온다!![2] 이 짤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하다(...).

어떤 국가든 무기 개발 및 그 실전 배치가 성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행 착오와 실패, 엄청난 규모의 흑역사를 만들고 돈만 날리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이런 시행 착오, 실패와 흑역사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이 시행 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군사, 무기 교리를 바꾸거나, 실패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기술로 다시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본군도 무기 개발 과정에서 시행 착오와 실패를 겪었고, 기본적으로 일본군이 개발한 무기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일본군은 이런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이는 부족한 공업능력과 군부의 구시대적인 전쟁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대표적인 예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전의 주 전술이던 저속 선회전을 컨셉으로 해서 제작한 제로센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항공전들을 보면 거의 절대 다수가 '붐 앤 줌'으로 대표되는 급강하 기동전이었다. 예외적으로 소련 공군은 항공기 기술의 부족으로 선회전을 했지만 그 결과는 더 많은 항공기를 투입하고도 더 많은 손실을 입어야 했다.[3] 제1차 세계대전 같으면 항공 관련 기술(기체 쪽 기술도 그렇지만 특히 고고도에서 출력 유지 같은 엔진 관련 기술)의 부족으로 항공기들의 양력이 부족하므로 복엽기가 거의 대다수이기 때문에 저속 선회전으로 싸웠던 것인데 이후 급격히 발전하는 항공기 관련 기술은 공중전의 양상을 바꾸어버렸다. 물론 대전 초반에는 연합군도(특히 미군[4]) 선회전으로 싸웠다가 제로센에게 당한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비교적 빠르게 붐앤줌으로 교리를 갈아탔다.[5] 그 후 제로센의 후계기랍시고 나온 A7M 렛푸도 선회전을 컨셉으로 잡을것을 요구받았다가 실패작이 되었다. 나중에는 '붐 앤 줌'을 장기로 하는 기종들(Ki-84 하야테, N1K-J 시덴등)이 개발/배치되기 시작하고 (정상적으로 만든 물건에 한해서)성능 자체는 쓸만했는데 이번에는 공업능력이 발목을 잡아서 기존에 배치된 기체들을 대체하지 못했다.[6] 그 결과 이들의 무기체계에는 무기 개발 및 배치에서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다.

2.1 빈약한 화력

일본군 무기의 가장 큰 문제점. 무기는 자고로 적을 박살내기 위해 있는 것인데, 일본군 무기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낮은 신뢰성으로 인해 낮은 명중률과 내구도, 높은 불발률 등 여러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 문제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일본군의 대전차포일 것이다. 일본군 육군이 지상전에서 미군에게 그토록 고전한 원인 첫 번째가 바로 이거다. M4 셔먼은 1,500m 밖에서도 여유롭게 치하의 장갑을 뚫는데[7] 치하의 주포는 미군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500야드(약 450미터)정도 거리에 들어오면 3.25인치(82mm)를 관통할 수 있고 셔먼 초기형의 전면이 실 방어력이 90mm정도이므로 이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야 관통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무기와는 달리 이건 끝까지 해결이 안된 문제다.차라리 해군 함포라도 뜯어다 쓸것이지. 그런데 그렇게 하려 해도 해군이 "육군, 니들 사안인데 니들이 알아서 해라." 하면서 안 줌.
항공기의 경우 제로센F4FF6F를 맞춰도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거나 7.7mm, 12.7mm 기관총 1~2정만으로 무장한 하야부사 같이 무장이 빈약한 경우가 많았다. 제로센의 경우는 기관포와 기총의 탄도차이가 커서 7.7mm를 주로 써먹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변명할 수 라도 있지 하야부사는... 그전에 제로센이 사용한 기관포 자체도 위력이 형편없는 축에 들어간다는게 함정 그나마 항공기용 무장은 상황이 양호한다고 볼 수 있는게 항공기용 20mm 기관포는 나중에는 물건 자체는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오기는 했다.[8] 문제는 그런 기관포들도 갈수록 자원부족등의 이유로 성능이 더 떨어졌다. 자원부족으로 포신 내구도가 감소해 약장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Ho-5가 그 예시.

2.2 부족한 방호력

주력 전차로 쓰인 97식 전차의 장갑은 대전차포M2 중기관총은 물론이고, 심지어 총류탄에 관통될 수도 있었다. 다만 이건 중기관총은 철갑탄을 사용한 경우이고 총류탄도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한 경우 한정이다. 중기관총은 좀 심하지만 대전차고폭탄은 대전차용으로 만든 물건인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어찌되었든 전차가 저 모양이니 다른 기갑차량이야 더 설명이 필요없을 지경.

해군의 경우는 좀 덜하기는 하지만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는 호위구축함과의 포격전에서 패배했고,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는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과의 포격전에서 패배했다.[9] 심한 파도를 만나면 장갑이 찢어지는 무츠키급 구축함의 경우는 제4함대사건에서 41척 중 19척의 함선이 피해를 입었다.[10] 에초에 일본은 조약을 위반하지 않는 한도에서 무장을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무장을 과하게 적재해야 했고 결국 함선의 방호력을 낮출 수 밖엔 없었다. 그래도 이 일을 교훈으로 일 해군은 선체 구조를 대폭 강화하게 되었고 일본군 답지 않게 제대로 해냈다.

특히 일본군의 군함들은 유폭하기 매우 쉬운 산소어뢰를 달고 다녔기 때문에 더 쉽게 터져나갔다. 일본의 어뢰발사관은 초기에 어뢰보호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어, 대놓고 "날 쏴줍쇼" 하는 거나 마찬가지 수준으로 어뢰를 바깥에 그대로 내놓고 다녔기 때문에, 한두발이라도 피탄되면 유폭해서 그대로 격침되었다.[11] 그리고 대공포도 절대 다수가 개방식이었기[12] 때문에 기총에 대한 방어력도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 항공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단적인 예로 연합군에게 원샷 라이터 내지는 플라잉 지포, 플라잉 시가등의 별명으로 불리던 G4M이 있다. 참고로 이 기체는 일본군에서도 부르던 별명이 연합군과 비슷한데, 이 기체를 운용하던 일본군 해군에서 이 기체를 부르던 별명이 "1식 라이터" 내지는 "불타는 낙엽" 이었다. 이는 전투기도 예외는 아니라서 제로센의 경우 주익에 연료탱크를 달아놓고도 거기에 대한 방어수단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며 조종사에 대한 배려도 없어서 방탄판도 없었다.[13] 게다가 저 테스트 기체는 비교적 후기모델인 52형이다. 이러한 방어수단의 부재는 최소한 J2M 라이덴까지 그대로 이어진다.[14] 이는 일 해군 항공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문제로 급강하폭격기인D4Y나 뇌격기인 B6N도 방어수단이 없다시피 했다.[15]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된 지상기지에서 운용한 G4M도 예외는 아니라서 절대다수가 중량을 절감한다는 이유로 방탄판도 방루탱크도 없었는데 덕분에 F2A의 M2 중기관총으로도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16] 그래서 G4M의 경우 이 기체를 운용하던 일본군 해군이나 이들의 적인 미군이나 거의 같은 별명으로 불렀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런 형편없는 방어력은 해군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육군기는 Ki-43 하야부사부터 이미 조종사를 보호하는 방탄판과 자동방루탱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Ki-84 하야테쯤 가면 서방권 기준으로도 충분한 방어수단을 갖추고 있었다.[17] 이는 폭격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방어에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Ki-49 돈류의 경우에도 방탄판과 방루탱크를 갖추고 있었다.[18]

2.3 공업능력의 부족

애초에 일본 공업능력 자체가 미, 소 등 기존의 서양 열강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19], 연합군의 온갖 공습과 공격, 일본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전비, 전장의 인적 자원 소모 등으로 인해, 전쟁 중반 이후 일본의 공업 수준은 그야말로 나락까지 떨어졌다.

사실 제 1, 2차 양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확실히 '총력전'이나 '소모전' 같은 개념이 군사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된 정도였고, 그 때문에 체계적인 군수 시스템 등이 시행 착오를 거쳐서 확립되고 있었다. 애초에 2차 세계대전 자체가 저런 것들이 '최초'로 확립된 전쟁이라는 것. 그러나 확실히 당시 추세는 체계적인 군수 시스템을 갖추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대량 생산 체계는 총력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공업 생산력과 기술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물론 당시 일본도 동아시아권에서는 나름 잘나가던 열강이었고, 사실 일본이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 등도 1시간에 구축함이 한 척씩 진수되는 정신나간 천조국의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일본이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미국의 싸대기를 갈겼다는 점.[20] 더군다나 본토가 전쟁터가 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본토의 생산 시설이 폭격을 맞는 일도 없으니 줄기차게 군수 물자를 뽑아내기도 쉽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 일본의 항모 전력은 산호해 해전미드웨이 해전,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갈려 나갔고 저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끝에 완전 소멸해버리다시피 했다. 그리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정규 항공모함 즈이카쿠를 미끼로 내던지며 최종 소멸 확인을 찍어 버렸다.[21] 하지만 미국은 정규 항공모함만 수개월마다 한 척씩, 과장 좀 보태서 풀빵 찍어내듯 건조 → 취역시키고 있었으니... 그뿐 아니라 함재를 비롯한 들도 보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리사카 소총의 경우처럼 경제 봉쇄와 전쟁이 장기화되며, 기술과 공구가 노후화 되고 제대로 된 원료들이 떨어져 가자 기존에 멀쩡히 나오던 무기들도 품질이 조악해지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그리고 생산 시스템이 기계화, 규격화 정도가 낮은 일본은 숙련공의 가치가 높았는데, 일본 군부는 숙련공들을 싹싹 긁어서 알보병으로 징집해 전쟁터로 내보내 소모시키는 이해 불가한 병신짓을 했다. 그러자 필로폰 빨고도 피곤해서 꾸벅꾸벅 조는 여학생들이 볼트와 너트를 조이게 되었으니, 일본의 공업 생산력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어가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22] 으악 그리고 기술을 제대로 전수해 줄 숙련공이 줄어드니 기술의 전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그나마 경력이 좀 쌓였다 싶으면 또 병사로 차출되어 소모돼 버리니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러니 일본의 기술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서 바닥을 찍고 만다. 이는 항공기라고 예외일 수 없어서 대전 말에 생산된 기체는 후반으로 갈수록 품질이 더 떨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 이로 인해서 피해를 본 대표적인 경우가 Ki-84 하야테같은 기체들이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지기만 하면 동시기 공랭식 엔진을 단 기체중 상위권에 들어가는 기체인데 정작 양산기는 신뢰성과 숫자가 모두 부족했다. 거기가 연료가 부족해서 송근유같은 저질기름까지 사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정도였다. 항모갑판에 비행기를 주욱 늘어놓으면 동종의 함재기들이 날개 길이가 들쭉날쭉하는 이런 막장 상황에서 생산 물량이나 품질이 보장될 거라고 믿는 건 코미디 그 자체.

요약하자면 태생적으로 부족한 하드웨어 + 총력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일본 군부의 콜라보가 무기의 양과 품질을 쌈 싸먹었다.

일본군 무기는 신뢰성과 내구성이 크게 뒤떨어졌고, 호환성이 개판이라 보급과 정비도 힘들었다. 특히 육군과 해군간의 물건은 거의 호환되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같은 조직에서 운용된다고 해도, 심지어는 똑같은 기종인데도 생산 업체가 다르면 부품이 호환되지 않았다.[23] 또한 수뇌부의 구시대적 전술에 기인한 쓸데없는 요청들로 인해 개량이 늦어지거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적었다. 재수 없으면 개량을 안 한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2.4 신뢰성이 나쁘다

전쟁터에 들어갈 무기들은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신뢰성이 중요하다. 즉, 총이든, 포든, 항공기든, 전차든, 심지어 군함이라도 믿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24]
그러나 일본군의 무기들은 위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 중요한 신뢰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사태를 초래한다. 이는 대전 후반으로 가면서 미군의 공습과 자원 부족문제가 겹치면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항공기의 경우 Ki-84 하야테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기체들을 보면 분명히 2차 세계대전기 전투기들 중에서도 상위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25] 신뢰성에 문제가 많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였는지 하면,

1945년에 생산된 하야테의 조종석에는 절대 타지 마라. 최근에 생산된 녀석들일수록 불량품이 더 많아서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것들이다. 차라리 1944년에 생산된 초기형이 더 믿을 만하다.

이런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구형인 하야부사가 신뢰성은 보장된다는 이유로 선호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빨리 배치된 하야테가 저모양이니 더 늦게 배치된 항공기들의 상황은 더 심각했을 것이다. 좀 다른 사례로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장해서 만들었으나, 개장 완료도 못 하고 단 한 척의 잠수함이 쏜 단 네 발의 어뢰를 맞고 격침당한 시나노가 있는데 이건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렇게 어이없게 격침되면 안되는 물건인데 말이다. 그러나 부실공사의 희생양이 시나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가토급 잠수함 7번함 SS-218 알바코어가 쏜 어뢰 단 한 방 맞고 항공유 공급 배관이 망가져 기화해서 퍼져나온 항공유에 튄 기관의 스파크 한 방으로 폭침당한 다이호도 그런 예 중 하나다.[26]

그리고 아래의 거지같은 대공포 문단에도 나오지만, 대공 화력의 경우 이 신뢰도 문제는 일부의 독일산 수입 장비를 사용한 대공포를 제외하면 정말 극악을 달리고 있었다. 빠르게 연사해서 적 항공기를 두들겨야 하는 대공포가 연사 속도에도 제한이 걸려서 일정 속도 이상으로 연사하면 포신이 망가진다던지 하는 문제들이 대표적인데, 이렇게 된 원인이 알고 보면 일본군 특유의 구세대적 사상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당장 연합군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 때도 독일에 비하면 거의 손을 놓은거나 마찬가지였을 정도니..일례로 연합군이 독일을 폭격한 건 도시 하나를 거의 가루로 만들다시피 해버린 드레스덴 폭격도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불렸을 정도로 독일군의 저항도 꽤나 심했던데 반해 일본군의 경우 주력이던 부대들은 거의 대부분이 동남 아시아, 만주 일대에 있었고 정작 본토에는 신주불멸 운운하며 제대로 된 대책이 없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아래에도 나올 레이더 문제와 겹쳐서 야간 방공대책도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말 다 했다.(...)[27]

3 원인

일본군/무기체계/원인 문서 참조.

3.1 일본군 육군의 경우

일본군/무기체계/육군 문서 참조.

3.2 일본군 해군의 경우

일본군/무기체계/해군 문서 참조.

4 양쪽 모두

물론 누가 일본군 아니랄까봐 일본 육군과 해군 모두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한 경우도 있다.

4.1 자살특공

미군의 무시무시한 악마 전차들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육군은 대전차총검술이라고 불리는 자살 특공 전법을 선보였다. 대전차 총검술에 비해서는 효과적인(?) 대전차 공격술로 자돌폭뢰라는게 있었는데 대전차총검술은 적어도 성공한다면 살아돌아올 가능성이라도[28] 있지만 자돌폭뢰는 성공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자폭공격이었다. 그리고 Ki-115 츠루기는 해군과 같이 개발한(!) 자살특공 전용 비행기였다.이런데서만 손발이 맞는건가[29]

해군이라고 다를바가 없어서 카미카제 같은 비효율적인 전술을 정규 전술로 채택한 것도 모자라[30] 조종사를 1회용으로 소모해버리는 MXY-7 오카, Ki-115 츠루기[31] 같은 비행기는 물론이고 사람이 직접 탄 상태로 배에 들이박아서 공격하는 어뢰인 가이텐, 일본군 육군이 만든 대전차무기인 자돌폭뢰의 대함버전인 후쿠류, 가이텐의 발전형인 카이류, 대함 자폭 보트인 신요 같이 바다와 하늘을 가리지 않고 만들었다. 일단 해당 무기의 개념부터 막장이라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이미 되돌릴수 없을 정도로 전세가 기운탓에 그 자살 돌격조차 제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못 되었다는 것. 그런 주제에 급조해서 만든 조악한 수준의 장비수준으로 조작성은 개판이고, 어쩌다 조작이 제대로 되어도 갓 훈련된 미숙한 병사들을 갈아넣었기에 목표물에 명중시키기가 힘들었다. 이런 천신만고 끝에 어쩌다 제대로 명중했다 하더라도 이미 서유럽의 전쟁을 끝내고 바글바글 몰려오는 미군의 물량 앞에선... 이 미군의 물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투가 오키나와 전투. 오죽하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이 전투를 말할 때 철의 폭풍(鉄の暴風)이라 하겠는가?

결과적으로 육군과 해군의 자살 특공 병기들은 일본군의 막장을 증명하는 사료로만 남게 된다. 자세한 것은 각 무기 항목을 참조.

4.2 야기 우다 안테나

야기 우다 안테나(Yagi-Uda Antenna)는 일본의 공학자인 우다 신타로(宇田新太郎:うだしんたろう,1896~1976)가 1926년에 개발했다. 야기는 지도교수였던 야기 히데츠구(八木秀次)에서 따온 것. 이 발명은 전기기술역사에 남게 되어 IEEE 이정표에 선정되었다. 안테나도 이정표 닮았다 논문은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지만, 특허 출원은 교수의 갑질로 야기 단독명의로 되었기 때문에 그냥 야기 안테나라고 불리기도 했다. 비록 야기 교수도 당대에 그다지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지만 관련 공적을 혼자 쓸어갔고 후에 야기 안테나라는 회사를 세웠다. 우다는 이런 일을 당하고도 의욕적으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여 후에 카호쿠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쯤 되면 그냥 우다 안테나라고 불러야

이렇게 생긴 물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32]

이 안테나는 매우 소소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기존의 것보다 월등한 성능을 가진 지향식 안테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독일 등에서 그 혁신적인 성능에 주목하여 육상 기지나 함선, 심지어 항공기에까지 레이더용 안테나로 대대적으로 도입하였으며, 현대에 TV 수신용 안테나로 쓰인다. 개발자가 일본인이니, 이쯤 되면 일본군도 이 안테나를 많이 써먹었을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군은 이 안테나를 쓰지 않았다. 일본인이 만들었다며!!

이렇게 좋은 물건을 쓰지 않은 이유는 후술하지만 일본군이 "적을 앞에 두고 전파를 쏘는 것은 한밤에 불을 켜고 자기 위치를 알리는 꼴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무전기는 전파 쏘지 않고? 무전기는 아군에게만 전파를 쏜다고 생각했나보다.[33]. 그 당시의 일본의 관련 학계에서도 이 말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파벌 때문인지 보신 때문인지는 의문이다.[34]

1942년, 일본군은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영국군의 레이더 관련 서류를 입수하는데, 거기서 Yagi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Yagi라는 단어가 대체 무슨 뜻인지 고민하던 일본군은 결국 영국군 포로에게 질문했고, 그 포로는 염소"빙딱들아. 너희나라 사람이 만든 안테나잖어. 영국 출신인 나도 안다."라고 가르쳐주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보물을 내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아 뒤늦게 개발에 착수하지만 그동안 연합군은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에서 연합함대를 죄다 털어먹어버렸고(...) 결국 대전 말기에 13호 전탐에나 겨우 도입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전부 위의 일본군 해군 문서의 전함 항목에 있는 파고다 마스트의 원흉이기도 한 다이폴안테나를 사용했다. 한편, 미국은 원자폭탄 투하에도 관련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야기 우다 안테나의 발명자인 우다 신타로는 이 일로 전쟁 중은 물론 전후에도 암묵적으로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쓰라고 줄 땐 거부하더니 자기가 버린 것을 상대방이 베껴서 사용하니까 개발자를 매국노로 만들다니... 아니 심지어 특허는 야기 단독으로 해먹었다며 그래놓고 1975년 죽기 1년전에서야 일본 정부는 신타로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는데 그는 굉장히 불쾌한 얼굴을 하며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인터뷰에서도 좋은 것을 만들어줬더니 나를 무시하고 매국노 취급하던 나라에서 내가 죽어가니까 훈장이나 주니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냐며 차갑게 대꾸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혁신적인 병기인 레이더와, 그 병기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려줄 수 있는 야기 우다 안테나를 무시한 행위는 결국 일본군 전체에 엄청난 손실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4.3 레이더 개발의 뻘짓

원래 일본 제국이 전자분야를 처음부터 등한시 한 것은 아니었다. 1909년에는 광석검파기를 개발했고 1916년에는 진공관을 개발 및 양산하는 수준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1936년에 일본 내 모든 전파기기의 연구 및 개발이 금지되면서 멈췄다.[35] 이 따위 명령이 내려온 이유는 단파라디오로 일본 국민들이 외국의 방송을 듣고 불온세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36]. 게다가 명령이 유지된 기간도 의외로 길어서 1941년 8월에 가서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전파 탐신기술의 개발 재착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구가 금지된 기간에도 몇 번씩이나 사태를 수습할 가능성이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황소고집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1938년에는 영국이 신형 전파탐지기를 개발했고 실전 배치단계에 도달했다는 첩보를 일본 제국이 입수한 후 관련학계의 연구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일본도 개발해서 군에 채용하자는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 병기국에서 돌아온 답변은 "적을 앞에 두고 전파를 쏘는 것은 한밤중에 불을 켜고 자기 위치를 알리는 꼴이므로 아무런 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일본군 육군만 바보가 되지만, 1940년의 일본군 해군 군령부는 정찰하기 위한 장비가 스스로 전파를 발신하는 것은 기습이 생명인 해상작전에서 위치를 드러내는 꼴이 되므로 그런 장비는 필요가 없다라는 이유로 고성능 레이더 개발에 필수적인 SHF 전파의 연구 개발마저 취소시켰다.태평양 전쟁 중 후반기의 일본군은 무전기도 개판이었는데 그 원인이 이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다가 앞서 언급한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정보를 입수한 후에야 다시 레이더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일본의 높으신 분들은 일본화한 인종론에 입각해서 서양인들의 푸른 눈은 야간에는 맹인이므로 야간전에는 일본군의 훌륭한 견시로 대처가 가능하며, 레이더 같은 것이 있더라도 서양인이 우월해질 수 없다는 이론을 신봉했다.[37] 그리고 레이더 개발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육군과 해군이 따로 개발에 돌입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도 않는 등의 뻘짓을 벌었다.

덕분에 일본군의 레이더는 등장도 늦었고 성능도 열악했다. 우선 일본군이 개발한 레이더 중 2,000대쯤 양산되어 함선 대부분에 쓰인 물건이 22형 전탐기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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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제의 22형 축음기전탐기Type 22 수상레이더의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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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레이더의 모습SG레이더의 화면[39]SG레이더의 화면부 및 조절부위

이렇게 된 이유도 참 한심한데, 상기의 야기 우다 안테나를 거부한 것 외에도 수신기의 문제가 심각했다. 이 문제는 1944년 7월에 광석검파기를 이용한 신형 슈퍼헤테로다인 수신장치가 제작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개발에 관련된 관계자가 광석검파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제작도 가능했으나 충분히 실험하지 않은 채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도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광석검파기는 열에 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회로가 간단한 오토다인 방식을 고집한 것이 수신기의 성능이 열악했던 주된 이유로 밝혀졌다.

게다가 당시에 광석검파기를 실험했던 것도 해당 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은 아니었고, 당시 학도 동원을 위해 기술연구소에 와 있던 도쿄대학 이학부 대학원생인 시모다 코이치와 이화학 연구소의 기쿠치 세이시 박사 등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발 책임자란 인간이 실험도 안 해보고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이미 가지고 있고 적용 가능하며 양산도 가능한 수준의 기술을 제멋대로 쓰레기 처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22형 전파탐신기의 실용화가 지연되었던 것은 단순한 기술력 부재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관료적인 구조 요인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맙소사 뻘짓들이 시너지효과를 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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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급 전함에 붙어있는 빨래건조기 21형 전탐기 (Type 21 General Purpose Radar)[40]

후에 야기 우다 안테나를 도입한 13호 대공경계전탐이 개발되었는데, 소형화/경량화에 성공하여 110kg의 무게로 월등히 좋은 성능을 보이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기존의 전탐들을 폐기하고 대량으로 생산하여 거의 모든 함선에 13호 전탐을 장비시켰지만 이미 해는 1944년 중기였다. 이 성능 차가 어느 정도냐면 기존 전탐들이 100Km 거리에서 항공기 편대, 2~30km 내에 있는 전함이나 감지해 낼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에 반해 항공기 편대를 최대 300Km 밖에서 탐지 가능했으며, 이는 13호 전탐의 예상 스펙의 3배, 표시눈금 한계인 150Km의 2배(...)에 달하는 탐지능력이었다.

그러나 13호 대공경계전탐은 말 그대로 탐지거리만 늘었지 방향이나 거리 측정능력은 기존의 일본군 레이더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그래서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기존의 레이더도 같이 달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레이더들의 위치를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면 오요도처럼 전파 간섭이 발생해서 안그래도 떨어지는 성능이 먹통 수준이 된다. 여기에 더해서 레이더 화면도 미국의 SG레이더의 PPI 스코프와 같은 것을 끝까지 개발하지 못했으므로 측정은 앞서 언급한 22호 레이더의 파형화면을 보면서 레이더 경계요원이 알아서 해야 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는 레이더 관제사격이나 레이더 연동 대공사격같은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덕분에 일본의 레이더는 성능도 조악한 것이 생산도 힘들었고, 문제점을 어느 정도 수정한 후에 개량할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그 결과 말이 레이더지 실제로는 적군의 레이더 전파를 포착해서 경고해주는 전파탐지기에 가까운 물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용법도 망했다. 필리핀 해 해전 직전에 타위타위에 집결한 일본군 함대는 자체적으로 레이더 사용을 금지했다. 이유는 레이더 전파를 역추적한 미 해군이 일본군 함대를 찾아낸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미 한참 전에 미군은 잠수함과 레이더, 항공기를 통해 일본군 함대를 찾아낸지 오래였고, 레이더를 안 키면 미국의 공습을 일본군이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41] 결국 이 문제를 끄집어낸 장교 덕분에 일본군은 레이더를 다시 가동했다.

여기에 더해서 필리핀 해 해전 직전에 항공모함용 함재기에 일본군이 개발한 프로토타입 항공기용 레이더를 장착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공습에 투입하기 전에 공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간신히 달아놓은 레이더를 철거하고 대신 어뢰를 탑재한다. 비록 일본군의 레이더가 성능이 좋지는 않았겠지만 어뢰 1발 단 함재기 몇 대가 늘어나는 정도의 공격력 강화보다는 미리 고공에 매복한 적 전투기를 탐지하거나 미국 함대의 위치를 탐지한다는 이득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런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출격한 비행기들은 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서 사냥감이 된다.

4.4 통신 문제

일본군은 이 문제도 심각했다.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는 바로 아래 항목을 보자.

4.4.1 무전기가 먹통입니다!

위의 레이더 항목에 있듯이 전파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킴으로 나오게 된 일본군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통신장비의 허술함이다. 운용 능력, 방호력, 공격력부터 개판인 제로센, 치하, 야마토 등 일본군 무기들의 안습함을 더 증폭시킨 원인 중 하나가 아군끼리의 연계가 안된다는 것인데, 이게 통신이 안되기 때문이다. 통신이 안되기에 할수 없이 나온 게 항공기들의 수신호[42], 군함들과 전차들의 발광신호, 연막신호 같은 것들이지만, 이걸로는 전투 중에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제로센 문서에 존재가치가 '제로'인 무전기라는 항목이 따로 있겠는가.

이건 전투 외의 상황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소류의 정찰기는 미 항공모함들을 발견했는데도 무전기가 고장나서 보고하지 못했다. 그 뿐 아니라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오보 하나 때문에 이길 수도 있던 해전을 홀라당 말아먹었다.(...) 이것이 바로 구리다 턴.(...)

이 통신 문제는 1945년 무렵에서야 어느 정도 해결되며, 343 해군항공대의 경우 개선된 통신장비에 힘입어 1:1.5라는 교환비를 연출하기도 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저 무렵의 일본은 일본어가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되든지, 항복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지만...

4.4.2 암호는 장식입니다

통신의 보안에도 투자가 게을러터져서 암호를 써서 통신을 하면서도 식수를 떡밥으로 던진 미군의 낚시에 역으로 걸린다던지, 해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일본군의 암호는 미군에게 쉽게 해독되었고, 미군의 암호는 일본군이 절대로 해독할 수 없었기에 그 차이는 더 벌어졌다. 오죽하면 일본군의 문제점을 다룬 문서숭숭 뚫리는 암호라는 항목이 따로 있겠는가. 사실 이건 연합군이 암호 해독을 너무 잘 한 것도 있기는 하다.[43] 동맹국인 독일의 암호도 영국 본토 항공전무렵에 이미 줄줄 세고 있었고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가 좀 더 오래 버티면서 영국을 위협했을 뿐이다. 독일은 암호가 뚫린 것을 알고 더 이상 뚫리지 않게 막으려는 노력이라도 했다.[44] 일본도 아예 손을 놓은건 아닌지 난수표를 바꾸는등의 어느정도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결국은 다 뚫려버렸다.[45]

4.5 거지같은 대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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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식 2연장 대공포 (九六式二十五粍高角機銃, Type 96 25 mm AT/AA Gun)쇼카쿠에 장착된 대공포.

일본군의 대공포는 육군과 해군 모두 거지같은 성능과 모자라는 수량으로 요약된다.

전쟁 초반기 대공포의 일부는 고각이 제한되는 등의 심각한 문제점은 둘째치고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카탈로그에서 나오는 발사속도보다 실제 발사속도가 극단적으로 감소하는 막장상황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나마 전쟁 초반의 물건들은 제대로 된 공작기계로 생산했으므로 신뢰성까지 낮지는 않았지만, 전쟁 후기에 생산된 대공포는 위에 언급된 문제점을 별로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가는데다가 수량도 매우 적고 신뢰성까지 낮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본의 대공포 대부분이 기계화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3식 5인치 대공포는 이런 일본군 대공포의 문제점을 모두 보여주는 물건인데 느려터진 상하각 조절 속도와 느린 발사속도를 가지고 있었다.[46] 게다가 자동장전장치는 커녕 장전을 보조할 장치조차 존재하지 않아서 이걸 순수하게 인력으로 장전해야만 하는데 이게 5인치쯤 되면 체격이 작은 일본인 수병의 체력으론 감당 못하는 상황이 일어난다. 3t식 대공포의 탄 무게가 23~28kg 정도 되는데 이걸 수직으로 장전한다고 생각해보자. 결국 장전을 위해서는 포를 5°~10°로 내려서 장전해야만 했다. 거기다 앞에서 이야기한 느린 상하각 조절과 시너지효과를 일으켜서 실제 발사속도는 본래 사격속도의 절반수준에 그쳤다.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것은 이 상하각 조절이 인력으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아래에도 언급될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 이 대공포탄을 손으로 장전하는 수병들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극 중에서는 나이 어린 대공포 조작원이 그 무게를 못 이기고 훈련 중에 포탄을 포좌에서 떨어뜨리고 만다!

그나마 89식 대공포는 이런 문제들이 어느정도 완화되서 장전기도 있었고 장전한다고 포신을 내리는 짓거리도 할 필요가 없어지기는 했다. 발사속도도 반토막 나서분당 5~10발 수준이던 3식과 비교하면 분당 14발로 상당히 개선된 모습을 보이며 상승률은 미국의 5인치 38 구경장 양용포와 비슷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47] 다만 비교적 느린 탄속과[48] 그로 인해서 구경에 비해서 포탄의 상승한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어서 한참 작은 구경의 8,8cm FlaK와 비슷한 상승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이외의 요소에서는 국제적인 수준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는 대공포를 만들어내기는 했다.[49] 문제는 일본은 이런 대공포를 1932년에 개발해놓고도 대수상화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구축함과 같은 보조함에는 대공화기로는 의미가 없는 3식을 계속 채택했는점과 종전까지도 성능의 향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결함을 보완하고자 대량의 대공포를 탑재하긴 했지만, 미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데다가 전함의 경우 밀폐식 선회포탑형 대공포보다 비장갑, 오픈탑 구조를 이룬 노천식 대공포가 많았고 서로 혼재해 있었기 때문에,[50]갑판에 적 전투기가 기관총질만 해줘도 피바다가 펼쳐졌다.[51] 그래도 대공화력을 무시한건 아니라서 전함과 항공모함에는 89식 대공포를 달아주기는 했지만 미군 함정들에 설치된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52] 위력, 포신부양속도, 포탑회전속도 등은 막 배치된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전 말까지도 그 성능에서 발전이 없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빨라지는 항공기들에 대해 대응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미군 전투기들은 기관총질만 하는 게 섭섭했는지 로켓탄까지 달고 와서 마구 쏴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저층방공망을 담당하는 20mm급 기관포조차 대부분은 연합군의 장비와 비교해서 훨씬 열악했다는 것이다. 25mm 기관포에 벨트(탄띠)급탄이 아닌 15발 매거진(탄창) 급탄을 한다던가(...) 총신이나 총몸체 가공능력 부족으로 발사속도에 제한이 가해진다던가... 탄약 자체의 위력부족 등의 문제로 안 그래도 튼튼한 미군 함재기들이 수십발의 대공포탄을 뒤집어쓰고도 무사귀환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해버렸고, 그 수량조차 모자라서 일본 본토를 미군 함재기들이 공격할 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이유가 되었다.

대공포 사격시 탄창이 빠질까봐 탄창을 병사가 옆에서 눌러줘야 하는(!!!) 장면이 일본 영화쪽에서 나오기도 한다! 일본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 보면, 대공포 사격시 병사들이 탄창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육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능의 열악함은 둘째로 치더라도 까고 싶어도 수량 자체가 크게 모자라서 깔 게 없다는 안습함을 자랑한다. 오죽하면 산악용 야포인 94식 산포까지 총동원해서 대공사격을 했겠는가? 만약 일본군에 제대로 된 대공포가 많이 있었다면 대공포로 전차를 사격하지 전차 하나 잡자고 대전차총검술을 하거나 자살돌격을 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 고고도 요격을 담당하는 대구경 대공포도 성능이 형편없었다. 대공포탄이 B-29가 있는 고도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뚝 떨어진다. 답이 없다. 그나마 도쿄 대공습 당시에는 미군의 B-29들이 한밤중에 낮은 고도에서 폭격했기에 조금 나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53] 그나마 독일제 부품을 사용한 5식 15cm 대공포처럼 B-29 4대를 격추하며 활약한 것들도 있지만, 그 수가 고작 2문이었다. 그 2문으로 4대 잡은것도 대단하다

4.6 부실한 군수지원

보급을 경시한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일본군 해군에는 훌륭한 공작함 아카시가 있었다.[54] 이 배는 연합함대의 평시 연간공수의 40%를 단함으로 시행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많은 활약을 했다. 무장은 매우 빈약하지만, 공작함에 중요한 건 수리 능력이지 화력이 아니다.

그런데 이 배는 한 척이다. 일본 연합함대의 규모로 보아 공작함 6척은 있어야 하는데 한 척이다. 이래서는 그 많은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고, 아카시가 격침되면 일본 해군은 망했어요. 대양해군에서 공작함이나 수송함 같은 지원함 세력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인데, 지원세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점은 일본 해군의 큰 실수였다.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은 그놈의 함대결전사상.[55]

사실 공작함은 아카시 이후 한척 더 나오긴 한다. 아사히라고.. 그런데 이 아사히의 경우 문제가 많아서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56] 게다가 아카시는 만들 때부터 공작함으로 만든 배지만 아사히는 원래 1차 세계대전도 터지기 전인 1900년에 진수된 전노급 전함이었다. 그리고 아사히가 골룸한 게, 함종이 한 번 바뀐 것도 아니고 세 번 바뀌어서 공작함이 된 거다.[57] 그리고 아사히 이후, 순양함이자 잉여함키타카미를 공작함으로 개장해서 써먹으려고도 했으나... 이럴 무렵이면 일본에 제대로 된 공작기계가 없어서... 결국 키타카미는 공작함 개장 후 수송선 역할만 하다가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식량을 수송하는 급양함마미야, 이라코, 2척 밖에 없었다. 2척으로 태평양 전체의 해군기지에 보급을 해주려니 급양함들은 정비와 수리를 할 때만 빼고 계속 돌아다녀야 했다. 2척으로 충분한가?

그럼 일본군 육군은 좀 나을까? 그런 거 없다. 당장 트럭부터가 거지 같은데 어떻게 제대로 된 지원세력을 갖춘단 말인가. 그 이전에 일본군 수뇌부의 마인드가 문제다 일본군 육군의 지원세력이 얼마나 처참한지는 임팔 작전 항목 참고.

트럭이나 공작함 같은 군수지원도 엄연히 무기인데, 이걸 소홀히 한 일본군은 바보가 분명하다. "초보자는 전술을 연구하지만, 숙련자는 보급을 연구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게다가 동일 구경인 7.7mm소총탄을 서로 호환이 안되는 3종류의 탄종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이거 역시 위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바 있고, 이 문서의 하위 문서들에도 수차례 언급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낳은 삽질.

5 전쟁 이후

위에 적은 주옥같은 문제점은 일본군이 미군에게 개발살나는데 크게 기여했고, 전후에 일본군은 해체되었으며 자위대가 창설된다.[58]

그러나 위에 적은 문제점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되었다. 자세한 것은 자위대/문제점 항목을 참고하자.

6 대중문화에서의 일본군의 무기체계

가공전기 등에서는 비교적 멀쩡한 무기로 등장한다. 얼마나 향수가 대단했으면 가상에서 도로 부활시키는 위엄 그러나 주로 등장하는 건 야마토급 전함이나 A6M처럼 이름이 많이 팔렸거나, 치누처럼 스펙 좋아보이는 병기들이고, 97식 전차처럼 답이 없는 물건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증을 철저하게 한 경우에는 야라레메카 본래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다. 한 예로 걸즈 & 판처에서 89식 중전차의 화력과 장갑 고증을 충실하게 했더니 픽션적 허용으로 보정까지 붙여줬는데도 상대팀 전차를 한 대도 못 잡는다(...). OVA '이것이 진짜 안치오 전입니다!' 에서는 탱켓인 CV33 5대를 격파하는 대활약을 펼치지만, 중형 전차가 탱켓을 잡는 건 당연한 일이다. 중전차가 미군 경전차한테 얻어터진 건 일단 잊자

온라인게임 월드오브탱크를 보면 일본군 6티어 중전차 O-I는 가공할 만한 화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것은 이것 역시 프로토타입이며 양산형은 단 한 대도 생산되지 못했다.[59] 상상만으로는 뭘 못 만들겠는가...타국에도 창작전차가 있긴한데 뭔가 일본만 심하게 까이는 거 같으면 기분 탓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프로토타입이 양산형보다 강하다는 것이나 특정 인물,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든 전용기, 에너지나 내구도등을 희생한 강력한 결전 병기 같은 효율성이 꽝인 로망뿐인 병기들을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저런 로망을 위해 만든 것도 일기당천의 위력은 커녕 기본적인 위력조차 안나오는게 태반이었다는 것이지만.

워썬더에서는 비교적 고증에 충실한지라 저티어에 있는 대전초 전투기들은 꽤 쓸만하나 중간티어에서는 나는 발전이 없는데 적은 확 바뀌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4티어부턴 미쳐 날뛰는 게 함정

월드 오브 워플레인 역시 고증에 쓸데없이 충실한 편이다. 제로센 트리 한정이지만 선회력은 최강인데 고도성능과 엔진성능따윈 개나 줘버린 지 오래고 유리몸에 불까지 잘붙는다는 점까지 넣어놨다... 이는 신덴도 마찬가지.

월드 오브 워쉽에도 일본 함정들이 등장하는데, 오히려 동급 미국 함정을 압도하는 성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된 이유는 월드 오브 워쉽의 전장이 통상적인 포격전보다 좁은 범위에서 수뢰전 위주로 전투가 벌어지는, 일본 해군이 정확히 원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게임이라는 특성상 보급이나 수리 등 군수지원의 필요성도 전혀 없다. 반면 미국 함정들의 강력한 대공화력, 레이더를 통한 탐지능력과 포격능력 등은 게임 내에 반영되지 않거나 반영되더라도 쓸 데가 없는 경우가 많다.[60] 덤으로 자오나 하쿠류 같은 고증무시 페이퍼쉽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7 일본군의 사용무기

일본군/무기를 참조.

  1. 일본군 무기의 각종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연으로서 코마츠 사쿄 원작 소설과 재난 영화 줄거리와는 별개 문제다.
  2. 사진의 M3는 경전차이지만 일본군에게는 "강력한 중전차"로 인식되어 있다(...). 심지어 실전에서도 M3 스튜어트가 일본군 대부분의 전차보다 강했다.
  3. 붐앤줌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상대보다 높은 고도를 확보해야하는데 당시 소련의 과급기 관련 기술이 형편없어서 4,000m이상 올라가는건 자살행위였다. 결국 독일 공군에게 고도 우위를 확보할 수 없으니 선회전을 하는게 그나마 가망이 있었던 것.
  4. 다만 미군의 경우는 어느 정도 변명거리가 있다. 애초에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공습만 아니었으면,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이 최소 1년은 늦춰졌을 것이고, 이전에 미군이 갖고 있는 전투교리라 해봐야 별도로 연구한 중(重)폭격기를 이용한 전략 폭격을 제외하고는 복엽기가 난무하던 1차 대전기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5. 미군에게는 제로센을 사냥하기 위한 선택지가 봄앤줌 외에 하나 더 있었다. 제로센에게 꼬리를 잡혔을 때 동료기와 통신을 하면서 꽈베기 꼬듯 선회비행을 하는 동안 역으로 제로센의 꼬리를 노리는 타치 위브가 그것.
  6. 기술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공업능력의 부족으로 일정한 품질을 가진 물건으로 대량으로 양산해내지를 못한게 문제였다. 쉽게 요약하면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쓸만한 품질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 게다가 수리나 보수 정비를 맡아야 할 숙련공을 공장이 아닌 알보병으로 갈아넣어서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아버리는 통에 정비 문제도 심각했으니... 일단 고출력 엔진 자체는 1941년에는 제법 개발이 진행되어서 실제 가동까지 한 상태였다.참조.
  7. 셔먼에 장착된 75mm 주포는 수직으로 착탄시 1,500m에서 54~79mm를 관통하며 3,000m에서도 30mm를 관통할 수 있다.Bird, Lorrin Rexford; Livingston, Robert D. (2001). WWII Ballistics: Armor and Gunnery. Overmatch Press. pp. 62–63.
  8. 사실 당시 괜찮은 20mm 기관포를 운용한 나라가 독일과 영국 정도였다. 소련제 기관포도 위력이 부족했고 미국의 경우도 라이센스 생산한 물건들이 묘하게 원판보다 떨어지는 신뢰성을 보인다거나 복제에 실패했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미국이 이상하게 기관포에서 삽질을 한 건 그놈의 단위계 탓이다.) 미국이야 기존에 사용하던 12.7mm 기관총 6~8정을 다는것으로 충분히 때울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다만...
  9. 이건 어뢰발사관에 맞아 유폭되어서 그렇다. 분명 놀라운 전과이고 어뢰발사관이 제대로 방어되지 않는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반화할 수 있는 전과는 아니다.
  10. 함수가 잘린 후부키급 구축함, 함교가 박살난 무츠키급 구축함, 비행갑판이 박살난 항공모함 호쇼 등(...) 다만 저 경우는 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저런 상황에서 훈련을 강행한 지휘부의 잘못이 크다. 저 상황이라면 일본군이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의 해군함정이라도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을만큼 악천후였다. 일례로 미군도 태풍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코브라(태풍) 문서를 보자.
  11. 다만 군함간의 포격전의 경우 어뢰발사관을 '노려서' 맞추기는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둔게 잘한건 아닌것이 노려서 쏘는게 아니라고 안맞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실제 사례까지도 존재하기 때문. 군함끼리의 포격전에서 어뢰발사관 때문에 당한 대표적인 사례가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인데... 그 포격전의 상대가 하필 호위항공모함이었다..
  12. 그래도 대구경 대공포에 한해서는 포방패라도 달아주기는 했다.
  13. zeke-52.
  14. J2M.
  15. Clash of Wings: World War II in the Air
  16. Torpedo: The Complete History of the World's Most Revolutionary Naval Weapon.
  17. Ki-43 PDF, Ki-44 PDF Ki-61-I PDF, Ki-61-II PDF, Ki-84 PDF 해당 자료에서 히엔만 Fuel tanks, Self-sealing라고 되어있고 나머지는 Feul tanks, Protected라고 표시되어있다. 그러나 하야테와# 하야부사는 자동 방루 탱크를 장착하고 있었으므로 쇼키의 Protected 또한 방루탱크를 이야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18. World War II: the Encyclopedia of the War Years, 1941-1945, International Warbirds: An Illustrated Guide to World Military Aircraft, 1914-2000.
  19. 이렇게 된 원인 역시, 당시 중일전쟁으로 인해 대륙이라 해봐야 중국 정도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공습 직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앞으로 미국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말인 "미국과 강화 협상을 준비할 겁니다."도 이것을 대변해 준다. 문제는 미국이 강화협상이 아닌 대일선전포고를 시작으로, 대 추축국 선전포고를 때려버렸다는 거지만.
  20. 동맹국인 독일은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을 피했지만 미국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신나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물론 그 전에 소련한테 선빵을 갈긴점에서 둘다 멍청한건 똑같다 원래 독일의 계획대로라면 최소 1943년까지는 미국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이 선빵을 안날렸어도 결국은 미국과 독일이 전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애초에 영국이 독일과의 싸움에 미국의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 선박도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 이것 때문에 전선에의 우선 투입 전력 구분에 혼선도 많이 생겼다.
  21. 다른 항공모함도 있긴 했으나, 항공대가 없다 이전에 함재기로 쓸 전투기도 없다. 나머지 항공모함들은 구레 군항 공습으로 사실상 몰살당했다.
  22. 더 큰 문제는 이 볼트와 너트를 만든 곳이다. 공장들이 폭격을 맞아버려서 일반 가정에서 군용 볼트와 군용 너트, 군용 리벳 같은 걸 만든다. 도쿄 대공습 직전 도쿄 상공에서 커티스 르메이가 한 말인 "사실 저 아래 스즈키 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 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 수공업이라 하지."가 바로 이것.(원문과 함께 더 정확한 번역은 항목을 참고.) 그러니 제품 생산 속도, 제품의 질 모두 땅에 떨어져버릴 수 밖에......
  23. 이런 경우의 예가 97식 전차 치하다.
  24. 아무리 성능이 좋고 단가가 싸다고 해도 신뢰성이 꽝이면 군용에서는 탈락이다. 개량을 명령받을듯. 혹은 다시 만들라고 하든지.. 일례로 미 해군도 잠수함, 뇌격기, 구축함들의 무장인 어뢰의 신뢰도 문제로 근 2년을 골치를 썩인 바가 있다. 이 당시 미 해군의 어뢰 신뢰도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어뢰 스캔들이라고까지 불렸겠나?
  25. 공랭식 기체중에는 F4U 초기형보다 조금 처지는 수준이고 Fw190A형과 비교하면 형식과 관계없이 더 빠르고 상승률도 더 우수하다. 도라는 액랭식이므로 패스.
  26. 이건 보수반의 서툰 대처가 더 문제였기는 하다. 폭발성 가스가 발생하자 그걸 함 전체로 골고루 퍼트려서 뽑아내겠다는 이해불가능한 바보짓을 했던것. 그러나 폐쇄식 격납고를 채택한 탓에 이건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27. 특히 대공화력에 대해서는 석기 시대 매니아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세한 건 일본 본토 공습 문서를 참고하자.
  28. 딱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미군을 상대로 대전차총검술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것. 이건 소련군을 상대로도 마찬가지. 탱크 데산트 문서 참고.
  29.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놓고도 이름을 다르게 부여했다는 거. 츠루기(剣)는 육군에서 붙인 이름이며, 해군에서는 이걸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고 불렀다.
  30. 사실 일본군 해군도 카미카제 전술을 태평양 전쟁 초반부터 정규전술로 체택해서 쓰진 않았다. 카미카제 자살특공이 본격적으로 쓰인 건 1944년의 레이테 만 해전 이후다. 더 안습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저 무렵 일본의 상황이 단기적으로는 카미카제가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는 거다(...). 물론 인권, 종전 이후등을 생각하면 정말 못할짓이지만.
  31. 육군기의 형식명인 Ki 번호로 알 수 있듯이 육군이 주로 사용한 것이다. 해군에서는 잘 쓰지 않았는데, 문제는 해군에서는 육군보다 한 술 더 떠서 프로펠러 엔진도 아니고 로캣 엔진을 달아서 독자적으로 이륙이나 이함이 불가능하므로 폭격기에 실려서 공대함 미사일로서나 써야 할 MXY-7 오카를 기업체도 아닌 해군 공창에서 만들고 있었다는 거. MX는 특수활공기라는 뜻이며, Y가 바로 이걸 주로 제작한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딴 것이다. 그리고 MXY-7 오카를 날리기 위한 운송도 해군의 G4M이 담당한 경우가 많다.
  32. 일반 가정에서 예전에 쓰던 방송 수신용 외부 안테나 중 UHF 수신 안테나가 딱 요렇게 생겼다.
  33. 그런데 여기서도 병크가 터졌다. 무전암호가 털리면서 해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시찰을 한다고 가던 중에 미군에게 걸려서 전사해버린 것. 야마모토 이소로쿠 문서 참고.
  34. 이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레이더의 성능을 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다(...). 역추적이 무서우면 레이더를 끄시던가 그런데 상대방도 레이더를 쓰고 있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방은 레이더로 다 보고 있는데 자기만 장님이 되는 셈이니.. 일본군이 이렇게 했다가 망한 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 다만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레이더를 역추적하는 장비를 이용해서 미 함대를 먼저 발견한 경우를 보면 일본도 이걸 알아내기는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시점이면 이미 과달카날까지 털린 시점이라는거...
  35. 밑에 나올 무전기 문제도 이것이 원인이다. 무전기도 엄연히 전파를 써야 하는 장비이고 무전기로 인해 아군끼리의 연계작전이 가능하다는 포지티브 가치가 훨씬 더 큰데 이것을 무시한 결과가 일본군 항공기들의 수신호, 군함 & 전차들의 발광신호, 연막신호같은 것들.
  36. 이럴 경우에는 단파라디오 소지만 막거나 방해전파를 쏘던가 하는 보다 세련된 방법이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이 북한의 존재 때문에 1993년까지 단파라디오 소지를 금지했다. 또 동맹국인 독일의 방송과 음악도 듣지 못하게했다
  37. 웃기지만 간혹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급의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매번 이렇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옥시덴탈리즘이 팽배했던데 있다. 게다가 맹점이 있는데 바로 견시원들의 시야고착. 단적인 예로 미드웨이 해전의 대역전극인 '운명의 5분'은 견시원들이 저공에 있던 뇌격기와 전투기들에 시계가 박혀있다보니, 고공으로 날아온 급강하폭격기들을 일찍 감지하지 못해서 벌어진 것이기도 하다.
  38. 탐지율과는 별개로 미군의 레이더를 이용한 관제사격의 명중률은 썩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본군보다는 나았다. 예를 들어 레이테 만 해전의 수리가오 야간전의 경우 미군은 그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0.6%의 명중률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일본군은 해당 해전에서 명중률 0%를 찍은 데다가 구축함 시구레 빼고 몽땅 격침당했다.
  39. 이것이 PPI 스코프(Plan Position Indicator scope) 화면이다.
  40. 출처는 Anatomy of the Ship : The Battleship Yamato - Janusz Skulski
  41.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상대방의 레이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레이더를 켜야 한다. 그리고 적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도 레이더가 돌아가야 하는데, 일본은 이것마저 묵살했다.
  42. 항공기들의 경우 한 술 더 떠서 방향타로 날개를 흔들어서 방향표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43. 실제로 연합군의 미국과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기부터 암호해독, 명령체계의 암호화 같은 보안 분야에 공을 들이고 있긴 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의 경우 일본군을 너무 얕보다가 당한 것이니 예외. 이 전훈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끝나고 만든 것이 NSA.
  44. 그 중에서도 특히나 암호에 민감한 잠수함대의 노력이 가장 처절했다.(오죽하면 이걸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겠는가? U-571 참조.)
  45. 야마모토 제독의 전사.
  46. 다만 이 포는 대공포로 사용하기 보다는 구축함과 같은 보조함의 주포로 주로 사용되었다. 주력함에 사용된 대공포는 후술한 89식 대공포이다.
  47. 89식이 분당 16도 미국의 5인치 38 구경장의 경우 분당 15도~18도이다.(전함의 대공포 버전은 15도이다. 항공모함의 경우 추가바람)
  48. 타국의 대공포에 비해서 포탄이 더 무겁다.
  49. 영국의 주력 대공포였던 4.5인치 양용포와 비교해도 발사속도는 14:12로 약간 앞서며 상하각 조절은 분당 16도와 10~20도로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미국의 5인치와 비교하면 발사속도는 14:15로 약간 밀리기는 하지만 앞도적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다.
  50. 게다가 밀폐식 선회포탑형 대공포는 일본 함선들 중 야마토와 무사시밖에 설치되지 않았다.
  51. 그나마 대구경 대공포에 한해서는 포방패라도 설치해주기는 했으며 3식의 경우에는 포방패가 너무 얇다고 판명되자 장갑을 보강해주기도 했다.
  52. 미군 주력함들이 대구경 대공포를(보통 38구경장 5인치 양용포) 12문씩 설치한 반면에 일본군은 야마토급 정도를 제외하면 4문정도에 그쳤다.
  53. 이 당시 일본은 야간 공습에 대한 방어능력이 없다시피 하다. 도쿄 대공습에서 격추당한 B-29는 난사되는 대공포에 재수없이 맞은 것.
  54. 그런데 이것도 훌륭하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게, 아카시에 적재된 공작기계들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기계들이었다. 아카시 문서를 참고하자.
  55. 함대결전사상이 원인인 이유는 함대결전이라는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승패가 몽땅 갈리기 때문이다. 즉, 한 번 크게 싸우고 그 이후가 없는 것. 당장 일본군 최강의 전함이라고 자칭한 야마토급 전함만 해도 알 수 있다.
  56. 이리 된 이유도 가관인데. 아카시에 적재된 독일제 공작기계들은 당시의 일본 내에서도 비슷한 규모를 가진 공장을 찾을 수 없었다. 쉽게 표현하면 수리용 공작기계들 80% 이상을 아카시라는 단 한척의 배에 몰아넣은 것.
  57. 원래 전함이었다가 연안방어함으로 분류가 바뀌고, 그 다음에는 잠수함에 대한 관리, 보급을 하는 잠수모함으로 바뀌며, 마지막으로 바뀐 게 공작함이다.
  58. 참고로 항복하여 무장해제되어 기존의 무기와 지상 병기, 군용기는 바다에다 버리거나 스크랩 처리나 소각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잔존 군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군함의 경우 더 안습인게 핵실험(!)으로 처분당한 군함도 있다. 전함 나가토의 경우 핵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맞았다. 비키니섬 핵실험 항목을 참고할 것.
  59. 더 안습인 건 실제 역사에서 O-I는 프로토타입부터 실패였다.
  60. 다만 레이더는 소모품이긴 하지만 연막 등의 은폐된 적함을 찾는 데는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