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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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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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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식 : 1988년 2월 13일
폐막식 : 1988년 2월 28일

개최국 : 캐나다
개최도시 : 캘거리

1 개요

1988년 캐나다 캘거리서 개최된 동계올림픽. 여러모로 전설이 된 올림픽이다.

냉전시대의 스포츠는 동서 진영이 맞붙는 대리전이었고, 이 올림픽은 그런 대리전 양상이 전개된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열린 1988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을 기록하며 동서 화합의 올림픽으로 역사에 남았다.

2 유치과정

캐나다의 캘거리, 스웨덴팔룬, 이탈리아코르티나담페초 세 지역이 공식적으로 후보로 뛰어들었다. 스웨덴은 이전 유치전에서 떨어진 데 대한 자격지심도 있었는지 열심히 준비했다.

그래서 투표 결과..

1988년 올림픽 유치 투표 과정
국가도시1차투표2차투표결과
캐나다캘거리3548유치 선정
스웨덴팔룬2531유치 탈락
이탈리아코르티나담페초18유치 탈락

스웨덴은 또 떨어졌다. 안습. 이 이후로 스웨덴의 동계올림픽 유치탈락은 전설이 되었다. 무려 6회 연속 탈락이라는 대기록이었다. IOC의 농간 (이 투표는 두번째 탈락이었다.)

3 피겨 스케이팅

캘거리 올림픽은 여러 종목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낳았지만, 특히 피겨스케이팅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올림픽이었다.

여자 싱글의 카르멘 전쟁 Battle of the Carmens, 남자 싱글의 브라이언 전쟁 Battle of the Brians, 페어의 G&G로 정리된다.

피겨스케이팅에서 최고의 화제거리는 단연 동독카타리나 비트였다.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카타리나 비트는 직후 4년 동안 유럽선수권, 세계선수권들을 모조리 제패하며 피겨 여제로 군림했다. 뿐만 아니라 냉전 시대 동구권이 낳은 최고의 스타였으며 서구권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던 선수였다. 비트의 원탑 독주체제였던 4년 동안, 단 한 번 비트가 2위였던 적이 있는데(1986세계선수권)그 때 비트를 꺾은 선수가 바로 미국의 흑인 스케이터인 데비 토마스였다.

올림픽에서 카타리나 비트와 데비 토마스는 둘 다 똑같이 비제의 카르멘을 롱프로그램 음악으로 선곡했고, 그래서 이 라이벌리는 카르멘 전쟁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전설이 되었다. 특히 이 둘의 라이벌리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 백인vs흑인, 여성적인 섹시한 피겨(비트)와 파워풀한 피겨(토마스)의 대립 등 수많은 화제성을 갖고 있었다.

카타리나 비트가 빙판 위로 쓰러지며 죽는 모습으로 끝나는 카르멘 프로그램은 피겨 역사에 길이 남을 프로그램이었으며, 비트를 영원한 카르멘으로 자리잡게 했다. 오늘날 비제의 카르멘은, 피겨 스케이터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선곡하는 피겨계 최고의 사골곡이지만, 그 수많은 카르멘 프로그램 중에서도 카타리나 비트의 카르멘을 뛰어넘었다는 평을 받은 여자 스케이터는 단 한 명도 없다.[1]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프리 프로그램 1위는 은메달리스트였던 캐나다의 엘리자베스 맨리였다.[2] 흠좀무

카르멘 전쟁은 비트의 승리로 끝났고, 카타리나 비트는 1984 사라예보 올림픽에 이어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이 기록은 역사상 유일하게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한 소냐 헤니 이후로 최고의 기록이며, 아직까지도 피겨스케이팅에서 올림픽 2연패를 기록한 여자선수는 이 둘 밖에 없다. 한편 데비 토마스는 동메달을 따며 흑인으로는 최초로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피겨스케이팅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캐나다의 엘리자베스 맨리는 은메달이었으며, 이후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 캐나다는 여자 싱글에서 메달리스트를 배출하지 못했다.

남자 싱글 부문에서는 미국브라이언 보이타노와 캐나다의 브라이언 오서, 두 명의 브라이언이 맞붙었는데 이것이 바로 브라이언 전쟁Battle of the Brians. 의외로 승부가 싱겁게 끝난 카르멘 전쟁과 달리 이 쪽은 채점 순간까지 진짜 박빙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남싱의 저주[3]가 작용한 결과 결국 보이타노가 오서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참고로 브라이언 오서는 1984 사라예보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이었다. 무려 2회 연속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페어 부문에서는, 전설적인 페어조인 예카테리나 고르디바세르게이 그린코프, 통칭 G&G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G&G는 1994년 릴리함메르 올림픽에서 또 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4]

4 이모저모

  • 캐나다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미숙한 경기운영으로 인한 논란과 노 골드(은 2, 동 3)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많이 노력하였다. 하지만 캘거리 지역의 기온이 급상승하면서 스키 경기 진행에 차질을 빚었고, 기대했던 선수들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또다시 노 골드라는 수모를 얻었다. 또 하나의 전설 탄생 자국경기에서만 노골드를 이어가는 기묘한 역사였는데, 이것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깨지게 된다.
  • 피지, , 과테말라,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자메이카 등 열대지방 국가들도 많이 참가하여 당시까지 동계 올림픽 사상 최대인 57개국이 참가하였다. 특히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들의 참가는 올림픽 정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쿨러닝이라는 영화로 각색된다.
  • 영국의 스키점프 선수 에디 에드워즈가 꽤 화제가 되었으며, 쿨러닝에 이어 독수리 에디로 영화화 되었다.
  • 대회 기간이 16일로 늘어났다.
  •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이 처음으로 실내 경기장에서 치러졌다. 고지대에 외부 환경의 영향을 덜 받는 실내 경기장이었으므로 세계 신기록이 대량으로 작성되는 성과를 올렸다.
  • 동독의 크리스타 루딩은 여자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곧바로 사이클로 전향하여, 1988 서울 하계 올림픽에 참가, 은메달을 땄다. 같은 해에 치러진 동계와 하계 올림픽 대회에서 메달을 모두 딴 전무후무한 사례.[5]
  • 종합 순위에서는 다시 소련이 동독을 제치고 1위를 하였다. 동독의 초강세종목인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종목 1개가 신설되는 등, 동독이 이번에도 종합 1위를 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3종목을 예상외로 네덜란드의 이본네 판 헤닙이 석권하면서 동독 선수들은 은, 동메달로 밀렸다.본격 콩라인 인증 동독은 카타리나 비트가 2연패를 하는 등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내며 금메달 9개를 땄으나, 소련이 이번에는 11개나 되는 금메달을 따는데 성공하면서 종합 1위를 내줬다. 스위스가 3위로 금 5, 은 5, 동 5라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최후로 출전하여 은 2, 동 1이라는 지난번 자국 대회보다는 향상 된 기량을 펼쳤다. 하지만 유고 내전으로 국가 붕괴 리히텐슈타인은 동메달 1개로 일본과 공동 16위 꼴지였다. 전대회 꼴지의 오스트리아는 금 3, 은 5, 동 2로 메달 수 4위, 종합 6위로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 대한민국은 당시까지 동계올림픽 출전사상 최다인 28명의 선수를 파견하여 첫 메달을 노렸다. 스피드스케이팅의 배기태는 유력한 메달 후보였으나, 500m에서 5위를 하여 근소한 차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그래도 당시까지 동계올림픽 출전 사상 가장 높은 성적으로 큰 가능성을 남겼다. 그리고 시범종목으로 치러진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2개를 따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메달 획득의 기초를 다지고 다음 대회인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과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메달을 따게 된다.
  • 대회의 마스코트는 카우보이 스타일의 왜? (칼가리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카우보이 시티다. 매년 여름마다 있는 Calgary Stampede라는 카우보이 주제 축제는 전국에 유명하다) 북극곰 Hidy and Howdy였다. 왠지 무섭다
220px-Olympics-hidy-howdy.jpg hidy-and-howdy.jpg

5 특이사항

이 대회는 1988년 9월에 열리게 될 1988 서울 올림픽 이전에 열렸던 대회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던 대회였다. 폐막식 때에는 서울 올림픽 공연단이 서울 올림픽을 예고하는 무대를 열기도 하였다. [6]

캐나다는 22년 후 밴쿠버에서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다시 한 번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 대회는 경제적으로 적자손실을 보게 되었던 올림픽으로 기록되어서 캘거리의 흑자재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대회와 서울올림픽에서 나란히 종합 1위와 2위를 한 소련과 동독은 이 해의 올림픽을 끝으로 올림픽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독일은 1990년 동서통일화에 따라 동독과 서독으로 따로 참가하게 되었던 마지막 동계올림픽이 되었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대회부터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국호와 선수단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소련도 소련이라는 국호와 소련 국기를 앞세우고 선수단을 입장시키게 되었던 마지막 동계올림픽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1992년 동하계 대회에서 연합팀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했고, 이후 소련을 구성했던 개별 공화국이 각각 별개의 이름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956년 첫 출전 이후 7회나 우승을 차지했던 동계 올림픽 최강국 소련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북한은 당시 캐나다와 미수교 상태였지만, 이 대회에 피겨스케이팅과 스피드스케이팅에 6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서울 올림픽에는 불참하였다.

  1. 예브게니 플루셴코의 카르멘 정도가 레전드로 거론된다. 근데 이 선수는 남주인공을 연기한 것이니 제외
  2. 당시에는 피겨 스케이팅 종목의 원류가 된 얼음 위에 도형 그리기 종목인 컴펄서리를 실시했으며, 채점 비중도 컴펄서리 3: 쇼트 2: 프리 5였다. 비트가 프리에서 2위였긴 하지만 컴펄서리 3위, 쇼트 1위를 했기 때문에, 컴펄서리 4위, 쇼트 3위였던 맨리는 프리에서 1위를 해도 비트가 프리에서 2위를 하면 뒤지는 상황이었고, 그대로 되었다.
  3. 캐나다는 피겨 남자 싱글에서 수많은 월드챔피언들을 배출했지만, 올림칙 챔피언은 단 한 번도 배출해 보지 못했다. 심지어 캐나다가 피겨 4종목에서 유일하게 가져보지 못한 올림픽 금메달이 남자 싱글메달이다
  4. 그 다음 해인 1995년, 남편인 세르게이 그린코프가 아이스쇼 연습 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 이후 동계와 하계올림픽을 같은 해에 치르지 않는 것으로 바뀌면서 다시 동계와 하계 대회를 같은 해에 치르는 것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기록이 되었다.
  6. 당시에는 손에 손잡고가 제정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주제가가 유력시되던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노래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