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日本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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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鎌倉幕府 | ||
가몬 | ||
1185~1333 | ||
수도 | 쿄토 | |
정치체제 | 봉건적 군부 독재체제 | |
국가원수 | 쇼군 | |
언어 | 일본어 | |
민족 | 일본인 | |
주요사건 |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쇼군 칭호가 내려짐→건국 1333년 멸망 | |
성립 이전 |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 가문 세력 | |
멸망 이후 | 남북조 시대 or 아시카가 막부 |
목차
1 개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겸창막부)가 집권하였던 일본사의 한 시대. 1185년부터 1333년까지 가마쿠라에 막부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타이라(다이라, 平) 가문을 물리치고 일본 전국을 제패한 후 각처에 수호를 설치하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흔히 이 시대부터 무사들이 권력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여전히 쿄토의 조정이 더 실권을 쥐고 있었기에, 쿄토의 조정-지방의 장원이라는 체제와 가마쿠라 막부-지방의 슈고(수호), 지토(지두)라는 이원적인 지배체제가 유지 되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어디까지나 쿄토의 조정이 공적 기관이었고 가마쿠라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 소속의 변방 지행국과 막부에 속한 무사들을 다스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막부가 조쿄의 난으로 조정을 물리친 이후부터 점점 막부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고[2] 원나라의 일본 침략 이후로는 막부가 완전히 일본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쇼군에 취임한 1192년은 일본 학생들이 역사 연표를 외울 때 '좋은 나라 만들자, 가마쿠라 막부(いい国 作ろう 鎌倉幕府)'라고 외우곤 한다.[3] 1192가 고로아와세로 '이이쿠니(いいくに)'라고 쓸 수 있는데 이게 '좋은 나라(いい国)'라는 의미의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 가끔 일본 서브컬처에서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할 때 '좋은 나라 만들자' 어쩌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다만 위 설명대로 1185년 막부 성립이 다수설이 된 이후에는 '좋은 나라'를 '좋은 상자(1185-이이하코:いいはこ-いい箱)'로 바꿔서 외운다고 한다.
2 겐페이 전쟁과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헤이안 시대 말기에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중심으로 한 타이라 가문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이에 못지 않은 미나모토 가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타이라 가문의 집권에 반발하고 있던 세력들은 1177년 쿄토의 시시가타니에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었으나(시시가타니 음모사건), 1180년, 왕자 모치히토가 타이라 가문에 맞서 봉기했다. 모치히토는 나라로 탈출해 미나모토씨에 기댔으나 결국 붙잡혀 패배하고 처형당했다.[4]
타이라 가문과 쌍벽을 이루고 있던 미나모토 가문은 1159년 헤이지의 난[5]에서 타이라 가문에 패배하면서 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살해당했고 요시토모의 아들인 요리토모는 생포되어 이즈로 유배되었으나, 호조씨와 혼인동맹을 맺는 등 이 때는 충분히 세력을 회복하고 모치히토 왕자의 봉기에 동참하여 1180년 8월 군사를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요리토모는 비록 모치히토가 처형당하고 이시바시산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반(反) 타이라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간토지방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가마쿠라에 본거지를 두고 본격적으로 타이라 가문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후 스모마타가와(후지천) 전투에서 승리한 요리토모는 간토를 본격적으로 장악하게 된다. 때마침, 키요모리가 1181년 병사했다. 열세였던 미나모토씨는 1183년의 구키카라 전투의 승리로 전세를 뒤집게 된다.
한편 요리토모의 사촌 동생인 미나모토 요시나카는 1183년 말 가장 먼저 쿄토에 입성해 타이라 가문을 추방했지만 다음해 정월 수도를 불태우는 등 전횡을 일삼았고 이를 우려한 고시라카와 태상황은 요리토모에게 쿄토 입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되려 요리토모는 동국(간토)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해줄것을 요구했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리토모는 우지 강 전투와 아와즈 전투에서 요시나카를 살해하고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세토내해 방면으로 도주한 타이라씨와 안도쿠 덴노를 지금의 시모노세키인 단노우라 해전에서 몰살시켰다. 타이라와 안도쿠 등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 삼종의 신기의 진품도 이때 없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3 죠쿄의 난과 막부 지배의 확립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대에 가마쿠라 막부는 그 세력을 확고하게 다졌지만, 사실 지배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지역은 여전히 간토 지방 뿐이었고 덴노의 조정이 있는 키나이 지방에 있는 장원 등은 조정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하고 그 자손도 죽어 미나모토씨가 3대만에 끊어지자, 본래 미나모토씨에 의해서 옹립되었던 고토바 덴노(당시는 상황)는 이 기회를 노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려 했다.
문제는 고토바 덴노가 너무 정국을 유리하게만 판단했다는 점이다. 고토바 덴노는 막부를 없애겠다는 칙서 한 장만 내려보내면 간토의 무사들이 알아서 조정의 편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전쟁 준비도 하지 않고 일단 칙령을 먼저 내려보냈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미망인인 "여쇼군, 비구니 쇼군" 호죠 마사코가 나서서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을 규합했기 때문에 막부 세력에는 거의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간토의 무사들은 이미 가마쿠라 막부의 지도력에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덴노의 조정과는 별다른 유대 관계가 없었다. 막부 내부에서도 이미 싯켄 호조씨가 쇼군을 제치고 실질적인 집권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미나모토씨가 끊어졌다고 막부가 붕괴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가마쿠라 막부의 내부사정을 전혀 모르지 않고서야 할 수 없었던 발상이었다.
간토의 무사들은 막부를 공격하기는 커녕 오히려 막부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거병하고 키나이로 진군했다.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가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력 충돌에는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던 조정은 그제서야 허겁지겁 방어를 하려 했지만 애초에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판국이라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덴노의 조정이 있던 키나이는 막부군에 완전히 함락당했다. 아, 망했어요...
그렇게 조정은 최소한의 권리도 잃어버린 막부의 포로가 되었다. 고토바 상황과 그 혈통을 이은 덴노를 비롯하여 그의 세력들은 모두 낙도로 귀양을 갔으며, 그나마 덴노의 조정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키나이의 장원들도 모두 막부에게 빼앗겨서 재정적인 능력마저 모두 상실한다.
4 가마쿠라 쇼군들의 역사
1199년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적장자인 요리이에가 그 뒤를 이었다(2대 카마쿠라도노 취임). 그러나 호죠 씨를 중심으로 한 13인 합의제가 성립되면서 실권을 잃고 말았고, 이에 반발한 요리이에는 측근들을 동원하여 정국을 독단하였다. 선대부터 쇼군의 총애를 받던 카지와라 카게토키는 다시 이에 반발하여 요리이에의 동생인 사네토모를 옹립하려 하였고, 정변이 실패한 후에 쿄토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했고, 요리이에는 1201년에 이르러 조정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203년에 요리이에가 중병으로 드러누우면서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외조부인 호죠 도키마사가 모든 실권을 쥐고는 요리이에의 동생인 사네토모를 다시 옹립하였다. 이 와중에 요리이에의 장남인 이치만이 사망하였고, 요리이에 본인도 이즈 슈젠지에 유폐되었다가 호죠의 손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사네토모는 겨우 열두 살의 나이로 옹립되었으나, 실권은 계속 호죠 씨가 쥐고 있었고, 정치나 군략보다는 문예에 재능을 보였다. 그런데, 1219년 1월 27일, 카마쿠라의 츠루가오카 하치만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 요리이에의 차남인 쿠교에 의해 살해당했다. 같은 날에 쿠교 또한 처형당했으므로 카와치 겐지 씨의 직계는 대가 끊기었다. 안습.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자손이 3대 째로 끊겼기 때문에, 이후에는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죠 마사코의 집안인 호죠씨가 싯켄(執權, 한글로 읽으면 집권)이 실권을 장악했다. 6대 이후에는 천황가에서 황자(친왕)를 데려다가 명목상의 쇼군으로 앉히기도 했다. 덴노는 쇼군의 허수아비, 쇼군은 싯켄의 허수아비
싯켄과 함께 점점 명목상의 힘으로 약화되던 가마쿠라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가 끌어들인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의 연합군에 의해 1333년 멸망하면서 겐무 신정을 거쳐 남북조시대와 무로마치 시대가 열리게 된다.
5 가마쿠라 막부의 역대 쇼군과 싯켄
- 역대 쇼군
순번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1대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源頼朝) | 1192 ~ 1199 | |
2대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源頼家) | 1202 ~ 1203 | 1203년 폐위 1204년 살해됨 |
3대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源実朝) | 1203 ~ 1219 | 1219년 암살 요리토모 직계 단절 |
4대 | 후지와라노 요리츠네 (藤原頼経) | 1226 ~ 1244 | |
5대 | 후지와라노 요리츠구 (藤原頼嗣) | 1244 ~ 1252 | |
6대 | 무네가타 친왕 (宗尊親王) | 1252 ~ 1266 | |
7대 | 코레야스 친왕 (惟康親王) | 1266 ~ 1289 | |
8대 | 히사아키 친왕 (久明親王) | 1289 ~ 1308 | |
9대 | 모리쿠니 친왕 (守邦親王) | 1308 ~ 1333 |
순번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1대 | 호죠 토키마사 (北条時政) | 1199 ~ 1202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장인 |
2대 | 호죠 요시토키 (北条義時) | 1205 ~ 1224 | 조큐의 난으로 전권 장악 |
3대 | 호죠 야스토키 (北条泰時) | 1224 ~ 1242 | |
4대 | 호죠 츠네토키 (北条経時) | 1242 ~ 1246 | |
5대 | 호죠 토키요리 (北条時頼) | 1246 ~ 1256 | 회국 전설[7] |
6대 | 호죠 나가토키 (北条長時) | 1256 ~ 1264 | |
7대 | 호죠 마사무라 (北条政村) | 1264 ~ 1268 | |
8대 | 호조 도키무네 (北条時宗) | 1268 ~ 1284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
9대 | 호죠 사다토키 (北条貞時) | 1284 ~ 1301 | |
10대 | 호죠 모로토키 (北条師時) | 1301 ~ 1311 | |
11대 | 호죠 무네노부 (北条宗宣) | 1311 ~ 1312 | |
12대 | 호죠 히로토키 (北条煕時) | 1312 ~ 1315 | |
13대 | 호죠 모로토키 (北条基時) | 1315 | |
14대 | 호죠 다카토키 (北条高時) | 1316 ~ 1326 | 1326년 출가 |
15대 | 호죠 사다아키 (北条貞顕) | 1326 | |
16대 | 호죠 모리토키 (北条守時) | 1327 ~ 1333 |
6 가마쿠라 시대가 배경인 작품들
- 산적왕
- 우대신 사네토모 : 일본의 대문호 다자이 오사무의 중편 소설로, 요리토모의 손자 사네토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패전 직전 일본은 각종 검열이 심했는데, 이를 피하고자 당대 작가들은 역사소설을 썼고 이것이 붐이 되었다. 다자이 또한 이 붐에 편승하여 가마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 것.[8]
- 호죠 토키무네( NHK 대하드라마): 8대 싯켄 토키무네의 생애를 다루었다.
- 이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고 보긴 애매하지만 문명 6에서 일본 문명의 지도자로 호조 도키무네가 등장한다.
- ↑ https://en.wikipedia.org/wiki/Kamakura_shogunate#/media/File:Sasa_Rindo.svg
- ↑ 흔한 설인 타이라가 조정의 태정대신을 겸하기 시작한 것, 타이라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 운운과는 큰 상관이 없다.
- ↑ 아마브릴 2화에서도 주인공인 카니에 세야가 이걸 "좋은 파벌 만들자, 요리토모 막부" 라고 외우는 엑스트라를 보고선 그게 아니라고 츳코미를 한다.
- ↑ 이전 문서에는 모치히토가 황태자로 기술 되어있었지만 모치히토는 친왕칭호조차 받지 못해서 모치히토왕 즉 조선시대식으로 말하자면 대군도 아닌 군호만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모치히토가 타이라 가문에 반감을 가지게 된 이유중 하나도 모치히토에게만 친왕칭호를 내려주지 않아서인것도 있다.
- ↑ 겐페이 전쟁을 길게보는 측에서는 이때부터를 원-평 양씨의 전쟁이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 ↑ 집권(執權). 가마쿠라 시대 쇼군을 대신하여 정무를 총괄하던 직책. 요리토모 사후 요리토모의 장인 호죠 토키마사가 임명된 것이 시초로 이후 호죠 가문에서 대대로 계승했으며 요시토키의 대에는 싯켄이 실권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막부의 수장이 되었다. 이 때의 호죠씨 가문은 전국시대의 호죠 가문(후호죠씨)과는 다른 가문이다.
- ↑ 廻国伝説. 토키요리는 후대의 미토 고몬 비슷하게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나라를 돌며 암행했다는 전설이 있다.
- ↑ <인간실격>, 도서출판 b, p302쪽.(2014년 펴냄) 해당 도서는 단편집으로 마지막에 <우대신 사네토모>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