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대국

1 개념

强成大國
지상락원에 이어서 북한이 밀었던 프로파간다 구호. 남쪽이 30년 전에 했던 걸 따라하고 있다[1] 강성대국이 이미 이뤄졌어야할 2015년 현재는 강성국가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다.

북한의 강성대국론은 1998년 8월 22일 로동신문에서 처음 언급되었는데, 1998년 9월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취임한 것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종결하고 김정일 체제의 안정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2]. 이 때문에 이것이 주체사상을 대체하는 김정일 정권의 이론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주체사상은 어쨌건 강성대국론의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념적으로 강성대국론은 사상, 군사, 경제의 3단계 이론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북한은 1980년대의 '우리식 사회주의' 이론과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한 비판에 기반하여[3] 자신들이 주체사상을 통해 사상의 강성대국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재 북한은 군대를 모범으로 삼아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선군정치 이론이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 북한은 김일성 출생 100년인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각종 선전 및 동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이론은 사실상 내부 동원력을 끌어내기 위한 것에 가까우며,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외교 및 도발과는 관련이 없다(물론 현실과의 괴리는 있는데 이는 후술). 즉 군대고 뭐고 다 끌어다 써서 밥이나 제대로 먹자는 것이 강성대국론의 요점. 실제로 북한에서는 군대의 산업 동원이 늘어가는 추세이며, 죽을 때까지도 행정직으로 자리를 회복하지 못한 채 국방위원장으로 집권한 김정일 체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외부의 고정적인 지원이 사실상 단절된 북한 내부에서 끌어낼 수 있는 정책이 대중 동원 운동과 그나마 먹여 살리고 있는 군대뿐인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본인들도 그걸 아는지 2012년은 '강성대국의 해'도 아니고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라고 선전해 왔지만...

2 현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중공업 비중이 이미 상당히 높은 북한의 상황에서 소련으로부터 석유코크스 등의 지원이 끊긴 북한은 공업 자체를 정상적으로 돌리기 어렵다. 근데 국제사회의 감시망을 뚫고 이란에서 가끔 석유 밀수입 한다고 카더라[4] 공업뿐만 아니라, 집단농장 체제와 공장 산업을 직접 연결시켜 비료를 공급하면서 돌아간 북한의 농업 체제도 파탄이 난 지경. 특히 북한이 지금껏 집중적으로 육성해 온 옥수수 농업은 지력 소모가 매우 큰데, 석유공급이 끊기면서 화학비료 공급이 중단된 상황에서[5] 이러한 농업을 계속할 경우 생산량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지력이 쇠퇴하면서 토양 자체의 질이 나빠진다. 그 결과가 북한의 현재 민둥산과 1995년 대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다.[6]

그리고 그나마 그 미친전쟁이라도 안일으켰으면 평양원산 등에 남아있는 공장으로 어떻게든 굴러먹기라도 하겠으나 김일성의 사리사욕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북한의 공업단지들이 죄다 미 공군에게 폭격맞아 버려서 공업단지들이 있던 자리가 죄 허허벌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북한의 공업기반 자체가 사라져서 북한의 산업 자체가 빈털털이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7] 만약 김마두(金馬頭)[8]가 이 쓰레기같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북한은 그 공업단지를 발전시켜서 일본이나 대한민국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동남아 국가보다 더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된 상황에서는 당연히 대중 동원 운동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 북한은 정권 창설 이후부터 사상의 강조와 이에 따른 대중 동원 운동을 계속해 왔지만[9] 1970년대 이후 대중 동원 운동의 효력은 날이 갈 수록 떨어져 가는 상태이며 이미 내부적 역량도 완전히 고갈된 상태.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 동원 운동은 오히려 북한 대중들에 대한 책임 전가라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태이다.

한편으로 식량, 석유 등의 획득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 필요성은 높아지고 있지만, 오히려 '우리식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을 계승한 강성대국론으로 인해 북한이 외부를 보는 시각은 오히려 좁아지게 되었다. 북한의 소위 '통미봉남' 정책은 1993년 1차 핵 위기 이후 위기감을 고조시켜 대화를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 사태라는 극단적인 공세까지 진행되었음에도 미국의 응답은 없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이니, 강성대국론이 스스로의 경직을 부르는데 일조한 셈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강화하고 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나름대로의 노력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장기적인 대책이 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대남 도발은 극단적일 정도로 나아갔음에도 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으니...대놓고 도발을 하는 악당짓을 하는데 말이 통할리가 있나

2011년에 평양에서 3개군과 1개 구역이 황해북도로 편입되어, 사실상 평양 시민에 대한 복지를 축소했다. 한편으로 한참 동안 방치되어 있던 류경호텔의 건설작업을 재개하고 평양아파트 10만호를 짓는 사업을 벌이는 등 체제 과시를 위한 건설 사업도 재개했지만, 이걸 위해서 김일성종합대학의 신입생 모집까지 중단돼 버리는 앞뒤가 바뀐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10]. 기술력도 중장비도 없는 북한은 엄청난 인력을 동원해서 아파트 10만호 건설을 서둘렀지만 결국 자금부족으로 사실상 실패. 남은 것은 졸지에 아파트 짓는다고 쫓겨나서 집을 잃은 주민들과 부실공사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11] 편의시설도 없이 껍데기만 올라간 콘크리트 덩어리 아파트들 뿐이다. 결국 아파트 10만호 사업은 2012년 신년사에서도 언급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이 가기 전에 김정일이 사망. 2012년에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겠다고 했던 김정은은 눈물을 쏙 빼게 돼버리고 말았다. 김정일이 자기 나름대로 무던히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실권 계승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지는 불분명한 상황이다.

특히 김정일의 사후 권력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북한 내부에서 군대가 발호할 위험성이 크다. 선군정치는 분명히 직접적으로 군권을 키우겠다는 이론은 아니며 다만 군대를 '혁명'의 도구로 삼겠다는 이론이고, 이에 따라 2000년대까지는 비록 군의 권력이 높아지기는 했어도 김정일 체제의 북한은 군이 당 아래에 장악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무 기반도 없는 김정은이 이를 장악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분명한 상태.[12] 결과적으로 북한은 강성대국은 커녕 본인들이 제시한 목표 하나하나를 다 이루기 어려워 보인다. 아니, 김정은 계승부터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나라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부실하기도 어려울 텐데. 지금의 북한 수준으로 자칭 강성대국이라는, 남한 수준의 경제대국을 만드느니 차라리 멸망시키고 재건국하는게 훨씬 쉬워캐삭하고 새로 키우는것이... 보인다.(...)

결국 2011년 말 공식적인 표현에서 강성대국은 사라지고 강성국가로 대체되었다. 강성대국이라는 표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년사설 등 공적인 표현물에서는 강성국가(또는 강성부흥)를 주로 쓰기 시작했으며 사용횟수 또한 현저히 줄어들었다.[13] 어휘표현 하나하나를 심각하게 따지는 북한의 특성상 이런 변화는 단순한 실수일 리 없고, 김정은 체제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리한 목표를 스케일다운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화여대 조동호 교수에 의하면 강성대국으로 가는 전 단계로서 강성국가를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뇌물 혐의로 적발된 장마당 관리 간부가 재판에서 "강성대국이 2012년 까지 될 리가 없다!"는 발언을 하여, 김정일이 어디 한 번 보자면서 의도적으로 2012년 까지 처형을 늦추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김정일이 내기에서 졌지만 간부는 처형되었다고.(...)#

3 총평

결국 김씨 왕조가 세운건 강성대국 맞다: 僵醒襶國( : 쓰러질 강,  : 깰 성,  : 어리석을 대,  : 나라 국)이라서 그렇지...
  1. 제5공화국은 '선진조국'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둘 다 독재정권이 경제발전을 기치로 내건 슬로건이라는 점에서는 극과 극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남쪽은 선진국 이뤄냈잖아…
  2. 고난의 행군은 1994년 제 3차 7개년 계획의 실패 선언과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정일의 유훈 통치 기간에 제시되며 출발했으나, 공식적인 종결 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와 완전히 대비되는 강성대국론이 제창되면서 사실상의 종결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상태이며, 그 종결 시점에 대해서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3.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서 이러한 사태가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대국(주로 소련에 대한 비판)에 의존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침투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현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어쨌건 북한은 이를 주체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도구로 삼아 자신들이 '낡은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넘어서 '주체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건립에 성공한 '사회주의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어째 명나라 멸망 후 스스로를 '중화'의 후예로 자처했던 조선 시대 소중화사상과 겹쳐 보인다?
  4. 북한이 달성했다고 주장하던 소위 민족자립경제는 실제로는 소련이 국제시세의 절반 이하인 우호가격으로 공급하던 석유와 원자재에 기반한 것이었다. 구소련이 1980년대말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북에 대한 지원을 줄이자, 북한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남북경협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5. 실제 북미협상이나 남북경협 때마다 북이 항상 요구한게 1순위-석유, 2순위-화학비료였다.
  6. 이 때문에 북한은 감자옥수수 대신 보급하려 애쓰고 있다고 한다.
  7. 남북한 모두 전쟁통에 일제강점기 시절 건설된 공업시설과 인프라가 수풍댐같은 일부를 제외하곤 모조리 박살났다. 다만 북한은 남한과 달리 예전부터 공업기반이라도 갖춰져있었기에 그런것조차 없던 남한보다 전후복구가 빠르게 이뤄질 순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공산권국가들의 원조나 지원도 한몫한바가 크지만...
  8. 1985년 국토통일원에서 발간한 '북한 대학생의 생활'에 실린 김일성의 멸칭으로 여기서 마두는 마적단 두목을 뜻한다. 1960년대 원산의 한 농업대학에서 발견된 낙서에 김일성을 이렇게 지칭한 것에서 유래했다. 김일성은 1932년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한 이후 계속 항일유격활동을 해왔었으므로 실제 마적단 출신이라서 이런 호칭이 붙은 거라기 보다는 와전된 소문에 기반을 둔 것이거나 그의 크고 아름다운 병크들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9. 1946년 11월부터는 건국정신총동원운동이, 1950년대에는 천리마 운동이, 1960년대에는 청산리 운동과 대안 사업 체계 보급이, 1970년대에는 3대 혁명 소조 운동 등이 있었다. 이는 사회주의 사상의 교육 및 당원의 확대와 함께 이루어져 북한은 사회주의권에서도 독특할 정도로 당원의 비율이 높았고 나름대로 소위 '노멘클라투라(당관료)' 계층의 전횡은 막을 수 있었다. 다만 그 결과물이 우상화될 정도로 수령의 비중이 높아진 유일 사상 체계라는 점은...
  10. 여기에 북한이 막대한 군인과 대학생을 동원하는 건 덤. 물론 북한은 3대 혁명 소조 운동 등에서 대학생을 대대적으로 동원한 바도 있었고, 앞서 말했듯 군인 동원은 이미 이념적으로 뒷받침될 정도라는 점은 주지해둔다. 애초에 김정일도 대학 시절부터 학생 동원 운동을 주도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1. 멀리서 찍은 사진을 봐도 아예 위층과 아래층의 기둥 위치(…)와 굵기(…)가 다를 정도다.
  12. 그나마 김정은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북한이 극단적인 독재 체제인 탓에 김정은을 몰아내는 것 자체가 대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김정은이 무력화되더라도, 소위 '백두혈통'의 상징성 때문에 북한 권력층이 김정은을 몰아내는 것은 60여 년 동안 이미 김씨 가계로 구성된 북한 체제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지워내야 하는 부담이 있다. 김정은이 갖는 이 상징성 탓에 어찌되었건 3대 세습이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만,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13. 인민들이 아무리 배를 곯고 있어도 매년 신년사설에서 강성대국을 열겠다고 외쳤던 것과는 상이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