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
小中華. 말 그대로 '작은 중국.' 버금가는 문명의 중신. 정통 한족 국가인 명나라가 망한 이후 주변국들에서 중화는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사상. 단정적으로 말하면 말하면 정신승리법이지만 이걸 단순히 한심한 정신승리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은 내용이므로 신중하게 접근하자. 쉽게 말해 1등이 죽었으니 이제 내가 1등이라능을 기본으로 하는 사상이다.
원래 소중화라는 말 자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듯이 중국 다음의 문명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소중화'라는 말은 중화를 가장 잘 본받는 모화국가라는 뜻으로, 한족의 중화제국을 가리키는 표현은 아니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명이 망한 이후에는 '명이 망했으니 우리가 제일의 중화국가이다'로 바뀌게 된다. 이를 구별하여 조선 후기의 '조선이야말로 중화의 정통 계승자'라는 사상을 특별히 '조선중화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런 소중화 의식은 중국 주변의 한국,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는 즉 중화 문명이라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핵심적이고 포괄적인 틀에 소속함을 표명함으로서 비단 내수용 정통성과 권위 뿐만 아니라 대외 관계에서도 이점을 제공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였다.
명나라가 망한 후에 '청나라는 제대로 된 정통 중화왕조가 아니니 우리가 중화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다. 중요한 건 명나라 이전에도 중국대륙에 기마민족 국가가 계속 들어섰었는데 그 때는 소중화 논란이 생기지 않았는데 첫째로는 고려의 원간섭기는 내정간섭이 너무 심해 내부에서 소중화사상이 싹틀 여지도 없었고, 통일신라나 고려는 각각 나당전쟁과 여요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해동천자 운운하며 국뽕에 빠졌던 반면 조선은 병자호란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정신승리가 간절했다. 둘째로 동아시아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대략 송나라 때 정도부터 구체화되었기 때문. 그래서 민족주의 성향이 뚜렷해진 명나라, 청나라 시대 때 소중화라는 개념과 민족주의가 섞인 논란이 생긴 것.
어떻게 보면 외왕내제에서 더 나가버렸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부터 외왕내제를 실시하고 근대무렵에 소중화사상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은 중화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중화문명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 조공과 책봉은 그저 외교적 수사였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중화 문명'이란게 송대 이후로는 단순히 중원이라는 지정학적 대상에 구속 된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권 전반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으로 진화 했다. 그런만큼 물리적 현실로서의 정치적 주권과 포괄적인 문명적 정체성으로서의 중화 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적 관점 처럼 서로 배제하고 대비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유럽의 제3의 로마 비교해 볼만 하다.
2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가진 사상이다. '조선 중화주의' 라고도 표현한다.
기본적으로 중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에서 중국황제의 명문을 무시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성리학만 특별히 명분을 중시하는 게 아니다. 명분이라는 말은 차라리 원칙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게 오해가 없다.
조선이 명을 대국으로 모신 것은 단순히 명분타령 때문만이 아니라 현실적 국력이나 문화적 수준 때문이다. 당시 만주족은 그냥 숲에서 사냥하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들과는 교류 정도를 유지하는 교린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국력이 쇠퇴하면서 만주족(여진족)의 후금, 이후에는 청이 되는 나라가 부상한 것. 새로 조선의 왕이 된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통해 후금과 명, 그리고 조선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광해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실리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인 북인들이 소수파였고, 단순히 명분과 실리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까지는 인구가 1억 명이 넘는 명나라가 100만 정도되는 만주족에게 멸망당할 거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실제로 명나라가 멸망한 건 내부 붕괴 때문이지 만주족에게 멸망당한 건 아니다.
결국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과 북인파를 축출한 후 인조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면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항복,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청에게 굴복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사실 그 앞의 상황이 어찌됐든 간에 우리 왕이 적국에게 치욕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상황. 이건 성리학자의 명분론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당시 조선사람들은 광해군이든 화친파든 다 성리학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노론의 거두인 우암 송시열이 북벌을 외치면서 제기된 것이 소중화론. 중국의 정통 왕조인 명을 계승한 것은 오랑캐인 청이 아니라, 조선이다란 논리다. 이는 송시열의 유명으로 제자들이 만동묘를 세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동묘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즉, 이제 중원에서 중국이 파괴되고 오랑캐가 들어섰지만, 그들은 정통이 아니며 조선이 중화문명의 전통을 이었다는 선언이다.
효종 때의 북벌론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우리가 황제되자"가 아니라 '중화에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의 나라를 회복시켜주자'는 것이었다.
북벌이 사그라든 이후에도 청나라를 오랑캐 취급하는 경향은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에 방문하는 사신을 명대에는 '조천(朝天)'(황제에게 조회하러 간다)을 썼지만 청대에는 '연행(燕行)'(연경(북경)에 간다)으로 바꾼 것. 또한 공문서에서도 청은 피국(彼國), 즉 '저쪽 나라'정도로 지칭되었다.
이 이유 때문에 명대에 파견한 사신을 조천사라고 부르고, 청대에 파견한 사신을 연행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더 훌륭한 치세를 보여주게 되면서 소장학파에서는 북학(청을 배우자)이 나타나게 된다. 박지원도 "청나라가 들어섰다고 해서 중국대륙이 야만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며, 중화문명은 그대로 남아있다"라고 평가했다. 즉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는 것은 오랑캐(만주족)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중화 문명을 배우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소중화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동아시아에서 중화문명은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의 소중화사상과 사대주의가 충돌한다는 식의 논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명을 섬기고 명의 문물이나 제도 사상 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대주의라면, 조선의 소중화사상은 명이 멸망한 뒤에 자국이 곧 명의 후계자라고 내부적으로 주장하고, 오랑캐(청나라)에게 외형적으로는 굴종할 지라도 그들을 중화로써 인정하지는 않겠다는 일종의 정신승리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1번에서는 정신승리라는 용어에 대해 신중히 접근하자고 했는데 말이 그렇다는거지 뭐
이러한 조선의 소중화사상의 문제는 청나라에 대한 외교보다도 조선 내부의 문화적 변화에 있다. 병자호란 이후 소중화주의가 퍼지면서 주자가 설정한 유교적 의례 등을 교조적으로 지키려 하는 경향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호란 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 멸망 이후 중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조선 내 자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나 국문학의 주체성이 보여진 점 등이 그러하다. 게다가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발전과 결합하여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가 더욱 강조되는 경향이 보였다.
결국 조선시대에서 소중화는 중화=문명이라는 인식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실학자들 또한 그 연장선 상에서 경세를 논의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이 실학자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과 방법론을 논의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공부하고 관직에 진출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성리학적 질서 안에서 새로운 기술과 현재의 폐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했다.
물론 명과 청이 교체된 시기에 명나라의 복수 운운하며 정치공작을 펼친 인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연암 박지원 같은 사람은 허생전 뒷부분에서 대차게 깐 것.
이런 이 대장의 말을 들은 허생은 크게 노하여, "뭐야!? 명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놈이 할 말이 그것뿐이냐? 상투를 트는 건 본래 오랑캐의 풍속이며 흰 옷은 상을 치를 때나 입는 옷이 아니더냐? 바야흐로 대륙을 정벌하겠다면서 그까짓 꼴같잖은 예의범절이나 따지다니 이게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할 말이더냐! 너같은 놈은 마땅히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칼을 집어 대장의 목을 베려고 들었다. |
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은 이 사상을 기반으로 영조에게 칭제하자는 상소를 올렸고 특히 한진원은 아예 중국에 나아가 천하를 소유해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
루리웹에 소중화를 주장하던 신하들의 정신상태를 매우 잘 보여주는 만화가 올라와 있다.
2.1 문화대혁명 이후 대한민국
이랬던 소중화 사상이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이후로는 현실이 되었다. 유교 관련 서적이 중국에 없어서 한국에 남아있는 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라가고, 중국에서도 전통 제례의식을 배우러 한국에 온다고 하니 더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중화 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므로 소중화가 실현되었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한 측면이 있다. 격동의 두 세기 동안 우리도 많이 바뀌었기에
3 일본
일본도 다른 주변국들처럼 명청교체 이후 중화를 자신들이 계승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병자호란 이후 초청된 조선 통신사에게 대놓고 오랑캐한테 졌다고 비웃었던 적도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몽골 침략을 생각하면서 조선을 통해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보를 모으며 벌벌 떨었지만... 이러한 일본식 소중화사상은 메이지 유신 이후 탈아입구를 내세우며 주변국들을 자신들이 '문명화'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실제로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에게 한국침략은 이러한 소중화주의의 연장선으로 여겨지며, 타국으로 하여금 조선은 일본의 나라였고, 국내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사대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부족과 더불어 동아시아 3개국의 미묘한 실용외교와 명분외교간의 괴리가 부른 어처구니 없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건 뭐지?
4 중화민국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치했어도 중화사상은 살아있어 한족이 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 하곤 다르고 오히려 청나라를 한족을 탄압하는 압제자로 보았다.[1] 쑨원은 아예 혁명적 기치를 멸만흥한 으로 정했고 청나라가 1912년에 멸망해 중화민국이 세워졌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난징 에 있는 명 효릉[2][3] 에 참배해 한족의 국가를 회복했다고 널리 알린 것 이다. 이름부터 中華民國 인데다 쑨원 사후 국민당의 권력자로 등극한 장제스는 북벌을 통해 군벌들을 정벌하거나 흡수, 멸망 전 청나라의 영토를 그대로 소유하는 중화민국 을 세웠다.[4]
하지만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국부천대 로 이어져 중화민국은 대만 섬 에 갇히게 된다. 국부천대 도중 북경과 중국대륙 곳곳에 있던 유물들을 긁어모아 미국이 군인과 피난민 실으라고 지원한 수송선들에 전부 채워넣어 대만에 옮겨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했다. 그 후 공산화 된 대륙에서 미친듯한 반달리즘이 벌어 질 때 대만의 중화민국은 역으로 중화문명부흥운동 을 펼쳐 자신들이 유일한 중화문명의 적통 이라고 주장했다. 유교문화와 전통이 아직 건재한 대한민국과 더불어 대만도 과거 한족의 문화를 잘 간직 한 편.
- ↑ 실제로 태평천국운동 때 명나라 부흥을 꿈꾸는 지하조직인 천지회(天地會)가 상하이를 점령하고 대명(大明)태평천국 이라는 정부를 세워 홍수전과 제휴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 ↑ 명 태조 주원장의 능묘.
- ↑ 쑨원은 1925년에 북경에서 죽고 북경 교외 벽운사 란 절에 안장되었지만 장제스가 북벌에 성공 한 이후 수도인 난징으로 유해가 옮겨져 명 효릉 바로 옆에 안장되었다. 현재 중산릉 이라 불리는 이곳은 한족이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국가를 세운 인물이 묻혀있다는 점 에서 효릉과 같지만 관심도와 관광객 수 에서 효릉보다 넘사(...)로 많다고 한다. 오히려 중산릉에 방문 한 김에 효릉도 같이 볼 정도. 참고로 릉(陵)이란 단어는 황제의 무덤에 쓰이는데 이를보면 쑨원이 중화권 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 ↑ 하지만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던 곳은 수도인 난징과 강소, 강서, 절강, 안휘 등 주변 지역 뿐 이었고 나머진 흡수된 군벌들이 자치적 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티베트와 신강은 명목상 관리만 파견했지 독립국 처럼 행동했고 몽골에는 아예 독립된 공산국가가 세워졌다. 참고로 현 대만은 몽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중화민국/미수복지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