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련택견

일반적으로,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택견을 의미한다. 택견이라는 기예가 개인에게 국한된 특정한 기예를 의미한다면 결련택견은 그 택견을 하는 방식이 단체전으로 승부를 가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체전이며 이긴 사람이 질 때까지 계속 할 수 있다는 특성이 있으며 4~5번의 승리 후에는 들어가 쉴 수 있다는 구전이 있다.

현재 중요 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된 택견에는 이것을 '결연택견' 이라 하여 결연하게 하는 택견, 즉 싸움수까지 포함하는 택견이라고 소개하는데, 택견 주요 3단체 중 신한승 택견을 계승하는 한국택견협회를 제외한 나머지 두 단체, 즉 대한택견연맹결련택견협회는 이를 신한승의 착각으로 간주한다.

이들 단체에서 '결련(결연)택견=쌈수택견'설을 부정하는 근거는, 국어사전을 찾아봐도 결련택견은 마을과 마을간, 갑동과 을동이 서로 편을 나눠 하는 택견인 단체전 택견 경기를 의미하며, 대한택견연맹(구 대한택견협회)가 문화재 관리국에 직접 클레임을 넣어 결련택견은 결연하게 하는 택견이 아니라 사전에 나온대로 단체전 택견이 맞다는 답을 얻어냈다는 것이다.

결련택견에 대한 신한승의 설명이 오류라는 주장에 대한 의문점

양 단체에서 "결련택견은 쌈수를 포함한 택견"이라는 신한승의 설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결정적인 근거로 '대한택견협회 측이 문화재관리국에 문의해서 그것이 오류라는 답신을 받은 사실'을 드는 것부터가 상당히 의아한 면이 있다. 상식적으로 택견 용어에 대한 전문성은 택견 단체에 있지 정부문화재 담당 부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택견협회 측에서 그러한 문의를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에게 신한승의 그러한 주장이 오류임을 밝힐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택견협회에서 송덕기의 음성을 녹취한 자료들을 많이 가지고 있음은 택견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대한택견협회의 관련자들이 그러한 녹취 자료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라도 신한승의 저런 설과 완전히 모순되는 발언을 발견했다면 굳이 전문성도 없는 문화재관리국에 문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1985년에 이보형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이 송덕기를 인터뷰영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타난다.

이보형(이하 '이'): 그 다음에, 그 임호 선생님이 택견 하실 적에 그 당시 마을끼리 하는 거 말고, 또 이렇게 호신술로도 이 택견을 했는지요?

송덕기(이하 '송'): 예, 그건 '결련택견'이라고 하지요.

이: 예, 결련 택견. 그러면 마을로서 이렇게 민속놀이로 하는 택견이 있고, 이제 결련택견으로, 호신술로 하는 택견이 있군요?
송: 예, 예, 막 찹니다, 이렇게.

이: 예, 그러면 그 임호 선생님이 하는 거는 그 마을끼리 하는 것도 있고, 그 결련택견도 두 가지를 다 하셨나요?
송: 네.

이: 그럼 결련택견은 주로 어느 분들이 많이 했나요?
송: 그거 중인들이죠.

이: 네, 중인들 요새로 하면 그, 에…
송: 깡패.

이: 무술을 하는 분들…
송: 깡패 짓이라고 하죠, 깡패.

이: 무결(武訣)을 하는 분들이 주로 인제 했군요.
송: 예.

이: 그 밖에 인제 그, 에… 그 별기군이라든가 이런 별순검과 같은, 이런 저… 무술을 하는 그런 관직 분들도 했습니까?
송: 했어요.

이: 네, 에… 그러고요, 그러면 인제 그… 옛날에… 그 마을끼리 하는 거하고 또 무술로 하는 결련 택견이 이 두 가지가 있었겠군요.

물론 송덕기의 이와 같은 증언에 대해 대한택견협회나 결련택견협회의 관련자들은, 그것이 인터뷰어의 유도에 의한 실언이라는 식으로 가치를 절하하지만, 그에 대한 근거는 전무하다. 게다가 당시 기자였던 전 문화관광부 장관 김명곤이 1977년에 작성한 택견 관련 기사에서도, 아래대의 택견꾼이었던 김홍식이라는 노인이 송덕기와 비슷한 증언을 남긴 것이 확인된다.

김 홍식 노인은 세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스물 남짓한 젊은 시절에 태껸을 배웠다고 한다. 그때의 서울은 웃대와 아랫대가 엄격히 구별이 되어 있었고 문안과 문밖끼리도 구별이 엄했다고 하는데 웃대는 인왕산 아래 쪽 곧 대궐에 가까운 쪽을 일컫는 말이었고 아랫대는 청계천 건너 쪽이며 문안은 서울을 둘러싼 성문의 안 쪽이고 문밖은 그 바깥 쪽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웃대는 주로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도가 대단해서 이것이 늘 불만인 아랫대 젊은이들이 가끔 웃대의 젊은이들에게 시비를 건네는 수가 있었다. 그러면 웃대에서는 태껸꾼들을 모아 아랫대에 시합을 청하게 되어 서로 시합을 벌이는데 보통으로 시합을 할 때에는 "서기 태껸"이라고 해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지만 동네 사이의 감정이 나쁠 때에는 "결연 태껸"을 하는데 그것은 서로 겨루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도 살인죄로 치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 행하여지는 무서운 싸움이라고 한다. 결연 태껸을 할 때에 쓰던 기술은 잘못 쓰면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으로 전해져서 여간해서는 그 법을 배울 수 없었다고 한다.


김명곤,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 『뿌리 깊은 나무』 통권 제19호(1977년 9월),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이처럼 송덕기, 김홍식 두 택견꾼이, 결련택견이라는 용어에 대해, 한 사람은 '호신술로써 익히는 택견'이라는, 다른 한 사람은 '과격한 형태의 택견'이라는, 일맥상통하는 증언을 남긴 것이다. 택견에 대해 잘 아는 두 사람이, 택견에 대한 동일한 오류를 우연히 반복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또한 문화재관리국에 소속된 그 누구도 저 두 사람보다 조선 말에 통용된 택견 용어에 대해 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한승만 해도 송덕기에게 진득이 배우지 않아서 자신의 기술적 성취도는 높지 않았어도 어쨌든 전국의 택견—이나 그와 유사한 무술적 놀이—을 해 본 경험이 있는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던 사람이다.

그런 신한승의 말뜻 풀이가 조선 말에 택견을 실제로 해 본 두 사람의 증언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신한승의 ‘결련택견=쌈수택견’설은 착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한편 1930년대 출판된 조선어 사전에 그렇게 등재되어 있는 이상 결련택견에 ‘마을 간 대항전 형태의 택견’이라는 뜻이 있었음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련택견은,

1. 마을 간 대항전

2. 무술성이 강한 택견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조선 말의 마을 간 택견 대항전이라는 것이 흔히 상상하듯 친선을 도모하는 화기애애한 대동의 한마당이었던 것이 아니라 살벌한 싸움터에 가까웠으리라 본다면 그렇게 된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