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Isolationism
독일어: Isolationismus
프랑스어: Isolationnisme
1 개요
타국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개입을 꺼리는 외교정책. 시대에 따라 고립주의의 스펙트럼은 꽤나 다양한데, 전근대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쇄국정책과 같이 모든 분야에서 철두철미하게 타국과 교류를 일절 하지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고립주의의 의미가 다소 축소되어서 정치/군사적으로 자국의 이익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 한하여 각종 국제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개입을 하지 않는 외교노선을 지칭한다.[1]
2 사례
2.1 한국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이 가장 유명한 사례. 소수의 교류국을 제외하면 아예 외교관계조차 수립하지 않으며, 경제/문화적 교류까지 금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고립주의와는 그 양태가 무척 다르다.
최근에 불경기와 취업난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서 고립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2] 인터넷에 외국의 전쟁/기근에 관한 뉴스 또는 우리나라 정부/민간단체가 헤외에사 지원활동을 한다는 뉴스가 올라오면 자국민을 우선순위로 챙기라는 투의 댓글이 추천을 많이 받는다. 또한 현재 유럽을 들쑤시고 있는 난민문제와 관련되어서는 우리와 상관없으니 받아줘서는 안되고, 이미 들어온 사람도 다 추방해야 한다는 식의 제노포비아성 댓글이 추천을 많이 받는다. 사실 대한민국 정부 또한 6자회담에 참여하는 주요 교섭국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 외 국가에서 일어나는 분쟁등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발언이나 개입을 잘 안하는 편이다.[3]
2.2 북한
현존하는 최악의 쇄국 국가
그나마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다른 나라들은 과거에는 고립주의를 택했더라도 현대에는 고립주의 정책을 이미 폐기했거나 점점 개방적으로 가는 추세인데 반해 북한은 21세기인 지금도 고립주의를 넘어서 아예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국 자체도 엄격하게 제한될 뿐만 아니라 어찌어찌해서 북한에 들어간다고 해도 북한 일반인들과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고 오직 당국에서 허락한 곳만 다닐수 있으며 가이드를 빙자한 감시원이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외국인이라도 가차없이 억류하거나 노동교화형을 때린다. 게다가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것 뿐만 아니라 내부 주민들도 북한 밖으로 도망가지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으며 여행증제도로 주민의 왕래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이러니 외국에서는 북한을 가리켜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경이다.
2.3 일본
일본 역시 에도 막부 시절이었던 1641년부터 1853년까지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쇄국정책을 실시한 바가 있다. 물론 전통적인 교류국이었던 조선, 중국, 류큐 등지와는 간헐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데지마를 통해 서양인과도 접촉을 가지는 등[4] 철두철미하게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아니었다. 이후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에 의하여 강제로 개항되며 쇄국정책은 종료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의 인식은 꽤나 고립주의적이지만, 국가규모가 훨씬 큰 탓에 그럭저럭 갈라파고스화 된 상태에서도 굴러가는 편. 일본 정재계에 숨어있는 지난 제국주의 시대의 그림자 때문에 '정상국가화' '세계 진출' 등을 운운하며 미국을 따라 해외파병[5]을 열심히 하며 세력 확장에 힘을 쓴다. 국가나 대기업 스케일로 보자면 의외로 동남아 등지에 영향력이 매우 큰 편이다.[6]
2.4 중국
역대 왕조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변하기는 했지만, 가장 유명한 사례는 명나라. 초대황제였던 홍무제 때부터 아예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했을 정도.[7] 명나라 초기에는 환관 정화를 원정보내기도 했지만 정화의 원정 이후로는 나라의 문호를 걸어잠그고 고립주의를 취했다. 이후 청나라 역시도 큰 틀[8]에서는 명나라의 대외정책을 유지한다. 그리고 아편전쟁 이후 반 식민지화 크리
또한 전근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의 경험만을 가진 한국/일본과 달리, 중국은 현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를 외교노선으로 채택하기도 했는데 죽의 장막이 바로 그것. 죽의 장막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고립주의는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를 수립함과 동시에 채택됐으며,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며 절정에 달했다가, 1970년대 미국과의 핑퐁외교 및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을 거치면서 철폐된다. 오늘날에도 트위터나 페이스북 사용을 막는 걸 보면 아주 고립주의를 포기하진 않은 것 같기도 하다
2.5 영국
개요에 나와있는 현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를 채택한 최초의 사례.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은 유럽 대륙 내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등 사이에서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한 유럽 내부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노선을 천명해왔다. 소위 말하는 영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 바로 그것. 하지만 18~19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경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영국이 고립주의를 파기하는 경우 역시 빈번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의 제국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프랑스 동맹의 주축으로 활동한 것.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영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크림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유럽 대륙과는 거리를 두었다.
영국이 이렇게 고립주의를 채택한 이면에는 19세기 절정을 자랑하던 자신들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도 밑바탕[9]으로 하고 있었으나, 19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영국의 국력은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보어전쟁에서 보여준 졸전 이후 영국의 군사적 자신감은 크게 깎였으며, 유럽 대륙에서는 신생 독일 제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건함 경쟁이 보여주듯이 독일 제국은 공공연하게 영국을 찍어누르고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등극하겠다는 야심을 표출하였으며 이에 1904년 영국은 오랜 숙적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맺고 고립주의에서 탈피하고 연이는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야욕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국가간의 상호의존성이 깊어진 탓에 영국의 고립주의는 그 색채가 많이 옅어졌다. 그렇지만 '우리 대영제국은 대륙과는 별개라능'이라는 마인드가 워낙 뿌리 깊은 탓인지 여전히 유럽 내에서는 독자적인 길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와중에 윈스턴 처칠은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에게 했던 "대서양과 유럽 중에서 선택을 해야한다면 우리는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다."[10]라는 명언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전후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 공동체(EC)에도 오랜 기간을 가입을 꺼리다가 1973년에야 가입했다. EC에 가입한 이후에도 회의적인 태도는 여전해서, 마가렛 대처는 EC의 기능 확대에 대한 조소를 공공연히 표출하기도 했다.[11] 유로화를 도입한 이후에도 영국이 꿋꿋이 자신들의 파운드화를 고수하고 있는 것 역시 유명한 사례.
그리고 2016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라는 초대형 이슈를 국민투표에 붙여 영국의 EU 탈퇴가 확정되었다.
2.6 미국
- 관련 항목 : 먼로 독트린
미국 역시 건국 이후 한 세기 넘게 고립주의를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노선으로 천명했던 역사가 있다. 다만 먼로 독트린 항목에서 나와있듯이 이는 국가적인 단위의 고립주의는 아니고 '아메리카 대륙은 우리 미국의 세력권이니 유럽은 신경꺼라. 대신에 우리도 유럽의 일에는 신경 안쓴다.'라는 방침이었다. 이후 1917년까지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일관적으로 채택하였으나,[12] 1차대전 당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치머만 전보 사건을 겪으면서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면서 그 명맥이 중단된다.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우드로 윌슨은 국제연맹을 창설하였고, 미국은 고립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에서 국제연맹 가입이 부결되면서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도했으면서도 막상 가입은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 채로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한다.
그 후 2차대전 초기까지도 미국 내에서는 유럽의 전쟁에 개입할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더 컸지만 눈치없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미국의 참전을 이끈다. 2차대전의 승전 이후 미국의 외교노선은 180도 뒤집어져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변모하는데, 그 이유야 당연히 소련과 벌인 냉전 때문. 세계 어느 지역이건간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그리스 내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곳곳의 분쟁에 깊숙이 개입한다. 물론 이 와중에도 오랜 고립주의의 역사탓인지 애치슨 라인과 같은 뻘짓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최근 수십년간 미국의 전반적인 외교노선은 활발한 개입주의였다. 냉전이 자신들의 승리로 종결된 이후로는 이념적인 문제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활발히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걸프전.
다만 아들 부시의 뻘짓 이후 미국 내에서는 '이제 세계의 경찰 노릇 그만하고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자'라는 신고립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공약으로 내걸어 재미를 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양반.
2.7 스위스
스위스는 중세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철저하게 외교적 중립 노선을 취하여 특정 국가와 동맹하지 않는 고립주의 정책을 썼다. 대표적으로 오늘날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참가하고 있는 UN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가 2002년에야 뒤늦게 UN에 가입한다. 사실 대한민국도 유엔 가입이 매우 늦은 편인데(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 한국은 유엔에 가입하고 싶었지만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가입을 못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스위스는 UN에서 제발 좀 가입하라고 하는걸 거부하고 버팅기고 있다가 겨우 뒤늦게 가입한 것으로 한국과는 상황이 정 반대였다. 그나마 UN에는 마지못해 가입했지만 스위스는 유럽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연합에는 가입을 거부하고 있고 당연히 유로화도 도입하지 않고 여전히 스위스 프랑을 쓰고 있다.- ↑ 즉 보호무역과는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 ↑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도 비슷한 사유로 인해 고립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 ↑ 끽해야 평화유지군보내서 치안/구호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국회를 통해서 허울좋은 결의안이나 의결하지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러시아처럼 전투병력을 보내서 싸우진 않는다.
- ↑ 1년에 한번씩 쇼군이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접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일반인들이야 네덜란드 상인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 ↑ 엄밀히 이론상으론 군병력이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 ↑ 하지만 이 쪽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일본에게 침략,점령 받았던 국가들이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과거사를 반성,사과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거나 할때면 절대 일본을 편 들지 않고 비난한다.
- ↑ 아이러니하지만 해금정책 때문에 오히려 왜구들은 견제를 덜 받게 됐고, 그 덕에 더더욱 날뛰게 된다(...).
- ↑ 한국에서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해 청 시기 베이징에서 활동한 선교사들 때문인지 청나라가 굉장히 활발히 대외교역을 한 것 같은 인식을 갖고 있는데,
물론 조선보다야 훨씬 활발했지만그렇다고 당나라나 원나라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 ↑ 즉, '혹시라도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험하는 국가가 등장한다면 언제라도 개입해서 박살내주겠다'라는 마인드.
- ↑ 미국과 프랑스 중에 선택해야 되면 영국은 미국을 편 들 것이다라는 의미.
부시의 푸들??? - ↑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보수당의 내분으로 대처는 실각하고 만다. 물론 대처가 실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인두세 도입이었지만, EC 기능 확대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출발점.
- ↑ 이때까지 미국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이 기간동안 미국은 유럽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서부로 진출하면서 멕시코와 전쟁을 치렀고 이후 하와이를 흡수했으며 더 나아가 일본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이 기간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하는지는 개개인이 판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