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 교향곡 제15번 A장조 작품 141
(Sinfonie Nr.15 A-dur op.141/Symphony no.15 in A major, op.141)
목차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열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 11번과 12번이 혁명을 그린 표제음악 스타일이었고, 13번과 14번이 성악을 오랜만에 도입하면서 홀로코스트와 죽음이라는 도전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면, 이 곡에서는 다시금 고전적인 절대음악 스타일의 교향곡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곡 전체는 마지막 교향곡으로 흔히 기대하는 대단원의 막이라든가, 죽음을 앞둔 비장함 같은 느낌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가벼운 고전주의 스타일이고 자기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서까지 이런저런 악상들을 끌어와 인용하면서 꽤 흥미로운 패러디까지 선보이고 있어서, 곡을 쓸 당시 건강악화로 고생하고 있었던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은 쉽사리 상상하기 힘들 정도.
1971년 여름에 소련음악가동맹 산하 작곡가 조합의 공동 다차(별장)가 있는 레닌그라드 근교의 레피노에서 요양하던 중에 작곡했는데, 완성에 걸린 시간은 불과 두 달 남짓이었다.
2 곡의 형태
1번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4악장제를 취하고 있는데, 다만 3악장과 4악장을 그대로 잇는 아이디어를 썼던 1번과 달리 여기서는 중간 악장들인 2악장과 3악장을 이어버리고 있는 점이 다르다.
2.1 1악장(Allgretto)
글로켄슈필이 약하게 두 번 치면서 플루트가 악기 특유의 민첩함과 경쾌함을 살린 솔로를 연주하며 시작한다. 이렇게 제시된 악상을 조금씩 변화시키던 중 트럼펫이 약하게 기상나팔 스타일 악구를 연주하면서 끼어드는데, 이 악구는 갑자기 로시니의 오페라 '기욤 텔(윌리엄 텔)' 서곡 후반부의 유명한 갈롭풍 주제로 패러디되어 나온다. 결코 길지 않지만, 이 악장 곳곳에 장난스럽게 나와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플루트 독주의 악상과 로시니 패러디가 얽히면서 발전부격 대목에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데, 여기서는 현 파트가 저마다 다른 리듬을 연주하면서 복잡하게 얽히는 구절도 있다. 제1바이올린이 8분음표,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셋잇단 4분음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다섯잇단 4분음표 식으로 겹쳐지면서 완전히 엇나가는 박자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 기법은 2번에서 보여준 각 파트가 극단적으로 따로 노는 실험적인 대목을 상기시킨다.
전체적으로 각 악기들을 솔로 혹은 중주 형태로 짝지워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1번에서 주로 보여주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거기에 갖가지 타악기들이 양념 이상으로 나와서, 쇼스타코비치가 말년의 교향곡들에 보여준 타악기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늠케 한다.
2.2 2악장(Adagio-Largo-Adagio-Largo)
금관이 무겁게 연주하는 단조의 코랄(Choral. 기독교에서 부르는 찬송가) 스타일 악상이 제시된다. 거기에 이어 첼로 독주가 마치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을 연상시키는 조성이 희박한 솔로를 연주한다. 금관과 첼로의 대목은 몇 차례 더 반복되고, 이어 고음 목관악기들과 금관악기들이 여리게 주고받는 불협화음이 연주되는 이행부를 거쳐 더 느려진 템포의 장송행진곡풍 대목으로 들어간다.
테너 트롬본이 베이스 트롬본과 튜바의 묵직한 화음을 배경으로 우울한 느낌의 솔로를 연주하고, 무거운 느낌을 바이올린 독주가 이어받아 마무리지을 즈음 목관악기와 금관악기의 이행부 악상이 갑툭튀하더니 관현악 총주가 크게 튀어나온다. 이렇게 비통한 분위기가 조성되나 싶지만, 이것도 얼마 안되어 다시 사그라들고 목관과 금관의 불협화음 주고받기가 다시금 나온다.
금관이 연주했던 코랄 스타일 악상을 이번에는 현이 받아 더 여리게 연주하면서 재현부 느낌의 후반부로 들어가는데, 다만 첼로 독주가 응답하듯 연주한 무조 대목은 생략되어 있다. 대신 첼레스타, 비브라폰, 바이올린이 첼로의 악상을 파편화시켜 암시만 하고 있고, 콘트라베이스의 솔로가 이어진 뒤 저음 금관악기들과 약음시킨 팀파니의 연주가 마무리한다. 팀파니 리듬이 끝나갈 즈음 갑자기 바순 듀엣이 온음 네 음을 강하게 연주한다.
2.3 3악장(Allegretto)
일종의 스케르초로 볼 수 있으며, 클라리넷 솔로가 연주하는 신랄한 주제로 시작한다. 중간부에서는 바이올린 솔로가 연주하는 두 번째 주제를 소재로 진행하며, 목관악기가 받아서 연주한다. 이어 초반부가 반복될 때는 클라리넷 대신 현악 파트로 악기 편성을 바꿔서 다소 작은 음량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이 부분도 초반부의 충실한 재현으로 볼 수는 없다. 막바지로 가면서 바이올린, 트럼펫, 특유의 글리산도로 들어오는 트롬본 등의 약간 아리송한 이행부, 클라리넷의 듀엣에 이어 목관, 현악, 약음기를 낀 트럼펫의 연주를 거쳐 캐스터네츠와 우드블록, 실로폰 등 고음 타악기들이 깔짝대는 듯한 극히 짧은 종결부로 마무리된다.
2.4 4악장(Adagio-Allegretto-Adagio-Allegretto)
1악장 처럼 패러디 기법이 특히 많이 쓰이는데, 이번에는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 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 초반부를 인용하고 있다. 낮은 금관들의 연주와 팀파니의 약하게 새겨주는 리듬까지 아주 노골적인데, 거기에 이어서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첫 번째 주제의 초반부는 또 같은 작곡가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1막 전주곡의 유명한 초반부를 패러디하고 있다.
하지만 그 초반부 빼면 전체적인 골격은 오히려 단정한 고전풍이라서, 바그너풍의 후기 낭만파 어법으로 진행될 것을 기대하는 청중들의 뒷통수를 제대로 갈기고 있다. 오보에와 바순이 바그너 동기의 일부를 변형시킨 이행부를 연주하면 다시 장송 행진곡이 단편적으로 인용되고, 계속 새겨지는 팀파니 리듬을 배경으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새로운 주제를 도입한다.
하지만 이 주제는 주제라기 보다는 8번 4악장에서 보여준 파사칼리아(Passacaglia) 스타일의 변주곡을 위한 일종의 '리프' 이며, 이것이 다른 파트에 인계되며 계속 이어지는 밑바탕에서 변주가 행해진다. 그리고 해당 피치카토 주제는 쇤베르크 등 신 빈 악파류의 12음 기법을 응용해 옥타브 내의 거의 모든 반음들을 고르게 배분하도록 계산되어 있기도 하다.
변주가 고조되면서 팀파니와 금관악기들이 강한 억양으로 주제를 연주하면서 클라이맥스가 형성되는데, 그리 강렬하거나 큰 규모는 아니다. 소리가 잦아들면 현악기들의 피치카토로 바그너 동기의 변형이 잠시 연주되고, 이어 바그너 인용구들이 다소 변형되어 연주되면서 재현부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이 부분도 고전적인 의미의 재현부라고 볼 수는 없는데, 이 악장 외에 2악장에서 들렸던 목관악기와 금관악기의 불협화음 문답구나 팀파니가 연주하는 파사칼리아 리프, 1악장 초반부 주제를 피콜로가 변형해 연주하는 악구까지 전체 교향곡의 주요 악상을 상기시키는 단편들이 띄엄띄엄 선보여진다. 마지막에는 약하고 길게 끄는 현의 A장조 으뜸화음과 타악기들의 연주만이 희미하게 남아 끝난다.
3 악기 편성
악기 편성은 피콜로/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튜바/팀파니/베이스드럼/스네어드럼/톰톰(고음)/심벌즈/탐탐/트라이앵글/탬버린/캐스터네츠/채찍/우드블록/실로폰/글로켄슈필/비브라폰/첼레스타/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관악기가 플루트족만 세 대 쓰는 2관편성으로 현저히 줄어든 대신, 13종의 타악기를 쓰는 등 타악기가 꽤 여러 종류 요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곡에 걸쳐 타악기의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클라이맥스에 대량으로 때려박는 물량 공세는 거의 없고 개별 음색의 대비 효과 면에서 많이 응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
4 초연과 출판
1972년 1월 8일에 모스크바에서 아들인 지휘자 막심 쇼스타코비치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방송 교향악단이 초연했고, 그 해 일본과 미국, 동독 등지에서도 공연되었다. 악보도 같은 해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간행되었다.
5 평가
하지만 이 곡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은 '뭥미?' 의 연속이었다. 예전처럼 보여주던 뻥뻥 터지는 클라이맥스도, 그렇다고 무거운 감정의 표출도 거의 없는 터라 어떤 '임팩트' 를 기대한 이들은 실망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타 작곡가 작품의 노골적인 패러디에 당혹스러워한 이들도 있었고, 반대로 여러 주제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예전 작품들의 아이디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용에 대한 견해도 꽤 여러 가지가 난무하고 있는데, 로시니의 경우 쇼스타코비치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갔던 장난감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오르골에서 멜로디를 듣고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했다는 설이 있다. 바그너의 경우에도 자신의 생애 중반을 쥐락펴락했던 스탈린이 은근히 애호가였다는 점과 연관성이 있다거나, 악극의 주인공 지크프리트의 장례를 자신의 죽음과 빗대었다거나 하는 온갖 설들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늘 자작곡에 대해 말을 아낀 작곡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명확한 관점이나 설명도 하지 않았으니 진실은 저 너머에.
가벼우면서도 수수께끼같은 느낌 때문에, 스케일 크고 난해한 현악 4중주 14번을 완성한 뒤 다시 고전 양식 풍의 회귀 경향과 독특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16번을 마지막 완성작으로 남겼던 베토벤처럼 일종의 인생 회고 의미로 작곡한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패러디로 여겨지는 대목들을 곳곳에서 집어내는 이들에게 자주 먹히는 떡밥이기도 하다.
물론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으로는 마지막이 된 이 곡을 남기고도 약 4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이 곡이 정말 마지막일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죽기 직전 후속작으로 16번 교향곡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정황 증거도 있는 모양.
결국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이는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여정처럼, 마지막 교향곡도 굉장히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이후로 교향곡은 죽었다' 고 주장하던 이들까지 있었을 정도로 교향곡이라는 장르의 역사에서도 나름대로 큰 방점을 찍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물론 음악은 지구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므로 설레발은 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