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 교향곡 제14번 작품 135
(Sinfonie Nr.14 op.135/Symphony no.14, op.135)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열네 번째 교향곡. 딱 말전에 위치해 있는데, 역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들 중 가장 파격적이고 어찌 보면 젊은 날의 실험작들이었던 2번이나 3번보다도 더 전위적인 경향을 띄는 곡이다.
소련의 대표 신문 '프라우다' 의 1969년 4월 25일판에 실린 쇼스타코비치의 글에 의하면 이미 1960년대 초에 무소륵스키의 가곡들을 관현악 편곡하면서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작곡에 소요된 시간은 1969년 초부터 봄까지로 여겨진다. 생전에 쇼스타코비치는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와 '호반쉬나' 의 관현악 편곡을 보강한 신판을 작업하기도 했고, 시대를 앞선 냉철함과 강한 풍자성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물론 무소륵스키의 영향은 예전 작품들에도 많이 나타나 있지만, 이 곡에서는 특히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무소륵스키는 사실상 무신론자였고, 죽음의 순간에 종교나 신에게 귀의하기 보다는 죽음 그 자체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실주의 논리에 따라 예술은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긍정의 힘과 낙관주의를 지녀야 한다는 보수적인 집권층의 논리에 이 곡은 상당히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작품으로 비쳐졌다. 그 때문에 소련 당국과 쇼스타코비치의 대립각이 거의 마지막으로 세워진 곡으로도 유명하며, 이 곡을 쇼스타코비치의 최후 걸작으로 치는 이들도 있다.
죽음이 중심 주제여서 그런지 '죽음의 노래' 혹은 '죽은 자의 노래' 같은 제목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쇼스타코비치 자신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출판 악보에도 각 악장의 부제들을 제외하고 곡을 가리키는 표제는 전혀 인쇄되어 있지 않으니 주의.
2 곡의 형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들 중 가장 많은 악장들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려 11개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작인 13번처럼 성악이 도입되어 있고, 각 악장마다 불리워지는 노래의 시 제목이 붙어 있다. 두 사람의 독창자들은 따로 노래하기도 하고 한 곡에서 같이 노래하기도 하지만, 정말 중창의 형태로 부르는 대목은 마지막 악장 뿐이다.
사용한 시들은 러시아 작가의 것도 있지만, 대부분 스페인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외국 작가들의 것을 러시아어로 번안해 사용하고 있다. 중심 조성이 없는 것도 독특한데, 물론 곳곳에 조성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지만 전체를 묶는 기본 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1악장의 제목은 라틴어로 '데 프로푼디스(De profundis. 깊은 곳에서)' 로 되어 있고, 스페인 내전 때 살해당한 시인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를 사용하고 있다. 바이올린이 느린 템포 속에서 아주 여리게 기본 악상을 켜는 가운데 베이스가 담담하지만 약간 우스꽝스럽게 노래하는데, 시의 내용도 죽음의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닌 죽음을 바라보는 신랄한 태도를 그리고 있다.
아주 짧게 쉰 뒤 바로 2악장으로 들어가는데, 1악장과 마찬가지로 로르카가 지은 '말라게냐(Malagueña)' 가 사용된다. 말라게냐는 스페인 남부 말라가 지방의 민속 춤곡으로, 갑자기 현악기들이 연주하는 춤곡 리듬으로 시작된다. 이어 소프라노가 꽤 격앙된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하며, 후반에는 캐스터네츠까지 더해져 꽤 흥분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의 내용은 1악장 것과 마찬가지로 일상에 늘 존재하는 죽음에 대한 관찰로 되어 있다.
말라게냐 리듬이 절정에 이를 즈음 갑자기 채찍 소리가 두 번 들리고, 여기서부터 '로렐라이(Loreley)' 라는 제목의 3악장이 시작된다. 프랑스 작가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같은 이름의 라인 강 유래 설화를 주제로 쓴 시를 쓰고 있는데, 초반에는 시에 특별히 대화체로 적힌 부분은 없지만 오페라의 레치타티보처럼 읊조리는 투로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번갈아 부른다.
신랄한 기악 이행부를 거쳐 잠시 템포가 느려지고, 소프라노가 마녀의 유혹을 나타내는 부분을 부드럽게 부른다. 이에 베이스가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분위기가 급변하는 식으로 오페라 풍의 전개를 취하고 있다. 후반부에는 첼로 독주가 등장하면서 바로 4악장에 진입한다.
'자살' 이라는 제목의 4악장 역시 아폴리네르의 시를 쓰고 있으며, 이후 8악장까지의 시도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다. 이전 악장 후반부부터 시작된 첼로 독주가 계속 이어지며, 그 위에서 소프라노가 자살한 이의 시점에서 부드럽게 노래를 부른다. 강한 대비를 이룬 3악장과 달리 굉장히 섬세한 대목이지만, 가사의 내용은 자살자의 영혼이 가진 설움과 우울함이 지배적이다.
아주 짧은 휴지를 거쳐 '조심스럽게' 라는 제목의 5악장으로 이어지는데, 실로폰이 특유의 깡마른 음색으로 솔로를 연주하고 나면 톰톰 세 벌이 상투적인 행진곡 리듬을 연주한다.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도 이에 맞춰 비교적 경쾌하고 신랄한 선율을 취하는데, 가사 내용은 오히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여인의 시선을 그리고 있다.
이어지는 6악장은 '부인, 보세요' 로 되어 있는데,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3악장에서처럼 대화창 형태로 노래를 주고 받는다. 베이스의 진지한 질문에 소프라노가 답하는 식인데, 소프라노의 대답은 뜬구름 잡는 식이거나 허탈함을 강하게 나타내는 웃음으로 귀결되어 신랄함과 비애감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바로 이어지는 7악장은 '라 상테에서' 인데, 라 상테는 파리에 있던 교도소 이름이다. 아폴리네르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일어난 미술품 도난 사건에 휘말려 1주일 동안 저기에 수감됐는데, 이 때의 경험을 살려 지은 시다. 5~6악장의 아이러니와 신랄함 대신 여기서는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 강하며, 성악은 베이스만 참가한다.
약간의 휴식 후 '콘스탄티노플의 술탄에게 보내는 자포로제 카자크들의 답장' 이라는 제목의 8악장으로 이어지는데, 이 교향곡에서 가장 빠르고 동적인 부분이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 4세에게 카자크들이 어그로를 가득 담은 편지를 보낸 일화를 각색한 시인데, 기악과 베이스 모두 날카롭고 독기 가득한 연주와 노래를 보여준다. 후반부에서는 바이올린들이 모두 제각기 갈라져 불협화음을 유발하는 전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기악의 거친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9악장으로 이어진다. 갑자기 분위기가 다시 무겁고 비통하게 가라앉고, 베이스가 강한 탄식조로 시를 읊듯이 노래한다. 제목은 '오 델비크, 델비크!' 이며, 발트 독일인 혈통의 러시아 시인 빌겔름 큐헬베케르의 시를 사용했다. 큐헬베케르는 1825년에 차르 니콜라이 1세의 폭정에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데카브리스트 파의 일원이었지만, 봉기가 실패한 뒤 종신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이 시는 친구인 안톤 델비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로, 유배당한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아주 잠깐 쉰 뒤 10악장으로 이어지며, 제목은 '시인의 죽음' 이다. 마지막 악장과 마찬가지로 독일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취했으며, 1악장 초반에 나왔던 바이올린의 희미한 연주가 다시 나오면서 소프라노가 죽은 시인의 모습을 묘사하는 담담한 노래를 부른다.
마지막 악장인 11악장은 '결말' 이며,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중창을 선보인다. 결국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타고나는 죽음의 위대함을 주장하는 시인데, 중창이 끝난 뒤 현악 파트의 점점 빨라지는 리듬으로 연주되는 불협화음으로 강렬하게 마무리된다.
성악 파트는 소프라노와 베이스의 독창으로 구성되는데, 묘사적인 대목이 많기 때문에 벨 칸토 식으로 미끈하게 부르면 별 소용이 없다. 대개 오페라 무대 등에서 잔뼈가 굵은 연기력 출중한 드라마틱 계열 가수들이 섭외된다.
기악 파트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들 중 가장 단촐한데, 현악 합주와 타악기 합주가 전부다. 다만 현악 합주는 일반적인 5부 편성이 아닌 4부 편성이 기본이며, 인원 수도 바이올린 10-비올라 4-첼로 3-콘트라베이스 2로 지정되어 있다. 콘트라베이스는 통상적인 4현 악기가 아닌, 저음의 C현이 추가된 5현 악기가 필요하다.
주자 세 명이 연주하는 타악기들의 구성도 독특한데, 캐스터네츠와 우드블록, 채찍, 톰톰 세 벌, 튜블러 벨, 비브라폰, 실로폰, 그리고 건반 악기지만 첼레스타도 들어간다.[1] 이 때문에 정규 관현악단 외에도 소규모 현악 합주단이 타악기 합주단과 합동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3 초연과 출판
1969년 9월 29일에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고, 독창자로 갈리나 비슈넵스카야와 마르크 레셰틴이 출연했다. 기악 연주는 루돌프 바르샤이 지휘의 모스크바 실내 관현악단이 맡았고, 며칠 뒤인 10월 6일에는 같은 연주진들에 의해 모스크바에서도 공연되었다. 모스크바 공연은 공식 연주회가 아닌 '공개 리허설' 형태로 진행된다고 공지되었지만, 레닌그라드 공연 때와 마찬가지로 청중들은 여느 연주회 이상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13번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곡도 소련 당국이 볼 때 결코 칭찬하고 축하해야 할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이미 소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은 국제적 명성을 얻은 만큼, 예전처럼 대놓고 불쾌함을 표시하기 보다는 그냥 무시하고 방관하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악보도 13번 처럼 아주 늦게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고, 초연 후 몇 달 뒤에 바로 간행되었다.
4 평가
하지만 이런저런 비판도 물론 나왔는데, 소련 정부의 꼭두각시 예술인들 외에도 반체제 인사의 대표 격인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쇼스타코비치의 친구였던 레프 레베딘스키가 이 곡이 삶의 긍정 같은 대비되는 주제도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비관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들에 쇼스타코비치는 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개속 크게 반응하지 않았고, '죽음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는 식의 발언으로 더 이상의 논쟁을 피했다.
외형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교향곡들 중 가장 '이단아' 에 속하기 때문에, 꽤 많고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후속작이자 마지막 교향곡이 된 15번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쇼스타코비치의 사실상 마지막 교향곡으로까지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2]
음악적인 면 외에도,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사적인 면과 이 곡을 연관지어보는 이들도 있다.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왼쪽 다리의 골절 때문에 거동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고, 거기에 심근경색으로 인해 오른손이 마비 증세를 보여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글을 쓰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이 시기를 전후해 쇼스타코비치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악보를 그리는 연습을 하며 추가 증세에 대비해야 했다.
이렇게 점점 악화되는 건강 상태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가족들에게 종종 비관적인 발언을 했고,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죽음을 의식하며 작곡을 했다고 한다. 이 곡도 최후의 작품이 될 것으로 여겼다는데, 초연 때 바이올린 단원으로 참가한 유리 투롭스키는 쇼스타코비치가 거동이 불편한 데도 불구하고 초연 준비가 한창인 공연장에 매일같이 나와 연주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거의 모든 연습 과정을 경청했다고 증언했다.[3]
사적인 면 외에, 완성과 초연 바로 전 해인 196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반공/반소 봉기인 프라하의 봄이 헝가리 반공 봉기처럼 바르샤바 조약군(사실상 소련군)에 의해 유혈 진압당했다는 소식도 이 곡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공식적이던 비공식적이건 이 곡과 프라하의 봄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식의 말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넘겨짚기라는 비판도 있다.
또 그 동안 금기시되었던 현대음악 작곡 기법을 일부 도입한 것도 얘깃거리인데, 쇤베르크 등 '신 빈 악파' 처럼 엄격하지는 않지만 12음 기법도 일부 사용하고 있고, 8악장 후반부의 완전 불협화음은 리게티나 펜데레츠키가 도입했던 톤 클러스터(음뭉치) 효과를 연상시킨다. 비교적 자유로운 창작 환경 속에서 활동했던 1920년대의 전위성이 다시금 발휘된 셈인데, 정부의 온갖 탄압 속에서도 현대적인 기법을 적극 도입하고 탐구한 후배들인 슈니트케나 데니소프, 구바이둘리나 등 후배들에게 자극받은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5 에피소드
음악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개 리허설식 공연 도중 누군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이 청중들에게 목격되었다. 파벨 아포스톨로프라는 인물이었는데, 소련군 장교 출신의 작곡가 겸 음악비평가로 스탈린 집권기에 소련음악가동맹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반대파들에 대해 심한 인신공격을 자행하기로 악명높은 인물이었다.[4]
아포스톨로프가 왜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쇼스타코비치의 신작 연주회에 왔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아마 이번에도 꼬투리 몇 개 잡은 뒤 열라게 깔려고 왔을 거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연주회 도중 심장마비인지 뇌졸중인지 몸에 급격한 이상을 느끼고 급히 공연장을 빠져나온 것이었는데, 결국 입원한 뒤 약 한 달 뒤에 죽었다. 쇼스타코비치가 그렇게도 죽음을 강조한 곡을 마지막으로 듣고 죽었다는 기록(???)을 세운 셈.[5]- ↑ 첼레스타는 연주 기법 상 타악기로 들어가지만, 관현악 편제 상에는 건반악기로 들어간다.
- ↑ 1970년대 후반에 세광출판사에서 일본어 원판을 무단 번역해 간행한 '교향곡 명곡 해설' 이라는 문고판 책에서도 마지막으로 소개된 곡들이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과 이 곡이었다. 저자는 일본의 유명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의 아들인 모로이 마코토.
- ↑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우려와 달리 그는 약 6년을 더 살았고, 진짜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을 완성하고 다른 작품도 몇 곡 더 쓴 뒤에야 타계했다.
- ↑ 스탈린 사후 초연된 교향곡 제10번에 대해 가장 가혹한 비판을 했던 인물도 아포스톨로프였다.
- ↑ 몇몇 문헌들에서는 아포스톨로프가 공연장을 빠져나온 직후 혹은 몇 시간 후 병원으로 후송되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확인 결과 카더라 통신으로 판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