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제11번(쇼스타코비치)

정식 명칭: 교향곡 제11번 G단조 작품 103 '1905년'
(Sinfonie Nr.11 g-moll op.103 "Das Jahr 1905"/Symphony no.11 in G minor, op.103 'The Year 1905')
(Симфония № 11 соль минор, Op. 103 «1905-й год»)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열한 번째 교향곡. 제2차 세계대전 후 당한 두 번째 레이드스탈린 사후 경색된 소련 사회의 분위기를 아주 약간이나마 풀어준 해빙기를 거쳐 나온 작품이다. 작곡 시기는 1956년 가을부터 1957년 9월까지였고, 작곡 중 국내외 언론사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곡은 1905년 혁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당시 불리우던 혁명가들의 성격을 띄게 될 것이다." 고 밝힌 바 있다.

작곡 도중 방향전환한 6번이나 9번과 달리, 이 곡은 도중에 뒤엎고 새로 쓰지 않고 그대로 완성되었다. 곡의 성격도 인터뷰 내용과 비슷하게 일종의 서사음악 혹은 표제음악으로 확립되었고, 이는 후속작인 12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2 곡의 형태

기본적으로는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번에는 모든 악장을 쉼없이 연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풍의 거대한 교향시처럼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각 악장에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직접 붙인 표제도 있고, 1905년 혁명의 시간 순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향곡의 형식이나 구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1악장은 '궁전 광장' 이라고 주기되어 있는데, 황실의 폭정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중들이 황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동궁 앞으로 천천히 걷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약음기 끼운 현악기들이 잔잔하게 연주하며 시작해 추위와 배고픔으로 신음하는 민중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고, 이를 배경으로 팀파니가 여리게 연주하는 셋잇단음표 리듬이나 트럼펫의 기상나팔 악구가 다가올 탄압을 예상하게끔 삽입된다.

이어 플루트 듀엣이 당시 불렸던 혁명가 '들어주시오' 를 연주한다. 이 선율이 고조되면서 스네어드럼이 팀파니 리듬을 이어받아 연주하고, 이어 또 다른 혁명가인 '밤은 어둡고' 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의해 연주된다. 마지막으로 첫머리의 현악기 악구가 반복된 뒤 곧장 2악장으로 이어진다.

'1월 9일' 로 표기된 2악장은 1905년 같은 날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의미한다.[1] 아직은 조용한 분위기지만, 템포는 빨라져 있고 비올라와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8분음표로 상하행을 반복하는 음형을 작게 연주하면서 움직임을 주고 있다. 이 위에 클라리넷과 바순이 쇼스타코비치의 합창곡 '10개의 시곡' 중 여섯 번째 곡인 '오, 황제여! 우리들의 아버지시여!' 의 전반부 선율을 연주한다.

하지만 이 연주에 화답하는 것은 1악장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트럼펫의 기상나팔이고, 일단 긴장이 고조되어 작은 클라이맥스를 이룬 뒤 트럼펫과 트롬본이 역시 쇼스타코비치의 합창곡 '1월 9일' 중 '모자를 벗읍시다' 를 연주한다. 두 개의 중요한 선율이 연주되고 나면 발전부 격인 다음 섹션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오 황제여!...' 와 '모자를 벗읍시다' 가 얽히면서 고조되어 민중들의 탄식과 분노 등의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한층 부풀어 올랐을 때 갑자기 1악장 초반부에서 나온 현악기의 나지막한 선율이 재현되며 분위기가 급변하는데, 평화로운 분위기는 절대 아니고 멀리서 스네어드럼과 트럼펫 소리가 울리면서 군대의 무력 진압을 예상하게 한다. 곧 스네어드럼이 큰 소리로 튀어나오고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8분음표 위주의 빠른 악구를 켜기 시작한다. 이는 여러 성부에 이어지고 겹쳐지며 푸가로 발전하고, 금관악기와 타악기들의 가세로 난폭하게 이어져 유혈 진압의 아비규환을 묘사한다. 그러한 아비규환이 벌어지는 가운데에 타악기를 제외한 악기군이 '모자를 벗읍시다'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 역시 주목할 만 하다.

거친 대목이 갑작스럽게 중단된 뒤에는 1악장 초반부의 악상을 약간 변형시켜 연주하면서 학살 후의 정적을 묘사하며, 트럼펫의 기상나팔 악구나 '들어주시오' 의 파편화된 악상 등이 띄엄띄엄 연주되는 이행부를 거쳐 3악장으로 이어진다.

'영원한 기억' 으로 이름붙은 3악장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죽어간 민중들을 추모하는 일종의 장송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피치카토 위에서 혁명가 '그대 희생자로 쓰러진 자여' 를 비올라가 연주하기 시작하고, 이 선율을 주제로 한동안 조용히 흘러간다.

금관이 작은 음량으로 무겁게 연주하는 이행부를 거쳐 바이올린 주도로 또 다른 혁명가인 '안녕히, 자유여!' 가 나오는데, 원곡 선율과는 좀 다르며 쇼스타코비치 자신이 적극 개작해 좀 더 길고 긴장된 모습으로 연주된다. 여기에 관악기와 타악기가 점차 더해지며 2악장에 나왔던 '모자를 벗읍시다' 가 연주되어 절정에 달한다. 이 흐름이 진정되면 다시 비올라가 '그대 희생자로...' 를 연주하며 악장 첫머리의 분위기를 자유롭게 재현하고,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피치카토만을 남기고 그대로 4악장에 들어간다.

4악장은 '경종' 이라고 되어 있으며, 이전 악장의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트럼펫과 팀파니가 갑자기 강하게 '탄압과 압제에 분노하라!'라는 혁명가의 첫 부분을 연주하며 시작한다. 추진력 강한 부점 리듬 위주의 선율이 계속되면서 거친 분위기로 급변하며, '모자를 벗읍시다' 의 단편이 큰 소리로 연주된다. 이어 혁명가 '바르샤바 시민' 이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억세게 끊는 스타카토 연주로 등장하며, 이를 목관과 금관 등 다른 악기가 받아 이으면서 투쟁적인 분위기를 계속 유지한다.

여기에 1악장과 2악장에서 나왔던 군대를 상징하는 기상나팔이 섞여들어가고 이에 대항하듯 '오 황제여!...' 의 선율 일부가 팀파니의 거친 두들김과 관의 길고 강한 연주를 곁들여 매우 자극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이 탐탐의 강타로 중단되고 나면 1악장 첫머리의 분위기가 또 재현되며, 그 위에서 코랑글레 솔로로 '모자를 벗읍시다' 를 길게 늘인 선율을 연주한다.

종결부는 탐탐과 팀파니 소리와 함께 시작되며, 베이스클라리넷과 클라리넷을 시작으로 전 관현악의 악기들이 차례차례 첨가되면서 행진조의 기분을 끝까지 유지한다. 스네어드럼이 규칙적으로 새기는 리듬과 함께 튜블러벨이 경종을 울리면서 이 마지막 악장의 제목을 상기시키며 끝을 맺는다. 이 마지막 대목에서 관현악은 G장조를 향하고 있지만, 튜블러벨의 타주는 G단조를 유지하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악기 편성은 플루트 3(3번 주자는 피콜로를 겸함)/오보에 3(3번 주자는 코랑글레를 겸함)/클라리넷 3(3번 주자는 베이스클라리넷을 겸함)/바순 3(3번 주자는 콘트라바순을 겸함)/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스네어드럼/베이스드럼/탐탐/트라이앵글/실로폰/튜블러 벨/하프 2(4악장 후반부에서는 가능하면 네 대)/첼레스타/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3 초연과 출판

1957년 10월 30일에 모스크바에서 나탄 라흘린이 지휘하는 소련 국립 교향악단 연주로 처음 공연되었고, 소련 언론들은 제정 붕괴의 신호탄이 된 사건을 효과적으로 음향화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했다. 악보는 이듬해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간행되었고, 서방에서도 차례로 공연되었다.

4 평가

혁명이나 노동절을 직접 묘사한 2번3번 이후 오랜만에 처음 나온 혁명 소재 교향곡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다만 꽤 실험적이었던 초기 교향곡들과 달리 여기서는 마치 영화음악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한 연상 작용을 가져오는 보수적인 형태의 표제음악 노선을 택했다는 점이 떡밥이 되었다.

소련 정부의 구미에도 잘 맞은 곡이었기 때문인지, 서방에서는 반공 성향 비평가들에게 '별 내용도 없는 묘사음악' 이라고 까이기도 했다. 소련의 반체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쇼스타코비치가 친정부 성향으로 변절했다고 비판하는 여론이 생겼는데, 물론 쇼스타코비치는 곡에 대해 최소한으로 말을 아끼면서 이러한 비판에 구체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1905년 혁명이 일어난지 불과 1년 뒤에 태어났고, 유년기에도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상황을 보고 큰 인상을 받으며 자라났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 곡이 '정권 접대용' 으로 쓰였다고 몰아가는 이들의 비판이 지나치다는 반박도 가능하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는 10대 시절 '혁명 교향곡' 이나 '혁명 진혼곡' 같은 혁명 소재의 작품을 스케치한 적도 있었고, 쇼스타코비치를 반체제 인사로 그려내 논란이 되고 있는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 에서도 혁명과 그 후의 상황을 꽤 인상적으로 술회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작곡 당시 쇼스타코비치 주변인들의 정황 또는 국제 정세와 이 곡의 관계를 연관시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억울하게 굴라그(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던 이들이 그 당시에 혐의를 벗고 대거 풀려났는데, 그들 중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친척과 지인들도 있었다. 또 1년 전인 1956년에는 헝가리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공 봉기가 소련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어 수천 명의 희생자와 수십만 명의 망명자를 낸 것도 연관지어지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논평을 극도로 꺼려했던 쇼스타코비치가 이러한 일들에 얼마만큼 영향을 받고 작곡에 반영했는지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다. 혁명의 열기와 참화를 있는 그대로 반영했는지, 혹은 그 속에 어떤 반어적인 메시지나 행간을 감추고 있는 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상태다.

  1. 다만 저 날짜는 당시 러시아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에 의한 것이고, 서방에서 흔히 쓰는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환산한 날짜는 1월 22일이므로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