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1 한국의 영화감독 (1919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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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부산국제영화제(1997)에서. 옆의 흰머리인 김동호 위원장이 훨씬 나이들어보인다. 당시 김기영 감독 79세, 김동호 위원장 61세...

1919.10.01~1998.02.05 1922년 생이라는 주장도 있다.

1.1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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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 by 김기영[1]
그 분은 정말 기인이셨어요. by 윤여정

한국의 알프레드 히치콕
청춘 영화도 기괴한 서스펜스 물로 만드는 사람
한국 영화광 세대 감독들의 최고의 우상

한국의 영화감독. 서울 출생, 의사 출신이며 부인도 치과 의사였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대학 연극부에서 연극을 연출하였는데[2] 그러던 도중 평양[3]에서 헨리 입센의 유령을 공연했었는데, 기성 연극 수준을 뛰어 넘는 가작이라는 극찬을 들었고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연극이나 영화의 검열을 담당하는 관계자로부터 모스크바 유학을 제의 받기 까지 했었는데, 거절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이 때 부인과 결혼하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부인인 김유봉 여사도 치과 의사였는데, 대학 시절 연극부 활동을 같이 했었다고 한다. 이후 주한미국공보원에 스카우트 되어 <나는 트럭이다>, <수병의 일기> 등의 문화영화, 홍보영화를 만들다가 미공보원의 지원으로 장편 극영화 <죽엄의 상자>를 1955년에 완성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상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시절 영화 필름이 그러듯이 초창기 영화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4]

그는 하녀시리즈로 유명한데, 본인도 하녀 시리즈에 애착이 있어서 리메이크해왔다. 하녀는 대박이 났지만, 1990년대쯤에 점점 잊혀졌으나, 그를 발굴한 사람들덕에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하녀의 새로운 리메이크작인 악녀를 기획하기도 했으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집안에서의 화재로 부부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부부가 사망했을때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리기 며칠 전이었다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남성미를 강조하던 당시 시대상과는 사뭇 다른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며,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부인에게 의지하는 찌질한 남성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강인하고 노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며 욕망에 충실하는 동물적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여성들이 계급적 욕망을 위해 본처와 충돌하며, 본처는 중산층의 삶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동계층의 여성과 대립하는 내용이 하녀 시리즈의 기본이다.

하녀 시리즈 부터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쥐, 계단, 담배, 독약 등이 주요 모티브로 쓰인다. 특히 쥐가 자주 등장하는데, 김기영 감독이 직접 집에서 키운(...)쥐들이라고 한다. 참고로 윤여정, 이은심 같은 여배우들이 직접 쥐를 잡고, 때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쥐에 맞기까지 한다. 이 경험 때문에 화녀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당시 촬영만 끝나봐라, 이 감독 내가 다신 말이나 거나봐라 하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 물론 그래놓고서 윤여정은 다음작 충녀에 또 출연했다(...)


김기영의 영화들은 전체적으로 에로티시즘이 묘하게 풍기는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괴하다. 충녀에서의 알사탕 위에서의 정사씬도 그렇고[5], 이어도에서의 시체와의 섹스씬[6]도 그렇고. 김기영을 알리는 가장 유명한 장면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를 붙잡은 여자의 머리가 계단 층계 하나하나에 부딪히는 것. 김기영을 회고하는 감독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담은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에서는 류승완 감독이 그런 기괴한 영화들을 만들었는데 충녀나 하녀같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다니 그때 한국 관객들 수준이 지금보다 더 높았던건지..하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TV나 라디오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영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특이한 것은 이런 기괴한 장면을 스스로 찍으면서도 그걸 싫어했다는 것이다.(...) 박찬욱#s-3?

영화에 그때그때의 시대 상황과 현실을 집어넣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십대들의 반항이라는 네오 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또한 세계적인 문화 트렌드를 읽어내는 능력도 뛰어나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당시의 트렌드를 알 수 있다. (70년대, 호스티스물이 유행하자 그런 요소들을 집어 넣었던 화녀,충녀, 청춘물이 유행하자 그런 코드를 집어넣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대표적.)대단한 점은 그런 트렌드를 단순히 따르기만 한게 아니라, 그 트렌드를 자신의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영화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해 완전히 자기화 시켰다는 점이다.

김기영 감독은 이은심, 이화시, 윤여정같은 배우들을 봐도 알겠지만 전형적인 미인 여배우보단 좀 특이하고 퇴폐적인 느낌의 여배우를 선호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윤여정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7] 그래서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후에도 그녀에게 '내 작품에 출연해달라는 건 아니고, 미스 윤이 살던 집 값이 내렸으니 한국에 한 번 와봐요.'(...)라는 식으로 편지를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윤여정은 자신과 끈질기게 대화하며 영화 속 자신의 캐릭터 형성을 위해 연구하는 등 그의 열의가 당시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늘 존대말을 사용했던 점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점 중 하나라고.[8]

시나리오도 자기가 직접 썼는데, 특유의 문어체 대사는 매우 독특해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어려서부터 워낙 다재다능했고, 워낙 완벽을 추구하는 기괴한 예술가였기에 조명부터 디자인까지 본인이 직접 손대야 직성이 풀리던 성격이었던 것 같다. 하녀같은 경우는 본인 손이 안닿은 것이 없었을 정도라고. 조명과 카메라,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이해가 매우 뛰어났으며 카메라 배치도 본인이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그의 영화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집과 인테리어가 하나의 배우로서 역할을 한다고 할 정도로 소품 하나하나가 공들여진 모습(특히 시계, 벽지, 스테인드 글라스)은 박찬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박찬욱 영화의 특징 중 하나인 벽지에 대한 강한 집착도 사실 이 양반이 원조다. 박찬욱이 김기영 영화 중 제일 좋아한다는 화녀 82와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를 보면 그가 김기영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9]

워낙 역량도 뛰어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 배우, 스텝들이 잘 따랐다고 한다.

이데올로기나 형식, 틀에 얽매이는 걸 싫어했다. '난 무슨 무슨 주의 같은 것들을 젊은 시절부터 싫어했다'라고 말한 적도 있고, 부산 영화제에서 30년대 이후 발달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냐는 칸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질문에 '난 그런거 잘 모른다. 난 무슨 무슨 주의같은 것들이 싫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자기 내면의 무의식을 영화에 그대로 옮긴 것 뿐임을 강조했다.

전쟁 시절에 미공보원에서 혼자 영화를 습작하며 감독이 된 사람이라 많은 해프닝이 존재한다. 조명 기술자, 장비가 없어 거울 등으로 조명을 내거나 사진 기술자가 하는 걸 보고 그대로 영화에 적용하는 등 직접 부딪히고 연구하며 영화를 익혔다.
당시 미공보원은 첨단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난 미국 유학 공짜로 다녀왔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감독들 중에선 대표적으로 박찬욱, 봉준호 등이 열혈 팬이다. 특히 봉준호는 영화 82년작 '화녀'의 대사를 모두 외우고 있을 정도. 한국영상원에서 나온 하녀 복원판 DVD 코멘터리도 녹음했다. 마틴 스콜세지도 하녀를 보고 호평을 하면서 필름 복원 작업에 투자하기도 했으며 외국 컬트팬들에게도 상당히 높게 평가된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당시 미국에서 이걸 보고자 찾아온 어느 백인 관객은 1960년에 이런 영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면서 감탄한 적도 있다. 김기영 컬렉션 소개 포스트. 김기영에 대해 굉장히 잘 소개되어 있다.

엄청난 영화광이있다. 무려 5살때 부터 영화관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때로는 몰래 들어가서 영화를 즐겼었다고 한다. 이 시절 수많은 무성 영화들을 탐닉했다.
말년에는 보고 싶은 영화를 일본에 가서 먼저 보고 오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생활했던 적도 있다. 생전에 남긴 글에 의하면 일본에 있던 시절, 당시 일본엔 외국영화만을 틀어주는 극장이 있었는데 그 시절 시네필들이 대게 그렇듯 영화관에서 거의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일 영화를 보러 다녔다고 한다. 이 시절 르네 클레르 같은 감독들의 영화를 많이 봤었다고 한다.
생전에 모르는 영화가 없는 수준이었으며 생전에도 새로 나온 영화들은 극장에 걸리자마자 모두 보곤 했었다고 한다. 무슨 무슨 영화 보셨냐고 물어보면 그 영화에 대한 세부적인 것, 느낀점, 분석 등을 줄줄이 쏟아냈다고.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뺨칠 수준.
생전에 촬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영화가 없으면 난 죽는다. 영화는 내 모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영화를 사랑했다. 때문에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영화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를 보면 힙합에 관심이 많았던 듯 하다. 어떤 젊은 감독을 만났을때 그와 한 시간 동안 힙합 얘기만 했다고. 고령의 나이에도 신세대들의 새로운 예술과 문화, 트렌드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으며 그것들에 대한 통찰력도 매우 날카로웠다고 한다.

사인을 쉽게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인을 해주기전에 영화를 보았냐고 물어본후, 봤다는 대답이 돌아와야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히치콕을 좋아하여 <히치콕과 트뤼포의 대화>를 일본 번역본으로 읽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책이나 영화는 직접 일본의 잡지, 시나리오를 구해서 읽었었다고 한다.

내가 만난 김기영- 김영진 편집위원의 말에 따르면 영화로 만들 수 있는 시나리오가 늘 많다는걸 자랑스러워 했던 것 같다. 오우삼의 브로큰 애로우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흥미롭다. '자네한테만 말해주지. 그건 말이야, 주인공이 아무리 쌍권총을 들고 설쳐대도 나쁜 놈들이 쏘는 총은 하나도 안 맞잖아. 그건 게임 같은 거거든. 바로 그거야. 요즘 애들은 게임을 좋아한다.그 영화는 게임처럼 찍었어. 그래서 손님이 드는 거야. 쉿,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게.비밀이니까. 우하하핫...!'[1]

목소리가 상당히 굵고, 말투가 어눌하다.

괜히 별명이 기인이 아닌 것이, 제작진을 따돌리고 혼자 고기를 구워먹었다거나 집값이 싸다고 폐가를 구입해 살았다거나, 하녀 시리즈에 나온 쥐들이 실은 그가 직접 키운 쥐들이었다거나하는 그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아주 수두룩하다. 웃음 소리도 그의 영화만큼 매우 특이했던 듯 하다.톤이 높고 쩌렁쩌렁하지만, 아이들이 킥킥대는 것처럼 때로는 순진하게도 들리는 웃음소리였다고.

의외로 상당히 유쾌하시다. 젊은 영화 학도들과의 대담에서 과거 재밌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도.

생전에 컬트 감독으로 재조명 받으면서 촬영된 다큐가[10] 하나 있는데, 그의 가치관 등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KMDB VOD로 감상할 수 있다.

  • 참고할만한 자료
95.03.01-박찬욱-김기영 감독 이야기

하녀들 봉기하다 / 영화 감독 김기영. 이효인. 하늘아래. 2002
근대성의 유령들 판타스틱 한국영화 . 김소영. 씨앗을 뿌리는 사람. 1999

1.2 영화들

  • 죽엄의 상자 1955년작

김기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 양산도 1955년작.[11]

2번째 장편 연출작.

[2]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주연은 김진규, 주증녀, 이은심이지만 현대인들은 조연으로 나온 안성기(아역)나 엄앵란을 더 잘알것이다. 감독이 애착을 가져서 1970년대에는 <화녀>로도 리메이크 되었고, 1980년대에는 <화녀82>, <육식동물>로 리메이크 되었다. 90년대에는 악녀로 리메이크하려 했으나 결국 감독의 사망으로 불발되었다. 원래는 20분이 잘려나갔으나,한국영상자료원에서 겨우 복원에 성공했다. 다만 <화녀> 같은 경우는 <하녀>와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만든 영화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녀>와는 다른 영화다. <화녀82>가 하녀의 리메이크고, <육식동물>은 <화녀>를 리메이크 한 영화다.

이건 필름이 소실되어서 줄거리만 남아있다. 형사 김진규는 밀수범 장동휘의 아내를 검거도중 살해하고,승진하지만 장동휘는 여장하면서 다리를 끌면서까지 김진규의 아내를 미행하는데... 말그대로 줄거리만 남아있어서 오승욱이 안타까워했다. #

김자옥주연의 괴기영화(라고 밖에 말할길이 없다). 주인공이 여러가지 일에 휘말리는 에피소드들을 엮었다.

2 한국의 영화 감독 (1954년생)

1번 항목의 인물과는 관계없는 인물. 하지원 주연의 미스테리 스릴러물 진실게임으로 데뷔했으나, 진실게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2014년 현재까지 연출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역량에 대한 부분은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긴 하나 진실게임 이후에 연출을 했다면 더 좋은 작품을 보여 줄 수 있었을텐데라는 평가가 대부분.

3 장기기사 김기영 九단

대한장기협회의 현 장기판을 주름잡는 장기기사 중 한 명. 별명은 무등산 코끼리이고 김경중 九단과 같이 귀마 포진을 애용한다.
  1. 그가 평생동안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다.
  2. 중학교 때 쓴 시가 일본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틈틈히 그린 그림이 공모전에서 1등으로 뽑히기도 하는 등 글과 그림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술교사로 부터 “김군은 재주가 너무 많아. 그걸 모두 할 수 있는 직업은 소학교 선생밖에 없네”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3.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소학교를 다닐때 평양으로 집이 이사를 했고, 평양에서 평양고보를 졸업했다. 즉 평양은 그의 제2의 고향이었다.
  4. 그나마 필름이 남아있는 첫 상업영화 양산도는 필름의 훼손이 심해 결말부 부분이 아예 사라져 버렸고, 첫번째 극영화 죽엄의 상자 같은 경우 최근에 그 필름이 발견 되었지만, 사운드 네가가 아예 소실 되었다.
  5. 충녀가 싯체스 영화제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때, 현지 관객들도 하수도 장면을 보고 경악을 했다고 한다.
  6. 국내 방영 및 극장 개봉당시 잘려나갔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일본 NHK-bs 2방영당시 이 장면이 그대로 실리면서 이 버젼을 녹화한 것이 고가로 팔리기까지 했다.
  7. 윤여정에 대해 자기의 말을 알아들은 유일한 배우라 평했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에도 크게 매력을 느꼈다고.
  8. 김기영이 거의 30살 이상 나이가 더 많은데다, 당시에는 배우들을 함부로 대하는 감독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이는 굉장히 특이한 점이다.
  9. 박찬욱 본인도 박쥐, 스토커 같은 작품들의 예시를 들며 자신이 무의식중에 김기영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하녀 블루레이 해설에서 밝힌 바 있다.
  10. 감독의 인터뷰도 들어있다!!
  11. 당시 상당히 흥행하여 극장이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