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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양조위?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폭포」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풀」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눈」
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
어두운 시대를 밝힌 20세기 대한민국의 시성
대한민국의 시인. 서울특별시 출생.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6월 16일 작고하였다. 김수영이 태어날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긴 했지만, 김수영은 유년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김수영의 백부 김태흥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집안의 장손이나 다름없었던지라 김수영은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1]
선린상업학교 재학 시절에는 오스카 와일드를 외워 읽을만큼 영어 실력이 유창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성장했던 한국인이 그렇듯 자의든 타의든 일본어에 유창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가 쓴 시나 에세이 중에서는 완전 일본어로만 작성된 글도 간혹 보인다.[2]
이후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이후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다가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심영 등과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또 연희전문학교에서 잠시 수학했으나 졸업하지 않았으며,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국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한다. 그러나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고 3년 만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이후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혹은 지식인)의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나름의 활동을 된 것은 4.19 이후의 일이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김수영은 여전히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직장을 가지지 않았으며, 시·시론·시평 등의 왕성한 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폭로하였다.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귀갓길 버스에 치여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을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운명을 달리 하였다. 신동엽이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렇게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3]
2004년에 방영한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 김수영의 일생을 다뤘다.
2 시집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다. 유고 시선집인 『거대한 뿌리』(1974)와 산문 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가 있고, 시와 산문을 모은 전 2권의 『김수영 전집』(1981, 개정판 2003)이 간행되었다.
3 시어의 특징
김수영은 스스로 자신의 시어가 평범하다고 했지만, 시와 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다. 김수영은 일체의 정립된 언어와 고정된 언어를 부정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의 언어는 관습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의 언어”이며, 대물림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다. 김수영의 시에는 한자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문어와 구어가 구별 없이 사용되며, 관념어와 구체어가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한 한자어, 일본어, 영어, 속어, 구어, 관념어 등은 어느 하나의 지배적 언어로 귀속되려는 언어에 대한 경계가 된다. [4]
4 시세계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였으나 점차 그 한계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4.19 혁명을 고비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추구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주로 자기 고백의 직설적인 어조로 소시민의 자기 각성, 지식인의 정직한 고뇌, 자유가 억압된 현실에 대한 항의를 다루며 ‘온몸’의 시학을 주창했다. [5]김수영은 자신의 시세계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극복한 곳에 자리하고 싶었던 시인이다. [6] 때문에 그의 시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넘어 열린 시각으로 읽어야 그의 시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5 김수영과 부인 김현경
일단 이 시를 보자.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이 시는 김수영이 실제로 겪었던 일을 다룬 시이다. 김수영이 길거리에서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우산대로 후려팬 것이다. 그러고도 남이 보는 것만 걱정하고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것은 우산 놔두고 온 것을 아쉬워한다. 그런 와중에도 아내를 때린 것에 대한 아련한 후회와 자신에 대한 조소가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일은 한 번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선린상업학교 야간을 졸업한 김수영은 일본 유학 시기에 학교 선배인 이종구에게 얹혀 살았다. 이 이종구와 잘 알고 있던 것이 후일의 아내가 되는 김현경이었다. 김현경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다녔고, 정지용에게 시를 배웠으며 프랑스문학에 심취했다고 할 정도로 인문학적 소양이 있었다. 김수영과 김현경의 처음 만남도 스승과 제자에 가까웠다. 그러다 연인이 되었고, 1950년 30세 김수영과 결혼했을 때, 김현경의 나이는 25살이었다. 예술적 감수성이 있었고 김수영에게 시를 배웠던 김현경은 나름대로 당대 문단에서 아이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역시 한국전쟁이었는데, 결혼하고 터진 한국전쟁 때문에 김수영은 인민군에게 의용군으로 강제차출된다. 하지만 의용군을 탈출했던 김수영이 이번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서울 집근처에서 체포되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문제는 의용군에 끌려간 상황에서 김수영의 생사는 묘연해진 상황에서, 아이를 김수영의 모친에게 맡겨둔 김현경이 이종구와 부산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1952년 1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왔는데, 부산에서 가족을 만났을 때, 김현경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후에 김수영이 김현경과 이종구가 사는 곳을 찾아갔을 때, 김현경은 김수영과 같이 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 때, 김수영이 받은 충격과 절망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쓴다.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圓周(원주) 우에 어느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하나 다른 遊星(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億萬無慮(억만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1954년 김현경은 이종구를 떠나서 다시 김수영을 찾아온다. 이후 김수영과 김현경의 삶은 부부라기 보다는 동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은 김현경을 사랑하면서도 분노했고, 복잡한 마음으로 살았다. 상단의 시 '죄와 벌'은 1960년대 초에 쓰여진 시이다.
하지만 김현경은 이후 김수영의 독자이자 비평가였으며, 의상실을 경영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등 상당한 예술적인 능력을 보여줬다. 김수영이 죽고 45년동안 김수영의 시를 알리기 위해서 노력한 것도 부인 김현경이었다. 이 김현경이 나중에 김수영을 그리면서 쓴 자서전이 바로 김수영의 연인이다.[7]
참고로 김수영이 아내 김현경에 관해 쓴 시 가운데서는 아래와 같은 야리꾸리한 것도 있다.
성(性)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6 이야깃거리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1960년 9월 20일 김수영의 일기
보다시피 제2공화국의 2대악법(집시법 등)에 관련하여 4.19 혁명이 미완으로 끝날것이라는 것을 알고 강하게 비판했다.
- 김수영이 좌우의 대립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자유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한 것에는 배경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경험이다. 김수영이 인민군에게 강제로 차출되었다는 이야기는 앞에 했는데, 김수영은 이와중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총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다. 이후에 겨우 다시 탈출해서 서울의 자신의 집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인민군이라고 잡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포로수용소에도 좌우익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두 집단은 맹렬하게 대립했다. 좌우익 세력 모두 서로를 린치했고, 한쪽으로 몰렸던 사람은 다음 날 화장실에서 시체가 되어서 떠올랐다라고 한다. 김수영은 이 곳에서 2년을 버티면서 좌우익의 대립에 진저리를 치게 된 것이다.
- 술을 좋아했다. 현실에 좌절하고 갑갑해하는 그에게 술이 마지막 해방구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한번은 술에 취해 눈밭에 엎어져 있던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서 경찰서에 데려다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술에 취한 김수영 시인은 순경을 보자 마자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 올시다!"라며 넙죽 절을 했다고 한다. 매일같이 술에 취해 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잠자는 아내와 애들을 깨워서 울리기도 하고, 그의 특유의 전위적 시론 때문에 다른 문인들과 쌍욕을 하며 싸움질을 하기도 하는 초특급 민폐쟁이이기도 했다(...).
애초에 시인들 중에 정상인이 있기는 한가
-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유독 안광이 강렬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시인의 눈'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고.
7 미공개 시 : 김일성 만세
- 김수영 시인이 썼던 김일성 만세라는 시와 대한민국의 사람 누구나 자유롭게 김일성 만세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그의 사상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는다. '대한민국의 사람 남녀노소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사회가 이룩된 것이다'라는 의미가 이 생각의 논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김일성 만세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제목은 위험해 보이지만 내용은 매우 건전하다. 제목이 너무 위험해서 그런지 문학계에 공식으로 발표된 작품은 아니다. 원래 이 시는 미발표시가 아니었다. 신문사에 2곳이나 보내었으나 아무도 실어주지 않은 것이다.
자세한 것은 김일성 만세 항목 참조.
8 주요 작품
- 눈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첫 행의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잘 알려진 시.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수평 폭력에 대해 설명하면서 자주 인용되는 시이다. 최근 조선일보의 간장 두 종지
불쏘시개칼럼으로 논란이 이는 가운데 재조명 받았다. - 폭포
- 풀
- 하......그림자가 없다
- ↑ 상허학회,「언어의 윤리와 시의 완성-김수영론」,『새로 쓰는 한국 시인론』, 백년글사랑, 2003, p.286.
- ↑ 친일 같은 건 아니고 그냥 자신을 압박하는 사회 속에서의 지쳐있는 삶에서 살고 싶다거나 하는 푸념 등이다. 그리고 그의 일본어 문헌은 현대 일본어라기보다는 2차대전 이전 일본어의 영향인지, 지금의 히라가나가 들어가있어야 할 부분에 카타카나가 쓰여지는 방식이었다.
- ↑ 상허학회,「언어의 윤리와 시의 완성-김수영론」,『새로 쓰는 한국 시인론』, 백년글사랑, 2003, p.289.
- ↑ 여태천, 『김수영의 시와 언어』, 도서출판 월인(서울: 2005), p.327.
- ↑ 최동호,『한국현대시사의 감각』,고려대학교 출판부, 2004, p.90.
- ↑ 김윤배, 『온몸의 시학, 김수영』, 국학자료원, 2003, p.250.
- ↑ 이 자서전이 김현경의 실드가 좀 강하다고 생각하여 좀 더 객관적인 둘의 관계를 알고 싶다고 한다면 '김수영 평전'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