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배우)

내가 고자라니의 심영에 대해서는 심영(야인시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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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 20대 때 모습.고자되기 전 [1]우측 : 중년기 때 모습.고자된 후 [2]

1 개요와 일대기

남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북한 배우

1910년 9월 3일 ~ 1971년 7월 24일. 실제 인물 심영은 한마디로 친일 + 월북 + 배신 + 고자으로 요약된다. 매국노인건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인터넷에서 이호성[3]빌리 헤링턴[4] 더한 이런 부류의 숨겨진 다크호스다. 덧붙여서 초기 한국의 영화, 연극계를 후퇴시키는데 한 몫한 작자로써 6.25 전쟁 중 수많은 예술가들과 배우들을 강제로 납북시키는데 지대한 공헌 하였다.[5]

1.1 탄생과 소개

본명은 심재설(沈載卨), 문중은 청송 심씨로, 심훈과는 먼 조카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한 이름은 아오키 진에이 (靑木沈影, あおき じんえい)[7]이며 심영(沈影)은 예명이다. 아버지가 철원군수라서 태어나긴 철원에서 태어났지만 자라기는 서울에서 자랐다. 서울 재동에 집이 있었는데 너른 기와집에 자랄 정도로 그의 집은 부유했다. 이후 제2고보(現 경복고등학교)에 재학 중 퇴학을 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었다.뭐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교장양반! 도일 직전 배우 박제행이 배우만 되면 크게 출세할 것이라고 그를 부추겼고 이에 그는 본격적으로 연기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담으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탈모가 있다.(...)날 보고 머리털이 없다고? 탈모가 됐다 그 말인가? 탈모라니! 아니 내가 탈모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에잇 탈모라니! 내가... 내가 탈모라니! 이건 말도 안돼... 말도 안된다고 어헑헑! 말도 안 돼... 남성호르몬 이놈,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헣호허어허! 말도 안 돼... 남성호르몬이 제대로 분비되었다는 데서 실제 고자가 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2 연기에 입문을 하다

학창시절부터 고자연기에 관심이 있어서, 그 쪽 계열에 기웃거리다가 배우 일을 시작했다. 《연기 초승달》과 《즐거운 인생》에서 데뷔했는데 대사도 없는 엑스트라 역이었다.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1929년 11월 14일에서 16일에 걸쳐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간난이의 설움》이었다. 당시 토월회는 심영의 연기에 대해 크게 호평하며 분발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심영은 같은해 11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아리랑 고개에 출연하면서 확실하게 데뷔를 하게 된다. 1930년 1월 12일 심영은 남경의 거리 1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관계자들 대부분이 반대할 정도로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이 연극으로 심영은 극단의 간판스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연기력에 대해선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는 등 꽤 호평을 받았지만 국민배우 황철이 등장하면서부터 그에게 밀려서 활동이 위축되었다. 하지만 야인시대에서는 심영이 주도권을 잡고 황철을 소개한다. 아마 암살미수를 당하는 주체가 이쪽인 만큼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그런 듯.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 연극 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의 간부를 맡고 친일 연극에 많이 출연해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1세기 들어 야인시대에 출연한 그는 내가 고자라니를 외치고 이름을 고자라니로 바꾼 다음 출세하였다 카더라

1.3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좌익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3월에 좌익 선전극 님#s-4(박영호 극작가)을 마치고 부인과 부인의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던중 미행해 온 김두한에게 광통교[8]에서 하복부영 좋지 않은 곳이보시오 의사양반!에 총상을 입었다.[9]이후 김두한은 심영이 입원중인 병원에 찾아갔지만, 그의 어머니로 인해 마음이 약해져서 협박만 하고 목숨을 살려주고[10] 이후 심영은 월북을 했다.이 나라 좆까네 심영 피습사건 당시 기사.정말 찌질하게 목숨 구걸하다니...

당시 해방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일제시대 내내 2등국민이자 그 사이에서도 천대받는 광대의 위치였던 연예인들은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는 북한에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많은 숫자가 자진월북 했다. 최승희, 문예봉같은 인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저 '만인이 평등'이라는 슬로건은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그 자체였고 실제로 북한은 김일성인 자와 김일성이 아닌 자의 차별이 극에 달한 신분제 국가였다. 실제로도 월북한 연예인 과반수가 숙청으로 생을 마감했다. 게다가 당시 정말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자였다. 물론 1950년대 이후 대부분 숙청크리 해방 전에 월북한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심영은 전쟁기간 중 연예인들을 강제 납북 시키는데에 앞장섰다. 이 부분은 쉴드를 칠래야 칠 수 없다.

월북 이후에는 여러 영화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아서 활동하여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 황철과 함께 북한 예술사에서 이름을 날린다. 그리고 남한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인터넷 예술사에 이름을 날렸다. 여튼 최은희의 말에 의하면 6.25 전쟁 당시 심영이 조선인민군 군복을 입고와서 영화인, 연극인들을 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고 한다. 최은희도 이 때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다. 최은희 기사

하지만, 말년에는 숙청되었다가 복권되어 남조선로동당 숙청 때 걸려들었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또한 한설야가 숙청될 때 다시 사상검토를 받았다. 1971년 결국 다시 숙청되어 평양에 소재한 삼신탄광 탄부로 떨어졌다고 한다. 내가 탄부라니! 탄부로 고생하다가 1971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는데, “이 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가져다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통일 후에 유언대로 되면 100% 성지 확정 [11]. 신불출의 경우와도 같이 수용소에 감금당해 개고생하다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북, 탈북 수기에서는 심영이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쓸쓸하긴 해도 고운 말년을 보냈다고 적혀 있지만, 이 이야기도 그들 부부가 직접 보지 않고 북한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책으로 옮겼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다. 실제로 이들 부부의 수기에는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그 내용들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 [12] 다만 이 수기에 언급된 심영의 경우에는, 최은희가 북에서 직접 만났었던 김연실, 문예봉, 문정복은 심영과 절친한 사이였고, 심영과 동시대에 활동했었던 사람들이다. 물론 문예봉은 1960~70년대를 협동농장에서 보냈지만, 특히 문정복은 심영과 같은 극단에서 같이 연기를 하기도 했었다. 따라서 그 기록의 출처가 이들의 증언이라면 그 신빙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또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실제로 심영이 1966년부터 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1971년 7월 24일지병으로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13] 따라서 아마도 사실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친일 연극을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인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매우 싫어하고 까내렸으며, 그 중에서도 이황이 동방의 주자라고 불리며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특히 부정적이었다. 그가 월북한 이후 그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 중 '술만 마시면 이이, 이황을 욕하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

1942년 당시 스타였던 박향림[14]과 음반을 녹음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대사 파트를 맡았다. 들어보자.

2 각종 창작물에서

2.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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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 64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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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움짤 하나로 모든 것이 요약된다.
어째서인지 동양극장쪽은 존재감이 없다
  1. # 1937년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야인시대의 심영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특히 공연중에 정면에서 본 얼굴과는 거의 흡사하다.
  2. 야인시대 극 중 심영과의 모습은 전혀 딴 판, 오히려 배우 신구를 닮은 듯 하다.
  3. 이 사람은 선수 시절에는 후배들을 빠따로 두들겨팼고 은퇴 후 사업을 시작하면서 조폭 1명이 이호성이랑 만난 이후 행방불명되기도 했으며 사기죄에도 한번 연루된 적이 있다. 사업 실패 이후에는 자기 내연녀와 그 내연녀의 딸 3자매를 살해하고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자 자살하고 끝냈으나 심영은 월북을 했고 게다가 해방 전에는 친일연극을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들을 간접적으로 몰아내어 죽게 한 죄가 있다.
  4. 이쪽은 친일파가 아닌 와패니즈 이며 그냥 SNS에 올린 역사적 문제인 글을 사과 안 하고 오히려 적반하장인 태도를 보인게 문제였지만 이 사람은 자기 본업, 그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본업을 악용하여 친일행위를 하여 잘못된 전쟁을 찬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징용,징집 대상자들을 전쟁의 전투나 열약한 시설을 가진 탄광 등으로 몰아넣어 수 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인 또라이짓을 몸소 독려하였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가 더 더한 쓰레기다. 피해 규모도 남다른데 전자는 특정 사람들만 즐기던 한국 붕탁계를 몰락시키는 정도로만 끝났지만 후자는 그릇된 전쟁을 독려하여 아무것도 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이끌려 실제 현장에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와패니즈 사건이 터져도 아직까지 그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얼마전에 열린 국제적 남고제 창시자가 한국인인걸 감만하면......)
  5. 광복 이후 행적에서 후술하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심영은 전위대전위대!! 전위대!!를 동원하여 강제로 남한의 배우들을 북으로 끌고 갔다. 이런 만행만으로도 남한의 예술을 후퇴시키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음을 알 수 있다.
  6. 명확한 것은 아니나 심훈도 청송 심씨이며 심훈의 세 아들이 재(載)자 돌림인데 심영의 본명이 심재설이므로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7. 한자를 보면 알겠지만, '진에이'라는 이름 자체가 심영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리고 '아오키(靑木)'이라는 일본식 성씨는 본관인 '청송(靑松)'(=푸른 소나무)을 청목(靑木)(=푸른 나무)으로 변형한 것이라 추측된다.
  8. 김두한은 동아방송 대담 노변야화에서 종로경찰서, 중구경찰서 등에 애매한 관할점을 이용해 광교까지 미행했다고 한다. 실제 광교는 종로와 중구 사이에 위치. 광교라고 수원 근처의 그 광교라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9. 일부에서 좌익 선전극 등 창작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은 친일파이자 좌익 극작가 박영호의 작품이다.
  10. 이부분은 김두한증언이다. 습격한 본인의 증언이니 진실인지 아닌지는 저 너머에. 어쨌든 야인시대의 해당 에피소드는 이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11. 김용균이라는 탈북자가 쓴 《시효인간》 이라는 책이 출처라고는 하지만,그 사실성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다. 걸러서 듣도록 하자. 참고.
  12. 예를 들자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가 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
  13. 반면 문예봉의 경우 친일인명사전에는 '1967년 안주협동농장으로 추방당했다 1980년 복권되었다'라고 숙청 및 복권 사실이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다.
  14.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