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

1 농구인

이름김영기(金永基)
생년월일1936년 1월 7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서울특별시
출신학교배재고 - 고려대
포지션가드
신체 사이즈178Cm, 64Kg[1]
입단[2]1960년 농업은행 입단
소속팀농업은행/농협 (1960~1963)
기업은행 (1963~1966)
지도자한국농구연맹 3대 총재 (2002.11.22~2004.4.30)
한국농구연맹 8대 총재 (2014.7.1~ )

50~60년대 한국 농구계 최고의 슈퍼스타
한국프로리그 출범의 일등공신이자 2010년대 농구계의 불통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감독, 행정가. 현 한국농구연맹 총재이다. 농구인 김상식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현역 시절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날린 선수로 굉장히 보수적이고 경직된 요즘도 그러하지만 당시 농구계에서 화려한 드리블로 군계일학의 기술을 과시했으며 원핸드 점프슛을 일찍 익힌 선구자 중 한 명이다.[3]

선수 은퇴 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농구 사상 처음으로 ABC(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제5회, 1969년 방콕)[4]와 아시안게임(6회, 1970년 방콕)에서 우승하는 대업적을 남겼다. 어? 죄다 방콕이네?

모비스유재학 감독이 작전타임 도중 자기 팀의 김수찬 선수에게 꿀밤을 먹이자 2015년 12월 10일에 재정위원회를 열어 벌금 300만원 징계를 내렸다. 예전 '함지훈 테이프 사건' 같은 일로 인해 유재학 감독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농구팬들도 이 날의 징계는 통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2015-16 시즌 앞두고 자신의 주도로 실시한 용병 2인제가 시즌 중반 들어 조 잭슨안드레 에밋의 맹활약으로 인해 재평가를 받고 있는 추세다.[5]

현재까지의 모습은 농구인기를 살리기 위해 V-리그신선우와 같이 프락치 구단을 심었는데그렇지 않은데도 그런 짓을 하는 정신나간 구단도 있지만 지들이 더럽게 삽질하는 중.

2 정치인

金英基
1905년 01월 08일 - 1989년 05월 01일

1905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태어났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기도 안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3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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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우. 주로 사극에 출연하는 편이다.

3.1 출연작

특이하게도 권율 역을 두 번이나 맡았다. 권율 전문 배우. 그리고 희대의 명대사를 남겼다(불멸에서)
  1. 경향신문 1966년 1월 19일 김영기 선수 은퇴하는가
  2. 프로리그는 1997년에 출범했다.
  3. 당시에 슛을 한 손으로 하면 자세가 불안하다며 감독들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농구의 원조인 미국에서는 1930년대 중반에 한 손 슈팅이 처음 도입되기 시작했고 50년대 경기를 보면 원핸드 슛이 이미 정석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농구라는 게임의 기틀이 잡힌 오늘날 상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오히려 두 손으로 던지는게 공의 궤적상 불안하다).
  4. 1969년 11월 29일, 당시 아시아 농구최강이었던 필리핀과 결승전에서 붙었는데, 신동파50득점을 올리며 필리핀에게 멘붕을 선사했고 대한민국 국대는 95-86로 승리하여 8전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여담으로 필리핀에서는 이 날 신동파가 보여준 원맨쇼에 충격을 받아 급기야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팀과의 교류전이 있을 때마다 "무조건 신동파를 출전시켜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신동파는 필리핀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
  5. 물론 냉정히 말하자면 김영기 총재 의도대로 성공했다고 보긴 힘들다. 본래 취지는 180cm 대의 테크니션들이 리그의 흥행을 견인하는 것이었는데, 시즌이 진행할 수록 단신용병들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에 각 구단들은 커스버트 빅터나 웬델 맥키네스 등으로 대표되는 '단신 빅맨'으로 갈아타 결국 농구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골밑이라는 명제만 재확인해주는 씁쓸한 결과만 낳았다. 살아남은 단신 테크니션은 잭슨과 에밋 밖에 없었고 그 잭슨마저 시즌 중반까지 한국 리그에 적응을 못해 다른 외국인선수로 교체해야되는게 아니냐며 팬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회의론이 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