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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호외[1]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가 일으킨 병크이자 한국 언론계에 길이남을 흑역사. 정작 당사자(...)였던 김일성은 7년 7개월 후인 1994년 7월 8일에야 심장마비로 뒈ㅈ..사망하였다. 중앙일보 출신으로 오마이뉴스와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를 지낸 정운현 기자[2]는 이 오보를 헤이그 밀사 사건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이준 열사 분사 오보에 이은 한국 언론사 최대의 오보로 뽑았다.
조선일보는 '북괴 김일성이 총에 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렸다. 이 호외 기사는 세계적인 뉴스로 주목받았으며 조선일보는 처음엔 피격설이었으나 이틀 뒤인 18일부터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단정해 보도한다. 신문 12면 중 7면을 김일성 사망 사건 기사로 채웠으며 <주말의 동경급전... 본지 세계적 특종>이라고 자뻑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당일 11월 18일 오전 10시 몽골 공산당 서기장 잠빈 바트문흐를 영접하기 위해 김일성이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나타나면서 세계적인 오보로 전락하고 만다.
이 오보는 11월 15일 일본 공안조사청에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이 소식이 일본 증권가찌라시와 외교가에 전해져 관심을 끌던 중 조선일보가 11월 16일 도쿄발 특집기사로 보도했다. 신속은 했으나 신뢰도는 없었던 것.
이 첩보의 시작은 더욱 가관이다. 처음 김일성 사망설은 11월 14일 오산 공군기지 아래 자리잡은 미군 통신정보부대(NSA) 산하 감청소에서 상황 근무를 서던 한 미군 병사가 이북에서 '임은 가시고...'라는 멘트와 함께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이를 장송곡(...)으로 착각하고 임은 가셨다잖아 방송에서 '김일성 주석이 가셨던 길을 김정일 지도자가 따라 가시고 있다.'라는 찬양시에서 가셨다라는 표현을 김일성이 죽었다고 착각해 버리면서 일어났다.한국어는 어려워요
그 병사는 곧바로 미국 본토의 NSA 본부에 확인 요청을 했는데, NSA의 상황병이 백악관과 CIA에 '확인을 요하는 정보'를 의미하는 두 번째 코드가 아니라 '확인 필'을 의미하는 첫 번째 코드로 잘못 전송하는 두 번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게다가 주일미군 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에도 마찬가지로 김일성 사망이라는 메시지가 송신되고 말았다. 거기다 일본에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내용의 첩보를 제공하면서 사망설은 터무니없이 확대되었다.
한국 정부는 처음에 이 사망설에 대해 의심을 했으나, 국방부를 통해 김일성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전파방송이 있었다고 발표해 김일성 사망설을 공식 확인해 주었다. 당시 정권은 무려 1000여명의 구속자를 낸 1986년 10.28 건대항쟁[3] 직후인데다가, 국민들 사이에서 불붙기 시작한 직선제개헌운동 속에서 정권 유지를 위한 떡밥으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는지 확인되지 않은 설을 그대로 공식적으로 풀어버렸다. 결국 군과 정부, 여당, 그리고 국민 모두가 낚인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20일에 국무총리였던 노신영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 오보가 '북한이 행한 고도의 책략이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상황 판단 미숙에 대한 사과가 아닌 '이게 다 북괴 때문이다'는 식의 발표였고, 이 설이 어디에서 나왔고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다. 처음 오보를 낸 조선일보도 독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서방 언론들은 정말 놀라고 있다.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 되었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 사건을 유포한 적이 없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유포한 건 조선일보였다. 북한이 훌륭한(…) 막장집단인 건 틀림없지만, 아무렴 자기네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지도자 생사 문제를 갖고 장난을 치겠는가. 정말 적반하장격 주장이다. 그야말로 '북(北)' 치고 장구 친 셈. 덕분에 김일성만 졸지에 오장원의 제갈량이 되었던 것이다. orz 조선일보는 그래 놓고도 오보 다음날 '김일성 살아 있었다'고 정정기사를 썼다…. 솔직하게 '살아 있다'라고 쓰는 것과, '(이제 와서 다시 보니 그땐) 살아 있었다(…고 하네? 할 수 없지 뭐. 근데 지금은 그새 또 죽은 상태여서 우리 신문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중 어느 문장이 더 책임감 있게 느껴지는지 읽어 보자.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은 조선일보가 일으킨 병크가 확실하지만 대한민국 국방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보도지침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이며 조선일보의 기사가 정부의 심리전의 일환일 가능성도 무시 할 수 없다. 조선일보의 보도를 확인한 대한민국 국방부의 발표 역시 책임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여담으로, 중앙일보는 당시 메이저 신문 중 유일하게 <김일성 피살설(說)>이라고 한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가까스로 오보를 면했다. #1, #2[4] 역시 아 다르고 어 다르다
- ↑ 당시 매주 월요일이 휴간일이었고, 1986년 11월 17일은 월요일이었다. 이 날 조선일보는 호외로 조선일보 세계적 특종- 16일자에 최초로 보도라는 제목으로 큼지막하게 자랑했다.
- ↑ 그것은 알기 싫다의 초창기 프로젝트중 하나인 박정희 소백과사전에 출연한 정운현 편집국장과 동일인물.
- ↑ 1986년 10월 28일 약 2000여명의 대학생들이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약칭 애학투련) 결성식을 위해서 건국대에 모이자, 당시 경찰은 최루탄을 쏘면서 교내로 진입하였다. 경찰의 포위에 걸린 학생들은 교내 5개 건물로 쫓겨들어가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애학투련 지도부는 안전귀가를 보장하면 자진해산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경찰은 단수/단전조치와 함께 건국대를 완전히 봉쇄해버렸다. 강제농성 4일차인 31일날 경찰은 8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건물에 진입해서 1500여명을 체포하고 이중에 1000여명을 구속하였다. 독재정권은 계획적인 점거농성이였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참여자들은 일회성 집회였는데 경찰의 포위에 걸려서 강제농성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뭐 이 시절에 규모만 작다 뿐 비슷한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 ↑ 두 링크 모두 중앙일보 기자 블로그이니 적절히 필터링해서 읽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