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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의 삼성시절 |
이제는 |
한화 이글스 No.47 | |
권혁(權奕 / Hyuk Kwon) | |
생년월일 | 1983년 11월 6일 |
출신지 | 대구광역시 중구 |
학력 | 대구수창초 - 성광중 - 포철공고 |
체격 | 192cm, 100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2002년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
소속팀 | 삼성 라이온즈(2002~2014) 한화 이글스 (2015~현재) |
등장곡 | 메탈리카 - Enter Sandman[1][2] |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47번 | ||||
최재호(1996~2001) | → | 권혁(2002~2014) | → | 최민구(2015~ ) |
한화 이글스 등번호 47번 | ||||
윤근영(2012~2014) | → | 권혁(2015~ ) | → | 현역 |
2009년 KBO 리그 홀드왕 | |||||
정우람(SK 와이번스) | → | 권혁(삼성 라이온즈) | → | 정재훈(두산 베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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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선수 소개
불꽃투혼[3]의 대명사
대전 아이돌
그 분의 합법적 노예
한화 이글스의 투수. 포철공고 출신이며 2002년에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며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삼성의 쌍권총, 그리고 2015 시즌 한화의 불꽃남자. 몇 년간 삼성의 철벽 불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부상 등으로 실력이 하락해 이제 잊혀가는 선수가 되는 듯 했으나, 한화로의 이적 후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주목받던 시절은 있었지만,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 했던 선수에서 2015 시즌의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주인공이 된 선수.
불펜 투수가 이렇게 화제성이 높은 경우는 최근 한국야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김성근 감독의 엄청난 혹사를 꿋꿋히 버텨내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내는 모습이, 꼴지를 전전하던 한화가 2015시즌 가을야구 싸움을 하면서 얻은 투혼의 팀컬러와 잘 맞았기에 가장 언급이 많은 선수중 한 명이 되었다. 기존의 한화 프랜차이즈 스타 김태균과 더불어 2015년 한화의 아이콘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200px |
포철공고 시절 |
이때부터 눈이 쳐졌었...
수창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하였으나, 성광중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키가 160cm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결국 야구를 그만두게 되고 경상공업고등학고로 진학하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키가 급속도로 자라기 시작하여 키가 180cm 이상 자라게 되었고, 당시 포철공고 야구부의 오대석 감독의 눈에 띄어, 고등학교 2학년부터 야구를 다시 시작할 만큼 남들에 비해선 출발이 늦었다.#
그러나 그만큼 큰 키에 힘이 좋고 투구 동작도 내리찍는 파워풀한 스타일이라 포텐셜을 뒤늦게 폭발시키고, 2002년에 누구나 1차 지명을할 것으로 생각했던 대구고등학교의 윤길현[4]을 제치고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삼성 팬덤의 주적이 만들어낸 최악의 희생양 4인방중 하나[5][6]
안정권KO라는 화려함에 가렸으나, 특급 에이스로 꽃피우지 못한채 성적이란 미명하에 불펜노예로 전락하고 혹사에 지쳐 구위를 잃어버린 비운의 선수
2.2.1 데뷔 후 2009년 시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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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뿌렸던 신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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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존 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2007년, 불펜 100탈삼진을 기록했던 리즈 시절.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등판하기 시작했다. 9월 8일 현대전에서 5⅓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선발승을 따냈는데, 상대 투수는 21연승 행진을 이어가던 정민태였다. 2004년 9월 18일 두산전에서 156km/h의 구속을 찍으며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시즌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서 2005년 시즌은 등판하지 못했다. 돌아온 2006년부터 슬슬 완성형 투수로 자리잡는데, 선발보다는 계투진에 중심을 두는 선동열의 방침에 따라 철벽 불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2007년 평균자책점 2.79, 7승 1패 19홀드로 중간계투요원으로 100탈삼진을 달성했다.
2008년까지 보통 삼성의 승리의 공식은, 어떻게든 선발 투수로 5회까지 리드를 잡는다 -> 권혁 1이닝 -> 정현욱 2이닝 -> 오승환 세이브,[7]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일본전에 등판해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하여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2009년에는 오승환이 뻗어버려서[8] 정현욱과 번갈아가면 마무리로 올라오게 되었으며, 올라오는 횟수가 늘어인지 갈수록 성적이 처참해져서 시즌 후반에는 심심하면 털리는 야라레 투수가 되어 버렸다. 지못미. 그래도 어찌어찌 21홀드를 기록함으로서 홀드왕 타이틀은 차지하였다.
2.2.2 2010년 시즌
2009년의 심각한 혹사의 여파로 2010 시즌에는 속구 구속이 140km/h대를 못 찍을때가 많아졌다. 반면 구속이 줄면서 2009년까지 약간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컨트롤이 상당히 개선되어, 예전만큼 끔찍한 강속구를 뿌려대지는 않지만 정교한 제구를 통한 코너웍을 이용해 타자를 처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게 되었다. 오히려 안정감만큼은 지난 시즌 이상이라는 평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결국 ERA 2.09에 7승 1패 4세이브 10홀드를 기록하며[9] 파이어볼러에서 완성형 투수로 변신. 안지만, 정현욱과 함께 삼성의 무적 불펜의 한 축을 이끌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삼성의 필승 불펜조를 선수들의 앞글자만 따서 '안정권'이라고 불렀을 정도다.[10] 문자 그대로 그들이 올라서면 안정권에 접어들 수 있게 된다는 것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덕분에 실제로도 선동열 감독도 2010 포스트시즌에 그런 그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2.2.2.1 2010 포스트시즌에서의 최악의 부진
2010년 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1차전, 팀이 스코어 5:6으로 이기던 9회초에 5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사 1, 2루, 2S1B 상황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혼자 실수로 투수판을 밟은 상태에서 공을 떨어뜨리면서 보크를 범하여 아이작 궈낵 경[11]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보크를 저질러 1사 2, 3루가 되자마자 안지만으로 교체되었고, 안지만이 3번타자 이종욱을 유격수 플라이, 4번타자 양의지를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시키고 경기를 끝냈으니 망정이지, 기껏 이겨논 경기 말아먹을 뻔했다. 이날 권혁은 ⅓이닝 12투구수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홀드를 기록했지만, 보크를 기점으로 (본인 왈)멘탈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어 이후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플레이오프 2차전 : 4타자 상대하여 ⅓이닝 16투구수 1피안타 2볼넷 1희비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27.00.
플레이오프 3차전 : 1타자 상대하여 스트레이트 볼넷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99.99.
플레이오프 4, 5차전 : 등판 못함.[12]
권혁은 2010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⅔이닝 1홀드 2피안타 4볼넷 2실점(2자책) 평균자책 27.00,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 : 1타자 상대하여 스트레이트볼넷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99.99, 패전[13].
좌완 중계로서 권혁의 역할은 삼성내에서 선감독 왈 '유일무이'라고 불리운 그는,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2차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지던 8회초에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7번타자인 박정권을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 박경완을 상대로 홈런을 맞았다. 이 피홈런 때문에 또 다시 멘탈이 붕괴했는지, 다음 타자인 나주환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고 정인욱으로 교체되었다. 권혁의 한계라고 보기엔 2010시즌 자체의 그의 성적은 그렇지 않았기에 삼성 선수단과 삼성팬들로서는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이날 권혁은 ⅓이닝 16투구수 1피안타 1피홈런 1볼넷 1실점(1자책)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1:4로 패했다.
결국 권혁은 10월 1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2010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등판하지 못했고, 팀이 시리즈 전적 3패로 몰린 10월 19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 팀이 스코어 4:1로 지던 8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6번째 투수로 등판했지만, 첫 타자이자 8번타자인 박정권을 상대로 내리 3볼을 던지고 투구폼이 평소보다 매우 불안하다는 평을 받으며 1타자밖에 상대하지 못했다. 권혁은 이날 ⅓이닝 5투구수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4:2로 패했다.
2010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⅔이닝 1패 1피안타(1피홈런) 2볼넷 1K 2실점(2자책) 평균자책점 27.00,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종합, 2010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9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1⅓이닝 1홀드 1패 3피안타(1피홈런) 6볼넷 1K 4실점 4자책점 평균자책점 27.00,[14] 1패를 기록했다.
스포츠 기사나 선동렬 감독등의 인터뷰를 볼 때 '권혁을 비롯한 불펜의 부진'이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좋게 해석하자면 그만큼 권혁이 높게 평가받고 있었고 나쁘게 해석하자면 그만큼 권혁은 이번 포스트시즌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
한마디로 한 것도 없이 망쳐만 놓고 아무것도 못했다. 기록상의 평가로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지경.
2.2.3 2011년 시즌
그 이후로 자신감을 급격히 상실, 2011년 시즌을 2군에서 시작했다. 아무래도 2010년 포스트시즌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떨쳐버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오죽했으면 충격으로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체중이 6kg나 빠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결국 4월 16일 1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까라인[15]...이 아니라 안정권KO 라인이 완성되었다.[16]
8월 2일 넥센전까지 38경기 11홀드 1블론 ERA 2.70 WHIP 1.33 30이닝 23피안타(1피홈런) 18사사구 15K를 기록 중이다. 뭐 충분히 뛰어난 성적이긴 하다. 그러나 이름값과 1억 9천만 원이라는 연봉을 생각하면 기대에 많이 못미친다. 보면 알겠지만, 경기당 1이닝이 안되는 수치로서 이는 당초 기대되던 강력한 셋업맨이 아니라 LOOGY, 즉 원 포인트 릴리프다.[17] 그런데 LOOGY들에게 가장 금물이라 할 수 있는 볼질이 심해졌다. 작년만 해도 73K/19BB였고 통산 K/BB도 2를 넘는데 올해는 어째... 물론 삼성 라이온즈나 국내 야구판에 권혁만한 레프티 릴리버가 있어도 얼마나 더 있겠냐마는, 이전에 비해 좀 안습인건 사실이다.
특이한 건, 좌우 상대 전적이 괴랄하게 밸런스가 안 맞았다. 좌타자 상대 14피안타(2루타 1개. BAA .241) 5K/11BB, 우타자 상대 9피안타(2루타 3개, 홈런 1개. BAA .191) 10K/6BB 1HBP(…). 이건 LOOGY가 LOOGY가 아니다. 아무래도 좌타 상대로는 그라운드 볼을 유도하여 맞춰잡는 전략인 듯한데, 그게 잘 안 되는 듯했다.
결국 2011년에는 평균자책점 1~2점대를 유지하는 좌완 릴리버라는 점만으로도 이래저래 팀에 유용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평균자책점과 WHIP을 보면 알지만, 본인이 볼질하고 내려갔다가 안지만, 정현욱 같은 흠좀무한 불펜이 전부 막아준 경우가 꽤 많았다. 그렇지만 삼성이 권혁 없던 시즌 초중반에 심하게 헤매던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삼성에서 없어선 안되는 중요한 릴리버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8월 6일 사직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로나쌩이던 정인욱이 초반 제구 실패로 무너진 후 팀이 스코어 1:6로 뒤진 상황에 패전처리로 등판하였으나, 실책과 본인의 여전한 제구난으로 인해 오히려 5실점하여 팀이 4:11로 대패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이 경기를 보면서, 많은 삼성팬들은 '삼성 핵심 불펜 중의 핵심이었던 권혁이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는지, 그것도 패전처리에서도…'라는 반응을 보이며 많이 씁쓸해했다. 분명 삼성의 특급좌완계투였던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상황이 아닐 수 없으며, 그야말로 처절하게 몰락한 거와 다름이 없었다. 당시 삼성의 쓸만한 좌완계투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2011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을 위해서는 그의 부활이 정말로 절실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페이스를 좀 되찾은 모양인지 왠일로 호투하면서 살아나는가 했더니, 8월 24일 청주 한화전에서 8회 3:2로 앞선 상황에서 나와 미친듯이 처맞고 1사 만루에서 강판, 바로 교체한 안지만이 그의 뒷처리를 하려다 오히려 역전을 허용하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타선 침체로 인해 3연패에 빠져 있었던 팀을 오히려 4연패로 몰아넣고... 결국 이날 안일하게 경기 운영하다 경기를 내준 류중일, 9회말 흔들리던 바티스타를 상대로 영웅스윙을 시전하다 폭풍삼진당한 채태인과 함께 삼성 팬들에게 개같이 까였다.[18] 역시 이놈은 답이 없다...라고 생각하던 차 8월 26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8회에 등판하여 또 왠일로 호투하면서 2연승의 밑거름을 다져놓았다. 좀 들쑥날쑥해도 두산에게만큼은 강한 점도 있었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날은 구속이 어느정도 돌아와서 고무적이었다. 올시즌 내내 원래 부족한 제구에 구속까지 안나와서 고전하던 차에 나온 이날 호투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 5경기 중 3경기에 나와 ⅓이닝 2피안타 1볼넷으로 부진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외로 실점은 0이다. 사실 권혁 다음 투수가 1차전에서는 오승환, 4차전에서는 안지만인지라 분식회계를 안 당해서 실점이 없는 것뿐이었다.[19]
권혁이 이렇게 부진했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2.2.4 2012년 시즌
해당 항목으로.
2.2.5 2013년 시즌
해당 항목으로.
2.2.6 2014년 시즌
나름대로 부활은 한 듯하다. 대신 기회를 안 줘서 그렇지....
2013년 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재활 차원으로 2군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당초 예상과 달리 시범경기에도 출장했고 개막전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경기에는 나오지 못했고, 결국 3월 31일 2군으로 내려갔다. 4월 25일 1군에 복귀했다.
복귀 후 모습은 비교적 성공적.
4월 25일 넥센전에는 점수차가 큰 상황이긴 했으나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5월 4일 NC전에는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고 내려갔으나, 5월 7일 SK전에는 4: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 등판하여 제구는 불안했으나 1이닝을 막았다. 그리고 9회에 팀이 SK의 필승조를 탈탈 털며 뜬금없이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첫 승리이자 2012년 7월 12일 이후 664일만의 승.
6월 4일 허리 통증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2군으로 내려갔는데, 권혁은 5월 20일 이후로는 등판하지를 않았다(...). 대신 백정현이 올라왔다.
6월 27일 김현우와 1군에 복귀했다. 이후 7월 5일 두산전에 등판하여 나쁘지 않은 투구를 보여줬다.
7월 24일 경기에서도 등판하였는데, 2이닝동안 전성기 수준의 피칭을 보여 삼팬들을 설레게 하였다. 유일하게 맞은 안타 하나가 전준우의 홈런인 것도 고무적, 그리고 7회초, 메가라이온즈포가 터지며 시즌 2승째를 챙겼다. 팬들은 이러한 활약에 후반기 삼성 불펜의 핵으로 재강림하기를 기대하는 중.
7월 25일 대구 NC전에서 10:6으로 앞선 9회초에 등판해 삼진 1개 포함 삼자범퇴를 기록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날 속구 최고구속은 149km/h.
7월 27일에는 1:1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1안타와 1볼넷을 기록했으나 삼진만 2개를 잡았다. 삼진/볼넷 비율이 4를 왔다갔다 할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 차우찬의 페이스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좌우놀이를 사랑하는 감독 특성상 왼손 투수로 필승조에 포함될 듯 하다.
8월 6일 한화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맞고, 8월 8일 롯데전에선 한 타자도 못잡고 1자책을 허용했으나, 끝내기 홈런은 임창용의 블론 이후 나온 것이라 삼성팬들은 임창용을 까기 바빴고, 롯데전에선 좌우놀이에 휘말려 1타자를 출루시킨 뒤 심창민의 깔끔한 분식으로 실점한 것이라 권혁에겐 비판의 화살이 거의 없었다. 이듬해 이 팀으로 적을 옮긴 후, 정근우가 이때 맞은 홈런을 가지고 권혁을 놀린다는 얘기가 있다
8월 11일 넥센전에선 이택근에게 2루타를 맞았으나 두 타자를 무사히 잡아내고 팀의 역전승을 견인했다.
이후로 잠시 부진하는 듯했으나, 8월 27일에 열린 롯데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6:4로 뒤진 5회초 2사부터 등판하여 타자 넷을 4타수 3K로 잡아내며, 초전부터 장작 포텐을 터뜨린 어느 용병과 이후 등판하여 장렬한 퐈이아를 시전한 수건이 부진한 가운데 제 역할을 했다. 다만 팀이 스코어 11:4로 탈탈 털린 것은 흠.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여 서건창을 초구 외야 플라이로 잡아내고 배영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그리고 이 등판이 유일한 한국시리즈 등판이 되면서 공 1개만 던지고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고효율 야구
2014년 11월 26일, 삼성과의 FA 우선협상이 결렬되었다. 자신과 구단이 제시한 금액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본인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어서 나섰다고 밝혔다. 보통 FA선수가 기회 운운하며 협상이 결렬되면 대부분의 경우 기회=돈으로 인식되는게 일반적인데, 권혁의 경우 좋은 공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삼성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권혁과의 협상 결렬에 매우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더군다나 2015년 삼성의 계투진에서 임창용, 안지만, 심창민을 빼면 제대로 된 투수가 없었기에 아쉬울 따름이다.[20]
2.3 한화 이글스 시절
2014년 11월 28일, 한화 이글스와 FA 계약을 체결했다. 4년 총액 32억 원(계약금 10억 원, 연봉 4억 5,000만 원, 옵션 4억 원)으로, 거품이 가득 낀 FA 시장 상황에서 세간의 예상보단 낮은 금액으로 계약을 맺었다. 정말 돈보다는 필승조나 마무리를 보장받길 원한 듯하였다.
이로써 한화는 20인 명단에서 빠져 KT 위즈로 이적한 윤근영이라는 좌완 불펜의 누수를 그 이상의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로 대체하였다.[21] 좌완 불펜이 부족한 한화에서 매우 긴요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이며, 출장 기회를 원했던 그의 바람은 충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좌완 투수 조련에 매우 능하며 권혁과 같은 와일드 씽 유형의 불펜자원을 정말 잘 활용하는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이어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22] 오랜 감독 생활 중 처음으로 외부 FA 선수를 선물받은[23] 김성근 감독의 기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편 권혁의 FA 보상선수로는 상무 입대를 앞두고 있는 포수 김민수가 지명되어, 김민수는 상무 제대 후 고향 팀에서 뛰게 됐다.
2.3.1 2015년 시즌 : 불꽃남자
누군가 날 믿어준다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다.ㅡ 인터뷰 中
내가 마무리를 실패했을 때 나오는 소리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을 던지겠다.ㅡ 2015년 5월 12일, 인터뷰 중 혹사 논란에 대한 답변 中
힘들면 내가 힘들다고 말할 것이다. 던질 만하니까 던진다.ㅡ 인터뷰 中
대전의 영웅
한화 이글스의 수호신
끊임없는 혹사 논란에도, 묵묵히 제 한몸 불사른 남자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을 불살라 하얗게 재가 돼 버린 시즌
해당 항목으로.
2.3.2 2016년 시즌 : 재가 되다
올해도 살려조
결국 8월 24일, 팔꿈치 통증으로 서산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해당 항목으로.
결국 10월 15일, 팔꿈치 수술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3번째 팔꿈치 수술이며, 뼛조각 제거 수술로는 두 번째.
2.4 한화 이글스에서의 혹사
8월 24일, 권혁은 팔꿈치 통증으로 인하여 1군에서 말소되었다. 올 시즌 현재(2016년 8월 25일 기준) 권혁은 66경기 95⅓이닝을 기록 중인데, 비록 리그는 다르지만 메이저리그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등판하고 있는 오승환이 61경기동안 64⅓이닝을 던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24]
올 시즌 뿐만 아니라 권혁은 최근 2년 동안 144경기에 나서 207⅓이닝을 던졌다. 2년 동안 권혁이 던진 공은 3,752개로 경기당 평균 26개를 던졌으며. 특히 최근 2년간 한 경기에서 4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날은 모두 26차례나 됐고, 이중 5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날도 6차례에 달한다. 기사, 박동희 칼럼 또한 연투 횟수는 총 34회로 지난해 2연투가 12회, 3연투가 8회로 20번을 던졌고, 올해 2연투 10회, 3연투 4회로 14번을 던졌다. 같은 기간동안 박정진은 총 41회로 권혁보다 많이 연투를 했지만 투구이닝수는 권혁이 훨씬 많다. 지난해 2이닝 이상 투구한 경기가 총 27회이고 이 중 3경기가 3이닝 이상 던진 경기였다. 올해는 2이닝 경기가 19회 그 중 3이닝 경기가 4회있었다. 즉, 2년 동안 2이닝 이상 경기가 46회, 3이닝 경기가 7회에 달했다.
그리고 셋업 상황이라고 볼 수 없는 5점차 이상의 경기에서 2년간 17경기 22이닝 355구를 던졌는데, 이 중에서 10점차 이상 경기도 2경기가 있었다. 큰 점수 차에서 권혁의 경기감각을 조율하기 위해 등판한 경기도 있었지만 김성근 감독의 조바심으로 인해 등판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타고투저 시대라서 5점차 리드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최근 2년간 5점차 리드가 뒤집힌 것은 1,282경기 중 30경기로 2.3%에 불과했다(2016년 8월 26일 기준).#
최근 2년의 기록이 잘 실감이 안 나는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국민노예라는 별명을 가지고있는 정현욱의 시즌 최다 이닝 기록은 2008년 53경기 7선발 127이닝이며 등판 간격은 불규칙했으나 연투는 2연투만 5번정도로 나름 등판 간격을 조절했었다. 다음 시즌 2009년엔 62경기 79이닝으로 2년간 115경기 206이닝을 던졌다. 즉, 권혁은 선발없이 국민노예를 뛰어넘는 등판을 하고있다는 것.
이 혹사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할 이유 중 하나는 투수 혹사의 기준이 김성근 감독의 투수기용 방식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즉 김성근처럼 하지 않으면 투수 혹사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최근 몇 년간 NC와 KT의 리그참가로 인한 경기수 확대, 극단적인 타고투저가 벌어지면서 투수들이 받는 피로감이 높아지고 있다.아무리 점수차를 많이 벌려도 금방 따라잡히거나 바로 역전당하는 경우가 많아지다보니 그나마 믿을 만한 선수라도 자주 나올수밖에 없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굴려지게 되며 결국에는 그 믿을만한 선수도 퍼질수밖에 없다. 게다가 올해는 기록적인 폭염과 함께 치열한 5강싸움으로 인한 심리 요소 때문에 투수들이 느끼는 피로도는 극심할 수 밖에 없다. 투수들이 이런 피로도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최근들어 5강 싸움을 한다는 이유로 각 팀마다 3연투는 기본이고 4연투, 5연투까지 나오고 있다.[25] 그러나 한화의 혹사로 인해서 권혁 정도의 혹사가 아닌 이러한 혹사는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고 있다.
비록 김성근 감독의 투수기용 방식처럼 투수들을 노예 수준으로 혹사시키는 것보다 덜하지만 지난 해 본인이 개처럼 굴렸던 투수들이 후반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도하고서도 전혀 배운 게 없이 또 굴리는 감독도 있다. 한화 팬들이 김성근에게 바랬던 모습은 그의 이미지로 여겨졌던 쌍방울 레이더스로 대표되는 "약체 팀을 강하게 만드는 감독"이었는데, 정작 김성근은 그 이미지에 집착한 탓인지 성적 조급증에 미쳐서 베테랑 선수 팔을 갈아넣는 감독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10월 30일 엠스플뉴스의 보도에서, 김성근 감독이 권혁에게 무통주사를 맞으며 1군에서 던질 것을 요구했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권혁이 난색을 표시하자 김성근은 서산에 머물던 권혁에게 감독의 권한을 이용해 '외박 금지' 등의 규정을 만들어 권혁을 단속했다는 것이다. 감독의 권한을 이용해 권혁을 가족과도 지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권혁은 앞으로 선수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도 염려된다. 기회를 더 얻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적한 팀이 이런 팀이라니... 본인에게도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3 투구 스타일
가공할 만한 공 회전력, 평균구속 150km/h를 웃도는 공을 가진 좌완에선 보기 힘든 파이어볼러였다.[26] 서승화와 함께 한국프로야구 좌완 공인 최고 구속(156km/h) 기록의 보유자.[27] 기본적으로 상체 중심의 피칭을 하고, 제구는 상당히 불안한 편. 던지는 구종도 직구-슬라이더로 단조롭다.
기본적으로 제구가 좋은 투수는 아니지만 빠른 구속과 묵직한 구위로 찍어눌러도 타자들이 맥을 못 췄기에 초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사실 뛰어나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성적을 냈다. 허나 2010년 이후부터는[28] 혹사 누적으로 이전보다 팔스윙이 느려지고 그로 인해 공의 무브먼트나 구위도 저하되며 삼성 철벽 불펜진의 일원으로서 신뢰를 얻지 못하였다. 그나마 삼성 불펜진이 굳이 권혁이 빠지더라도 워낙 막강이라 그냥 묻어가는 모양새였다.[29] 그리고 2013년, 불펜진에 균열이 생기면서 본격 까임의 대상으로 등극. 하지만 권혁 이외에는 쓸만한 삼성 왼손 불펜이 1, 2군 통틀어 전무한지라 삼성 불펜진의 아픈 손가락이자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차우찬은 원 포인트로 쓰기엔 너무 아깝고, 백정현, 조현근은 1군으로 올리기도 영 애매하다[30][31]
공교롭게도 그가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과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삼성의 본래 팀 컬러와 영 맞지 않았던 모 감독의 재임기와 사퇴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 때문인지 삼성 팬덤에서는 배영수, 권오준 등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후반 삼성 투수진 혹사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보기도 하고 있다.
박재홍 해설 위원에 따르면 SK 와이번스 분석팀에게 투구폼이 읽혔다고 한다. 그래서 박재홍 위원은 권혁이 나오면 좋아했다고.
4 이야깃거리
- 힙합보이나 국민노예에 비해 임팩트가 있는 별명이 오랫동안 없었다. 데뷔 때는 겉으로 보면 한 성깔 할 것 같은 외모, 항상 짧은 헤어스타일, 큰 키와 덩치까지 겹쳐셔 별명이 강백호였으나 금방 묻혔고(...), 오히려 다른 권씨 성을 가진 선수인 권오준과 함께 엮여서 '쌍권총'이라고 불리는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허구라가 발음하는 궈넥이 별명으로 쓰였을 정도. 그러던 와중 2012 시즌에 채르노빌, 최형우라늄, 차르 봄바와 함께 하는 원자력 라인에서 핵을 맡았다.[32] 팀을 옮긴 첫해인 2015년, 윤규진이 부상으로 빠진 사이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필요한 순간마다 삼진을 잡아내며 불꽃남자, 그 인기가 대전 구장 내 아이돌급이란 의미인 대전 아이돌이란 별명이 추가되었다.
- 중학교 재학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키가 작았으며,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이유로 야구를 잠시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고교 진학 후 키가 부쩍 자라 포철공고로 전학 가며 계속 야구를 하게 되었다. 참고로 프로필상 키는 187cm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입단 당시의 키. 프로 입단 후에도 키가 커 지금은 190cm 이상이다. 2014년 192cm로 공식 프로필이 수정되었다.
- 2003년 2월 하와이 전지훈련 때[33] 2.5M 깊이의 물에 빠져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수영이 능숙하지 않음에도 깊은 데로 갔다가 빠진 경우인데,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제대로 빠져서 익사 직전까지 갔다가 인공호흡 및 응급처치로 살아난 케이스. 정황상 권혁은 당시 그곳이 그렇게 깊은 곳인 줄 몰랐던 것 같다. 물놀이 분위기가 고조되어 맥주병 선수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폭포를 왕복하고 있었는데 권혁도 그렇게 하다가 빠진 것. 체격 건장한 운동선수라 물에 빠져도 어떻게든 나올 것 같은데 당시 권혁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가라앉았던 걸 보면 역시 물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맞는 듯. 다행히 현장에 있던 배영수와 이재국 기자[34]가 가까스로 그를 건져내서 응급조치로 살려냈다. 당시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사진도 있음. 그리고 13년 뒤인 2016년 현재 배영수와 권혁은 나란히 한화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 마해영이 방송에서 권혁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뒤로 구속이 150km/h가 넘었다면서, 한 번 더 빠지면 160km/h가 넘을 거라고 농담했는데 방송에서 왜 그런 걸 말했냐고 싫어한 걸 보면 본인의 흑역사인 듯하다. 일반적으로도 이런 일을 겪으면 트라우마가 생기는 법이다. 숨길 것도 없지만 공중파에서 대놓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 근데 솔직히 말해 죽을 뻔한 일을 남이 방송에서 농담 삼아 얘기하는 걸 누가 좋아할까.
- 2009년 9월 6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예정에 없던 구원등판을 하게 되었는데, 유니폼이 없었다. 평소같았으면 다른 선수 유니폼 빌려입고 나갔겠지만 하필 이 날 김응용 사장이 참관하고 있던 터라... 최원제가 권혁의 이름이 마킹된 유니폼을 갖고 있던 팬[35]에게 부탁해서 유니폼을 빌려입었는데, 그 사이즈가 너무 작았다. 그나마 너무 작아 겨드랑이를 잘라낸게 저정도라고.
그냥 경기장 밖에서 어센틱 유니폼을 사와그럼 한국야구도 이제 빨래끝난 유니폼 선수가 직접 찾아가는 식으로 하지 말고 메이저리그처럼 구단 유니폼만 관리하는 전담 직원을 마련하던가..는 그럴 돈 없다능
- 2009년 시즌 후에 2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2010년 12월 15일. 득녀했다!
하지만 분유버프는 없었다
- 여담으로 대구 팔공산 정상에 올라가면 '삼성 라이온즈 권혁 파이팅!' 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권혁이 경기에서 보이지 않던 시절인 것을 보아 2012년 5월 초 쯤으로 추정된다.
- 2015년 시즌 전반기 시점에서 한화의 최고 인기 선수 중 한명. 6월까지 중위권을 유지해 본게 너무 오랜만(...)인 한화인데 그를 위해 박정진, 송창식과 함께 눈물나는 투혼을 보여준 중간계투의 핵이기 때문이다. 대전 구장에서 권혁의 등판 순간 제일 환호가 커지며, 유니폼도 권혁 마킹이 제일 잘나간다. 4종류 유니폼 권혁 마킹이 죄다 동이 나는바람에 예약까지 받는데, 예약조차 몰려서 대기자도 엄청 많다는 구단 프런트의 얘기가 있을 정도. 한화 이글스 갤러리엔 이미 그의 등짝에 하악(...)대는 팬들이 출몰하고 있으며, 한화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 불꽃 투혼을 가장 잘 나타내는 선수로 인식되고 있다. 한화 이글스 갤러리의 애칭은 권따. 야민정음이 아니라, 2015년 청주 경기에서 '권혁 따랑해'라는 아재들의 응원 문구가 중계 영상에 잡혔는데, 이 표현이 너무 찰지게 입에 붙은 나머지 권따로 줄여 부른다. 특히 권혁이 불꽃 투구를 펼친 날에는 온갖 짤방과 움짤이 올라오고 권따 뒤에 하트를 몇개씩 붙인다(...).
다들 그렇게 게이가 되는거야
- 상당히 신실한 불교신자로 추정된다. 모자, 글러브에 불교를 상징하는 '卍'자가 새겨져 있고 "다시 태어난다면 야구선수를 하겠느냐"라는 질문에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때 생각해보겠다"라고 굉장히 심오하게 대답하는 등... 나름 열성신자인듯. 어떤 인터뷰에서는 부인이 올림픽 때 지리산 절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를 올린 그 마음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하기도 했다.
- 마운드에 김성근 감독이 올라갈 때 유독 스킨십이 잦은 투수. 감독의 말에 따르면 투구를 한 후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을 자주 보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경기중계 화면을 자세히 보면 다른 투수들보다 자주 더그아웃 쪽을 힐끔거리며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2015년 저축의 날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였다. 삼성의 도박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가운데서 권혁도 썰이 풀리기도 했는데, 국무총리 상으로 그러한 썰을 완전히 씻어버렸다. 한화 권혁, 멍든 야구계 빛낸 '국무총리 표창'.
- 2015 시즌 종료 후 마무리 훈련을 떠나지 않고 대전에 남아서 재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예비군 훈련장에서 "대전의 영웅"이 등장하였다며 깜짝 스타가 되기도 하였다. "대전의 영웅" 권혁, 예비군 훈련장 스타 된 사연. 그런데 몇년치를 몰아서 하다보니 거의 2주 가까이 예비군 훈련장에 모습을 나타내서 나중엔 다들 군대에서 사는줄 알았다고.
- 팬서비스는 간단하게 츤데레로 정리되는 듯. 올라온 후기들에 "안해준다고 하면서 다 해준다"라는 얘기가 대부분 적혀있다. 한 팬이 찍은 영상
아 모양 빠지니까 (선물)빨리줘용일화
- 디시위키에서는 권혁 문서가 사찰연기설화가 됐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2 | 삼성 라이온즈 | 2 | 4 | 0 | 1 | 0 | 0 | 0.000 | 13.50 | 11 | 2 | 0 | 0 | 1 | 6 | 6 | 2.750 |
2003 | 23 | 39⅓ | 3 | 2 | 0 | 2 | 0.600 | 5.26 | 40 | 5 | 21 | 0 | 26 | 26 | 23 | 1.551 | |
2004 | 37 | 81 | 3 | 3 | 0 | 3 | 0.500 | 4.78 | 80 | 12 | 38 | 4 | 78 | 44 | 43 | 1.457 | |
2005 | 1군 기록 없음 | ||||||||||||||||
2006 | 12 | 8 | 0 | 0 | 0 | 2 | 0.000 | 4.50 | 8 | 1 | 6 | 0 | 6 | 4 | 4 | 1.750 | |
2007 | 60 | 77⅔ | 7 | 1 | 0 | 19 (3위) | 0.875 | 2.79 | 47 | 2 | 39 | 3 | 100 | 26 | 24 | 1.112 | |
2008 | 43 | 47⅔ | 6 | 0 | 0 | 15 (4위) | 1.000 | 1.32 | 36 | 2 | 22 | 1 | 37 | 10 | 7 | 1.217 | |
2009 | 63 | 80⅔ | 5 | 7 | 6 | 21 (1위) | 0.417 | 2.90 | 64 | 10 | 42 | 4 | 76 | 29 | 26 | 1.314 | |
2010 | 60 | 73⅓ | 7 | 1 | 4 | 10 | 0.875 | 2.09 | 54 | 6 | 19 | 2 | 73 | 18 | 17 | 0.995 | |
2011 | 58 | 48⅓ | 1 | 3 | 0 | 19 (4위) | 0.250 | 2.79 | 38 | 2 | 22 | 2 | 27 | 19 | 15 | 1.241 | |
2012 | 64 | 49⅓ | 2 | 3 | 1 | 18 (5위) | 0.400 | 3.10 | 48 | 2 | 20 | 1 | 38 | 18 | 17 | 1.378 | |
2013 | 52 | 36⅓ | 0 | 1 | 0 | 3 | 0.000 | 3.96 | 35 | 5 | 16 | 1 | 41 | 17 | 16 | 1.404 | |
2014 | 38 | 34⅔ | 3 | 2 | 0 | 1 | 0.600 | 2.86 | 27 | 4 | 11 | 0 | 38 | 13 | 11 | 1.09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홀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15 | 한화 이글스 | 78 (2위) | 112 | 9 | 13 (1위) | 17 | 6 | 0.409 | 4.98 | 124 | 15 | 53 | 5 | 88 | 68 | 62 | 1.58 |
2016 | 66 | 95⅓ | 6 | 2 | 3 | 13 (10위) | .750 | 3.87 | 93 | 5 | 42 | 7 | 77 | 45 | 41 | 1.42 | |
통산(13시즌) | 656 | 787⅓ | 52 | 39 | 31 | 132 (2위) | 0.571 | 3.57 | 705 | 73 | 351 | 30 | 706 | 343 | 312 | 1.34 |
역대기록(타자)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
2015 | 한화 이글스 | 1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
통 산 | 1 | 1 | .000 | 0 | 0 | 0 | 0 | 0 | 0 | 0 | 0 | .000 | .000 |
- ↑ 마리아노 리베라의 현역시절 등장곡이었다.
- ↑ 삼성 시절엔 터보의 검은 고양이를 썼다.
- ↑ 불꽃투혼이라는 말 때문에 권혁의 등판이 미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21세기 현대 야구에서 있을 수 없는 심각한 혹사이다.
- ↑ 현 롯데 자이언츠
- ↑ 같은 이유로 선발로 대성할 기화도 못 받은 채 혹사당하고 재능을 잃어버린 권오준, 부상당한채 06 한국시리즈에서 모든걸 불태우고 그 압도적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배영수, 팀에 리빌딩이 필요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비참하게 내쳐진 양준혁, 이 네 명이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 ↑ 그 미친 혹사를 당하고서도 살아남아 류중일의 관리하에 전성기를 아직 달리고 있는 안지만, 오승환이 대단한거지... 참고로 안지만 또한 선발자원이었다. 6이닝 노히터를 기록한 적도 있었던... 쌍권총 듀오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성적이란 이름하에 노예로 굴러졌지만 끝끝내 부상으로 망가지지 않고 KBO 역사상 최고의 셋업맨이 되었기 때문에 피해자라는 소리까진 어울리지 않아서 여기서 빠진 것이다.
- ↑ 상황에 따라 정현욱과 권혁의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JKO펀치라 부르기도.
- ↑ 이는 삼성의 2009년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로 직결된다.
- ↑ 특히 삼진 개수는 유지하면서, 사사구 개수가 예전보다 월등히 줄어들었다.
- ↑ 위의 2명과 권혁.
- ↑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패러디.
- ↑ 등판 못한 거 자체가 치명적이었다. 팀이 3, 4차전 모두 7명의 투수를 쏟아부었기에 4, 5차전에서 투수가 1명이라도 더 필요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권혁은 중심불펜 역할을 예정중이었으므로 더욱 타격이 컸다.
- ↑ 오승환이 김재현에게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결승점을 득점한 주자를 내보낸 권혁이 패전투수가 되었다.
- ↑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 포스트시즌 평균자책점을 모두 27.00을 찍는 위엄을 달성.
- ↑ 정현욱-오승환-권-권오준-안지만의 이니셜 앞글자를 따면 JOKKA다. 자세한건 조까항목 참고.
선수들 욕하는 아니다. 타자들 조까라는 뜻 - ↑ 사실 조까보단 안정권KO가 등판순서에 더 어울린다. 그리고 2011년엔 안지만이 선발로 나오면서 진짜 안정권KO 순서대로 등판할 뻔 했다!
- ↑ 물론 예전과 달리 선발 투수들의 소화 이닝이 6이닝 이상까지 올라갔으며 8회에는 힙합전사가, 9회에는 인간투석기가 풀가동 중인 점을 감안하면 이는 6~7회의 아웃카운트 4~6개를 정현욱, 권오준과 나눠 소화하게 되기 때문에 납득하지 못할 변화도 아니다. 권오준만 해도 경기당 1이닝이 되지 않는다.
- ↑ 2011시즌 권혁의 성적은 1승 3패인데 3패가 모두 한화전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삼성은 이 시즌에 유일하게 한화에게 상대전적에서 뒤졌다. 1승은 7월 19일 SK전.
- ↑ 상세하게 따지면, 1차전에서는 1타자 상대 1피안타, 3차전에서는 팀이 1: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SK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고 4차전에서도 1타자 상대 1볼넷을 기록했다.
- ↑ 2016년 8월 현재 이 셋 중 임창용은 도박 사건에 연루된 뒤 방출되어 고향팀으로 이적하였고, 안지만 역시 도박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불법 도박 싸이트 개설 혐의로 계약해지당하며 셋 중에 심창민만 삼성에 남아있게 되었다.
- ↑ 공교롭게도 두 선수의 등번호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화 관련 커뮤니티에선 주황색 잉어킹이 푸른색 갸라도스로 진화했다(...)는 식의 드립이 인기를 끌었다.
- ↑ 선수 본인도 계약을 체결하며 "김성근 감독님과 야구하고 싶었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 ↑ FA제도가 시행된 후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았으나 두 구단 모두 김성근 감독에게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양준혁(LG), 이진영(SK) 등 내부 FA를 타팀에 내주는 등 김성근 감독에게 FA는 연이 없었다.
- ↑ 오승환은 전문 마무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그런 오승환조차 최근 잦은 등판으로 인해 혹사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 ↑ 8월 셋째주 한 주동안 KIA 김광수와 박준표, 롯데 이정민이 4연투, 한화 심수창이 5연투를 했다.
- ↑ 사실 지금도 140 중후반대의 속구를 던진다. 좌완임을 감안하면 충분히 빠른편.
- ↑ 2004년 두산 베어스와의 시즌경기에서 기록. 2004년 포스트 시즌에서는 157km/h를 찍기도 했으나 페넌트레이스 중이 아니라서 시즌 정식기록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 ↑ 특히 위에서 언급했던 2010년 플레이오프의 보크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었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 ↑ 특히 2011년에 그런 모습이 확연하였다. 겉보기 성적과 실제 투구내용과의 상당한 갭이 있다.
- ↑ 보충 설명을 하자면 삼성 시절 권혁은 몸이 늦게 풀리는 편이라 마운드위에서 타자를 상대로 던지면서 감을 잡는 스타일이였다. 선동렬 아래에선 구위가 엄청날때는 감을 잡는 동안 구위로 버텼지만, 혹사와 보크 사건 이후인 류중일 아래에선 구위가 떨어지며 감을 잡는 동안 팩질을 하거나 두들겨 맞았다.
- ↑ 물론 몸이 완전히 풀리면 위력적이지만 그때까지 장작을 쌓을 확률이 꽤 높아서 위험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셋업에는 안지만이 있는지라 삼성벤치에서는 굳이 권혁을 올리는 위험한 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안지만도 불안하면 8회 2사에 오승환을 올리는 치트키가 있었다(...) - ↑ 사실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삼성의 사실상 유일한 좌완 필승조라는 점에서 권혁을 '불펜의 핵'으로 자주 일컬었기 때문.
하지만 팬들에겐 그런 거 없고 핵폭발 - ↑ 2006년이라고 잘못 기재했었는데, 이건 아마 사진을 2003년에 촬영한 뒤 2006년에 블로그에 업로드한 것으로 추정된다. 블로그를 보면 이승엽과 틸슨 브리또, 김진웅, 이정호가 삼성에 있었고 손혁과 차명주가 두산 베어스 소속인 상태이다. 당시 권혁은 입단 2년 차였다.
- ↑ 당시 스포츠조선 소속. 현재는 스포츠동아로 옮긴 상태이다. 이광용의 옐로우카드의 주 패널로 잘 알려져 있다.
- ↑ 아마 여자 팬인 듯. 크기를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