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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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智泰
1908년 7월 ~ 1982년 4월 9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언론인. 정치인이다.

1908년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섬유한국생사, 삼화고무 등의 기업을 경영하였다. 1949년 부산일보를 인수하였다. 1958년 부일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959년 부산문화방송을 개국하고, 1961년 문화방송을 개국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 같은 해 제명되었다가 1957년 복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에서 안준기에 밀려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부산진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종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김지태는 부정축재자 명단 1호에 오른다. 당시 부산 학생들은 김지태의 집으로 몰려가 집을 불태우면서 ‘악질친일재벌을 처단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당 시절에 대한민국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20여만평의 농지를 편법으로 구입한 바 있는데, 이것이 부산 지역 민심을 격발시켰던 것.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고, 중앙정보부에서 강압에 의해 재산을 헌납당하였다. 이로써 부일장학회는 5.16 장학회가 되고,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박근혜 현 대통령의 정수장학회가 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선여부비고
1950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부산시 갑)무소속-당선
1954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부산시 갑)자유당-당선
1958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남도 부산시 부산진구 갑)무소속-낙선

3 친일 논란

김지태는 1927년부터 1932년까지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서 근무하다가 폐결핵으로 퇴사하였다. 입사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고 중도퇴사 직원을 적극적 친일파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반박될 수 있다. 김지태는 조선지기회사와 직물공장, 조선주철공업 등을 운영하면서 포장상자, 군복, 군수물자 생산을 하면서 전쟁특수로 때돈 벌었다. 참고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에 따르면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역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지목하고 있다.

더구나 이 사람, 동척에서 퇴사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의 인간적 신뢰로 동경의 본사와 의논해 불하받은 울산의 땅 2만 평을 10년 분할 상환으로 불하받았다고 하는데, 당시에 일본인도 1만평 이상 불하받기 힘들었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 식산은행 정보에 따르면 농업 대부는 15정보(약 45000평) 이상의 지주계급에게만 한정하였고, 토지 개량 사업을 위한 국고 지원금은 30정보 이상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게 과연 단순한 근무자였다고 볼 수 있는가? 더구나 동척이 설립되었을 때는 순사보다 동척이 더 악명이 높았을 정도다. 나석주 의사가 괜히 거기다 폭탄을 던지신 게 아니다.
김지태가 불하받은 땅에서 수확한 벼는 매년 분할상환금을 갚고도 100석 이상이 남아서 그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하면서 사업을 키웠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김지태의 유족들은 그가 신간회에서 애국활동도 했다고 주장하였고, 일제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던 조선노농총동맹에서 1923년, 1924년 연거푸 회장직을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지태는 1908년 생으로, 유족들 말이 맞다면 부산제2상업학교(現 부산상고)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인데, 당시 잘나가는 사회주의자 형님들을 제치고 회장이 되었다는 소리가 된다. 더구나 이게 사실이면 동척은 사회주의자를 입사시킨 셈이 되고, 한때 마르크스보이였던 김지태는 인민을 수탈하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뭐 이런 것을 떠나서 독립운동하다 변절한 친일파들도 욕먹고 있는게 현실인데, 김지태라고 옹호해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승만 정권의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거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친일명단에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거기 명단에 없는 박정희도 친일파가 아닌 셈이 된다.

한편 박근혜/개인처신 문제 문서에서는 김지태의 이러한 친일 논란에 대해 반박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더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