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사 이승복
Robert Seung bok Lee | 이승복 |
출생 | 1965년 |
직업 |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의사 |
학력 | 다트머스대학대학원 의학 박사 등 |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의사로 2011년 기준으로 미국에 단 두명 있는 사지마비 장애가 있는 의사다. 인간승리초고교급의 희망를 한 사람중 하나로, 한국인이었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일해야하기 때문에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꿨다. 한국에서는 인간극장에 출연한 뒤 인지도가 올라갔다.
초등학생때 미국으로 이민간 후 체조를 시작하여 고교시절 여러 명문대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을정도로 뛰어난 엘리트 체조선수였다. 한국국적을 유지하면서 88올림픽 한국 체조 국가대표를 꿈꿀정도로 유능한 선수였지만 연습도중 착지실패로 경추 7번이 골절되어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사고 후 재활을 받으면서 재활의학에 대한 관심과 의사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2011년 연방정부로부터 장애인들의 간병인 고용을 위한 지원금을 간병인을 고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허위로 150,000불(2016년 기준으로 약 1억 6000만원)이나 착복해서 2014년 향후 13년 동안 미국 내 의사면허 정지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저서로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가 있다.
2 시인 이승복
시인이며 문학자로 홍익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이며 시의 운율 분석의 권위자이다.
3 이승복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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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당이 싫어요.[1]'"- 피살 직전의 이승복 -
1.21사태 청와대습격사건이 있던 1968년 10월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군의 초가집에 침입했다. 당시엔 북한의 무장 공격이 도처에서 벌어진 시대였다. 전년도인 1967년에는 1, 4, 5, 8, 9월에 군함 피격, 휴전선 남하 북한군과의 교전, 철도폭파테러, 어선피격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무장간첩들이 당시 속사국민학교 2학년인 이승복(당시 9세)에게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자 이승복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공비들은 이승복의 입을 찢어 살해했다. 이후 발견된 이승복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진 상처,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자 형태의 상처 2개가 뚜렷한 상태였다.
이렇게 이승복과 그의 가족은 무장 간첩에게 습격을 당했다. 그나마 일가족 3명은 목숨을 건졌는데, 36곳에 칼을 맞고 거름더미에서 발견된 형 이학관(당시 15세), 이웃집 이사를 돕다 돌아와 공비에게 붙잡혀 다리를 칼에 찔린 뒤 도주한 아버지 이석우, 그리고 할머니 강순길(1980년 별세)은 생존했다. 당시 많은 언론들이 이 사건을 취재했는데, 조선일보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군의 발언이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는 특종 보도를 하게 된다.
이승복의 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때 사건으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한 그의 형 이학관 씨를 포함한 유가족들 역시 "너무 지쳤다"며 논란에 휩싸이는 것보다 안식을 바란다고 한다. 2009년 무장공비 120명 중에 한명이었던 김익풍씨가 이승복 41주기 기념식에서 이학관씨 부부에게 사죄를 한 적이 있다.
2014년 8월 이승복 소년의 아버지 이석우 씨가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술하듯 논란이 많은 사건이며 이승복 군은 없다라는 식의 사건 자체에 대한 조작설도 나왔으나, 이승복 어린이가 북한군에게서 끔찍하게 살해를 당한 것 자체는 100% 사실이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도 조작설이 난무했으나 북한 짓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므로 두 사건은 이런 면에서 비슷한 특징이 있다.
3.1 추모사업과 동상건립
그 후 이승복은 반공의 상징이 되어, 효자 정재수 군과 함께[2]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동상이 세워지고 1975년 10월에는 대관령 정상에 이승복 반공관이 설립되었고 1982년에 이승복의 모교였던 평창군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1998년 폐교) 근처로 이전하면서 성역화되었다(이 성역화 사업에 발맞추어 호랑이 선생님에서도 이승복 극화를 방영했다). 이후 초등학교 수학여행에는 백이면 백 이승복기념관이 포함되었다.
이승복 동상. 1982년에 제막되었다.
당시 구리가 부족해 일부 동상은 콘크리트로 만들고 페인트를 칠한 경우도 많다. 당시 콘크리트 품질 상 풍화에 매우 취약한지 콘크리트상들의 상태가 대부분 안좋다(사진은 원주시 부론면 손곡초교. 참고로 99년에 폐교된 학교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 많은 이승복 동상은 철거되거나 잊혀지면서 역사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길리슈트
최근엔 이런 상태다. 아마 폐교가 된 곳에서 그대로 방치되다 보니 이렇게 된 듯.
3.2 논란과 판결
철저한 반공 분위기 하의 사회였다는 점과 보도 매체가 조선일보라는 점에서 기사 안에 소설이 가미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3] 실제 조선일보에 문제제기한 김종배 측도 제법 신빙성 있는 근거가 있다는 판결이 나온걸 보면... 다만 김종배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만한 근거가 있다 해 항소심 무죄를 선고받은 것으로, 해당 주장들은 모두 논파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이승복 소송으로, 미디어오늘의 편집국장 김종배가 <저널리즘> 1992년 가을호에 게재한 걸 발단으로 1998년 ‘오보 전시회’를 연 김주언[4]의 기사가 더 큰 파급력을 불러일으키면서 사건은 더욱 커졌다.
김종배의 경우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신화 이렇게 조작됐다〉라는 기사를 작성, 문제제기를 했는데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 '그의 집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듣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후에 '이승복의 형이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밝힌 점'[5]을 지적했고, '이승복 시신의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조선일보의 기사를 “작문”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김주언 김종배 두 명을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했으나, 7년이 넘는 재판 끝에 2006년 김종배는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는 "조선일보 기사의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과 조선일보 기자가 사건을 현장취재한 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인정되나, 거기에 대한 의혹보도 역시 당사자가 사실이라고 확신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언론의 자유에서 용인할 수 있다" 고 밝혔다. 한편 김주언은 집행유예 2년에 징역 6개월.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500만원. 이는 오보전시회가 김종배의 글에 비해서도 훨씬 근거가 허술했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법원 판결에서 이승복 사건 자체는 실제 사건이라고 판결했으므로 진위 여부의 논란은 끝났다. 물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6]라는 말은 불신할 만한 합리적 의심의 근거가 있지만, 생존한 형 이학관이 수십회 난자당해 비몽사몽 상태에서도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상당한 개연성을 부여하므로, 사건 자체는 분명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굳이 정리하자면 이승복이 당시 상황에서 북한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인 주장을 했고, 그것이 이 어린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어찌 되었건, 이 소송 사건은 관습화되는 와중에 조금씩 사그라들던 반공주의 기조와 이승복 기념사업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타가 되었다. 이 소송이 벌어지는 기간 동안 전국의 초등학교 중 70~80%는 동상을 철거했으며, 이승복 기념관은 2004년 강원교육청소속에서 평창군교육청 소관으로 옮겨지며 통폐합이나 사회단체나 사단법인의 관리를 고려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졌다. 10년 뒤 정권이 바뀐 뒤에도 이승복 기념사업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고[7] 이승복 사건은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98년 9월 경남매일에 <아직도 이승복 동상이>라는 기사를 쓴 김효영 기자도 11월 5일, 이승복의 형 이학관에 의해 '사자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약식 기소되어 이듬해 7월에 200만원의 벌금형을 당했고, 9월 22일에 방영된 MBC PD수첩을 통해 이승복 조작설 관련 보도를 했던 이용석 PD는 경남매일 건과 같은 날 이학관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한 일이 있었다.
3.3 유머(…) 소재
위 항목처럼 이승복 사건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작되었다는 논란이 있을 정도로 당시 독재 정권 시기에 정치적 목적으로 크게 악용해 왔다. 따라서 이에 반감을 품은 대중들 사이에서 이를 풍자하는 유머가 유행했다. 종종 이게 특정 정권 시절 정치적으로 우스개로 악용되었다는 이들도 있는데 되려 80년대 반공 정책이 한창이던 시절에부터 유행되던 거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말하는 쪽이 최불암이나 사오정인 경우도 있었다. 주된 내용은 실제로는 이승복이 '공산당이 싫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발음이 비슷해서 무장공비들이 이승복의 말을 잘못 듣는 바람에 이승복을 살해했다는 이야기.
여기선 토론으로 인해 대표적인 드립만 남겨둔다. 이 두 개의 드립 모두 90년대 초의 최불암 시리즈에도 등장했던 표현들이다. 단 공비에게 이 드립을 치던 최불암은 총알세례를 받고 끔살당한다. 백괴사전의 이승복 문서에 좀 더 다양한 판본이 있으니 참고할 것.
- 무장공비: (어린이인 이승복에게 군것질거리를 줘서 회유하기 위해) "자. 맛있는 콩사탕이란다."
- 무장공비: (어린이인 이승복에게 장난감을 줘서 회유하기 위해) "자. 이 공 갖고 놀아라."
- 이승복: "저 공 상당히 싫어요."
이와 같은 다른 드립들도 몬데그린을 이용한 유머다.
3.4 극화화
이 사건을 토대로 여러편의 극화가 만들어졌는데 실제 사건 재현이라는 명목 아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주는 작품이 많다. 이를테면 이강윤 감독의 1987년작 '잊을 수 없는 순간'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좋지 않지만 후반부에 공비들이 난입해 벌이는 만행은 웬만한 호러영화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끔찍하다.
반공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 영화는 학교를 돌면서 단체상영되었는데 전체 관람가임에도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잔인한 폭력 및 고어한 어린이 살해장면 묘사가 있는 편이라 놀래서 우는 학생들이 속출했다.너무 영화 제목을 충실히 잘 지켰다(?) 배고픈 공비들이 살아있는 닭을 산채로 씹는가 하면 (실제로 닭의 머리를 자르고 푸드덕 거리는 걸 촬영), 무장공비가 이승복의 입을 대검으로 찢어버리는데 외국 고어물 저리가라 할 정도로 시뻘건 피와 혀를 낼름거리며 찌걱 찌걱 끈적한 피 소리를 내던 장면, 승복의 어린 동생을 산채로 벽에 내던져서 살해하는 장면, 그리고 확인사살한다면서 이승복의 머리에 큰돌을 던져 머리를 박살내버리는데 더 끔찍한 사실은 이승복이 입을 찢겨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도 살아있다가(자세히 보면 돌을 맞기 직전에도 움직이며 희미한 목소리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한 번 더 말한다) 머리에 돌을 맞고 숨을 거둔다는 사실이다.
이승복 일대기를 보고 싶으면 여기를 참조하자. 영화는 비디오로도 발매되었으며, 등급은 '연소자 관람불가'다.
그 당시에는 굉장히 심의삭제가 심하던 시절이라서 영화나 공중파 만화, 만화책에 조금만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묘사가 있으면 가차 없이 삭제 당하던 시절이나, 반공을 목적으로 하는 창작물에는 심의가 굉장히 관대했다.[8]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종상 반공부문이 사라지는 등 반공 영화에 대한 지원이 점차 줄어듬으로써 대중들 역시 반공물 장르에 대한 관심이 사라짐에 따라 반공영화 특유의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반공물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자료조사가 잘 된 전기는 1980년대 나온 신동우 화백 삽화의 이야기. 이 책은 당시 생존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고 이승복 사건 전후에 일어난 무장 게릴라들의 학살 사건등도 빠짐없이 취재했다.
80년대 반공 서적중 하나에서는 60년대 산골소년 이승복 가족이 스웨터를 입고 있는 충격적인 일러스트를 선보인 적이 있다. 물론 그 책에서는 이승복 실록보다는 뒤에 있는 북한 어린이의 참상이라는 작품이 더 현시창과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부연하면 이승복 사건부분은 그래도 상처하나 없이 숨을 거두는 모습이 나오지만 북한 어린이의 참상에서는 시체 훼손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심지어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도 1995년 제6차 교육과정 개편 전까지 이승복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3.5 관련문서
3.6 바깥 고리
- ↑ 실제로 이승복이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래의 논란과 판결 참고
- ↑ 1974년 1월 22일 아버지와 함께 폭설이 내린 보은군 마로막재를 건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쓰러져 동사하게 되자 아버지를 살리려고 가진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떠난 효자로 이 아이의 이야기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정재수 군의 이야기의 일부는 동화로 각색되었다.
- ↑ 심지어는 이승복이 가상인물이라는 썰도 있다. 다만 이런 것은 판결이 났으니 그냥 음모론으로 보는게 맞다.
- ↑ 당시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 ↑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포함한 사건 증언 전체가 이 형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 ↑ 참고로 조선일보 기사에는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쓰여 있다.
- ↑ 흥미롭게도 도리어 이승복 부활 여론을 강조한 기사는 2004~2007년간 조선일보의 기사가 대부분으로 나온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있다.
- ↑ 폭력적인 장면 뿐만이 아니라 벌건 대낮에 중요부위 노출은 없지만 배드신, 강간신이 나오기가 일쑤였다. 그 외에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에서 사람들의 목을 작두로 자르고 대검으로 마구 쳐 온 몸이 피로 목욕을 하는 장면을 국민학생들에게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