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 ergo sum (라틴어)[1][2] Je pense donc je suis (프랑스어) I think, therefore I am[3] (영어) Ich denke, also bin ich (독일어) Penso dunque sono (이탈리아어) Pienso, luego existo (스페인어) Ik denk, dus ik ben (네덜란드어) 我思う、ゆえに我あり (일본어) 我思故我在 (중국어) |
1 개요
데카르트가 제시한 논리. 이 말과 작은 책자인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이하 성찰)> 하나로 데카르트는 철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성찰>에서 직접 나온 말은 아니다. <성찰>에서는 더 업그레이드 되어서,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한다'라는 언급으로 주장을 더 명확하게 한다.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이였지만 데카르트가 직접 집필하고 발행한 관련 서적의 숫자가 매우 적어서 수많은 논문과 서적을 내고도 주목을 받기가 힘든 현대의 심리학/철학 교수들은 데카르트가 철학계 희대의 먹튀라고 농담하기도 한다. 다만, 철학계에 판치는(...) 직관에 호소하는 논변들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논변이기도 하기에 여전히 수많은 논쟁이 가능하기도 하다. 추가로, 이 논변을 당신이 완벽하게 반박할 수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미국 탑스쿨의 교수로 임용될 수도 있을것이다(!).
2 내용
사실 그가 완전한 원조는 아니고, 철학자 성 아우구스티노의 인식론과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말로 보는 게 적당하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감각이 인간을 속일 수 있으며(찬 물인데 뜨겁다고 느끼거나, 미지근한 물도 뜨겁다고 순간 생각하는 등), 또한 상대주의(똑같은 온도의 물에 대한 사람들의 제각각 다른 인식 같은 것)에 의해 객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상대주의,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나 자신이 이 물이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참이다라는 쪽으로 진리의 방향을 선회시켰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감각의 속임수로 인해 회의주의가 성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만일 내가 잘못하고 있다면, 나는 존재한다. (Si enim fallor, sum)라는 명제를 도출했다. 이는 속고 의심하고 그렇게 의심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런 일을 당하는 나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한다고 한다.
데카르트 또한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회의론자인데[4] 그도 감각이 인간을 기만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감각은 인간을 때때로 기만하므로, 감각으로 얻어지는 정보는 확신할 수 없다. 반면에 감각이 아닌 이성의 추리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 예를 들자면 수학적 추론이나 '연장'(밀랍의 맛과 향 따위는 감각의 영향이지만, 밀랍의 질량이나 부피 등은 직관적인 사실이다)은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얻는 자신의 추론적 과정이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오류를 범하도록 조작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2+3이 원래는 6인데 5이라고 생각하도록 정신이 조작되었다고 말이다. 이러한 직관적이고 객관적인 지식까지 부정했을 때 자신이 오로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회의의 주체인 나 자신의 현존뿐이다.
다만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별다른 고려없이 뜬금없이 '나'가 등장했다는 것이 헛점. '나'는 어떻게 정의된다는 말인가? 결국 이 논증을 타당한 형태로 고친다면 "사유가 있다."정도가 되겠다. 논리적인 반박 중 유명한 것은 Leibniz's Law of Identity of Indiscernible.[5][6]
사실 데카르트 본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이후이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 및 여타 확실한 명제는 참이라는 입장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론해낸 다음, 신에 기대어 다시 확실한 명제가 참이라는 입장을 개진한다. 이는 순환 논변처럼 보이기에 데카르트의 순환(Cartisian circle)이라 불리는 문제를 만들어낸다. 여튼 데카르트의 논의가 자신의 존재 증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확실한 수많은 지식에 대한 증명까지 미치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뒷부분이 순환 논변인 것처럼 보여서 문제일뿐(...)
3 의의
이 간단한 한 마디는 인간이 몸 + 무언가(영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의 기초이다[7]. 수많은 창작물들이 시간을 넘어서 우려먹는 주제를 제공한 것은 덤.
현재까지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있는 육체와 정신간의 관계지만, 요즘 심리학계와 철학계에서는 물질적 일원론(물질적인 뇌와 몸만 있어도 심리적 활동은 가능하다)이 좀더 많은 지지를 받고있다.
어쨌거나 계몽주의의 효시격으로 일컬어지는 한 마디로 역사적인 의의는 충분하다. '자아'와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서 보는 근대철학의 태도는 이 말에서 기반을 얻었다. 또한 신앙공동체(교회)와 정치공동체(영주)의 명령에 따르는 부품으로서의 '주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인으로 서게 한 것도 이 고찰. 이 문장으로 표현되는 사상적 경향이 결국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이므로 의외로 큰 의의가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라고도 바꿔쓸 수 있으며 이로 손쉽게 반박가능… 하다면 밥먹고 사색하는게 일인 교수와 학자들이 백년도 넘게 싸울 리가 없다. 다만 이러한 관점에서 유력한 반박 중의 하나가 바로 장자의 호접몽 고사인데, 사유를 하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되는 '나'의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이야기이기 때문.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매트릭스같은 가상현실을 생각해보자. 가상현실 속의 '나'는 여럿이 될 수 있지만 이들을 조작하는 '나'는 하나다. 가상현실 속에서 아무리 나비도 장자도 될 수 있다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조작하고 꿈을 꾸는 존재인 '나'는 분명 한명이다. 즉 다른 말로 사유하고 있는 '나'는 하나뿐이다. 이를 근거로 내가 사유를 하는 주체인것이 아니라 사유 그 자체가 '나'라고 보는 관점또한 있을 수 있다. 간단히 게임을 예로 들자면, '나'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게임을 하고있는 게이머인것이다.
그런데 내가 기억상실에 걸린 게이머라고 하더라도, 그 게이머는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데카르트가 증명하고 싶은 것은 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무언가는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 같고, 이 무언가를 '나'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마음의 직관적인 투명성에 기대어서(타인의 마음은 볼 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은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게임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나' 말고 '무언가 내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인지, 아니면 무의미한지는 여전히 논의 대상인 상태.
다만 위에서 언급한 호접지몽은 장자가 물아일체를 주장하기 위해 만든 사고 중 하나라 게임을 하고 있는 구체적인 나와 무언가 내 마음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즉 코기토와 호접지몽은 서로 상반되는 사유가 아니라 관점과 추구하는 바가 판이하게 다른 사유다.
다른 반박으로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종의 가상현실이고 세상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은 전부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사유가 있다. 이 사유는 지구멸망#s-2.16 문서에도 나온다. 가상현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기사도 나왔다. 자신의 존재도 의심해야 하는 미래가 올까?
여하튼 서양의 '주체로서의 자아'을 대표하는 기초가 된 말이기 때문에, '의심의 세 대가'로 불리는 근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많은 반박을 받은 명제이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성은 존재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해당 어구를 '그 무엇이 생각한다'로 치환시킨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를 꺼내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전의 단계를 설정하면서 '생각하는 나'의 절대성을 무너뜨렸고[8] 칼 마르크스는 물질적 토대와 사회에 기초해 개인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관념론적인 데카르트의 사고를 반박한 바 있다.
사르트르는 진리에 뿌리를 두지 않은 개연은 모두 허무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운명 이라고 했다. 때문에 확고한 개연을 세우려면 확실한 진리가 있어야 하고, 그 절대적 진리는 단순하고 중계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서 '코기토'에 절대적 진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또한 자아가 스스로를 파악함으로서 얻어지는 이 이론에 의해 자아는 확고한 것이 되고, 반대로 바깥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단지 있음직한 일이 되어 버림으로서, 코기토는 진리에 기반하여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며, 단지 물질로 여기지 않는 유일한 학설이라 주장했다.
작가 이영도는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바탈리언 남작의 입을 빌어 이 주장을 신랄하게 깠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자아 개념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위에 서술한 비판들은 그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아래 구체적인 정리를 참조.
3.1 보다 구체적인 논변 정리 및 반박 시도에 대한 소개
지식은 명석하고 판명해야 하므로, 의심 가능한 명제는 지식이 될 수 없다. 내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명제들은 사실 꿈속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꿈 속에서 이러한 명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들은 거짓일 것이고, 따라서 의심 가능하다. 따라서 경험적 명제들은 지식이 될 수 없다.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비-경험적인 지식들은 꿈을 통해서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항상 틀리도록 나를 오도하는 사악한 악령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들을 단 한번도 맞게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역시 의심 가능하다. 따라서 비-경험적 지식들 역시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 틀릴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내 마음을 관찰할 때에 내 마음속에 여러 명제가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 수많은 명제를 지금 이 순간 명확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무언가를 떠올릴 때에, 그 무언가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2차적 의미의 생각이 진행되고 있음은 명확하다.(이를테면, 내가 사과는 붉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내 눈에 악마가 붙어있어서 사실은 사과가 검은데 내가 붉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내가 사과가 붉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틀릴 수가 없다.) 이 생각의 주체는 자기 자신일 수 밖에 없으리라.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내 생각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는, 바로 이 순간에 한해 존재한다. |
이러한 입장에서 드러나는 자아는 1인칭적이며, 바로 내가 내 생각을 자각하는 한 순간에만 드러나는 자아이다.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데카르트를 달리 이해하려 노력했던 다른 논박 두 가지를 정리한다.
러셀은 이 논변에서 '생각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공격한 바 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이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아는 완벽하게 1인칭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사람의 마음을 살펴보는 관점에서 내가(혹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각자가!) 옆사람 마음은 결코 알수 없지만 지금 자신의 마음 안에 무언가 능동적인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데카르트는 이러한 직관에 기대어 다른 논리적 가능성에 기댄 반론을 쳐낼 수 있을 것이다. 단, 이렇게 해석되는 데카르트는 다른 근대철학자에 비하여 마음을 투명한 것으로 여겼다는 점은 제시될 수 있겠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옆사람 마음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정도는 다르다는 직관은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이영도는 데카르트가 논한 자기 존재 증명이 5분전의 자기 자신과 현재의 자기 자신에 걸쳐 생각될 수 있는 지속적인 자아에 대한 존재 증명이 될 수 없다는 논박을 펼친 바 있다.(유사한 입장이 2011년에 평가원 6월 모의고사에 나온 적도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논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에서의 존재의 의미는 단지 내가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능동적인 현상(생각)이 진행되고 있는 그 한 순간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성찰 3장까지의 논의에서 데카르트는 이영도나 평가원이 이해한 방식의 존재에 대해서 논한 바가 없다.(성찰의 6장 이후에나 이러한 논의가 가능하다. 물론 거기까지 가기전에 제대로 배운 철학자라면 신존재증명에 태클을 걸겠지만.) 따라서 이러한 반박은 애초에 데카르트적 자아에 대한 논박이 될 수가 없다. 데카르트적 자아는 지금 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순간 그 찰나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영도의 비판은 데카르트가 시간을 뚫고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변은 그냥 그가 데카르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4 패러디
패러디될 때는 별 철학적 고려 없이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 혹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할 만한 목적성을 규정하기 위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경우, 앞의 내용과 패러디는 별 상관이 없다.
강철의 연금술사에 등장하는 밸리 더 쵸퍼는 알폰스 엘릭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반대로 자신의 정체성은 '나는 죽인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정리했다.
스타워즈의 현상금 사냥꾼 로봇인 IG-88 시리즈를 다루는 짧은 소설에서는 이 로봇들의 신념으로 패러디되어 나온다. "나는 파괴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 등장하는 모드론인 노돔도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말 끝에 소심하게 "...I think.(아마도.)"라고 덧붙인다.
어떤 마술의 인덱스땅에서는 "나는 무시당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패러디.
총몽에서는 작가의 각주를 통해서 '얕은 생각이다'라며 까였다. 애초에 이 만화 자체가 "기계 몸에 인간의 뇌, 칩 뇌에 인간의 몸. 이 중 어느 쪽이 인간인가?" 하는 식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부여하는 소재가 많이 나오니만큼. 물론 당연히 이 지적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헛소리니 무시하고 넘어가자. 상식적으로 이 주장이 그렇게 얕은 생각이었다면 현대까지 두고두고 회자되겠는가?
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의 AM은 이 대사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응용한다. 육체 없이 정신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인 자기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심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다.
2005년에 나온 학습만화인 '신데렐라 백설공주의 환상 미술여행'에서는 이 말을 변형한 말인,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라틴어로 한 "Sómnĭo, ergo sum"을 주문으로 쓴다.
팬택이 베가 브랜드 광고와 베가 시크릿 노트 광고에서 부터 고로 존재한다는 드립 문구를 광고들에 썼다.
'Give her the Dick'이라는 데카르트와 관련된 인터넷 밈에서도 이 말을 패러디했다.
- ↑ cogito가 '나는 생각한다', ergo가 '고로', sum이 '나는 존재한다'. 라틴어는 주어에 따라 동사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굳이 '나는'이나 '너는'을 안 붙여도 어떤 말인지 알 수 있다. 문법적으로는 꽤 간단한 문장이라서 라틴어 수업을 들으면 1교시에 배울 수도 있다.
- ↑ 본래 데카르트 본인은 프랑스어로 썼다. 나중에 자신이 한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라틴어로 썼다.
- ↑ 혹은 am 대신 be를 써서 I think, therefore I be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 ↑ 하지만 아우구스티노나 데카르트나 회의론자로 구분 지을 수는 없다.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 존재, 전지-전선-전능한 존재로서의 신의 존재를 믿었고(의심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회의를 사용한 것이다.(방법론적 회의-이 회의적 사고의 결과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회의를 위한 회의를 한 회의론자와는 다르며, 오히려 두 명 다 절대적 진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모두 의심해야 하는 회의론자와는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 ↑ '사유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어떤 회의를 하든, 그 어떤 사유를 하든 결국 그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의 존재가 결론적으로 나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입장이다. 다만 이것을 문장으로 표현한 방식이 3단 논법인지라, 대전제인 '사유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가 선행해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반박이 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런 말을 했겠지만... 문장이 맛깔나지는 않지만, 이쪽이 반론의 여지가 적다.
- ↑ 사유함으로서, 사유하기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존재한다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혹은 속고있는 상태에서) '악마같은 것들이 내 감각이나 생각은 속이더라도 내 존재 그 자체를 없는데 있다고 속일 수는 없으므로 내 존재는 확실한 진실이다.'라는 의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정도가 본래 의미에 가깝다. 사유와 존재가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론과 근거의 관계에 가까운 것이다. 다만 이러한 반박은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제기되는 반박이다. 데카르트의 논변을 이해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마음은 볼 수 없으나, 자신의 마음은 좀 더 잘 보인다는 직관에 호소하는 점을 빼둘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논변의 호소력을 고려하면 데카르트에 대한 논리적 논박의 힘은 충분히 약해질 것이다.
- ↑ 물론 이러한 사고의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플라톤까지 끄집어낼 수 있다.
- ↑ 근데 프로이트는 철학에 영향은 끼쳤지만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아두자. 그러한 요소까지 의식 작용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이트 본인이 자신은 과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정면 반박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