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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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고국천왕(故國川王) / 국양왕(國壤王) | |
성 | 고(高) | |
휘 | 남무(南武) / 이이모(伊夷模) | |
생몰년도 | 음력 | ? ~ 197년 5월 |
재위기간 | 음력 | 179년 12월 ~ 197년 5월 (17년 5개월) |
1 소개
고구려의 제9대 왕. 천왕으로 끝나서 오해할 수 있는데, 천왕天王이 아니라 고국천원(故國川原) 근교에 묻어서 고국川왕이다. 형 발기(拔奇)가 재능이 용렬하여(불초하여) 동생 남무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발기는 요동의 공손강[1][2]과 연나부 등과 연합해 반란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진압당하고 요동에서 여생을 보낸다.[3][4]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판단력이 좋고 힘이 아주 세서 큰 솥도 들었다고 하는데 고구려에서는 이 큰 솥을 드는 사람을 장사로 여겼다니 무지막지한 힘의 소유자였을듯.
2 내정
단순히 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이겨낸 것을 넘어 큰 업적을 몇가지 남겼다.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을 피해 유입된 유민들을 받아주었다. 후한 요동태수가 침입했을때 왕자 고계수(신대왕의 5번째 아들)는 막지 못하였으나 왕이 기병을 이끌고 가 좌원(坐原)에서 격퇴했다. 왕비쪽의 외척 연나부의 좌가려와 어비류가 자신들의 권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재하려 했는데 난을 일으켜버리자 이를 진압했다. 또한 을파소와 안류[5]를 등용해 진대법[6]을 실시하여 하호[7]들을 구제했다. 복지의 성격이 더욱 강하지만 귀족통제의 의도도 있었다.[8]
교과서에서도 서술하듯 이 시기는 국가 공민(公民)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입장에서는 국가 통제 아래 역을 지고, 조세를 납부할 공민이 필요했다. 부족 연맹체 개념에서 하호나 호민으로서 귀족 아래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골치가 아플터... 진대법을 실시하여 굶주린 백성이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복지 이전에 중요한 정치적 사업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국천왕의 치세에 왕위의 부자상속이 확립되고 부명[9]이 방위명으로 전환되는 등[10] 중앙집권화를 위해 정치체제가 더욱 정교해젔다. 하지만 정작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어 계승한 건 산상왕이었고, 아마 우씨가 불임이기 때문일거다 동천왕 때에야 부자상속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고국원왕과는 대조되는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헷갈리지 말자(...) 한자가 다르기는 하지만, 고국천왕은 하늘같이 업적을 이룬 왕, 고국원왕은 원수(웬수)같은 원한을 품고 죽은왕이라고 외우면 편하다.
다만 평생 부인 왕후 우씨 사이에서 후계를 보지 못한데다가 갑작스럽게 죽어버리는 바람에 고구려 왕실은 이미 사라진 풍속인 '형사취수제'를 선택하게 되는데...... 산상왕 참조.
3 왕후 우씨
저 왕후 우씨와의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산상왕이 죽고 동천왕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우씨도 세상을 떠났다. 우씨는 죽기 직전에 '차마 고국천왕을 볼 낯이 없으므로 산상왕 곁에 장사지내 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동천왕은 그 유언을 따랐다. 얼마 후 무당이 찾아와 동천왕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꿈에서 고국천왕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길 수 없어 결국 함께 싸웠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라." - 《삼국사기》 동천왕 8년 가을 9월
동천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고국천왕의 무덤 주변에 일곱 겹의 소나무를 심어 왕의 능을 꼭꼭 가리게 했다고 한다. 고국천왕과 산상왕, 우씨의 이야기는 오늘날 봐도 꽤 재미있는 막장 드라마 소재가 될 법한 이야기다. 형제덮밥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二月 고국천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우씨를 왕후로 삼다
二年秋九月 시조사당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春三月 붉은 기운이 태미를 통과하다
四年秋七月 혜성이 태미에 나타나다
六年 왕이 후한 요동태수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기다
八年夏四月 화성이 심성을 지키다
八年夏五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二年秋九月 좌가려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十三年夏四月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다
十二年冬十月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다
十六年秋七月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다
十六年冬十月 진대법을 실시하다
十九年 중국에서 난리를 피하여 많은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九年夏五月 고국천왕이 붕어하다
- ↑ 하지만 항목의 공손강은 아니다. 해당 항목의 공손강이 요동을 확보한 것은 204년의 일로 한참 뒤의 일이다. 이 시기라면 공손강의 아버지인 공손도도 요동태수가 되기 전(공손도의 요동태수 임명은 삼국지는 189년, 후한서는 184년인데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이다. 때문에 발기를 도운 인물이 공손강이 맞다면 이는 이 시기 요동지역에 존재하였던 동명이인인 공손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시기 해당항목의 공손강에 대해서는 요동군 양평현령 공손소가 공손강을 강제로 끌어가서 하급 관리에 임명했다가, 이후 요동태수가 된 공손도가 공손소를 처형했다는 안습한 기록만 남아있다.
- ↑ 이 시기의 요동태수로 유력한 인물은 장거와 장순의 반란시에 죽은 요동태수 양종이다.
- ↑ 훗날 넷째인 연우(산상왕)에게 반기를 일으키는 셋째 발기(發岐)와 동일인물이란 이야기도 있으나, 비슷한 이야기 구성에 비해 세부 요소에서 동일인일 경우 일어날 수 없는 요소가 많다. 발기가 다시 고국천왕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단은 요동에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을 따른다.
- ↑ 반면 고국천왕과 산상왕이 동일인물이고, 또 발기 역시 동일인물이란 설도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고국천왕의 다른 이름을 이이모(伊夷模)라고 기록한 데 반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를 산상왕의 이름으로 기록하였고, 신대왕의 계승자도 고국천왕이 아닌 산상왕이라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중국의 사가가 비슷한 이름의 두 왕을 혼동한 것으로 치부하는게 정설.
- ↑ 귀족들이 천거한 인물인데, 이 이가 을파소를 천거했다.
- ↑ 국사 교과에 나오는 구휼책. 국고에 있는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낮은 이자를 쳐서 갚도록 하는 제도. 이를테면 국가 차원(한국은행 또는 정부)의 저금리 대출.
- ↑ 下戶. 평민이나 서민의 고구려식 (한자화된)표현.
- ↑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굶어죽는걸 피하려고 귀족의 노비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귀족의 힘이 강해지지만 정부가 빌려주면 굳이 귀족 밑에 안들어가도 되기 때문에 귀족의 힘이 강해지는걸 억제할 수 있다.
- ↑ 계루부, 연노부, 소노부, 절노부 등
- ↑ 중/동/서/남/북부. 이런 5방위 체제는 역사가 깊다. 부여와 백제, 발해에도 5부가 있었다.
굳이 끼워넣자면 신라의 9주 5소경도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