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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만에 이루어진 남북 정상간 만남
관련 이슈 | |||||||||
남북정상회담 | → |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 → |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
1 제안
남북정상회담이 최초로 제안된 것은 1988년이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통해서 김일성과 김정을 20여 차례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다는 주장이 있다.관련기사 8월 15일 노태우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에 김일성이 용의가 있다고 회답한 것이다.관련기사 하지만 성사 직전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배경에 대해서는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 군부와 보수세력의 저항이 너무 클 것같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포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본인은 육성회고록에서 북한과 중국의 여건이 덜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고, 북한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섣부르게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정상회담으로 인한 실익을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북한이 자신을 초청했으나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박철언 당시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말에 따라 초청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김일성의 회답으로 정상회담을 연다는 것은 일단 남북 간의 잠정적인 합의사항이 되었으나, 세부 사항 논의와 남북관계의 변동,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회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지연이 몇년간 계속되었다.
2 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김영삼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열려고 했으며 구체적인 회담 일정까지 잡아두는 진전을 보기까지 이른다. 1994년에 합의된 일정은 7월 25일 평양에서 연다는 것이었다.관련기사 그러나 회담일자가 이미 잡힌 상황에서 7월 8일 김일성이 급사돌연사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관련기사 이 시기 김영삼 정부의 목적은 북한에 돈을 주고, 대신에 북한군을 후진배치시킨다라는 것이었다는 말이 있다. 남북간의 성격을 볼 때, 이것이 성사되었을지는 다소 의문.
일단 북한에서는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해왔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렸고 북한이 조문을 둘러 싼 한국 내 갈등이 일어났으며 이에 분위기는 일시에 사그라들어 정상회담은 없게 되었다.
3 제1차
2000년 6월 13일에서 6월 15일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평양에서 진행한 회담.
2000년 4월 10일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이 남북정상회담의 예정을 발표했다[1]. 원래 발표된 일정은 6월 12일부터 14일까지였지만, 북한측이 준비가 덜 되었다는 이유로 하루 연기를 통보하고 남측도 이걸 받아들이면서 6월 13일로 조정되었다.
정상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간 회담이 지속됐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한관계사의 이정표로 남을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 평화 조성과 햇볕정책의 결실과도 같은 이 회담은, 김 전 대통령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여담으로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우리 현대사에 손꼽히는 대사건이였지만 당일 조선일보 사설에서는 "양안관계에 관하여..."라는 글이 실렸다. 중국과 대만을 뜻하는 양안이라는 단어는 그때도 생긴지 얼마 안되 매우 생소한 단어였고 현재까지도 한국민들은 거의 관심 없는 주제이다. 조선일보 입장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영 못마땅하니 신문 1면에 사진을 싣는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사설에 남북관련이 아닌 엉뚱한 내용을 싣은 것이다.
4 제2차
참여정부 수립 이후 임기 초반의 대북송금 특검 등으로 경색된 채 흘러가던 남북관계는 다시 유화 국면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7년 8월 8일 오전, 대한민국과 북한은 동시에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이 2007년 8월 28일부터 8월 30일에 걸쳐 개최될 것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2007년 8월 18일 북한은 수해로 인해 회담 일정을 연기할 것을 요청하였고 구체적인 회담 일자 지정을 남측에 일임했다. 이에 남측은 2007년 10월 2일에서 10월 4일 동안 회담을 개최하기로 제안했다.
1차 회담과는 달리 2차 회담에서는 평양개성고속도로를 통한 육로 방문이 합의되었고, 일정 첫 날인 10월 2일 9시 5분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은 국가 원수로서는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4·25 문화회관 앞에서 평양으로 들어온 노무현을 맞이했다.
일정 둘째날인 10월 3일 9시 30분 남북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회담을 가졌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둘째날의 회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나전칠기 병풍과 드라마와 영화 DVD, 팔도특산 차 세트를 선물했고, 김정일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500상자의 송이버섯을 선물했다. 청와대에서는 이 송이를 정치인, 소록도 주민, 실향민 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과 나누겠다고 공식발표했다. 이 때, 김정일의 특사로 내려온 것이 바로 박재경 조선인민군 대장인데, 이 사람이 바로 1.21사태 때 살아서 북으로 도주한 무장공비라는 설이 있다. 까꿍 그런데 최근 김정은의 숙청을 피해서 탈북을 했다는 설이 돌고 있다. 어떤 의미로 인생이 스펙타클하다
이 회담을 바탕으로 10.4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4.1 NLL 대화록 논란
2012년 10월 대선정국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본 결과 당시 노무현 대통렁이 김정일에게 NLL 포기하는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일, 상세내용은 NLL 대화록 논란을 참조.
5 3차 시도?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은 3차 남북정상회담을 은밀히 추진하기 위해 측근인 임태희 당시 국회의원(후에 대통령 실장)을 싱가포르로 보냈고 싱가포르에서 남한의 통일부장관에 해당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비밀회동을 가졌다고 한다. 이는 비밀로 묻혀졌으나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 기밀자료를 폭로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이 드러났고 후에 임태희 실장이 이를 김양건과의 비밀 회동을 시인했다고 한다. 당초는 임태희 의원이 아니라 이기택 평통 수석의장이 김양건과 회동을 가졌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평통측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던 상황이었다.
이후 2011년 5월에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등이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와 회동해 3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논의했으나 무산되었다. 북한은 다음달인 6월에 국방위원회 대변인의 인터뷰 형식으로 이 회동을 폭로했고 돈봉투를 주면서 정상회담을 애걸복걸했다라고 주장해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문인지 박근혜 대통령은 남북대화에 비선라인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천명하기도 했으나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과연 비선라인을 배제할수 있을지는 의문. 2013년 6월 12일에 서울에서 남북 장관급 회담이 개최될 예정인데 3차 남북정상회담이 추진될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일단은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등의 남북한 현안들이 주 의제가 될 전망이라 남북정상회담이 논의될지는 미지수. 그나마도 남북회담이 무산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록 전문까지 공개되면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되어서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은 거의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4일 전인 4월 10일 발표되었다. 이는 수십년의 기득권 상실로 인해 분노하던 영남권에서 역풍을 초래해 영남권에서 여당이 참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여당의 과반수 확보미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