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불신임결의

內閣不信任決意; (영어)Motion of no confidence, Vote of no confidence

1 개념

의원내각제 또는 내각책임제에서 입법기관인 국회가 의결로써 내각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의사표시. 의원내각제에서 국회가 쓸 수 있는 최종필살오의.

내각이 이것을 받으면 총사퇴하거나 의회해산을 실행해야 한다. 의회해산과 내각불신임결의가 충돌하면 의회도 내각도 동시에 해산되면서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뤄진다. 내각총사퇴와 의회해산은 일반적으로 여당의 당수인 총리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다. 내각불신임안이 제출되는 주요 이유는, 여당 내의 계파 갈등, 사회적 이슈로 인한 민심으로 인해 당수인 총리가 당내 의원 통제권을 잃었을 경우, 연정파트너가 돌아설 경우이다.

비슷한 제도로는 탄핵이 있으나 탄핵은 내각불신임결의보다 절차가 복잡하다.

2 국가별 제도

의원내각제 국가들마다도 미세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내각불신임안[1]으로 인해 잦은 의회해산 및 내각총사퇴등의 결정을 내려왔는데, 이 의회해산이 말 그대로 선거를 다시 하는 것이라 상당한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 또한 잦은 내각불신임안은 정국불안의 원인이 되곤 한다. 자유민주당(자민당)이 전후 지속적인 여당이었기 때문에 총리는 당내 계파간의 조율을 통해 정해져왔고, 이로 인해 총리는 집권여당 내의 타 계파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제출된 내각불신임안에 의해 실권하는 경우가 잦았다.

독일의 경우에는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는 정당 측에서 (내각불신임결의가 통과할 경우) 새로 총리로 지명될 인물을 추천해야 한다. 즉 내각불신임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새로 조성될) 내각을 신임하는 성격까지도 지니고 있는 것. 그래서 독일의 내각불신임 제도는 다른 국가들로부터 건설적 불신임 제도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불신임안을 제출할 경우 그와 동시에 총리 후보를 지명할 것을 강제한 이유는 바로 현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전신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개판오분직전이었던 모습에 대한 반성 때문.[2] 그 외에도 독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제도가 있는데 바로 총리 본인이 셀프 불신임결의를 할 수 있다는 것. 이 경우 총리는 사임할 필요가 없고 단지 연방 대통령[3]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하고 선거를 치르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셀프 불신임은 보통 연방하원의 분위기가 총리 자신에게 영 좋지 않게 돌아갈 경우 판 뒤집기 용도로 쓰이곤 한다.

인도과 호주에서는 오로지 하원만이 내각불신임을 결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와 반대로 허구헌 날 내각이 뒤집히는 이탈리아에서는 양원에서 모두 동의를 해야 내각불신임안이 통과된다.

한편, 미국과 같은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에서도 불신임결의를 제출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며, 실질적인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의회에서 불신임결의가 통과되면 체면을 크게 구기니까 실질적인 의미가 아예 없다고 볼 수도 없기는 하다. 보통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탄핵이라는 수단이 의원내각제 국가에서의 불신임결의를 대체하는 편.

3 역사속 사례

3.1 미국

이쪽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만큼 보통 탄핵을 더 애용[4]하기는 하지만, 불신임안으로도 아주 유명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조지프 매카시. 매카시즘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비이성적인 마녀사냥을 일삼던 그는 1954년 12월 상원으로부터 불신임결의를 맞고 그대로 정치생명이 끝장난다.

3.2 영국

초대 총리였던 로버트 월폴 경부터 내각불신임결의를 맞았었다. 다만 이 시기 로버트 월폴에 대한 불신임은 재무장관직에 대하여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걸 최초의 내각불신임 사례라고 볼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이 최초로 결의된 때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군이 조지 워싱턴에게 항복한 프레더릭 노스 내각 시절. 다만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반 무렵까지는 영국 내에서도 완전한 의원내각제가 자리잡지 않아서 몇몇 수상들의 경우 국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내각불신임결의에 굴하지 않고 총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로버트 필 내각. 의원내각제가 확고히 뿌리를 내린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내각불신임결의가 효율적인 정적 배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총리의 임기를 엥간하면 지켜주자'는 것이 영국 정계 내 암묵의 룰이 되면서 잘 쓰지 않는다. 1920년대 이후 근 90년 동안 영국에서 내각불신임결의가 통과된 것은 1979년 제임스 캘러헌 내각 때 단 한 차례.

3.3 독일

처음으로 의원내각제가 도입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우, 2번 항목에서도 서술되어있듯이 허구헌 날 내각불신임결의가 통과되는 막장 상황이었다. 이 시기의 불신임 사례는 쓰기에 여백이 부족하다.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후로는 총 3차례의 내각불신임결의가 있었다. 이 중 두 차례는 총리 본인이 정국의 판을 뒤엎을 계산으로 실시한 셀프 불신임이었으며, 야당의 주도 하에 통과된 일반적인 의미의 불신임은 단 한 차례.

최초의 사례는 1972년 빌리 브란트 때의 일. 이 시기 브란트 내각은 동방정책오데르-나이세 선 승인 등의 외교정책을 추진하면서 야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1972년 4월 야당 기민련이 발의한 내각불신임결의가 단 두 표 차이로 부결[5]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국정 장악력이 확연히 떨어지자 브란트는 셀프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고 예정보다 1년 먼저 총선을 실시한다. 결과는 해피 엔딩이어서,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은 이 해 총선에서 역대 최다 의석수를 차지한다.

두번째 사례는 1982년의 일로, 이 때가 일반적인 의미의 불신임안이 결의된 유일한 사례이다.. 1982년 헬무트 슈미트 내각이 부자 증세 여부를 놓고 연정 파트너 자민당과 충돌을 빚자 야당 기민련이 자민당과 손을 합쳐 헬무트 슈미트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기민련이 슈미트를 대체할 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인물은 헬무트 콜로, 슈미트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통과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세번째 사례는 2005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내각 때의 일. 슈뢰더 내각이 주도한 노동시장 유연화 및 연금 개혁 정책로 인하여 지방 자치단체 선거에서 자당 사민당이 참패하자, 슈뢰더는 셀프 불신임안을 결의하고 1년 먼저 총선을 실시한다. 결과는 30여년전 브란트 때와 달리 새드 엔딩. 슈뢰더는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련에게 4석 차이로 석패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3.4 그 외 국가

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연합군이 자국을 침공하는 막장 현실에 분노한 파시스트 당원들에 의하여 1943년 불신임결의를 맞고 실각된 적이 있다. 뭐 그래봤자 빡친 히틀러가 특공대를 보내서 구출하고 다시 재집권시키기는 했지만...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도 두 번이나 1948년, 1953년 두 번에 걸쳐 불신임결의를 당한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꿋꿋이 재기하여 무려 도합 7년을 집권한다.
  1. 법률상으로 불신임안이 통과되면 10일 이내에 내각이 해산되어야 한다.
  2.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내각 불신임 > 총리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정당 간 대립 > 간신히 새로운 후보 추대 > 여기에 반발한 정당이 연정 거부 > 내각 불신임(...)이라는 병크가 수도 없이 반복됐다.
  3.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총리지만 헌법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4. 사실 애용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대통령의 경우에는 아예 탄핵이 이루어진적도 없다. 앤드루 존슨빌 클린턴의 경우에는 하원을 통과한 탄핵안이 상원에서 부결. 그리고 워터게이트와 관련된 거짓말로 탄핵이 확실시 된 리처드 닉슨은 탄핵안이 발의되기 전에 사퇴.
  5. 이 시기 사민당은 연정 파트너 자민당과 합쳐서 원내 518석 가운데 268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즉, 최소한 반란표가 10표는 나왔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