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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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저는 내일 정오에 기해서 대통령직으로부터 사임합니다. 포드 부통령이 그 시간부로 대통령에 취임할 것입니다. - 닉슨의 사임 발표 연설

1 개요

Watergate Scandal

1972~1974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최대의 정치 스캔들.

미국 역사상 처음이자 2016년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야한 사건의 계기가 된 스캔들이다. 또한 음모론이 사실이었다고 밝혀진 사례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그 시작은 미약하나...

사건은 아주 사소한데서 시작되었다.

1972년 6월 17일 밤 늦은 시각 민주당(미국) 전국위원회[1]가 입주해있던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의 경비원은 괴한이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호텔에 출동한 경찰은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였다.[2] 체포된 범인들은 끝까지 단순 절도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단순 절도범에 어울리지 않는 거물급 변호사가 나타나서 이들을 변호하고 결정적으로 일당 중 1명이 가지고 있던 수첩에서 백악관 보좌관인 하워드 헌터의 전화번호가 발견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대통령 재선위원회를 만들어서 차기 대선을 준비중이었는데, 하워드 헌터가 바로 재선위원회의 실무자. 게다가 경찰 수사 결과 이들은 3주전에도 민주당 사무실에 침입했으며, 이번 침입은 고장난 도청기를 교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게 드러났다. 이게 단순절도 사건이 아니라는 의혹이 커지자, FBI가 직접 수사에 착수했다.

FBI가 개입할 정도로 일이 커지자 닉슨과 주변 측근 인사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시작한다. 리처드 닉슨은 우선 CIA에 FBI의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최대한 은폐하라고 지시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당시 CIA 국장이 훗날 증언하기론 은폐, 특히 증인 매수 및 입 단속에 필요한 을 CIA 자체 자금으로 처리하라는 것이 닉슨 측의 명령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CIA 자금 이외에는 마땅히 닉슨이 남들 눈에 안 띄게 쓸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CIA로서도 이미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함부로 돈을 쓸 수 없었고 결국 증인 매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수 있었던 일이, 닉슨이 긁어부스럼을 만들면서 점점 커지게 된다.

하지만 민주당(미국) 대선후보로 조지 맥거번이 선출되고 닉슨과의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화되자, 워터게이트 사건은 점점 여론의 관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게다가 괴한들이 침입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는 별다른 기밀문서도 없었기 때문에 맥거번 후보나 민주당쪽에서도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면서 이 사건을 크게 부각시키지도 않았다. 사실 당시 민주당은 험프리와 맥거번의 대선후보 경선이 너무 치열했던 나머지 당이 쪼개져 있었고, 부통령 후보가 중도에 사퇴하는 등 난장판이었다. 이때문에 일관된 선거전략을 세우지도 못했다. [3] 결국 1972년 대선에서 닉슨은 선거인단 538표중 520표를 쓸어가는 초압승을 거뒀다. 유권자 득표율에서도 60%를 넘어서는 대승이었다. 사실상 대통령 선거 시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아무도 신경 안썼단 얘기. 언론들도 일반적인 선거보도에만 열을 올렸지,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미 신문지면 구석으로 밀려난지 오랬였다. 다만 워싱턴포스트는 이 사건을 계속 보도했지만, 별다른 여론의 반향은 없었다.

3 ...그 끝은 창대하리라

하지만 대선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사법절차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 수사와 검사의 기소를 거쳐서 재판끝에 1973년 1월 도청기를 설치한 범인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FBI는 범인들의 배후에 관해서 계속 광범위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닉슨이 두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무렵에 상원 청문회가 열려 전국에 TV 생중계가 되었다. 그리고 청문회에 나온 닉슨의 부보좌관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는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비밀장치가 있으며, 닉슨 대통령이 사건의 은폐 공작에 관여하는 내용도 녹음되었다는 핵폭탄급 증언을 해버린다. 특별검사와 상원 특별위원회는 녹음 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하라고 백악관에 요구했지만, 닉슨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들어 거절한다.

닉슨은 직접 법무장관에게 아치볼드 콕스[4] 특별검사를 해임하라고 명령했지만, 법무장관은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다. 닉슨은 이번에는 법무장관 권한대행이 된 법무차관에게 해임을 명령했지만, 법무차관도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그리고 대행의 대행이 된 법무부 서열 3위 송무실장이 닉슨의 명령대로 특별검사를 해임한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부르면서 대통령의 무분별한 권력행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닉슨은 결국 사건을 수사하던 특별검사를 날리는데는 성공했지만, 대통령의 권력을 남용해서 자신을 보호하는데만 급급한 모습은 미국인들이 닉슨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닉슨은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는데 여기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라는 유명한 개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발언은 오히려 미국민들이 닉슨 대통령을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전면적 부인과는 상관없이 대통령이 말한 사기꾼이라는 단어만 뇌리에 남은 탓. 그리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에서 대통령들의 말을 따라하는 아이가 "닉슨 대통령은 뭐랬어?"라는 엄마의 물음에 사악하게 썩소를 지으며 웃으며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의 개드립(나는 사기꾼이 아니다)을 따라한 적이 있다(...).[5]

똥줄이 탄 닉슨은 테이프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합의를 하고 증거로 제출하지만 이때 기록 대부분을 삭제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때 들고 나온 주장이 소위 "통치 행위론". 대통령이 정무적, 정치적 판단에 따라 기록의 공개를 막을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면서 대통령의 기록을 공개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을 계속 이어갔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새로 임명된 특별검사는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고, 연방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판결했다. 이 United States vs. Richard Milhous Nixon,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미국 정부 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판결은 대통령의 권한과 특권의 한계를 정리한 기념비적 판결로 꼽힌다.

그리고 새로 제출된 테이프에서 닉슨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들통났다! 닉슨은 계속해서 워터게이트 사건 및 사건은폐 공작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지만, 테이프에는 CIA국장에게 직접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 녹음되있었던 것이다. 그외에도 주변 측근들과 사건에 관해 논의하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국 사회 전체가 벌집 쑤신 듯 되었고 끝까지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마저 닉슨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참고로 미국 사법체계에서 위증은 엄청난 중죄다. 전국적으로 사퇴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린 것도 도청을 한 게 사실로 드러나서가 아니라 공식석상에서 도청을 안 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이유였다.[6] 결국 의회의 탄핵이 가결되기 전인 1974년 8월 9일 닉슨이 자진 사퇴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대신에 테이프는 지켰다.[7]

4 후폭풍

일단 선거에서는 닉슨이 민주당 맥거번 후보를 관광보냈던 탓에 민주당에서도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것으로 합의한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뇌물수수 문제로 이미 사임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진짜 막장 정권이다 그래서 닉슨이 먼저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제럴드 포드를 부통령으로 지명하고 의회의 인준을 받은 뒤에 사임하였고, 포드가 자리를 승계해서 대통령에 취임하였다.[8][9]

그리고 포드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대통령 사면'이라는 특권을 이용해 닉슨이 저질렀거나, 혹은 저질렀을거라고 추정되는 모든 범죄행위에 대해서 사면한다. 이 사면으로 닉슨은 조사나 재판을 면했지만, 사면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역으로 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에도 닉슨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개입했다는 걸 부정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5 왜 그랬나?

요약: 과잉충성과 정치술수의 결과물

닉슨은 1968년에 당선되고 1971년부터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보통은 이런 도청 시도를 했다면 당시 닉슨이 불리했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오히려 이 당시 닉슨의 지지율은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닉슨 측이 처음부터 불리한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조작이 실제로 있었다고는 하나 득표율 60.7%에 51개 주[10] 중 전통적인 민주당 텃밭인 워싱턴 D.C.와 매사추세츠만을 내준 49개 주 승리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이 나오겠는가? 오히려 이 당시까지만 해도 3선까지 노려볼 만하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베트남 전쟁을 이끈 것이 바로 민주당의 케네디-존슨 정권이었고, 닉슨은 위치상 반대파가 되었다. 결국, 전쟁의 실패에 따라 1968년 사회 안정과 종전을 원하는 "침묵하는 다수"를 등에 업고 와신상담에 성공한 것이 닉슨이다. 그리고 실제로 베트남전 개입을 중단하고 중국을 방문하는 등 냉전 완화와 데탕트를 이끌면서 그 인기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특히 불법 침입과 도청 대상이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회장 오브라이언의 워터게이트 사무실에는 닉슨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닉슨 측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는 이야기. 이러한 상황 때문에, 대체 이 사건이 왜 벌어졌느냐에 대해 의문이 굉장히 많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낸 시도가 나와서 한동안 이슈가 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이 내용이 로버트 치알디니의 저서 설득의 심리학을 통해 소개되었다.

당시 불법 침입 계획은 대통령재선위원회 정보 수집 담당자 G. 고든 리디의 작품이였는데, 그가 본래 계획했던 것에서 민주당사 도청 시도는 매우 사소한 일부분이었다. 그가 처음 제시한 것은 도청 외에도 민주당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에 대한 미행, 특수 통신장치를 탑재한 추격기, 공갈 협박, 강도 위장 침입, 납치 및 습격, CIA와 FBI를 이용한 신상 털기, 조작된 정신병력 등의 허위사실 유포, 언론기사 조작, 민주당 정치가들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고급 콜걸을 태운 호화 요트 등을 포함한 100만 달러짜리 계획이었다. 애초에 이 리디라는 인물도 워낙 괴짜에다 신뢰성이나 판단성이 의심되는 인물이었고, 보좌관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통과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리디는 이 계획을 대폭 축소한 50만 달러짜리 계획을 제시했고, 여전히 황당한 내용은 당연히 통과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리디는 이 계획들이 모두 거절당하자, 제법 저렴한 25만 달러짜리 계획을 제시했다. 여전히 내용은 황당했고, 당연히 통과되었다. 응? 바보 맞네.

당시 이 계획 통과에 관여하였던 사람은 존 미첼 법무부 장관 겸 대통령 재선 위원회 위원장, 재선 위원회 부위원장 제프 스튜어트 매그루더, 백악관 법률 고문 존 딘, 그리고 프레드 라루였다. 이 중에서 가장 급이 낮았던 라루만이 마지막 의견에 반대 의견을 표출하였는데, 중요한 건 라루는 그 전 2번의 제안 때 참석하지 않았고 이때 처음 참석한 이였다. 이후 제프 매그루더가 내놓은 보고에 따르면 이 사건의 진실이 약간은 보인다.

"우리 중 누구도 리디의 계획에 적극 찬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00만 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에서 시작했기에 25만 달러 정도면 수용 가능한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 "리디를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곤란했던 것이다." 미첼은 "'좋아, 100만 달러의 1/4만 내주고, 뭘 들고 오나 보자'라는 의미로, 리디에게 뭔가 작은 것을 승인해줘야 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사건 이후 몇 년이 지난 후, 매그루더는 이 사건을 '거절 후 양보' 전략의 사례로 이야기했다. 거절 후 양보 전략이란 머리부터 들이밀기(Door in the face technique) 전략이라고도 하는데, 먼저 큰 요구를 하고 점차 요구를 줄여가면서 상대가 자신 또한 양보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력을 받도록 하는 설득 전략이다. 심리학적으로 상호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있으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뭔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느낀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기법은 실제로 상대에게 준 것은 없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마치 제안자가 양보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설득 기법으로 꼽힌다.

"만약 리디가 처음부터 우리한테 래리 오브라이언[11]의 사무실에 불법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는 즉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디는 일단 콜걸 투입, 납치, 습격, 파괴, 도청 등의 계획을 한아름 들고 왔다. 절반, 아니 1/4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먼저 빵 한 덩어리를 전부 요구했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쓰면 사건에 대한 미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이것은 현재 미국에서도 심리학적인 주요한 사례로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5.1 닉슨의 과대망상과 편집증

당연한 얘기지만, 윗선에서 애초에 딱 잘라서 비열한 술수를 쓰지 말라고 지시했다면 위와 같은 설명이 필요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과도한 집착때문에 저런 결과가 나왔다고 볼수 있다.

사실 닉슨은 1960년 대선에서 총 득표수 0.17%[12] 차이로 케네디에게 석패했고, 처음 당선된 1968년 대선에서도 겨우 0.7% 앞섰을 뿐이었다.[13] 그 와중에도 소위 "50개주 전략" (50 State Strategy)라는 선거전략으로 전국적인 지지를 끌어모으는것이 닉슨의 계획이었고, 닉슨의 지지층 자체가 중산층 일반 미국인이기도 했으니, 이 모든것 종합해봤을 때 닉슨 스스로 압도적인 승리로 재선을 따내고 싶은 욕심이 강했다.

또한 닉슨은 반대파에 대한 심한 염증을 느끼는 성격이었다. 따로 자신의 정적 리스트까지 만들어서 관리했다는게, 청문회에서 폭로될 정도로 철두철미했다.[14] "침묵하는 다수"라는 표현으로 도덕적 가치와 중요를 내세워 미국 중산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닉슨이었지만, 도청 테이프와 청문 과정에서 공개된 그의 본 모습은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마구 씹어대고 공권력을 동원해서 사찰하는 썩어빠진 정치인이었다.

거기가다 서민 가정 출신에 돈이 없어서 하버드대에 합격하고도 입학하지 못한 유년시절의 기억, 돈 많은 집안 출신의 존 F. 케네디에 대한 반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서 열등감이 심하기로 유명하기까지 했다.[15]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서 과한 욕심을 부리다가 저런 병크를 저지른 측면이 강하다.

6 진실을 파헤친 사람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파헤쳐 진실이 밝혀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계속 제공한 정보원이 있었는데 밥 우드워드는 이 사람을 '깊은 목구멍(Deep Throat)'이라고 칭했다. 깊은 목구멍의 정체는 그 이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2005년에야 밝혀지는데 그 정체는 바로 사건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펠트였다.[16] 펠트와 연락한 사람은 밥 우드워드였는데 둘의 인연이 기이하다. 우드워드가 해군 장교 재직 중에 백악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펠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원 동창이었던 둘은 서로 친해졌고 펠트는 이후 우드워드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장교 제대 후 듣보잡 신문사에 있던 우드워드에게 중앙지로 가라고 해준 사람도 펠트였다고.

펠트가 우드워드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과정은 첩보극을 연상시키게 한다. 우드워드는 펠트와 만나고 싶을 때 자기 집 창문에 빨간 깃발을 꽂은 화분을 놓았고 펠트가 이를 보면 미리 약속한 지하주차장에서 다음 날 새벽 2시에 만났다고 한다. 우드워드는 펠트가 어떻게 자기 집 창문을 볼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만약 펠트가 우드워드를 만나고자 할 때에는 뉴욕 타임즈의 20면에 시계를 그려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밥 우드워드가 정보를 물어오면 칼 번스타인이 주로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종종 우드워드가 펠트한테 확인을 받기도 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이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의 공로로 무명의 신참 기자에서 일약 전 미국인이 아는 대기자가 되었다. 이 2명은 1971년 워터게이트 건물 침입 사건부터 1974년 닉슨 사임까지 무려 3년 동안 오로지 이 사건에만 매달렸고 결국 대통령 퇴진을 이끌어내었다. 이런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한 장기간의 심층 취재와 보도는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면서 속보 경쟁만 하고 있던 미국 신문, 방송에 일대 경종을 울리면서 탐사보도 저널리즘[17]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엔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펠트 이외에도 당시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이었던 벤자민 브래들리[18]와 사주였던 캐서린 그레이엄도 큰 역할을 했다. 브래들리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냈으며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붕괴를 각오하고 두 기자를 보호하며 외풍에 맞섰다. 실제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 조사는 물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던 걸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30년 동안이나 정보제공자를 보호한 워싱턴 포스트는 언론사의 귀감으로 평가 받을 만하다. 그리고 이 사건의 교훈은 내부고발자의 중요성도 다시 느끼게 해준다는 것.

7 후일담

닉슨 사임 이후 2명이 저술한 책을 바탕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1976년작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19] 로버트 레드포드(밥 우드워드 역)와 더스틴 호프먼(칼 번스타인 역)이 두 주인공을 맡아서 열연했다. 이 영화 자체에서는 대통령이 발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의 행정부의 승리와 함께 엿 먹는 것처럼 그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닉슨의 하야를 이끌어낼 증거가 발견되어서 하야했다' 는 식의 자막이 뜬다. 이 영화는 1977년 4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로 올랐으나, 상은 록키한테 돌아갔다.

하지만 대특종을 낚은 두 사람의 길은 엇갈렸다. 우드워드는 승승장구한 반면 번스타인은 1980년대 초 거짓 편집 사진 사건으로[20] 포스트지에서 물러났다. 물론 강연과 기고 등으로 번스타인도 굶주리지는 않았지만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번스타인은 초라하다는 것이 일반적.[21] 우드워드는 이후 누구도 그의 인터뷰 요청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최근까지 총 8권의 책을 발간하였다.[22]

이 사건을 계기로 권력형 비리 사건에는 '~게이트'라는 말이 일종의 접미사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본바닥인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한국 등)에서도 마찬가지. 대표적인 예시로 최순실 게이트가 있다. 그 외에도 '게이트' 대신 '워터'를 접두어로 붙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 용례로 일명 '워터웨스트 사건'이라 불린 1991년 수서택지 분양특혜 사건이 있다.#

한편 테이프에 과연 도청 지시 사항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영원한 논쟁거리이다. 왜냐하면 닉슨이 하야함으로서 테이프에 실린 내용이 전부 공개되지는 않았기 때문.[23] 다만 여러 정황 증거를 통해서 확실히 도청 관련 이야기가 있다는 건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문제, 즉 위에 설명된 여러 더러운 정치 공작에 대한 이야기들이 같이 들어있어서[24] 닉슨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다고 한다.[25]

8 창작물에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이 사건이 유머러스하게 풍자된다. 유명인이 되어 닉슨을 만난 검프가 그의 배려로 워터게이트 호텔에 묵게 되는데, 밤에 자기 방 맞은편의 객실의 창문을 통해 괴한 몇 명이 형광등은 안 켜고 손전등으로 방을 이리저리 뒤지는 걸 발견한다. 검프는 그 방이 정전되서 그러는 줄 알고 나름 배려해준답시고 프런트에 전화해서 '제 맞은편 방이 정전된 것 같은데 사람 좀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왓치맨에선 대충 처리된 듯하다. 코미디언이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을 처리할 때가 재밌었다고 파티장에서 낄낄거리는 장면이 있다. 거기선 리처드 닉슨이 20년이나 해먹는 상황이었으니.

9 같이 보기

  1. 우리나라로 치면 중앙당. 미국 정당들은 각 정치인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개방적인 구조로 중앙당이 없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전혀 아니다. 모든 선거 후보자를 경선으로 선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공천권을 행사하는 당대표는 없지만, 전국의 당원과 재정을 관리하고 선거때마다 후보경선을 진행하는 중앙당 조직은 당연히 존재한다. 2016년에도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힐러리 클린턴을 대선후보로 만들기 위해서 편파적으로 경선을 관리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가 나와서 당지도부들이 사퇴하는 등 민주당이 엉망진창이 된 상황이다.
  2. 괴한 중 일부는 전직 CIA 요원으로 CIA에서 사용하는 동일 종류의 도청 장비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CIA는 사건 초기부터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3. 핵심공약으로 기본소득제를 내세울 정도로 진보적이었던 맥거번 후보가 지저분한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깨끗한 정책선거를 원했다고...그리고 개털렸지...
  4. 당시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다가 의회의 추천으로 특별검사에 임명된 인물.
  5. 이런건 정치에서 조심해야 되는게, 조지 H. W. 부시도 상대 후보인 마이크 듀카키스를 이기기 위해 듀카키스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느니, 아내가 성조기를 불태웠다느니(...) 하는 헛소문을 밑도끝도 없이 퍼뜨렸는데 그 아내는 굳이 그걸 반박한다고 성조기 안 태웠다고 계속 말하다가 사람들에게 '듀카키스 아내=성조기'로 그냥 박혀버렸다. 결국 듀카키스는 마음의 상처를 받고 은퇴했는데 정작 부시도 네거티브 전략을 주도했던 리 애트워트가 갑자기 네거티브 전략의 실체를 죄다 까발리고 세상을 떠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6. 위증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지퍼게이트(르윈스키 스캔들)다. 워터게이트야 도청을 했으니 분명히 법을 위반한 것이지만 지퍼게이트는 간통죄가 없는 미국에서는 법을 어긴 것이 아니었다. 선거 전이라면야 이미지가 망가져서 당선은 물 건너 갔겠지만 이미 재선된 후였기 때문에 비난은 받을지언정 대통령 자리까지 잃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클린턴이 법원에서 위증을 했고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요구한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탄핵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7. 대법원 판결까지 나왔으니 당연히 테이프는 대중에 공개되었다. 물론 삭제된 부분도 있는등 석연찮은 점들도 있지만...
  8. 연방법상 대통령 계승 순위 3위는 하원의장이나 공화당은 소수파여서 하원의장은 민주당이었다. 그래서 공화당 하원 대표였던 포드가 부통령으로 지명받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전에 민주, 공화 양당간에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9. 포드의 정치적 목표는 하원의장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자리를 굉장히 힘들어 했다. 재선에 실패한 것도 인기가 없는 것도 있었지만 포드 자신이 대통령직을 버거워한 것이 가장 큰 이유.
  10. 총 50개 주이지만, 수도인 워싱턴 D.C.를 특별지역으로 간주해서 따로 3명의 선거인단이 배정된다.
  11. 이 사건 이후 1975년부터 NBA 총재를 9년간 지냈다.
  12. 이때 몇몇 주에서는 부정선거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13. 물론 간선제에 가까운 미국 대선 구조상, 선거인단 득표수에선 큰 차이가 났다.
  14. 저걸 처음 입수해서 터트린 기자 본인도 그 리스트에 올라있어서 생방송과정에서 자기 이름을 대통령 정적 리스트에서 읽어내는 기상천외한 일까지 벌어졌다.
  15.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룬게 올리버 스톤 감독, 앤소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 "닉슨"이다.
  16. 훗날 알려지기로 펠트는 자기보다 높으신 분들이 FBI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걸 굉장히 혐오했고 그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17. 간단히 말해 황우석의 사기극을 까발린 PD수첩이나 안기부 도청 엑스파일을 보도했던 MBC의 이상호 기자, 삼성비자금을 폭로했던 시사in 주진우 기자 등을 떠올리면 된다.
  18. 2014년 10월 21일 별세, 언론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자유메달'을 주었다. 별세한 날 오바마 대통령은 "브래들리에게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공공재였다"며 "진정한 언론인이었던 브래들리는 WP를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신문 가운데 하나로 변신시켰다"고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19. 국내에선 '대통령의 음모'로도 통한다.
  20. 닉슨은 죽는 날까지도 번스타인의 이 병크를 예로 들어서 워터게이트 사건도 이런 사이비 기자들의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21. 1990년대 한국 대우 자동차 CF에도 나온 적이 있다. 또 아내였던 영화감독 노라 에프론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 아내 친구와 불륜을 저질렀는데 이혼 후 그 불륜을 담은 소설 '제2의 연인'이 출판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었다. 완전 안습.
  22. 다만 말년에는 부시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이라크 침공이 정당하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내용을 보도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부시 행정부가 우드워드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고 우드워드는 다른 기자들은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신만이 만난다는 특권의식에 취해있다는 비판.
  23. 많은 내용이 공개되긴 했다. 닉슨도 죽었고, 이제 테이프의 저작권이 미국 국가기록원으로 다시 넘어온 마당이라.
  24. 올리버 스톤은 노골적으로 그가 케네디 암살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 테이프에 들어있다는 설까지 이야기한다.
  25. 실지로 이미 밝혀진 사항으로도 닉슨은 충분히 욕을 먹고 있지만 보수파의 리더로서 재평가되는 걸 보면...다만 실제 연구를 위해서 닉슨의 여러 테이프를 들어본 학자들에 의하면 닉슨 자체가 지나칠 정도로 쪼잔하고 세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앞서 말한 비리 뿐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약점도 공개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