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롭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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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월스트리트 저널 표지를 장식했던 대형 로비 스캔들. 노스롭 항공사(현 노스롭 그루먼)가 대한민국 공군F-20을 팔기 위해서 벌인 대형 로비 스캔들이다.

F-5로 한동안 짭짤한 재미를 본 노스롭은 후계기종 F-20을 자체개발하여 기존 F-5의 운용국에 수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F-5의 주요 운용국이던 남베트남은 이미 망한 상태고, 최다 고객이 될거라 믿었던 대만 판매가 미중수교로 무산된다가[1] 여타 동맹국들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자 노스롭은 F-20의 전신격인 F-5 전투기를 가장 많이 운용하던 한국 수출에 사활을 걸게 된다. 노스롭은 한국 판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2명의 에이전트를 고용한다.

첫 번째 에이전트는 지미 신이란 이름의 재미교포로, 본래 한국군 해병대 출신이었으나 이후 미국에 건너가서 하와이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이다. 그는 이후 노스롭의 태평양지부 홍보 마케팅 담당의 고위급 인사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나중에는 한국 판매 에이전트를 담당하였다.

두 번째 에이전트는 바로 피스톨 박이라 불리던 박종규였다. 박종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한때 정권의 2인자 소리까지 듣던 거물급 인사였으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 대한사격연맹회장 겸 IOC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정희 피살 이후 전두환신군부에게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해 일부 재산을 강제헌납하는 등의 일을 겪었으나 IOC위원으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큰 공헌을 하면서 5공화국에서도 정계, 재계에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2][3]

사실 이 두 사람을 에이전트로 고용하는 것은 노스롭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노스롭은 이미 1970년대 한 차례 로비 스캔들 이후 '법적, 정치적으로 문제시 될 만한 인물들은 해외 에이전트로 뽑지 않는다.'라는 사내 규정을 만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미 신은 그렇다치고 박종규는 에이전트로 삼기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노스롭 이사진은 박종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당시 F-20 판매에 모든걸 걸었던 노스롭의 사장 조운즈는 일을 밀어붙였다.

당시 박종규는 F-20 한국 판매 계약 성사시 5500만 달러의 커미션을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당시 노스롭이 에이전트들에게 지불하던 금액의 10배나 되는 액수였다.

또한 한국내 F-20 판매 에이전트 회사로 동양고속을 지목했다. 동양고속은 말 그대로 고속버스를 운영하던 교통업체로, 무기 해외 도입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이곳 사장인 이민하 사장이 박종규의 처남이었으며, 실질적인 동양고속 소유주도 박종규 본인이었기 때문에 이 회사를 에이전트 회사로 지목한 것이다.

게다가 박종규는 당시 노스롭 서울지부 사무소장인 웰코 가시크에게 판촉비 명목으로 5만달러의 현금을 요구하였다.

더 황당한 것으로 박종규는 노스롭에게 '오프셋(절충교역)' 조건으로 '아시아문화여행개발'이란 회사에 625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인 오프셋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오프셋은 거래성사 이후 하는것이며, 대부분 무기 생산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오프셋하거나 혹은 돈의 투자나 부품 구매 대신 기술이전을 하기도 한다.[4] 혹은 국가대 국가라면 다른 투자 약속 등이 뒤따르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아시아문화여행개발'은 이런 것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호텔 업체였다. 별걸 다 요구하네 이참에 전투기도 하나 달라고 해보지

아무리 노스롭이 F-20 판매에 사활을 걸었어도 무기 개발 업체도 아니고 호텔 업체에 투자하란 요청은 무리였기에 이사회는 요구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노스롭 사장 조운즈는 이미 이 돈을 홍콩에 있는 밀리 킴이라는 여성의 개인계좌에 보낸 뒤였고, 조운즈는 이 사실을 이사회에 숨겼다. 밀리 킴은 박종규와 친분이 있던 사이로 이 돈은 당연히 박종규, 이민하에게 전달되었다.

주로 고위급 인사는 박종규가, 중/하위급 인사는 지미 신이 만나서 로비활동을 벌여으며 이 과정에서 다량의 금품이 살포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현금거래 내역은 이후 알려지지 않았다.

노스롭 사장 조운즈는 이제 진짜 '고갱님'을 만날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박종규에게 고갱님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조운즈 사장과 전두환 대통령이 만남을 갖기에 앞서 박종규는 좀 더 극적인 '쇼'를 준비하였다. 바로 F-20 쇼.

노스롭은 1984년 10월 수원 비행장에 전두환 대통령 이하 각계 고위인사가 자리를 잡은 가운데 F-20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그러나 급강하 후 급상승 기동을 선보인 기체는 정점을 찍은 후 별다른 후속기동이 없었다. 이후 뒤집어진 상태에서 실속에 빠진 F-20은 천천히 낙하하더니 결국 근처 논바닥에 추락하고 말았다.

추락 당시의 영상. 플레이타임 30초 이후.
[1]

기체결함은 아니고 G-LOC으로, F-20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G-LOC의 발생가능성을 낮추는 방법은 있어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아직도 없기에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사고이긴 했다. 자세한 것은 G-LOC 항목 참조. 그러나 원인이 어찌되었던 국내 고위 인사들 앞에서 전투기가 추락해버렸으니 노스롭 입장은 말이 아니었다.

이후 박종규와 지미 신의 로비도 불이 붙었다. 때로는 강압적으로, 때로는 금품등을 이용해 유화책을 써가며 각계 인사들에게 더 열심히 로비활동을 벌였다. 대략 F-20 사고시점 당시 이들이 쓴 로비자금은 한 달에 우리 돈으로 1억원 가량이었다. 이는 1984년 당시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당시에도 최고급 아파트로 꼽히던 압구정 현대아파트 48평도 1억이 안 됐다. 지금으로 따지면 강남의 최고급 신축 50평대 아파트 수준. 월 수십억 원을 로비자금으로 쓴 것이다.

결국 박종규, 지미 신은 조운즈 사장과 전두환 대통령의 회동을 성사시켰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대략 30여분 정도 회동하였다. 조운즈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인하여 박종규를 더 신뢰하였다. 한편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노스롭에게 F-20 도입 조건으로 800만달러를 지불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다만 전두환 대통령의 금품요구는 지미 신의 주장으로, 이후 벌어진 수사등에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서 결국 공식적인 내용은 아닌 지미 신의 주장 수준에서 머문다.) 내가 물건을 파는데 돈을 줘야 하는 이상한 현실

여하간에 조운즈 사장 및 노스롭 이사회는 박종규를 신뢰하여, 그가 또 다시 요구한 오프셋도 받아들여 박종규 소유(명의 자체는 다른 사람으로 되어있었음)의 홍콩내 무역 회사에 9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자하였다.

그러나 노스롭에는 악재가 겹친다. 일단 1985년 7월, 파리 에어쇼를 앞두고 캐나다에서 시범비행을 연습중이던 F-20 한대가 또 다시 추락한 것이다. 이번에도 원인은 G-LOC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두 번이나 떨어진 전투기를 판매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몇 달 뒤인 12월에 박종규가 덜컥 간암으로 죽어버리면서 노스롭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F-20의 연이은 추락을 로비로 막아줄 사람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여기에 레이건 정권은 한국 등 2등급동맹국에 대한 무기수출 규제를 완화하면서 한국에 대해 당시 미공군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사양의 F-16 블록30/32형 모델 판매를 허가한다. 사실 F-20이 국제 무기 시장에 등장한 이유가 전임 지미 카터 정권이 F-16 최신형의 '2등급 동맹국'[5]에 대한 해외 판매를 막았기 때문이었는데 레이건 정권은 이것을 풀어버린 것이다.[6]

비록 F-20이 당시 F-16 초기형은 없던 AIM-7 운용능력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애당초 레이더 탐색거리 자체도 더 짧고, 기체도 지나치게 소형이어서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여러모로 F-16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정적으로 F-20은 미국조차 운용하지 않던 전투기인 반면 F-16은 이미 미 공군이 운용하여 검증되었다는 점도 큰 이점으로 작용하였다. 이제 대한민국 공군이 F-16을 놔두고 굳이 F-20을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

노스롭은 돈은 돈대로 다 날리고 한국에 대한 F-20 판매는 완전히 물건너가버린 것이다.

이후 1986년 대한민국 정부는 피스브릿지(Peacebridge) 사업을 통해 F-16 Block 30/32 모델을 36대 직구매하였고, 2년뒤에 복좌형 4대를 추가도입하였다. [7]

여기에 노스롭에겐 일이 더욱 더럽게 돌아간다. 지미 신과 이민하 사장은 노스롭에 입막음조로 다시 돈을 요구한 것이다.징한 놈들 도대체 얼마를 뜯어먹은거야 노스롭은 동양고속에게 150만달러를 추가로 지불하여 한국에 대한 악연은 막을 내린다. 이후 지미 신은 다시 이민하에게 추가로 돈을 뜯어 갔다고 전해진다. 뛰는 놈위에 나는 놈

하지만 입막음료까지 지불한 것도 무색하게 1988년에 월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노스롭의 로비가 폭로되었다. 더불어 우리나라도 당시 '5공비리 척결 특별수사'를 통하여 이 내용이 알려졌고, 이민하 사장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기소 된다.

그러나 로비의 핵심이었던 박종규는 이미 사망하였고, 지미 신은 애당초 재미교포여서 국내에 없었기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조사가 못되었다. 결정적으로 이 '5공비리 척결 특별수사'가 어차피 말만 그럴싸 했지 '친구야' 정권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일인지라 대부분 용두사미식으로 흐지부지 수사가 끝나서....

결국 이 사건으로 이민하는 1심에서 1년의 징역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8개월에 집행유예 1년으로 감형되어 풀려난다.

한편 노스롭은 '야 우리 너희한테 속았다. 우린 그거 로비하라고 준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부동산 투자 금으로서 주었다.'라며 오프셋으로 건네주었던 625만 달러를 도로 토해내라는 소송을 걸었다.

결국 1991년 법원은 '구라까고 있네. 이거 단순 투자자금이 아니라 너네가 로비목적으로 돈 건넨거 다 알거등?'이라고 결정을 내려 노스롭은 패소하고 625만 달러도 못 받아갔다....

관련기사 링크 어느 민초의 반세기 전투기 5 : 양 김(金)과의 인연


관련항목

  1. 미국의 외교 무게중심이 대만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미국은 중국과 적대 관계인 대만에 대한 신형 무기 판매를 꺼리기 시작했다.
  2. 박종규는 유신정권 시절 사격연맹회장으로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였는데, 이게 우리나라가 최초로 개최한 세계구급 스포츠대회였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IOC위원으로 국제 스포츠계에서 유일하게 통하던 한국인이었다.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하면서 한동안은 은둔 생활을 했으나, 5공 정권이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면서 국제스포츠계에서 유일하게 통하던 박종규가 다시 실세로 부상한 것이다.
  3. 김운용은 박종규가 사망한 뒤에 한국 몫의 IOC위원 자리를 승계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4. KFP 사업으로 F-16을 도입하면서 록히드마틴으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서 T-50 골든이글을 공동개발한 것을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의 절충교역은 이런 식이다.
  5. NATO, 일본, 호주, 사우디 아라비아, 이스라엘을 제외한 기타 동맹국. 당연히 대한민국도 미국의 무기수출에 관해선 2등급 동맹국이다. 이건 F-15 최신형이 어떤 순서로 해외에 판매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F-15가 미공군의 최상위 모델이던 시절, 오직 이스라엘,사우디,일본에만 수출허가가 떨어지고 한국수출은 언제나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6. 조금더 정확히 하자면 지미 카터 정권은 F-16에 탑재되던 대용량 F-100엔진의 수출을 막아버렸다. 이때문에 2등급 동맹국에 F-16을 수출하려면 한단계 낮은 구형 J79엔진을 탑재한 다운그레이드 사양(F-16/79)만 가능했다. 그런데 이 모델보다는 F-20이 성능, 가격 모든 면에서 우수하단 판단으로 노스롭이 해외수출에 나선 것이다.
  7. KFP 사업과는 별도 계획이다. 1990년대 KFP를 통해서 들어온 것은 F-16 Block 50/52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