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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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第五共和國
국기국장
전두환 사진
대통령전두환
수도서울특별시
체제 기간1981년 ~ 1988년
이전 체제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이후 체제제6공화국

1 개요

경제적으로는 3저호황과 더불어 사상 최고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던 황금기, 정치적•사회적으론 가장 엄혹했던 군사독재정권.

대한민국에서 12.12 군사반란5.17 내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1981년 3월)부터 노태우 대통령 취임(1988년 2월)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 사실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에 이미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이건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은 것이고, 이른바 체육관 선거 시즌 투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제5공화국의 시작이다. 물론 체육관 선거 시즌 원과 시즌 투의 대통령 가카는 동일인물이다.

1981년 3월 3일 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 약 7년에 못미친 독재 시대. 분명히 시대상으로는 경제발전과 물가안정으로 인한 생활수준의 향상과 기술의 발전 등의 혜택[1]이 있었던 시대였지만, 그 전보다 더 악랄하고 듣도보도 못했던 사건들이 일어났던 아이러니한 시대이다.


평화의 댐코렁탕 그리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의 온갖 막장 행태를 부리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고삐 풀렸던 독재 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것이 평화의 상징인 19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국가의 불과 몇 년 전 모습이었다

2 시대적 특징

이 정부의 모토이자 캐치 프레이즈는 선진조국창조 와 모순정의사회구현.

"선진조국창조" 의 경우, 이 시절 만들어진 공익광고를 보면 '선진조국'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30여 년 뒤 북쪽에서도 비슷한 슬로건이 생겨난다.

"정의사회구현"의 경우는 각급 경찰서 현판 바로 밑에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달린 것은 물론 동사무소 등 관공서에 버젓이 걸려있었다. 심지어는 당시 국민학교 외벽에도 떡하니 걸려있던 문구. 메간테. 이 정부의 태생부터 따져보자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캐치프레이즈다.[2] 그리고 여당의 이름은 민주 정의이었다.[3]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김병조는 민주정의당 전당대회 및 차기 대선 후보 지명식이라 쓰고 왕위 계승식이라 읽는다에서 "민정당은 국민에게 (情)을 주는 당, 통일민주당은 국민에게 고을 주는 당 " 이라고 말하다가 장렬한 자폭크리를 맞았다.[4][5] 이 발언이 터져나왔던 장소는 장충체육관이었으며, 그날은 1987년 6월 10일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강력한 억압 정책 덕분에 물가가 안정되고, 안정된 참모진 기용과 정권 후기의 3저호황 덕분에 경제와 중산층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전 도시 미관이라는 명분하에 서울의 많은 판잣집이 철거되기도 하였다.

미국과의 관계는 겉보기에 로널드 레이건이 한미동맹을 굳건히 강조하는 등 관계가 끈끈했으나, 미국 내에서는 전두환 정권을 향한 비판이 계속 되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서는 김대중이 귀국할 때 그를 걱정해 따라온 미국 정치 인사[6]들과 안기부 요원들 사이에 몸싸움마저 있었다. 미국 정계 인사들이 김대중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전 해에 비슷한 경로로 귀국했던 필리핀 정객 아키노가 공항에서 마르코스에 의해 암살되었기 때문에 김대중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국 경찰과 안기부 요원이 김대중을 데려간답시고 미국 인사들에게까지 무력을 행사한데 대해 미국 내부적으로 매우 언짢아 했을 뿐만 아니라,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화이츠는 "한국 경찰이 저 모양인데, 3년 후에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서울 거리를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는 말까지 하며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안 그래도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비난을 퍼붓던 시기였다. 중국도 천안문 사태때문에 국제사회의 온갖 비난과 제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 시절 관련 그시절 문제학교의 채플린 대통령의 죽음과 광주 교육감이 된 민 선생과 전두환의 사회정화위원회 여당 의원의 비서가 되다 양 김(金)과의 인연 스트립 쇼와 빈민운동 사이 제정구, 원혜영 그리고 최기선

3 제5공화국 헌법

제5공화국 헌법은 1980년 10월 27일,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개정되었다. 제2공화국 다음으로 가장 짧은 체제. 다만 국민 눈치를 아예 안본 것은 아니어서 유신체제처럼 가지 않고 대통령은 무조건 단임으로 하기로 했다. 원안에서는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으로 했는데, 전두환이 숫자는 럭키 세븐이라며 7년 단임으로 슬그머니 고쳤다고. (...) 여하간, 단임이란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 그리고 어쨌든, 약속은 지켜서 임기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물러났다. 사실 전두환은 내각제로 바꿔서 수상도 해볼까 고려했고푸틴?, 후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 막후 실세, 사실상의 대통령 노릇을 하려고 했지만 후임인 친구가 뒤통수를 쳤다. 결국 전두환은 백담사로 갔다가, 김영삼이 당선되자 얄짤 없이 친구와 손에 손잡고 함께 감옥행.

대통령 선출 방식은 간선제[7], 국회의원 선거 방식은 전국 92개의 중대선거구 지역구에서 최다와 차다 득표자를 뽑고(184명), 지역구에서 받은 의석에 비례해서 비례대표인 전국구를 92명 뽑는 방식이었다. 당시 전두환의 측근들 중에는 그냥 직선제로 가자는 사람들도[8] 많았지만 결국 간선제를 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역구 제1당이 비례대표의 2/3인 61석을 먹는다. 즉 여당이 무조건 전 지역구에서 2등 안에 들어 지역구 절반은 거의 먹고 들어간다 + 여당이 지역구에서 1등이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 61석을 먹는다 = 여당이 5/9인 153석, 즉 150석 언저리는 먹고 들어가므로 여당은 결코 과반(총 의석 276석 중 138석)을 놓칠 수 없다. 이를 두고 11대 총선 당시 민정당 초대 대표위원 이재형(야당에서 변절해 5공에 참여했고 12대 국회의장이 되었다)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다 합쳐 봤자 55%밖에 안 되는데 무슨 비민주적이라는 거냐."라고 발언했다.

야당 돌풍이 분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신한민주당이 출현하여 67석[9]을 얻었다. 민한당이 35석[지역구 26 + 전국구 9]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 다음, 민한당 의원들이 총선 이후 대거 신민당으로 이적해 103석의 단일야당이 탄생했는데도 여당은 148석[10]이었다. 득표율은 신한 29.3% + 민한19.7% = 49.0% > 여당의 35.2% 였다. 만약 이 때 전국구를 지역구 득표율에 따라 정확히 배분했다면 신민+민한 120석 VS 민정 119석이 될 수 있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거제도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알 수 있다. 12대 총선 결과를 놓고 격분한 전두환이 민정당의 과반 확보를 보고한 노신영 안기부장에게 "전국구가 있으니까 그 정도 얻은거잖소!"라고 역정을 낸 것만 봐도..... 그리고 노신영은 안기부장에서 짤렸다.[11]

3.1 "2중대, 3소대"로 전락한 관제 야당

게다가 야당은 안기부에서 만든 관제 야당이었다. 3김으로 대표되는 유력 야당 정치인은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1985년에야 해금되었다. 구 신민당 계열의 민주한국당(2중대), 구 민주공화당 계열의 한국국민당(3소대), 그 외 신정치사회당, 민권당, 농민당, 민족당, 거기에 민주사회당(사회민주당) 등의 진보 정당까지 만들었다. 정당놀이 참고로 2중대, 3소대라는 조롱에서 민주정의당은 1대대였다. 진정한 야당이 생긴 것은 1985년 1월 신민당이 창당되면서 부터라 할 수 있다.

야당 내부 파벌 간 갈등 부추기기나 공작 수준에 그쳤던 박정희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으니, 집권세력의 야당 만들기는 가히 북한에 비견할만 했다. 심지어 1981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으로 공천신청을 했더니 제1야당 민주한국당 후보로 공천된 사례도 있다. 당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정당의 공천작업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12] 야당의 당직 임명도 전부 안기부에서 챙겼다. 한마디로 여/야 모두 정권의 꼭두각시였던 셈이다. 자세한 건 민주한국당 참조. 이것이 어원이 되어서 현재에서도 특정 단체/집단/커뮤니티의 멀티라는 의미를 비꼴때도 이 2중대라는 용어가 가끔 쓰인다. [13]

당시 민한당 총재였던 유치송의 회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창당 후 야당총재들이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조찬을 한 적이 있다. 전씨 앞에서는 야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화 중에 야당총재와라는 말을 무심코 썼더니 전씨가 "야당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1.2.3 당이지요."라고 정색을 했다. 전씨의 이 말에 아무런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고, 또 그러는 야당총재도 없었다.'

실지로 여야라는 표현은 국론분열을 부추긴다며 나라일을 사이좋게 함께 논의하는 친구 정당이라고 "우(友)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쯤되면 뭐 간판만 다르지 저 윗쪽 동네랑 크게 다를 게 없는 수준이다. 북한이나 중국도 명목상의 어용야당은 있다. 실제 북한에도 조선로동당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칭 사민주의 정당인 조선사회민주당자칭 천도교 민족정당인 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 두 정당은 조선로동당의 동맹이라 하여 역시 우(友)당으로 부른다.

중국, 북한, 구 동구권 공산국가에서도 집권 공산당 뿐만 아니라 우당까지 형식적으로 참여한 선거를 치룬다. 하지만 절대 집권 공산당을 꺾을 수 없게 사전에 선거판이 짜여있다.[14] [15] 제5공화국 시절 선거는 이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제5공화국 시절 선거를 통해 전두환이나 민주정의당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만약 정당화한다면 북한, 중국과 같은 독재 국가의 형식적인 선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과 다름없다.

4 관련 인물

4.1 제5공화국 관련 인물

  • 전두환 특전사 1공수여단장, 1사단장, 보안사령관, 중정부장(서리)[16], 민정당 총재, 대통령
  • 노태우 특전사 9공수여단장, 9사단장,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민정당 대표, 민정당 대선후보
  • 정호용 50사단장, 특전사령관, 3군사령관, 육참차장, 육참총장,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3군사령관, 안기부장[17]
  • 황영시 1군단장, 육참차장, 3군사령관, 육참총장, 감사원장
  • 차규헌 수도군단장, 육사교장, 육참차장, 2군사령관, 교통부 장관
  • 박희도 특전사 1공수여단장, 26사단장, 특전사령관, 3군사령관, 육참총장
  • 최세창 특전사 3공수여단장, 육참차장, 3군사령관, 합참의장
  • 장기오 특전사 5공수여단장, 교육사령관, 총무처 차관, 총무처 장관
  • 노신영 외무부 장관, 안기부장, 국무총리
  •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 특전사 직전참모, 특전사 3공수여단장, 대통령 경호실장[18], 안기부장
  • 안무혁 국세청장, 안기부장
  • 박세직 수경사령관, 안기부 제2차장, 총무처 장관, 체육부 장관
  • 안현태 대통령 경호실 차장, 대통령 경호실장
  •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19], 청와대 정무수석
  •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청와대 사정수석
  • 허문도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문공부 차관, 청와대 정무수석, 통일원 장관
  •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장 및 대공처장, 청와대 민정수석, 안기부 2차장
  •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민정당 사무총장
  •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 민정당 대표
  • 이춘구 내무부 차관, 민정당 사무총장
  • 박준병 20사단장, 보안사령관, 국회의원
  • 백운택 71방위 사단장, 9사단장, 1군단장[20]

4.2 야당 관련 인물

5 관련 항목

☆표시가 된 것은 제5공화국과 관련은 있으나, 제5공화국 출범 이전(1981년 3월 이전, 즉 제4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제5공화국에 의해 부조리하게 자행되거나 제5공화국의 부조리로 인해 촉발된 사건은 볼드체로 표기한다.

5.1 사건 사고

다음은 5공의 종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항목들로 연대기대로 나열한 항목.

참 많기도 하다

5.2 기타 항목

  1. 놀랍게도 서울지하철 1기 지하철 구간이 모두 개통된 것도 이 시기이다.
  2. 정의사회 구현에 앞장선다고 '사회정화위원회'라는 행정부서를 전국 읍면동 단위까지 만들었다. 주로 각종 관변 캠페인에 앞장서고 각 지역 유지들 한자리용 + 삼청교육대 잡아들이기 용.
  3. 이후 김영삼3당합당을 통해 당권을 잡고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현재의 새누리당이 된다.
  4. "일요일밤의 대행진"(일요일 일요일밤에의 전신)을 진행하면서 현재 유재석이나 강호동 이상의 인기를 누렸던 코미디언이었으나, 이 발언으로 전국민의 공분을 샀으며 그 이후 거의 연예계 생명이 끝났다고 할 정도로 타격을 받았고, 조용히 지내다가 SBS 개국 때 옮겨갔다. 그러나 당시 SBS로 옮겨간 원로급 코미디언이 다 그렇듯이 폐기처분된다.
  5. 다만 이는 엄연히 정권과 MBC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대사였으며, 실제 김병조 본인은 대본을 보는 순간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리허설 때 이 모습을 지켜본 정권 관계자는 "그 부분이 곤란하면 빼라. 단, 뒷일은 알아서 해라."는 말을 했으며 결국.....
  6. 민주/공화 양당의 상원의원은 물론이고 전직 외교관, 학자들이 대거 동행했다.
  7. 개선(?)된 게 있다면, 이번엔 선거인단에 야당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당이 전체 선거인단의 53.1%, 친여무소속이 31.8% 입후보한 데 비해, 제1야당은 전체 선거인단의 12.5%만이 입후보해서 선거인단 선거 자체가 형식적인 절차였다. 전두환은 90.2%의 득표율로 당선. 백사십 퍼센트가 아닌 게 어디야.
  8. 사실 이게 실현됐다면 전두환을 처리하기는 훨씬 어려워졌을 공산이 크다. 어쨌건 위법하게라도 국민의 신임을 어느 정도 얻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9. 신민당 지역구 50 + 전국구 17
  10. 지역구 87 + 전국구 61
  11. 다만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겼다. 총선 때 삽질한 것만 빼면 워낙 그 동안 일을 잘해왔기 때문에 전두환이 사실상의 영전을 시킨 것.
  12. 창당은 여당은 보안사, 야당은 안기부/ 여하간 해당 후보는 걱정할 거 없다. 2등까진 다 붙으니까...
  13. 대표적인 건 김용갑 의원이 2000년에 사용한 사용한 "조선로동당 2중대"로서 북한 의 멀티, 친북파라는 표현이다. 웃기는건 김 의원 개인은 5공의 핵심인사로서, 이 표현을 다시띄운 대표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14. 일당 독재 국가로 인식되고 있는 북한도 형식적으로 조선로동당 소속이 아닌 의원이 많이 있다. 우리의 국회에 해당되는 최고인민회의에서도 조총련, 조선사회민주당, 조선천교도청우당, 무소속 등이 100석에 육박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우당은 조선로동당을 절대 비판하지 않으므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만든 것일 뿐이다.
  15. 북한 뿐만 아니라 냉전 시대 중공, 소련, 폴란드, 동독 등도 우당이 형식적으로 의회 의석을 차지했다.
  16. 중앙정보부장은 민간인 출신만 임명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역 군인(중장)이었던 전두환은 서리의 자격으로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었다.
  17. 초대 안기부장. 마지막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해 중도에 안기부로 개편되어 안기부장이 됐다.
  18. 현역 군인 신분으로 경호실장을 지냈다.
  19. 원래는 없는 직책이다. 청와대 입성시 만들어서 들어갔는데 다른 보좌관들과 달리 청와대 본관에서 대통령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파워가 (...) 결국은 이러한 이유로 전두환의 눈밖에 나면서 좌천됐다.
  20. 재임 중 82년 사망
  21. 기본 골자는 1980년에 나왔다.
  22. 당시 안기부가 사건발표를 한 날짜이다.
  23.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사실상 강제추행, 강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24. 박정희중앙정보부를 계승. 하는 짓거리도 계승 그리고 그걸 국정원이 또 계승
  25. 제3공화국 초기(1963년)에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