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일반적인 의미
- 能通 : 무언가에 능숙함을 일컫는 말.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릉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 |||||||||||
정보 | 황개 | 한당 | 장흠 | 주태 | 진무 | 동습 | 감녕 | 능통 | 서성 | 반장 | 정봉 |
凌統
(189년 ~ 217년 또는 237년[1])
2.1 정사
2.1.1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 능조는 오나라의 손책과 손권을 2대에 걸쳐 섬겼다. 능통의 등장은 능조가 사망하는 시점이다. 203년에 오는 대대로 악연인 황조를 공격했는데, 그 때 능조는 닥돌하다가 눈먼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 능조가 해적 출신 감녕에게 화살 맞고 죽었다고 나오는데, 이건 〈감녕전〉에 주석으로 남은 위요의 《오서》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다. 이게 주석이지 본문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만 보고 감녕과 능통의 원수관계가 100% 《삼국지연의》의 창작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당시 능통은 15세였는데 능조가 국사를 위해 죽었으므로 손권은 능통을 별부사마에 제수하고 파적도위를 겸임하여 아버지의 병사를 거느리게 했다.
2.1.2 진근을 죽이고
손권이 보둔과 마둔을 공격할 때 능통도 따라갔는데, 손권은 보둔을 함락시키고 마둔에는 병사 1만을 남긴 채 능통과 장이에게 포위를 맡기고 돌아갔다.
기한이 되기 전, 능통은 대장 진근(陳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진근은 술 마시는 예의를 어겼고 능통의 아버지인 능조까지 모욕했다. 사람들이 연회를 떠난 후, 진근은 길에서도 능조를 험담했으므로 능통은 진근을 칼로 찔러버리고 진근은 며칠 후 죽었다.
마둔을 공격할 기한에, 능통은 진근을 죽인 죄를 지고 스스로 화살과 돌을 받아내며 싸워, 제 때에 자신이 맡은 부분을 무너트렸다. 여러 장수들은 능통의 활약으로 적을 무찔렀다. 돌아올 때에는 스스로 군정에게 가 결박되었다. 손권은 능통을 칭찬하고, 그 공적으로 죄를 면해 주었다.
2.1.3 복수는 물건너가고
208년에 능통은 황조 토벌전에 따라나서 복수를 하려고 했다. 능통은 동습과 함께 몽충을 이끌고 돌격했으며, 적장 장석을 베고, 여몽이 적의 수군을 패배시킨 틈을 타서 능통은 먼저 그 성을 공격하여 크게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원수인 감녕이 그 전에 투항해 버려서 레귤러 멤버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복수는 물 건너 갔고 능통은 주먹을 내리칠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서》의 기록에서 능통은 아버지의 원수인 감녕에게 늘 원망을 했고 이에 감녕은 항상 능통을 경계하고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손권 역시 능통에게 한을 품지 말라고 명령했다.
어느 날 여몽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능통이 칼춤을 췄다. 감녕이 이에 일어나서 자신도 쌍극무를 출 수 있다고 말했다. 여몽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자신도 칼과 방패를 쥐고 칼춤을 춰서 두 사람의 거리를 벌렸다. 후에 손권은 능통의 의도를 눈치채고 감녕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주둔하게 했다.[2]
적벽대전에도 참가했으며, 남군전투에서 주유가 감녕을 구원하러 갈 동안 본거지를 무사히 지켰다.
2.1.4 손권의 신임
능통은 어진 선비와 가까이 지내며 재물은 가벼이 여겼다. 또한 공손하고, 수하를 잘 대했고 의를 중시했으며 주로 불리한 시점에서 후위를 맡거나, 불리하지 않아도 닥돌이 필요한 상황에서 먼저 창들고 뛰어가는 역할이었기에 손권이 이 친구를 크게 신임했다고 한다.
이후 2차 합비 공방전에서 영혼까지 털리고 도망치던 손권을 수하의 300명을 이끌고 죽을 힘을 다해 구원했고, 수십명을 죽였으나, 수하의 병사들은 전멸했다. 자기가 아끼던 병사들이 모두 죽자, 울기 시작했는데 손권이 말하길
공적, 죽은 자는 이미 죽었고, 실로 경은 살아 주었는데, 어찌 사람 없음을 걱정하오?
라고 말하며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했다고 한다.
손권이 마음을 기울인 점에 있어서는 여몽과 능통에 대한 것이 가장 무거웠고, 주연은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고 하니 그의 죽음 때 손권이 얼마나 난리를 쳤을지 짐작이 간다... 게다가 29살에 요절해버렸으니... 게다가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게 있는데 죽을때의 나이가 흔히 단명했다고 알려진 손견, 주유보다도 적다!
능통이 병으로 죽자 손권은 크게 슬퍼하고 능통의 두 아들인 능열과 능봉을 궁 안에 거둬 양육했다.
아들인 능열(淩烈)과 능봉(淩封)은 나이가 각각 몇 살 밖에 되지 않아 손권이 궁 안에서 기르고 친애하며 대우함이 여러 아들들과 같으니 빈객들이 나아가 알현하면 그들을 불러 보여주며 “얘들이 내 호랑이 새끼요”라 했다. 나이가 8, 9세가 되자, 갈광(葛光)에게 영을 내려 독서를 가르쳐 주게 하고, 10일에 한번은 말을 타게 하였다.
위 기록은 손권이 그만큼 능통을 아꼈고 능통의 자식들까지 궁에서 기를 정도로 총애를 했다는 뜻이 된다.
2.2 사망 시기 논란
사망 연도에 29세 사망설과 49세 사망설, 두 가지 설이 있다. 능통 본인의 열전에는 49세에 죽었다고 적혀있는데(이 기록대로라면 능통의 생몰연도는 189~237), 다른 오나라의 인물인 낙통의 열전을 보면 낙통이 능통 사후에 그의 부대를 통솔하여 222년의 이릉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낙통은 228년에 죽었다. 237년에 죽었다는 게 사실이라면 222년에 멀쩡히 산 사람의 부대를 이끌었다는 셈이 되는데, 낙통전에는 분명히 '능통이 죽은 후'라고 적혀 있다.
즉 능통전이 잘못되었거나 낙통전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능통전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경우 능통전의 나이 四十九를 二十九의 오기로 보는 설이 있다. 만약 낙통전이 맞다면 능통의 생몰년도는 189년~217년이 된다. 또한 능통이 형주 공방전이나 이릉대전, 조비의 몇 차례의 남정 등 217년 이후 237년까지 20년간 숱한 중요한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217년 사망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거기다가 건강실록에서는 217년에 죽었다고 못 박아버렸다.
또한 능통 사후에 손권이 몇 살 밖에 안된 능통의 자식들을 궁 안에 거둬 양육했다고 한다. 능통전 기록대로 49세에 죽은 게 맞다면 당시 49세가 적은 나이는 아닌데도 그때까지 장성한 아들이 없이 유아에 불과했다는 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
또한 합비 공방전 때 부상을 당해 손권이 배에 능통을 남겨두고 의복을 갈아입혔으며, 약을 써서 죽지 않았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이로 볼 때 합비 전투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능통 역시 요절한 인물이 맞다.
2.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의 능통과 감녕과의 그렇고 그런 적대관계를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김홍신 평역판 기준)
(전략) 황조를 죽인 뒤 손권군은 잔치 분위기였다. 이 때 능통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감녕이 주인공격이 되어 모든 사람의 이목을 받는 걸 보고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계속 감녕을 노려보다가 옆에 있는 부하의 칼을 쓱 꺼내들고 중앙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제가 칼춤이라도 춰 보겠습니다."
이에 아까부터 능통의 눈초리를 느끼고 있던 감녕도 창을 하나 꺼내들고는 역시 중앙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도 미약하게나마 창을 써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칼과 창을 가지고 춤을 추는데 그 눈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둘 사이의 분위기를 눈치챈 여몽이 얼른 칼과 방패를 들고 끼어들며 말했다.
"두 분이 춤을 추시더라도 저만큼은 추시지 못할 거요. 제 칼과 방패를 쓰는 솜씨도 봐 주시오."
여몽은 능통과 감녕 사이에서 둘이 치고받지 못하게 거리를 벌려 놓았다. 잔치 자리에 때아닌 칼춤이 벌어지자 불안함을 느낀 장수들 중 하나가 얼른 손권에게 달려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손권이 둘 중 하나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급히 도착하자 능통과 감녕은 무기를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손권은 능통을 보자 호통을 쳤다.
"같은 오나라의 장수이니 원한은 씻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에 능통이 울며 엎드리자 손권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달랬다. (후략)
(전략) 합비에서 장료군이 몰려온다는 것을 듣자 손권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조조군을 깨트릴 용자는 없는가?"
이에 능통이 공을 세울 기회라 여겨 나서며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군사는 얼마면 되겠는가?"
"3천이면 충분하겠습니다."
이 때 누군가가 끼어들며 외쳤다.
"기병 백이면 충분하거늘, 어찌 3천이나 끌고 간다는 말입니까?"
모두가 소리나는 쪽을 보니 바로 감녕이었다. 감녕을 원수로 여기고 있는 능통이 그 소리를 듣자 화가 날 수밖에 없어 외쳤다.
"네가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3천씩이나 필요할 것이 없다, 내가 100명을 이끌고 적을 치는 것을 보라!"
이에 손권이 두 사람을 제지시키며 능통에게 군사 3천을 주고 적을 치도록 했다.
(중략)
과연 감녕은 100명을 이끌고 적진을 습격하고도 군사 한 명을 잃지 않았다.
(중략)
다음 날 장료군 측에서 악진이 나와서 도발을 하자 능통이 자신이 나서서 손권에게 말했다.
"제가 저 자의 목을 베겠습니다."
이에 능통이 나가서 악진과 싸웠다. 한참 싸우던 중, 실수로 말에서 떨어지자 악진이 쓰러진 능통을 창으로 찌르려 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악진을 맞췄고 악진은 땅에 쓰러졌다. 조조군에서 한 장수가 나와 악진을 데려가는 동안 능통도 본진으로 돌아와 손권에게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했다. 이에 손권이 까닭 모를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악진의 볼에 화살을 쏴서 그대를 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능통이 허둥대는데 손권이 웃음지은 얼굴로 말했다.
"바로 감녕일세."
능통은 의외의 사실에 놀라서 멍하니 있다가 감녕에게 가서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귀공께서 큰 은혜를 베푸실 줄은 몰랐소이다."
이후 두 사람은 원한을 씻고 친구가 되었다 한다. 손권도 두 사람이 화해하게 된 것을 큰 수확으로 삼았다.(후략)
여기서 정사 기준으로 첫 번째 부분은 사실이고 두 번째의 부분은 감녕이 백 명의 병사로 적진을 습격한 부분은 사실이나 그 외에는 연의의 묘사이다. 실제 정사에선 능통과 감녕이 화해했다는 기록이 없다.
2.4 미디어 믹스
- 능통/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