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삼국지)

오서 「정황한장주진동감릉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정보황개한당장흠주태진무동습감녕능통서성반장정봉


陳武
(177년? ~ 215년)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 는 자열(子烈). 진수(陳脩)와 진표의 아버지.

2 정사

손책이 수춘에 있을 시절 손책을 찾아가 스스로 그 가신이 되었는데, 당시 18세였으며 신장이 7척 7촌에 달했다. 이후 손책을 따라 장강을 건너 정벌에 공을 세워 별부사마가 되었다. 199년, 손책이 여강태수 유훈을 격파하고 여강 사람 중 정예한 자들을 묶어 진무에게 거느리게 했다.

손권의 친애를 받고, 공적이 있어 편장군으로 승진했다. 215년, 손권을 따라 2차 합비 공방전에 참전하였으나, 난전 중에 전사한다. 손권은 이를 애통히 여기며 직접 장례에 참가하고 빈객 2백여명의 부역을 면제한 다음 진무의 애첩을 순장한다.

이를 두고 잔인하다는 등 말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 능통전에 달린 손성의 평이 있다.

손권은 훌륭한 인물을 기르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위해 사력을 다하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보였다. 가령 주태가 부상을 당했을 때는 눈물을 흘렸고, 진무가 죽자 첩을 순장시켰으며, 여몽이 위독해지자 신들에게 빌었고, 능통의 고아들을 기르는 등, 직접 고통스런 마음을 다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아름다운 덕이 알려지지 않았고, 은혜와 덕택은 안에서만 드러났으나, 굽히며 형(荊), 오(吳)를 단단하게 하고, 분수에 넘치게 연호를 본뜰 수 있었던 것 또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패왕의 도는, 크고 심오한 것을 기약하니, 이 때문에 선왕(先王)은 덕의의 토대를 세우고, 진심으로 복종하는 천하를 갖추었으며, 경략의 근본을 만들고, 귀천의 차례를 밝혀, 평이하고 간단하면서도 일가가 오래 갈 수 있었고, 몸이 온전하면서도 공이 커질 수 있었는데, 어찌 사소한 것에 치중하여 가까이하며 힘써, 그 해에 이로움을 구한 것인가? 어(語)에서 이르길 “비록 작은 도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으나, 원대함에 이르는데 지체될까 두렵다”, 이가 이것을 이른 것이로다!

즉, 부하를 위하는 행위지만 왕이 하기에는 너무 작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하작이라는 사람은 평을 달아 말한다.

중모(仲謀)의 일은, 오직 첩을 순장하며 예를 잃었을 뿐이고, 기타는 또한 임금이 그만두지 못할 바이나, 근본은 아니다. 일부 주례(周禮)는, 지극히 자세하면서 다 갖춘 내용이나, 손성의 견해는, 뜻이 차이가 심하면서도 세밀하지 못하다.

손성은 진무전에는 또 다시 이 일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목공과 두회의 예를 들어 손권의 행동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을 내렸다.

옛날 삼량이 진 목공을 따라 순장되자 진의 군대가 정벌하지 않았고[1], 위씨의 첩을 출가시키자 두회는 전장에서 고꾸라졌으니[2], 화복의 응보의 효험는 이와 같다. 손권이 계교에 맡기고 술책에 의지하고, 삶으로써 죽음을 따르게 했다가, 대대로 이어질 제위를 재촉하게 되었으니, 또한 의당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첩이 진수나 진표의 어머니도 아닌데 서자 진표가 진수가 죽었을 때 진수의 어머니를 섬기겠다고 겨우겨우 허락을 맡은 것을 보면 순장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살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3 연의

연의에서는 얼굴은 황색, 눈은 적색으로 괴이한 용모라고 서술된다. 손책이 강동에 진출했을 때 등용되어 유요 휘하의 장영을 죽였다. 그 후 적벽대전, 남군 공략전에 참가. 유비손상향이 형주로 귀환할 때 반장 등과 함께 데리고 돌아오려 하다가 손상향의 일갈에 물러났다.

215년, 유수구에서 조조군과의 전투에서 방덕과 격렬하게 싸우다 윗도리가 나무에 얽혀 움직일 수 없게 된 바람에 전사한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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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0,11
삼국지 12,13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무력이 80대 후반을 찍으며 오나라에선 손꼽히는 무력 담당. 다만 통솔력, 무력을 제외하면 나머지 능력치는 밑바닥으로 긴다. 사실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큰 활약이 없는데 무력이 지나치게 높은 감이 있기는 하다. 오나라에 워낙 지상전에 특화된 장수가 없다 보니 버프를 준 듯.

삼국지 6에서는 무력도 60대에다가 숨은 능력치인 용맹이 0이다. 웃기는 건 무용 특기는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5/82/45/37로 분투와 투함을 가진 꽤 좋은 장수. 제사도 있기 때문에 공성전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4/88/47/40/63에 특기는 9개. 일기토 특기가 4개라 일기토로 쓸만하고 돌격, 일제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책략만 주의하면 전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준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74/87/43/40/62에 극병과 수군의 적성이 S이다. 특기는 극장인데 무력이 제법 높은 편이라 육전용 특기가 모자란 편인 오나라에서는 상당히 좋다.

삼국지 12에서는 능력치는 11과 동일하며 전법은 잉여스러운 속공. 일러스트가 괴수스럽게 변했으나 아니 왜 연의를 적용해서 눈이 적색이 아닌거지!? 전장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손책군에 워낙 좋은 장수들이 많아 높은 무력에 비해 실제 전장에서 볼 일은 거의 없다.

삼국지 13에서는 통솔이 72, 무력이 84로 너프되었다. 전법은 특공. 병종 적성은 창병만 A고 나머지는 모두 C. 특기는 훈련 3, 공성 3, 수련 4, 일기 3. 주장으로 쓰기는 많이 애매해졌고 전투특기가 부실한 장수들의 부장으로 붙여서 보내자.

삼국지대전에서는 파충류(도마뱀)와 비슷하게 그려졌다, 아무래도 연의에서의 외모 묘사 때문인 듯.

난전 중에 죽다보니 보통 명장과의 일기토에서 죽는 식으로 묘사된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궁병(연노병)으로 나와 방덕과의 일기토에서 전사.#

창천항로에서는 기습을 해온 장료와 대치 중이던 손권을 구하려다 전사.

삼국전투기에서는 장료빠 최훈 답게 료라이라이 버프를 받은 장료에게 순삭. 장료의 최초 기습 때 죽는 것으로 보아 창천항로의 장면을 오마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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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나라 목공때 진나라의 국세가 강했으나, 진 목공이 죽을 때 차씨 삼형제인 삼량을 비롯해 중신 170명이 순장되어서, 그 여파로 이후 진나라는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이지 못한 일.
  2. 결초보은의 얘기. 진나라 사람 위과의 아버지는 자기가 죽을 때 자기 애첩인 서모를 같이 순장시켜 달라고 했는데, 위과는 아버지가 정신이 혼미했을 때 한 망언이라 생각해 출가시켰고, 후에 진나라가 역사 두회를 앞세어 쳐들어 왔을 때 서모의 아버지의 혼령이 풀을 매어 두회가 걸려 넘어지게 하여 은혜를 갚았다는 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