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돈

1 개요

踏頓 (? ~ 207)

후한오환족의 수령. 요서오환의 왕을 자칭했던 구력거의 조카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2 정사

2.1 오환족 규합

어려서부터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사납고 무예가 뛰어난 한편 기민하고 모략을 잘 꾸몄기에 부족의 장로들에게서 경외시되었고 오환 사람들은 모두 답돈을 모돈에 비유하며 경외시했다고 한다.[1]

구력거가 초평 연간[2]에 사망하고 그 아들 누반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답돈은 삼촌의 자리를 계승했다.

당시 오환족은 후한의 이이제이 정책에 따라 대부분 장성 안쪽으로 이주하여 유주 10군에 제각기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으나, 후한 말에는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기에 각군의 유력한 족장들은 저마다 왕을 자칭하며 세력을 넓히던 상황이었다.[3]

답돈의 삼촌인 구력거 이외에도 상곡군의 난루, 요동속국의 소복연, 우북평군의 오연은 제각기 왕을 자칭하고 있었으나 답돈은 즉위한 이후 이 삼군의 왕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그 무리들은 모두 답돈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다.[4]

2.2 원소와 우호

건안 초(196~197년 사이로 추정), 원소공손찬이 전쟁을 벌일 때 여러차례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때마침 답돈이 원소에게 사자를 파견하고 화친을 제의해 원소를 연합하며 공손찬을 격파한다.

그 일로 원소는 황제의 명령을 위조해 답돈을 오환선우로 임명하고 초왕 소복연과 한로왕 오연을 각각 좌,우 선우로 임명하여 답돈을 보좌하도록 했으며, 원씨 일족의 여성을 자신의 양녀로 삼는 형태로 답돈에게 시집보내 답돈을 사위로 맞아들인다.

이후 누반이 장성하자 소복연과 오연 등은 누반을 선우로 추대하였다. 어찌 보면 누반을 앞세워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에 답돈은 선우 자리를 순순히 내주고 왕으로 강등되며 한때 힘을 잃는 듯 했으나, 본인의 주도면밀함과 원소의 후원 덕분인지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다고 한다.

2.3 조조에 대항

이토록 세력이 강하고 원소에게 후대를 받았기 때문에, 원소 사후 그의 아들인 원상원희는 조조와의 싸움에서 패하자 답돈에게 의탁하게 된다.(205년) 답돈은 원상을 받아들임은 물론 원상을 따라 망명한 사람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5]

이에 원상은 상곡군에 주둔하면서 오환의 기병들을 이끌고 유주를 여러차례 침입해 유주자사를 살해하고 유주 백성 10만호를 끌고 가는 등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6]

마침내 207년 8월, 조조는 직접 원정에 나서 답돈의 근거지였던 유성[7]을 공략하게 된다.

본래 조조는 5월에 무종현을 거쳐 진군했지만 장마로 인해 큰 길이 진창이 되고 여러 샛길은 오환군이 먼저 선점하여 단단하게 지키고 있어서 7월까지 유성으로 진군하지도 못한 채 손해를 보며 시간을 끌고 있었으나 마침 오환을 토벌한다는 소식에 조조에게로 합류한 전주가 2백년동안 사용되지 않아 존재 자체가 잊혀져 있던 노룡새의 샛길을 소개하자 이에 따랐고, 군사를 돌려 노룡구로 진입하는 한편 오환군과 대치하던 무종에는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글을 남겨 퇴각하는 척 페이크를 쳤다.

몇 차례의 척후에도 조조를 찾을 수 없자 답돈은 정말로 조조가 퇴각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달에 유성에서 불과 2백리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발견되자 경악하여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답돈은 수만기를 이끌고 원상, 원희, 누반, 능신저지 등과 함께 범성에서 조조를 맞아싸웠는데, 마침 인근에 있던 백랑산에 올라갔다가 우연히도 조조와 직접 마주쳤다.

이때 조조가 이끌던 군대는 본대와 떨어진 소수 병력으로 오환군에 비해 확연히 적어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으나 장료는 기백을 떨치며 맞서 싸울 것을 권했고, 저지대에 있던 답돈군이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않았던 것을 본 조조는 조조가 장료를 선봉에 세워 답돈군을 격파했고 답돈 본인은 조순 휘하의 기병들과 싸우다가 붙잡히면서 참수된다.

우연히, 혹은 갑작스럽게 오랑캐들과 조우했다는 무제기,장료전의 표현이나 조조가 고지에서 살펴보니 오랑캐들은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오환전의 표현을 보면 조조는 물론 답돈에게도 예상치 못한 조우였던 것 같고, 양군 수장들이 한판 싸움에 앞서 현장 시찰을 돌다가 벌어진 헤프닝으로 보인다.[8]

수장이 끔살당하자 범성의 오환군 또한 대혼란에 빠져 붕괴되었고 이어진 조조군의 공격에 시체로 들판이 뒤덮였다고 한다. 이에 원상은 누반 등 삼군오환의 선우들을 이끌고 달아나 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망명했으나 곧 살해당하여 조조에게 수급이 보내졌고 조조는 오환족을 재차 만리장성 안쪽으로 이주시켜 기병 자원으로 활용한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답돈을 비유한 모돈으로 나와 역사처럼 원희, 원상을 받아들였다가 조조군의 공격으로 전사한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5부터 점점 쓸만해지고 이민족 무장들 중에서 맹획에서 두번째으로 쓸만한 무장이다. 비교적으로 통,무가 80대 초반에 지력이 60대이라서 이민족 무장들 중에서 높은편이며 기병특화 적성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답둔으로 등장. 능력치는 84/82/61/36/57에 특기 8개는 징병을 제외하곤 전투, 일기토에 특화되어있다. 통솔,무력이 80대로 나쁘지 않은 무장이며, 시나리오1부터 돌기병 8000을 사병으로 들고 나오기때문에 나름대로 유용하다.

삼국지 11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삼국지 12에서는 PK에 추가되었으며 구력거가 사망하면 오환족의 군주가 된다. 능력치는 추가된 이민족 장수 중 가장 좋은 편이다. 전법은 전의고양.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82/84/61/36. 중신특성은 없고 병과특성은 창C/기A/궁A. 특기는 훈련(5), 신속(5), 분전(1)이다.

창천항로에서는 까마귀 인간으로 나와 '나는 신비한 이민족이오' 라는 오리엔탈리즘식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다가 조조군에게 패배하고 본인은 장료와 곽가에게 붙잡힌다. 곽가는 그 능력을 아까워했지만 조조는 별 거 아니라면서 그냥 처형해버렸다.

삼국전투기는 창천항로에 영향을 받았는지 크로우의 크로우로 나왔다. 이미 원소 생전 시기부터 간간히 등장했고 수백년간 분열되어 있던 오환을 통일한 영웅이란 식으로 띄워 주는 듯 했지만 원소 사후와 조조의 하북 평정 전체가 3화만에 끝나면서 장료한테 끔살당하는 걸로 딱 한컷 나오고 죽는다(...)

일기당천(만화)에도 나오는데 초반부즈음에 까마귀를 몰고다니는 흑장발에 선글라스를 낀, 나름 뭔가 있어보이는 남자로 나오지만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리타이어 되는 단역이다. 누가 쓰러트렸는지는 보는 위키러가 추가바람.
  1. 흉노의 왕 모돈이 동호를 멸망시킬 때 도망쳐나와 오환산 일대에 정착한 것이 오환의 시초였고, 모돈 이후로 수백년간 해마다 흉노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치면서도 심심하면 얻어맞는 빵셔틀 신세였던 것이 오환의 역사임을 감안하면 꽤 기이한 평가인데, 오환에게 강한 자는 일단 존경부터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하나 굳이 그런 인물을 갖다붙이면서 모돈의 환생이라고 모두가 불렀다는 걸 보면 능력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2. 190 ~ 193년이다.
  3. 본래 오환교위라는 관직이 따로 있어 이들의 통제를 맡고 있었으나 영제 말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오환교위의 입지도 매우 좁아졌고, 초평 연간 무렵의 오환교위였던 형거는 아예 오환족에게 살해당했으며 오환에게 붙잡힌 포로였던 염유가 오환,선비를 등에 업고 오환교위를 자칭했다. 염유는 나중에 원소,조조에게 차례로 줄을 대면서 정식으로 인정받고 입지를 넓혔지만 이때는 사실상 오환 측에서 데려다 앉힌 것이니 오환의 감시,통제는 거의 유명무실.
  4. 정확히 어떻게 복종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답돈이 '무략'이 있어서 삼왕이 모두 복종했다는 서술의 뉘앙스로 봐서는 아마 두들겨 팬 것 같다..;;;
  5.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원상의 망명 이후 기주 출신을 중심으로 무려 10만호의 백성들이 오환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6. 삼국지의 기록인데, 후한서에 언급된 10만호 망명과 동일한 사건을 범엽과 진수의 시각 차이로 다르게 적은 것일 가능성도 있고 후한서 쪽의 10만호가 대체로 기주인 중심인 반면 이쪽은 유주인들이라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7. 요서군 유성현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으나 만리장성 밖에 있었다.
  8. 영웅기에 의하면 조조는 여기서 답돈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