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위서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공손찬도겸장양공손도장연장수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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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孫瓚
(? ~ 199년)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이자 소설 삼국지의 등장 인물. 사서에서는 가 백규(伯珪)라고 하나, 185년에 건립된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에 따르면 공손찬의 자는 伯圭(읽는 법은 똑같이 백규)인데, 공손찬이 이 비석의 건립에 돈을 기탁했으므로 그의 바른 자는 伯圭이다.

연의에서는 영세 군벌처럼 묘사되지만, 중국 최강의 군벌 중 하나였다. 초기의 공손찬은 동탁처럼 막대한 생산력을 지닌 영토, 손견의 용병술을 모두 가진 완전체 군웅이었다. 특히 손에 꼽히는 기병 육성의 달인으로서 당대 중국에서는 비교할만한 세력이 없었다. 특히 백마 위주로 편성된 정예 기마부대 '백마의종'을 이끌면서 큰 공을 세웠던 까닭에 백마장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1]

하지만 당대 기병들은 등자가 없어서 기마민족을 상대할 때는 중요하지만 충격력이 확실치 못했고, 이것이 국의를 포함하여 보병과 지형 전술을 활용하는데 능숙한 한족 군벌들에게 패퇴한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유주 우북평군 (현재의 탕산시) 일대에서 선비족을 정벌하거나 회유하여 안정시키는 것이 주 임무였으나, 혼란의 시대에 최대 인구 밀집지역이었던 하북을 평정하여 엄청난 세력을 구축했다. 사실은 동북의 제왕이나 다름 없었던 인물로서, 유주, 기주, 청주, 병주, 연주에까지 세력권이 미쳐서 따로 자사를 파견해 다스렸다. 하지만 비상식적인 인간성 때문에 목표를 달성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훌륭한 반면교사가 된다.

유비와는 노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며, 공손찬이 막장성을 드러내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오랫동안 그를 지켜준 객장이기도 했다. 연의에서는 유비의 초반 조력자라서 그런지 악독한 성격이 굉장히 완화되었다. 하지만 엄청났던 군사적 능력도 함께 잘려나가서 항상 당하고 처발리는 캐릭터로 능욕에 가까운 왜곡을 당했으므로 역시나 간접적으로 까는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2 생애

2.1 초기

봉급 2천 석을 받던 태수급의 지위를 가지던 고관의 가문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의 마음 고생이 많았다. 때문에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지 못했으며, 말단 공무원부터 관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말단에는 어울리지 않게 총명했을 뿐더러 용모와 목소리에 절도가 있었으며, 당당하였고 변설에도 탁월했기 때문에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를 눈여겨본 태수 유기의 사위가 되어 인생이 펴기 시작했다.

태수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학업을 마친 후에는 군의 계리를 지냈다. 이후 유태수가 비리에 연좌되어 면직되고 낙양으로 소환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가는 내내 병졸로 행세했으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기가 일남으로 유배되자, 그를 수발하기 위해 다시 일남으로 갔다. 이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겨 북망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장함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일남으로 유배가 된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따라가려고 했으니 젊은 시절에는 의리가 있었다.

하지만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사면령이 내려지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을 지내다가 요동속국의 장사로 임명되었다.

2.2 동부의 맹장

공손찬이 요동속국의 장사로 부임하자 동북의 기마민족들은 공포에 떨었다. 전 중산국상을 역임한 장순과 전 태산태수 장거가 오환 및 선비족과 연합하여 반란하고 하북을 휩쓸자, 공손찬은 미친듯한 전공으로 그들을 진압하며 중랑장과 도정후로 연달아 승진했고, 속국장사도 계속 겸임했다. 오환족은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공손찬을 피해서 다녔으며, 공손찬의 얼굴을 그려 과녁으로 활을 쏴서 이것을 맞히면 모두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강경책으로 안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을 잃고 밖으로는 더 강한 적대감을 모았다. 전투에서는 연전연승을 이어가면서도 상황이 유주, 기주, 청주, 서주까지 큰 피해를 입도록 상황을 악화시켜버렸다. 결국 조정에서는 반대로 이민족들에게도 인망이 높던 유우를 유주목으로 파견했는데 오환족은 유우가 부임한다는 소식에 자발적으로 귀순해 왔고 반란수괴였던 장순은 처자를 버리고 선비족에게로 도망갔다가 빈객인 왕정에게 살해당하여 반란은 싱겁게 진압되어 버렸다.

공손찬은 본디 선비과 오환 등의 북방민족들을 아예 절멸시키고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과 친했던 유우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귀순을 청해오는 오환의 사신을 죽이며 전쟁을 계속 이어가려는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결국 화의가 맺어지자, 유우가 자신의 공을 가로챈 것이라고 생각해 원망했다고 한다.

2.3 원소와의 불화

동탁이 집권하자 공손찬은 분위장군과 계후로써 임명되었다. 190년, 동탁이 황제를 갈아치운 것에 반발한 원소는 명망이 높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며 동탁에게 도전했는데, 공손찬은 산동지역의 군벌들 중 이에 반대한 몇 안되는 군벌 중의 한 명으로, 사승서에 의하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모아 원소를 쳤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1년, 원소와 밀약을 맺고 한복을 공격하여 격파하지만, 그 사이에 원소는 기주의 여론을 장악하고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의 자리를 빼앗았다.[2]

이에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던 원술과 연합했는데, 공손월을 예주로 파견해 원술이 친원소계 군벌을 공격하는 것을 돕게하였다. 그런데 그가 전사하자 공손찬은 모든 것이 원소의 책임이라고 하며 군대를 남쪽에 배치시켰다. 원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공손찬의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를 양도하여 자신과 공손찬 사이를 중재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발해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가세하였다.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이 하북으로 올라와 발해군의 경계를 침입했는데 공손찬은 보기 2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여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30만을 거의 몰살시킨 것에 가까운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위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그러면서 원소군과 몇차례 소규모 교전을 펼치면서 군을 계교까지 전진시켰고 ,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추단을 병주자사로 삼아 각기 파견했으며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3개 주의 주, 군, 현에 배치된 기존 관리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몰아내고 점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노골적인 야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장안의 헌제에게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상주문을 작성하고 포고한다. 이때 수많은 군현이 원소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가 마침내 192년 1월에 출정한다. 계교 전투 전까지 공손찬은 군사의 양, 질, 장비, 보급 모든 면에서 원소를 압도하였으나, 계교 전투에서 국의가 보병방진과 를 이용하여 백마의 종을 격파하고 공손찬군을 대패시킨다. 국의의 활약으로 공손찬군은 원소군에게 뚜렷한 우세를 점하지 못하다가 부장 최거업의 군대를 대파하고 전세를 회복하는가 했지만, 192년 겨울에 다시 원소와 붙어서 또 다시 거하게 졌다. 결국 193년에는 마침내 기주를 포기했고 원소와 화친을 맺었다.

2.4 유우 살해, 몰락의 시작

193년 4월. 원소가 장연의 뒷치기에 본진인 업을 함락당해 위기에 몰리자, 공손찬은 얼씨구나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했다. 동시에 유주에서도 평소 이민족 정책 등으로 사이가 나쁘던 유주목 유우의 본거지인 계의 옆에다가 성을 쌓고 대립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유우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선공했다.

공손찬은 유우를 매우 만만하게 봤는지 유우의 본진 앞에다 성을 쌓고는 유우의 교섭 시도를 모조리 무시하면서도 주력병력은 전부 밖으로 돌렸다. 덕분에 유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당시에는 가지고 있던 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곧 유우군이 오합지졸인 것을 파악하자 정예병 100명을 선발해 화공을 펼치며 역공에 나서 철저히 무너뜨렸다. 미친 지휘력! 유우는 관속들을 데리고 거용현으로 달아났고, 오환과 선비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공손찬은 불과 3일만에 거용성을 함락시키고 유우를 산채로 붙잡아 버렸다. 공손찬은 유우가 원소와 짜고 천자를 사칭하려 했다고 모함하였고 이를 빌미로 그를 처형했다.

공손찬은 유주에 대한 지배권을 굳혔지만, 그를 향한 민심은 완전히 잃고 말았다. 더불어 북방민족들과는 원래 사이가 나빴던 판국에 북방민족과 한족(漢族)양쪽에 신망이 높던 유우를 죽임으로 인하여 공손찬은 하북 전체에서 완전히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 원소의 선동이 더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우를 처형할 때 공손찬은 유우를 저잣거리에 세워놓고 그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았고 공손찬은 유우를 처형했다. 나름대로는 유우를 죽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듯 하기도 하지만, 공손찬의 잔인한 성격상 죽음을 앞에 둔 유우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한말 일수도 있다.

유우를 죽였을 때 이에 대한 반대 세력이 조성될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유주의 관리와 이름이 알려진 사대부의 대부분을 숙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공포통치에도 불구하고 유우의 관속들 중 상당수는 공손찬의 휘하로 들어가기를 거부하여 군대를 조직해 저항했으며, 여기에 원소가 유우의 아들 유화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기폭제가 되어 안팎으로 수만 명이 가세해 공손찬을 공격하게 된다.

계교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에도 원소보다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손찬은 유우를 죽이고 불과 2년 사이에 병주, 청주, 연주가 모조리 원소 혹은 원소계 군벌들에게 각개격파 당하는 형태가 되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또한 민심의 이탈로 인하여 공손찬의 부하들도 그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즉 유우 처형이 공손찬에겐 죽을 죄나 다름없는 패착이었던 것이다.

2.5 역경에 틀어박히고 죽다

195년 12월. 원소, 선비족, 오환족의 연합군에 거하게 털리고 2만 명의 전사자를 낸 공손찬은 아예 나가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우주방어 용도로 세우고 있던 역경테마파크성에 칩거한다. 역경성은 10중의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14m)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 위에 망루만 수천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군량미 3백만 섬을 쌓아두고 장기전에도 대비했기 때문에 성 안에서 둔전까지 가능했다. 당대의 건축기술과 공사 기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초월적인 규모의 요새였다.

원소는 부하들을 보내 역경성을 공격했지만 몇 년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성을 세운 것부터가 공손찬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역경성을 쌓기 위해서 백성들을 무제한적으로 수탈하고 노역을 부과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손찬이 역경성에 칩거할 무렵엔 곡물값도 비정상적으로 올라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할 지경이다.

역경성의 칩거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원소를 꽤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던 방법이기는 했다. 공손찬이 역경에 틀어박힌 196년 무렵 조조는 황제를 봉대하여 슬슬 원소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공손찬이 찌그러들었다곤 해도 군사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세력이 아니었던 터라 당시 원소는 조조에게 신경을 쓸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고, 실제로 원소는 조조에게서 대장군 관직을 빼앗은 것 외에는 특별한 견제도 하지 못한 채로 황제를 옹립하지 않아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을 후회했다. 심지어 원소 쪽에서 먼저 공손찬에게 화친을 제의하기도 했다.

문제는 역경성에 들어가도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농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텐데, 이때부터 공손찬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인다. 중앙의 고층 누각에 철제문을 세우고, 좌우의 측근들을 모두 만나지 않았으며, 아예 7세 이상의 남자는 공손찬이 사는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직 첩들만이 공손찬을 시중들었는데, 모든 공문서는 누각 위에서 끌어올리는 식으로(…) 받거나 내렸으며 첩들에게 목소리를 크게 내는 훈련을 시켜 수백 보 밖에서도 들릴 수 있게 하여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식을 벗어난 편집증 증세를 보인 데다가 나중엔 직접 출격해서 싸우는 일도 거의 없어지며 완전히 히키코모리가 돼버렸기 때문에 측근들도 공손찬을 볼 기회가 없었다. 공손찬의 말도 안되는 행동에 그나마 남아 있던 맹장과 모신들도 원소에게 투항하거나 도주해버린다.

이후 장연과 공동전선을 펼치고, 원소군 내부의 불만세력들을 영입하며, 반원소 세력를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강력해진 원소를 상대로 성공한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198년, 원소가 편지를 보내에 화친을 제기했지만 공손찬은 거절하고 이에 원소는 군사를 일으켜 공손찬을 공격하였다. 공손찬의 한 부하가 원소군에게 포위되자 공손찬은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들은 구원병만을 기다리며 힘써 싸우지 않을것이다"라며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았고 이에 계교에 주둔했던 각 영들은 도망가거나 배신하였다. 원소군이 성문에까지 다다르자 공손찬도 요격에 나서 아들 공손속을 보내 장연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자신도 기병을 거느리고 출진해 흑산적과 연계하여 원소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참모 관정이 이를 제지하자 단념했다. 그런데 이후 관정은 공손찬을 말린 것을 후회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공손찬은 퇴각을 거듭해 역경루에 틀어박혔고, 마침내 199년 3월에 원소에 의해 역경루가 함락당하자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했다. 원소가 공손찬의 머리를 허도로 보내자 조조는 정신이 아득해져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3 능력

3.1 용병술

북방 이민족들은 모두 공손찬의 이름을 알았고, 그 무용을 두려워하여 침범하는 자가 없었다. 개인의 용맹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손견이랑 닮은 점도 있는 군벌이다. 정예 100명을 뽑아서 유우의 10만을 와해시켰다든지 스스로 전장을 휘젓고 이민족을 수도없이 베어버린 전적을 보면, 군사적인 능력으로 폄하할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근데 한족끼리 싸울 때는 못 싸웠다.[3]

중국 최강이었던 공손찬의 세력은 원소의 정치 선전술 때문에 자동적으로 찢어져버렸지만, 공손찬이 고립된 이후의 상황만을 보고 폄하하는 대다수의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조조마저도 헌제와 순욱이 없었으면 고립당했을지 모를 정도로 원소의 정치술 자체가 엄청났던 것이다. 또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어 고립된 상황에서도 게릴라로 국의와 원소를 괴롭히고 심지어 역습으로 죽일 뻔했던 전적을 보면 용병술만큼은 분명히 뛰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당대 기병들은 등자가 없어서 기마민족을 상대할 때는 중요하지만 충격력이 확실치 못했고, 이것이 원소와 국의를 포함하여 보병과 지형 전술을 활용하는데 능숙한 한족 군벌들에게 패퇴한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3.2 백마의종

공손찬은 항상 뛰어난 궁수 수십 기를 데리고 다녔는데, 모두 백마에 기승하여 좌우로 날개처럼 펼친 진형으로 다녔고, 이를 백마의종으로 자칭하였다. 백마의종은 유주의 유명한 특수부대로 좌익과 우익을 합쳐 교차사격을 행하는 전술을 이용했다. 전장에서는 국의가 이들을 격파하기 전까지 병귀신속의 전형으로 손꼽혔다. 참고로, 공손찬과 이들을 격파했다는 국의는 본가가 양주에 있어 강족을 진압하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맹상군의 말에 '장군의 가문에는 장군이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는 재상이 나온다'라는 말이 적절한 것이다.

3.3 미창을 실전에서 쓰다?

除遼東屬國長史。嘗從數十騎出行塞下,卒逢鮮卑數百騎。瓚乃退入空亭,約其從者曰:「今不奔之,則死盡矣。」乃自持兩刃矛,馳出衝賊,殺傷數十人,瓚左右亦亡其半,遂得免。<공손찬 전>

후한서의 기사가 말하듯 공손찬은 요동속국장사시절 실전 미창술을 해내고 말았다. 판타지 만화 센고쿠에서 야마자키 센페에나 센고쿠 히데히사가 했던 바로 그 미창술이다. 요새를 순찰하다가 선비족을 만나 10배 미만의 적을 상대로 2개의 창을 잘라 날을 양쪽으로 붙여 세우고 진·무쌍난무를 시전해 버렸다. 빨피에서 쓴거라 더 감쪽같군 마구잡이식 개돌같기도 하지만 마상창의 진화한 형태라고 할 만하다.

4 평가

4.1 이민족 킬러

이민족들을 때려잡는 일을 했고, 실제로 이민족을 무수하게 때려잡았다는 점을 들어서 손찬이 형도 남북조 이후 시대가면 여포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한다. 손찬이형이 이민족은 잘 족쳤지 비슷한 원술 등과는 달리 군사적인 전과만큼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고, 간지나는 일화도 제법 많아서 영웅으로 추켜세워주는 분위기도 있다.

初平二年,青、徐黃巾三十萬眾入勃海界,欲與黑山合。瓚率步騎二萬人,逆擊於東光南,大破之,斬首三萬餘級。賊棄其車重數萬兩,奔走度河。瓚因其半濟薄之,賊復大破,死者數萬,流血丹水,收得生口七萬餘人,車甲財物不可勝筭,威名大震。拜奮武將軍,封薊侯。

기병 2만 으로 약 30만의 황건군(蟻軍)을 치고 다시 친뒤 또 쳐서 3만의 목을 자르고 수만을 더 죽였으며 7만을 산채로 포획하였고 물자를 노획하였다.

공손찬은 서강족을 멸해버린 태위 단경과 같은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북방에서는 흉노를 써는 자, 요서의 공손백규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단경은 그야말로 강족을 썰고 또 썰어서 걍 씨를 말려버리고 영제에게 오랑캐 장수의 인새를 수도 없이 바쳐 비단과 금, 부절 등을 하사받았다. 출전은 <<후한서>> <영제기>.

서진의 멸망 이후, 이민족들이 들어온 것에는 공손찬이 지배한 하북지방이나 촉한처럼 각 지방 세력들이 몰락한 것에도 원인이 있다. 원소는 최소한의 전투와 선전술만으로 공손찬의 세력을 훼손하지 않고 흡수했지만, 이후에 조조는 위왕조를 세울 때 하북세력의 대다수를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변경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어서,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공손찬만큼의 능력과 세력을 양립한 대군벌이 나오기 힘든 상태였다.

다만, 원소조조마저도 이민족의 잠재력을 두려워하여 친목을 다지고, 그들의 내분을 부추기는데 중점을 두었던 점을 보면 공손찬이 얼마나 막나갔는지 알 수 있다. 애초에 공손찬이 싸울수록 그가 지배하는 지방의 피해도 커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통치자로서의 덕목은 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판만 벌려놓고 뒈지면 책임은 누가 질 건데?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이민족들을 너무 괴롭혀댔다는 이유로 공손깡패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런데 자기가 지켜야 할 한족도 신나게 괴롭혔던 걸 보면 진짜 깡패 맞는 듯(...).

4.2 괴짜

당시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으며 미칠듯한 무력과 포스를 자랑했던 항우와 비슷한 이미지를 지녔다. 항우가 군주로써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처럼 공손찬도 마찬가지였다. 항우와는 달리 한족 말고 이민족들과 잘 싸웠다.

다소 극단적인 평가의 경우, 공손찬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 도덕 자체를 거부하는 파천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는 해설도 존재한다. 이러한 평가는 과도한 추측이지만, 전체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공손찬이 사대부를 비롯한 후한의 지배층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어쩌면 모친의 신분이 낮았던 것 때문에 차별을 받다가 자수성가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출세한 과거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점쟁이나 장사치를 관료로 기용했던 것은 사대부를 배제하고 그나마 관료를 시킬만한 지적능력이 있는 계층이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단, 공손찬이 대놓고 유교적 가르침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공손찬의 참모 관정은 죽기 전 "군자는 남을 위태롭게 만들고 혼자 살아남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또한 유교의 '충(忠)'은 지배자들에게 더없이 유리한 프로파간다였므로 쉽사리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장인 유태수가 좌천 되었을 때 북망산에 가서 흠향하고 죽음을 다짐하였던 것이나 스스로 의종(義從)[4]을 이끌고 적(오랑캐)를 친 것은 오상의 하나인 義[5]에 해당한다.

어쨌든, 공손찬이 괴짜였던 것은 확실하다. 동탁도 점쟁이와 장사치를 참모로 기용하는 괴상한 짓을 벌이진 않았으며, 한족치고는 놀라울 만큼 기병 육성에 투자를 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기병전술에 뛰어났던 국의에게 개돌했다가 털리고 나서, 원소의 정치 선전술에 깨갱하여 자신의 세력이 찢어지자, 아예 역경에 틀어박히는 것으로 괴상함의 절정을 이룬다.

4.3 폭정

나중에는 포악성이 극에 달해서 백성들을 학살하고, 영내에서 재주가 알려진 인물들은 시기해서 반드시 트집을 잡아 죽이고, 심지어는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봤다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등 인간쓰레기 폭군의 모습을 보인다. 이런 관계로 기록에서는 대부분 악당 취급을 받는다.

후한서》를 쓴 범엽은 공손찬이 유우와 대립하지 않았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물론, 평가는 대체적으로 이민족에게도 추앙받는 유우의 인덕을 더 높게 평가하는 말이다. 당시에 인덕의 가치는 명분과 외교 기술을 합친 총합 정도라고 보면 된다. 공손찬은 가뜩이나 인간성 때문에 실책을 반복해왔는데, 이런 사람을 조롱하며 죽임으로서 그동안 쌓았던 어그로가 폭발하면서 고립되고 말았다.

특히 휘하의 대표적인 인재이자 명사로서 유비도 공손찬의 막장성을 보다 못해 서주 구원을 빌미로 그를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유비가 도겸에게서 서주목을 양도받았을 때 원소에게 진등을 보내 허락을 구하는데, 원소가 유비를 칭찬하며 서주목 취임을 긍정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나마 중기 이후로도 공손찬의 편을 들어주었던 유일한 객장(용병)중의 하나가 유비였지만, 그를 포함해 상당수의 명사들은 공손찬이 막장 행각을 시작할 때 이미 등을 돌려버렸다.

4.4 원소와의 비교

경쟁자였던 원소가 연의와 정사를 가리지 않고 가문빨만 있는 무능한 인물이라는 왜곡을 받기 때문에, 공손찬이 원소보다 역량은 뛰어나지만 가문의 힘이 없어서 패배했다는 해석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틀린 해석이다. 일단, 원소는 절대 가문빨을 가지고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다. 원소는 아예 공손찬에게도 노비 자식라고 까였던 인물이다. 얼자보단 서자가 낫다 이거지.

초기의 공손찬은 군대조차 없었던 원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동북의 제왕이었으므로 휘하에 쓸 만한 인물들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공손찬은 점쟁이(유위대), 비단장사(이이자), 말장수(악하당) 같은 인물들을 신임하고 관료로 기용했는데, 이들이 용렬한 데다 난폭하고 부정축재에만 열심이라서 백성들이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손찬군의 유일한 모사 정도로 알려진 관정도 원대한 계획도 없으면서 아첨하기만 잘하는 소인배였지만 유독 공손찬에게 신임을 받았다. 이런 예들을 보면, 공손찬은 하나같이 막장 인물들을 기용했던 것에 가깝다. 리더와 비슷한 성격만 고용했나 보다. 애초에 공손찬 휘하에도 조운이나 전예같이 특급 인재도 있었는데 중용되지 못 했으니 공손찬의 잘못이 매우 크다. 게다가 조운과 전예가 인격적으로 크게 흠이 없는 좋은 인물인 것을 생각하면 공손찬의 성격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5 연의

연의에서는 왠지 히로인 포지션이다(…). 역전의 용사 백마장군이라는 식으로 조금 띄워주는 부분도 있지만 압도적으로 쳐발리면서 위기를 겪고, 그 순간 유비 진영의 주연들에게 구출되는 굴욕씬이 많은 편이다. 하여 소설에서는 공손찬의 능력을 보여준 일화는 완전히 짤려나가거나 약간 언급하는 수준에 그쳤다.

삼국지연의만 본 사람들은 공손찬이 성격이 좋은 호인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정사에서의 막장 행각들을 보면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유비의 친구라서 인격자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사실은 능력치를 폭풍너프시킨 것 치고는 인격자 버프는 정말 미미하다. 막장스러운 행적이나 폭정이 삭제된 것은 버프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래봤자 조운에게 "원소와 다를 바 없는 인물" 이라고 까이는 수준이다. "포위된 자들을 구해주면 이후 병사들은 남들이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힘써 싸우지 않을 것이다." 라는 정신 나간 의지드립으로 병사들을 버리는 묘사 역시 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확실한 정인군자로 버프받은 도겸에 비하면, 공손찬은 아군에게 우호적이지만 여전히 선한 캐릭터는 아니다.

결국, 대충 넘어가는 피라미 수준이라 비중이 낮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설에서는 유비 3형제와 조운에게 맨날 구해지는 불쌍한 캐릭터가 되었으므로, 오히려 나관중이 공손찬을 조롱하기 위해서 출연시켰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정사에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공손찬을 일부러 참가시킨 이유도 여포에게 쳐발리는 역할을 맡기 위해서이다. 대놓고 능욕하기 위해서 넣은 캐릭터.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비중이 줄어든 것도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데 일단 이민족 토벌은 유관장 삼형제와 접점이 없는 부분이므로 크게 비중을 두어 적을 수 없다. 또한 주인공의 조력자인 공손찬이 너무 악하면 그와 친한 유비 역시 욕먹게 되므로 메인 악행 중 하나인 유우와의 전쟁 일화를 삭제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 둘 다 공손찬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결국 주연들과 접점이 생길만 한 전투는 계교 전투 정도만 남게 되는데 이게 하필이면 정사에서 공손찬이 지는 전투이니(...).

구체적인 행적을 말하자면 호뢰관 전투에서 방열, 목순, 무안국이 패하자 철삭이라는 유니크해보이는 무기를 들고 여포에게 덤벼 몇 합을 싸우다가 패해 도망치는것이 첫 전투씬이다. 적토마를 탄 여포에게 쫓겨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찰나 장비에게 구출되면서 유관장 vs .여포라는 매치를 성사시키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후, 동생 공손월이 원소군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원수 및 원소가 약속을 어기고 기주를 혼자 꿀꺽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계교 전투를 벌이지만, 서전에서 문추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죽기 직전에 조운의 첫 등장을 위한 장식품으로 활약한다. (…). 이후에는 국의에게 관광을 타는 분위기에서 다시 조운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겨 역공을 시도하나, 이번엔 원소가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하자 다시 관광을 탄다.

이때 구세주처럼 유관장 삼형제가 나타나 원소를 꾸짖고, 그들에게 가까스로 구출되는 장면으로 또다시 굴욕을 인증한다. 역시 후대인들이 싫어하는 인물답다. 그나마 정사에서 패한 계교 전투는 은근슬쩍 승리하여 이득을 봤지만, 이건 유비 덕분이지 공손찬의 능력과는 상관없으므로, 의도를 보면 절대로 버프가 아니다.

이후 연의에서는 조조와 유비의 술자리에서 만총의 보고로 그의 최후가 묘사되는데 역경성에서 부하들에게 신망을 잃어 결국 패몰한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담으로, 연의의 영향으로 21세기에 나온 매체에서는 여포가 악당이면서도 간지나는 역할로 등장해 인기가 많은데, 삼덕후들 사이에선 정사에서의 여포의 찌질함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공손찬에게 그런 기믹을 주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있다.

삼국지평화에서는 반동탁연합을 위해 정주로 조조가 태수 공손찬을 만나러 간다거나 조조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보낸 편지에서 여태까지 조조가 없앤 적들을 언급하는데, 하내에서 공손찬을 참수했다는 언급으로 나온다.

6 미디어 믹스

  1. 흔히 회자되는 '백마장군'은 사실 방덕의 별칭이다.
  2. 소설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에게 기주를 같이 공격해 공평히 나누자고 제안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3. 천적 국의한테 결정적으로 패한것을 제외하면, 계교전투와 국의와의 대결 외에는 잘 싸운편이다
  4. 양주의종과 같은 것들은 오랑캐 귀순 용사를 의미하나 여기서의 의종은 의로 뭉친 종사에 해당한다. 즉 자원병. 또 <<한서>> 이현의 주에 50세 이상의 즉시 소집가능한 잡색군의 의미로 쓰인 것 등이 있다.
  5. 부당함을 참지 않고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