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관료와 환관(宦官)이 충돌하여, 환관세력이 관료를 금고(禁錮)에 처한 탄압사건. 당고의 옥(黨錮之獄), 당고의 화(黨錮之禍) 또는 당고의 금(黨錮之禁)이라고도 불린다. 시기적으로 보면 삼국지의 바로 앞 시대로 삼국지연의에서도 배경설명처럼 자주 인용된다.
2 배경
충제와 질제가 살아있을때 간신이자 권신인 양기(梁冀)와 그의 부인 손수는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마음껏 권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손수는 양기의 집 말고도 자신의 집을 따로 만들어 양기의 옆에 만들었는데, 양기가 집을 크게 지으면 손수도 따라서 집을 크게 짓고 손수가 크게 지으면 양기도 다시 크게 지으면서 병림픽을 벌이고는, 둘이 마차를 끌고 길 한복판으로 나와 신나게 놀고 즐기는 등 전횡이 극심하였다.
환제는 양기의 손으로 옹립된 위치라 힘이 없어 지켜보고만 있었다. 손수의 외삼촌 중에 양기(梁紀, 남편과는 한자가 다름)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양기의 부인인 선(宣)씨에게는 이전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만든 딸인 등맹(鄧猛)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이후 손수는 등맹의 성씨를 양(梁)씨로 바꾸고 환제의 후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입막음을 위해 남편 양기를 시켜 선씨를 죽이게 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선씨는 살아서 궁궐로 달려갔다.
사정을 들은 환제는 이를 명분삼아 환관인 선초(單超)등과 손을 잡고 한번에 들이닥쳐 다 박살을 냈다. 양기의 집은 포위되었고, 양기와 손수는 절망해서 자결하였다.
환제는 이렇게 양기를 처리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에는 되려 이 사건에서 공을 세운 환관들의 세력이 막강해져버렸다.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고 자기들의 일족을 지방으로 파견시켜 토지겸병을 벌였다.
3 전개
당시 호족 세력과 이들이 향거리선제를 통해 진출하여 형성된 사대부 및 관료 계층은 유교를 통해 외척 및 환관의 세력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들을 기반으로, 환관들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류파들은 연일 환관들을 비판하였다.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한 200여명을 잡아들였다.
헌데 재판이 시작되었을 때 청류당은 저마다 입을 모아 환관의 죄상을 폭로하는 법정진술을 택해서 환관들을 물먹였다. 그대로 놓아두면 진짜로 큰일이 나겠다 싶은 환관들은 외척 두무(竇武) 등이 상주하여 간한 것을 기회로 청류당에게 관직을 박탈하고 이후 평생의 관직 진출을 막는 금고(禁錮)형을 내렸다. 이것이 1차 당고의 금(166년) 사건이다.
이후 환제가 죽고 13살의 황제 영제가 즉위하자 두태후(두묘)가 섭정이 되고 외척 두무가 실권을 잡았다. 두무는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다. 이를 통해 외척 두씨 세력은 진번 · 이응 등 청류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들을 등용하며 기회를 엿보았지만 오히려 환관들에게 계획이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했다.
두무는 일찌감치 자살해버렸고, 이응을 포함해서 잡혀 죽은 자만 100여 명이 넘었고,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00 ~ 700명이 되었다. 이것이 2차 당고의 금(169) 사건이지만, 단순히 금고형에 처했던 1차 사건과는 달리 아예 이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호족 및 사대부 세력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면서, 후한 정권에 대한 지지는 폭락했다.
4 결과
당고 사건 이후 이후 환관들의 권력 독점은 더욱 심해졌으며, 삼국지의 시작을 알리는 '십상시의 전횡'도 당연히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초에 후한에서 인재를 등용하던 향거리선제가 사대부 세력에 근거하던 것이었는데, 사대부 세력을 탄압한 것은 새로운 인재 수급을 사실상 끊는 일이었고, 권력 독점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황건적과 싸울 인재를 급히 모으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많은 당인들의 금고를 해체해주게 된다.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대두한 하진은 이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으로 삼게 된다. 기존 권력을 독점하던 십상시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과 청류파를 끌여들인 새로운 외척 하진의 대립은 십상시의 난으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군웅할거 시대가 열리게 된다.
5 분석
흔히 이 사건에 대해 환관 세력을 탁류(濁流), 사대부 세력을 청류(淸流)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청탁이라는 말로 선악의 구도를 형성할 만큼 도덕적인 차이가 컸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사대부 세력은, 특히 태학과 관료계의 인재 등용이 지방의 여론에 의존해 인재를 중앙으로 뽑아 올리는 향거리선제에 의거한 상황에서는, 지방 유력 세력인 호족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자연히 이들도 토지 겸병을 행하고 일반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던 대지주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단적으로, 당시 빈곤에 찌들린 농민들을 결집시킨 황건적의 난을 때려잡던 군벌(군웅)들은 대체로 군복으로 옷만 갈아입은 지방호족·사대부 세력이었다.
즉, 후한의 국가 지배권을 부식시키고 지방에서 각종 모순이 일어나던 상황은 당고 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호족들은 지방에서는 대지주로서 소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이들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는 한편, 중앙에서는 관료 계층에 대한 존중과 (지방 세력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법가 사상에 대한 반대를 위해 유교 사상으로 스스로를 무장시켜 사대부로서 활동하였다. 후한은 광무제 대부터 이들을 인정하면서 시작된 정권이었고, 때문에 황제가 직접 이들을 탄압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때문에 황제에게는 자신의 통치력을 확장시킬 측근이 필요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황제와의 관계 속에서만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외척과 환관 세력이었다. 때문에 외척, 환관 세력과 사대부 세력은 계속해서 대립했으나, 2세기 경에는 어린 황제의 연이은 즉위로 외척과 환관 세력이 득세하여 사대부들의 상위에 섰다. 문제는 이들도 부패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이용하면서도 정국을 통제해야 할 시대의 필요성과는 달리 황제권이 완전히 추락해버렸다는 것이다. 황통이 단절되어 어리고 무능한 황제가 외척들에게 옹립되는 불행이 이런 상황을 악화시켰다. 헌제가 동탁, 조조의 꼭두각시가 되었던 것처럼, 그 이전부터 후한 황제들은 권신들에게 대부분 농락당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척과 환관 세력들도 내부에서 권력다툼을 벌이다가 이 시기에는 환관 세력이 승리했고, 그 과정에서 사대부 세력들은 완전히 싹이 잘려 버렸다. 명망 높은 사대부들이 정부에 의해서는 오히려 탄압받고 관직으로의 출구가 봉쇄된 결과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은 사대부에게 오히려 권위의 출처가 아니게 되었다. 이후 사대부들은 중앙에 대한 관심을 끊는 한편, 신비주의 사상이나 아예 도교 계통의 신종교에 몰입했다.
교지(현재의 베트남 인근)나 촉 등 벽지로 숨어드는 사대부들도 많았다. 그로 인해 사대부 세력이 협조하며 운영되던 지방 통치력은 말 그대로 폭락했다. 쉽게 요약하자면 지방 유력 세력은 이 사건으로 후한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외척이든, 환관이든, 사대부이든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바탕으로 대토지를 장악하고 민중에게는 압제를 가하는 대상이었음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정계의 자정 능력이 완전히 상실되고 중앙과 지방이 유리되면서, 후한의 멸망은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사대부 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지의 시대에 각지의 사대부, 즉 호족들은, 지방군벌으로 다시 군웅할거의 시대를 주도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났다. 위진남북조시대로 이어지는 귀족 정치의 모습이 한 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닌 것이다.
6 미디어 믹스
드라마 영웅조조(제왕을 꿈꾼 남자 조조)에서는 제2차 당고의 금이 조조의 어린 시절을 다루는 것을 통해 나오는데, 조조가 냉혹한 현실과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계기로 나온다.
조절이 왕보에게서 두무, 진번 일당이 비밀리에 상소를 올려 자신들을 몰래 죽이려 했다는 보고와 함께 두무의 비밀 상소를 받는다. 이에 조절은 왕보를 시켜 옥에 가서 정삽을 빼내 두무를 체포하게 하고 조등에게는 산빙을 잡아두고 궁 문을 전부 닫도록 하면서 일이 새나가지 않도록 입막음하게 한다.
조절은 전쟁 놀이를 하고 있던 영제에게 가서 태후께서 부르신다는 핑계로 궁에서 벗어나게 하며, 조절은 영제와 전쟁 놀이를 하고 있는 조조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주겠다면서 자신을 따라오게 한다. 진번이 궁으로 오자 조절이 많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반란이라도 꾸밀 작정이냐고 묻자 진번과 진번과 함께 온 사람들은 산빙이 어딨냐고 따지며, 조절은 잡아들였던 산빙을 끌고와 보여주고 산빙이 반역자들과 결탁했다면서 글자가 아무 것도 적혀져 있는 가짜 교지를 보여준다.
진번이 어명없이 산빙을 멋대로 잡아들인 것, 교지를 날조했다고 따지자 조절은 진번이 반역자와 가담해 역모에 날조했다면서 그 순간 환관들의 군사들이 나타나 진번, 진번과 함께 온 자들을 모조리 때려죽인다. 싸우는 장면 없이 두무가 이끌던 군사들도 환관들의 군사에게 패하고 두무가 자신 혼자 책임지고 병사들은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조절은 이를 수락하자 두무는 칼로 자결하고 두무가 죽자 조조는 정말로 저들을 모두 돌려보낼 것이냐 묻는데, 조절은 수하들을 시켜 두무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인다. 조조는 조절에게 저들을 속인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조절은 웃으면서 그 말에 수긍하고 할아버지가 저들을 속였다고 말한다.
이 일로 조조가 생각에 빠지자 조숭은 악독하고 잔인한 처사였냐고 생각하냐면서 저(환관)들이 외척 당파를 죽이지 않았다면 외척 쪽에서 우리에게 손을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숭이 궁에 데려오면서 그런 일을 보여주게 된 것을 후회하며, 그 일을 알게 된 겸 본래 하후씨인데 조씨 성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알려준다.
그 이유는 환관과 외척 간의 분쟁의 결과로 자신(조숭)을 살리기 위해 조등의 집에 양자로 맡겼다고 하며, 이로 인해 하후씨와 조씨가 가족이 된 것으로 증조부(조절)가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환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