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촉서 「황이여마왕장전(黃李呂馬王張傳)」
황권이회여개마충왕평장억

王平
(? ~ 248년)

1 개요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 익주 파서(巴西) 탕거(宕渠) 사람. 자는 자균(子均).

유비 사후 조운, 오의, 오반, 위연, 장억, 강유 등과 더불어 촉한의 용장으로 꼽히는 인물에 마충, 등지 등과 더불어 촉한의 국경을 책임진 핵심 무장이다. 북벌에 나서서는 위의 명장 장합을 두번이나 막아내고 낙곡 대전에서는 위급한 상황에 지연전을 펼치는 냉철한 판단력을 보이는 등의 활약을 보면 촉한 제일의 방패로 평가받을 만하다. 항장 신분에 문맹임에도 불구하고 한중을 진수하는 군부의 최중심 인물로 우뚝섰고, 독한중, 진북대장군을 맡아 위와 최일선에서 싸우며 명장으로 거듭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촉한으로의 투항.

어릴 적 고아가 되어 외가인 하(何)씨 집안에 양육되어 한 때는 '하평(何平)'이라고 불렸다가 성인이 되어 다시 왕평으로 개명했다. 이 영향으로 『정사 삼국지』에서도 간혹 하평으로 불린다.

"두호(杜濩)와 부호(朴胡)를 따라 낙양에 이르러 가교위(假校尉)가 되었고 조공(曹公)을 따라 종군하여 한중(漢中)을 정벌하였다가 선주(先主)에게 항복하니 아문장(牙門將), 비장군(裨將軍)에 제배(除拜)하였다."

-『촉서』 「왕평전」

"9월 파군(巴郡)의 7성(七姓)의 이왕(夷王) 부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종민(賨民- 이민족의 일종)을 들어 내부해왔다."

-『위서』 「무제기」

본래 의 무장으로 「왕평전」에 의하면 파서의 이민족 왕 두호(杜濩)와 부호(朴胡)[1]를 따라 낙양에 이르러 가교위(假校尉)가 되었다고 한다. 「왕평전」에서는 두호와 부호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둘의 항복에 대해 「무제기」에서는 더욱 자세히 밝히며 이 둘이 파서의 이민족 왕으로 기록한다. 유독 이민족과의 인연이 많은 왕평에 대한 첫번째 기록이 이민족을 따라서 위에 항복된 것으로 시작하는데 이 때문에 왕평이 이민족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민족과 아울려 성장한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존재한다.

왕평은 조조를 따라서 한중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촉한에 투항했다. 정확히 어떤 연유로 항복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2] 유비는 항복한 왕평을 아문장(牙門將),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이후 제갈량의 북벌에 참전하기까지 기록이 끊긴다.

2.2 제갈량 시대 (228년~234년)

2.2.1 1차 북벌 : 마속의 패배를 수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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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벌의 지도
"건흥(建興) 6년, 참군(參軍) 마속(馬謖)에게 소속되어 선봉(先鋒)이 되었다."

-『촉서』 「왕평전」

228년, 왕평은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참전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아직 관직이 낮았던 왕평은 참군(參軍) 마속의 부장으로 종군한다. 제갈량의 명에 가정 수비를 맡은 마속은 험난한 지형의 요충지를 선점하지 않고 도리어 물을 버리고 산을 고집하는 악수를 둔다. 이를 반대하며 왕평은 계속해서 마속에게 간규(規諫-옳은 도리(道理)로 간(諫)함)하였으나 마속은 듣지 않았다.[3]

"장합의 군대가 도착해 먼저 '보급로를 차단'하자 산 위의 촉군은 식수가 떨어져 거의 탈진상태에 빠졌는데, 이 틈을 노려 장합의 군대가 공격하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제갈량 평전』

마속의 악수에 위의 명장 장합은 급도(汲道-물을 길어 나르는 길을 뜻한다)를 끊었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후 마속군을 대파하는 기록만을 수록하지만 『제갈량 평전』의 저자 여명협은 나관중의 묘사와 비슷하게 수로를 끊어서 마속군을 탈진시킨 이후에 장합군이 대파했으리라 추측한다. 굳이 급도를 끊었다는 기록을 「장합전」에서 수록한 것을 보면 꽤 타당한 해석이다.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촉서』 「왕평전」

"(다른) 군사들은 무너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自持] 위나라 장수 장합(張郃)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속후한서』 「왕평전」

마속 휘하의 촉한군은 장합의 일격에 대거 패주하고 총사령관 마속은 아예 도주한 정황이 「상랑전」에서 발견된다. 이런 혼란속에 왕평이 인솔하는 천명의 병사는 산 아래에 주둔해서 장합의 공격에 영향받지 않았다. 왕평은 병사들에게 북을 두드리게 하며 제 자리를 지키자 장합복병을 의심해서 접근하지 못한다. 장합이 주춤한 사이 왕평은 여러 군영을 수습해서 병사들을 이끌고 퇴각해서 깔끔하게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위 최고의 명장 중 한명이지만 유독 왕평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장합과 왕평의 첫번째 결전이었다.

이 공으로 마속이 참수당하고 제갈량조운의 벼슬이 강등당하고 그외에도 장휴, 이성을 처벌하고 황습의 군사를 박탈하는 와중에 오직 왕평만이 승진했다. 참군으로 임명하고 토구장군(討寇將軍) 승진시키고 정후(亭侯)에 봉했으며 더불어 이민족들로 구성된 촉한의 정예부대 오부(五部)를 지휘하게 된다. 왕평의 활약이 얼마나 높게 평가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부분은 『삼국지연의』에서도 상당히 자세히 다루는데 덕분에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등 삼국지 창작물에서 가정전투를 묘사하는 이벤트나 시나리오가 등장하면 왕평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2.2.2 4차 북벌 : 장합을 물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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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북벌의 지도
"건흥 9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촉서』 「왕평전」

231년, 왕평은 제갈량의 4차 북벌에 종군한다.

제갈량이 일군을 이끌고 기산을 포위하자 왕평을 남부에 주둔시켰다. 전황에 대해서는 간략한 『정사 삼국지』보다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더 자세히 묘사한다. 『한진춘추』에 의하면 제갈량사마의가 상규(上邽) 동쪽에서 조우하지만 지형이 협소하고 험준해서 교전에 이르지 않았다. 장합은 이에 민심을 저버라지 않기 위해 교전을 치뤄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사마의는 이를 무시하고 다시 제갈량을 뒤따라서 산에 영채를 세우고 대치를 지속시켰다. 가허(賈栩)와 위평(魏平)이 여러차례 제갈량과 싸우기를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이를 한스럽게 여긴 사마의는 출병을 요청한 제장들을 따라서 장합에게 무당감(無當監) 왕평(王平)[4]을 공격하도록 하고 본인은 본대를 이끌고 중도(中道)에서 제갈량과 교전하도록 한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촉서』 「왕평전」

『한진춘추』와 『한진춘추』의 기록을 참고한 『자치통감』에서는 장합과 왕평과의 교전만 언급하고 결과를 언급하지 않지만 「왕평전」에 의하면 왕평은 장합의 별동대를 상대로 침착하게 대응해서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사마의의 본대 또한 제갈량이 보낸 위연, 고상, 오반에 의해 대파당하면서 장합의 별동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왕평은 촉한군의 전술적 완승에 공헌한 셈이다. 다만 이에 대한 포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4차 북벌에 대한 기록이 『촉서』 「제갈량전」에 사실상 없고 『진서』에서는 사마의의 대승을 기록하고 오직 『한진춘추』만이 제갈량의 승리를 서술하는 와중에 『촉서』 「왕평전」에서 장합군을 물리쳤다는 대목은 4차 북벌에서 사마의군이 패배했음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5]

정작 나관중은 『삼국지연의』에서 4차 북벌을 여러모로 각색한 덕분에 왕평과 장합 간의 교전을 서술하지 않아서 낙곡 대전 누락과 더불어 왕평의 저평가에 일조했다.

2.2.3 5차 북벌 : 위연의 난을 진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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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북벌의 지도

234년, 왕평은 제갈량의 5차 북벌에 종군한다. 5차 북벌이 진행되는 와중에는 아예 언급되지 않지만 제갈량 사후의 수습 과정에서 분명히 등장하는 것을 보면 종군한게 확실하다. 대규모 교전이 없는 5차 북벌의 특성상 제갈량과 함께 오장원에서 주둔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전술했듯이 왕평은 5차 북벌 도중이 아닌 제갈량 사후 수습 과정에서 활약한다. 이는 위연의 난을 거의 홀로 진압한 것이다.

"건흥 12년, 제갈량이 무공에서 졸하자 군대를 물려 돌아왔는데 위연이 난을 일으키자 한번 싸움으로 패퇴시킨 것은 왕평의 공이었다."

-『촉서』 「왕평전」

「왕평전」에서는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하지만 「위연전」에서 진압과정을 더욱 자세하게 다룬다.

위연은 제갈량의 죽음에 불구하고 북벌을 지속해야 한다고 비의에게 주장한다.

"승상이 비록 죽었다고 하지만 내가 여기에 있소. 승상부의 가까운 관속들은 바로 시신을 모시고 돌아가서 장사지내야 할 것이고, 나는 당연히 스스로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해야 할 것이오. 어찌하여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큰일을 그만둔다고 말하겠소! 또한 나 위연은 어떤 사람이기에 양의가 부리는 부하가 되어서 후미를 차단하는 장수 노릇을 하란 말이오."

-『자치통감』 72권

북벌 지속에 대한 주장은 그럴듯하더라도[6] 후퇴의 결정과 위연의 후미 역할은 제갈량이 생전에 내린 결정으로 양의와 관계를 이유로 죽은 상관의 명령을 불복종하는 위연의 태도는 망발이나 마찬가지다.

이를 들은 비의는 위연을 속여서 양의를 설득하겠다고 말하며 위연이 추격하기 전에 달아났다.

위연은 양의를 사람을 보내 양의의 행동을 염탐했는데 양의가 제갈량이 따른 규정에 의거해서 철수를 진행하자 위연은 병사를 이끌고 양의를 앞질러서 잔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양의가 진행했으나 제갈량의 명령이나 마찬가지인 철수작전을 사사로운 감정을 이유로 방해한 것이다.

직후 양의 등은 산을 깎아 밤낮을 이동하는 강행군을 거듭해서 위연을 추격한다. 위연은 먼저 남곡구(南谷口)를 선점하고 일군을 파견보내 양의군을 요격하려 한다. 이에 양의는 왕평[7]을 보내 위연을 진압하도록 한다.

앞장선 왕평은 위연의 병사들을 꾸짖는다.

“공(公-제갈량)이 죽어 그 시신이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너희 놈들이 감히 이처럼 구느냐!”

-『촉서』 「위연전」

왕평의 꾸짖음에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깨달은 병사들을 모조리 흩어진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위연의 난을 진압한 셈이다. 이후 무력화된 위연은 아들 몇명과 함께 한중으로 도주했으나 마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이 장면은 위연의 난이 여러모로 각색된 『삼국지연의』에서도 의외로 거의 그대로 등장해서 왕평이 위연군을 무력화시키는 활약을 펼친다. 문제는 개명하기 전의 이름인 하평으로 등장해서 정사에 능통하지 않은 이상 왕평과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없고[8] 정사에서 활약이 굉장히 저조한 마대가 훨씬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는 탓에 연의만 읽고는 왕평이 위연의 난을 진압하는데 활약했다는 점을 알기 어렵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만해도 위연의 반란이 묘사된 이벤트에서도 왕평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니...

피해없이 위연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왕평은 후전군(後典軍), 안한장군(安漢將軍)이 되어 거기장군 오의를 보좌하며 한중태수(漢中太守)를 겸하게 되었다.

2.3 장완 시대 (235년~246년)

2.3.1 한중방어선의 수장이 되다.

"(건흥) 15년, 승진하여 안한후(安漢侯)에 봉해졌고 오일을 대신하여 독한중(督漢中)이 되었다.

연희(延熙) 원년, 대장군 장완(蔣琬)이 면양(沔陽)에 주둔하니 왕평은 다시 전호군(前護軍)이 되었고 장완의 대장군부(大將軍府) 일을 맡아 처리 하였다.

연희 6년, 장완이 부현(涪縣)으로 돌아가 주둔하니 왕평을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으로 삼아 한중을 통솔하게 하였다."
-『촉서』 「왕평전」

"승진하여 안한후(安漢侯)에 봉해졌고 다시 전호군(前護軍)이 되었고 장완의 대장군부(大將軍府) 일을 맡아 처리 하였다. (연희) 6년, 장완이 부현(涪縣)으로 돌아가 주둔하니 오의(吳懿)를 (대신하여) 독한중(督漢中)에 제배(除拜)하였다.

연희(延熙) 원년,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이 면양(沔陽)에 주둔하니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이 되어 한중을 통솔 하였다."
-『속후한서』 「왕평전」

237년, 한중태수로 오의를 보좌하던 왕평은 오의가 죽자 그를 승계해서 한중방어선의 실무자가 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관직을 승계하고 임명되었는지는 『촉서』 「왕평전」과 『속후한서』 「왕평전」 간의 괴리가 존재한다. 『촉서』에서는 237년에 오의가 죽자 바로 안한후(安漢侯), 독한중(督漢中)에 봉해지고 243년에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에 오른 것으로 기록한 반면 『속후한서』에서는 안한후에 오른 것까지는 동일하되 238년에 전감군, 진북대장군으로 승진하고 243년에 독한중에 오른 것으로 서술한다.

두 사서 간에 괴리가 존재하지만 『촉서』가 가장 먼저 서술되었으니 『촉서』의 내용을 신뢰하는게 옳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234년: 후전군, 안한장군, 한중태수에 오름.
237년: 안한후, 독한중에 오름.
238년: 전호군으로 임명. 장완의 대장군부 일을 맡음.
243년: 전감군, 진북대장군에 오름.

대사마 장완이 한중에 주둔하자 대장군부의 일을 맡으며 장완을 보좌한 점은 『촉서』와 『속후한서』에서 모두 동일하게 등장한다. 장완이 병으로 243년에 부현으로 물러나고 진북대장군에 오르면서 한중방어선의 1인자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2.3.2 244년 : 흥세에서 위군을 저지하다.

"남양(南陽)출신의 하안(何晏), 등양(鄧颺), 이승(李勝), 패국(沛國) 출신의 정밀(丁謐), 동평(東平) 출신의 필궤(畢軌)는 모두 명성이 있던 인물로 이무렵 출사했으나 명제는 그들이 부화(浮華-실속없이 화려하고 사치함)하다 하여 쫓아내었다. 그러다 조상이 정권을 잡자 다시 서임되어 조상의 복심(腹心-심복, 측근)이 되었다. 등양 등이 조상의 위명(威名)을 천하에 떨치기 위해 촉을 토벌하도록 권했고 조상이 이에 따랐다. 선왕(宣王)이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정시 5년(244), 조상이 서쪽으로 장안에 도착해 6-7만의 대군을 일으켜 낙곡(駱谷)을 따라 들어갔다."
-『위서』 「조상전」

244년 봄, 의 권신 조상등양 등의 조언에 따라서 장안에 도착해 대군을 일으키고 촉한을 침공했다. 제장으로는 하후패, 곽회, 사마소 등을 동원했다.[9] 촉한에서 이 침공을 파악했을 무렵에 조상의 선봉[10]은 이미 낙곡(駱谷)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힘이 부족한데 적을 막아야 하니, 마땅히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굳게 지키고 도적[賊-위나라 군대]들을 만나면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는 사이에[比爾間] 부현(涪縣)의 군대가 양평관(陽平關)을 족히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촉서』 「왕평전」

장마로 인해 실패한 230년의 조진의 촉침공 이래로 처음 이뤄진 위의 대침공에 당시 한중에는 3만 내외의 병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중의 장군들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제장들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낙성(樂城)과 한성(漢城)까지 후퇴, 위군을 내부로 끌어들이되 성에 의존하여 수비를 하면서 부현[11](涪縣)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소, 한중(漢中)에서 부현(涪縣)까지 가면 거의[垂] 1천리요. 도적들이 만약 양평관을 얻는다면 곧 화(禍)가 되는 것이오. 이제 의당 유호군(劉護軍)과 두참군(杜參軍)을 먼저 보내어 흥세산(興勢山)을 점거하게 하고 평(平-왕평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은 뒤에서 막을 터이니 만약 적이 군사를 나누어 황금곡(黃金谷)으로 향하면 평이 1천명을 거느리고 내려가 그들을 맞아 싸우겠소. 이러는 사이에 부현의 군대가 도착 할 것이니 이것이 계책의 으뜸이오."

-『촉서』 「왕평전」

그러나 왕평은 이 전략에 반대했다. 부현에서 한중까지 천리나 되며 낙성과 양안관구, 특히 양평관까지 밀렸다가 만일에 양평관이 빼앗길 경우에는 화(禍)가 되리라 주장했다.[12] 소수의 병력이라 할지여도 흥세산(興勢山)으로 대표되는 험한 촉의 산악 지형을 이용해 적을 지연시키고 부현에서 병력이 도착하면 바로 역격하는 전략을 주장한다.

이는 유비가 제시했던 한중수비전략[13]으로 훗날 강유에 의해 좀 더 공세적으로 수정된다.[14]

제장들은 왕평의 주장을 의심했지만 오직 유민만이 왕평의 전략이 옳음을 깨닫고 왕평과 작전을 시행했다.

"드디어 자기가 거느리는 군사를 인솔하여 흥세를 점거하고는 기치(旗幟)[15]를 많이 벌려놓으니 100여리를 걸쳐져 있었다."

-『자치통감』 74권

유민과 왕평은 흥세를 점거해서 100리의 길이의 전선에 깃발을 꽂아서 수를 부풀리는 계략을 썼다고 한다. 이 계략이 과연 성공했는지 알리는 기록이 없지만 왕평이 주장한 지연전은 성공해서 위군은 흥세를 뚫지 못했다. 지지부진해진 조상군은 제대로된 결전을 치루지 못했음에도 물자부족에 시달렸으며 이 영향으로 소, 말, 노새 등이 죄다 죽었다고 한다.

당시 그나마 선방하던 위의 곽회도 「곽회전」에 의하면 형세가 불리하자 즉시 적지로부터 탈출했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공세를 중단하고 제빨리 퇴각한 덕분에 선방한 것인데, 이는 조상의 공세가 얼마나 난항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장군 조상(曹爽)이 촉을 정벌하던 때 정촉장군(征蜀將軍)이 되어 하후현(夏侯玄)의 부장으로 낙곡(駱谷)에서 출병하여 흥세(興勢)에 주둔했다. 촉의 장군 왕림(王林)은 밤에 군영을 기습했는데 사마소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진서』 「문제본기

당시 하후현의 부장으로 종군하던 사마소왕림이라는 장군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림(林)은 사실 평(平)의 오기로 실은 왕평이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왕평은 당시 지연전을 수행해 소규모의 병력으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위군을 흔들려 했으니 왕평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마소를 공격했더라도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부현에서 출발한 비의강유의 원군[16]이 도착하자 공세로 전환해서 조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공을 세운다.

촉한이 위를 상대로 거둔 가장 큰 승리 중 하나를 지휘한 주인공이나 낙곡 전투는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때 등지(鄧芝)가 동쪽에 있었고 마충(馬忠)이 남쪽에 있었으며 왕평은 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을 드러냈다."

-『촉서』 「왕평전」

촉한 북부를 지키는 명장으로써 동부의 등지와 남부의 마충과 함께 칭송받았다고 한다.

2.4 비의 시대 (246년~253년)

2.4.1 248년 : 사망, 호제의 승계.

"연희11년(248), 진북장군 왕평이 죽었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244년의 낙곡 대전 이후 4년은 더 살았으나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248년에 죽으니 아들 왕훈(王訓)이 뒤를 이었다.

독한중의 업무는 호제가 맡음으로 한중방어선의 수장은 호제가 승계하게 되었다.

3 개인적인 면모

3.1 문맹

특이하게도 지장(智將)으로의 면모를 여러차례 보인데다가 열전까지 존재하는 촉한의 고위무장 왕평은 문맹이었다.

"왕평은 군대[戎旅]에서 자라 손으로 글씨를 쓰지 못하였고 아는 글자도 10자를 넘지 못하니 입으로 말한 것을 다른 사람이 적게 하여 글을 지었는데 모두 조리 있었다. 사람을 시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여러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읽게 하고 이를 들었는데 그 대의(大義)를 모두 알았고 종종 논하여 말할 때는 그 요지를 잃지 아니하였다."

-『촉서』 「왕평전」

그러나 문맹이라고 일자무식한 인물은 아니였고, 아는 글이 10자를 넘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조리있게 쓸 줄 알았다는 점이나 『사기』와 『한서』를 비롯한 역사서의 본기와 열전들을 듣고 요지와 대외를 알았다는 것을 보면 시기를 놓쳐서 글을 배우지 못했던 것을 보인다.

왕평이 보인 활약들은 어린 시절부터 군대에서 자라며 익힌 경험들을 특유의 지모로 적재적소로 활용해서 펼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병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더라도 현장에서 빡세게 구르며 익힌 재주인 것. 마속의 경우에는 배수의 진 같은 고대의 일화를 재현하려다가 가정 전투를 그르친게 아니냐는 의심이 존재하는 것과 반대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3.2 법도있는 모습, 거침없는 입

"행동은 법도를 지키고 말은 망녕된 것을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르게 앉아 하루를 보내니 무장(武將)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못 성급하고 좁아 이 때문에 명예가 깎이게 되었다."

-『촉서』 「왕평전」

행동 또한 법도를 지키고 농담거리를 삼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르게 앉는 등 정숙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문맹이지만 지장으로의 면모와 함께 일자무식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일화다.

그러나 말이 거침없어 상대방을 가리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깔본다 여겨 명예가 깎였다고 한다. 244년의 낙곡대전에서 왕평이 주장한 치밀한 작전에 대해 의심한 것도 이러한 왕평의 거침없는 발언에 대한 반감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3.3 이민족과의 인연

신기하게도 이민족과도 연관이 많다. 위군 소속이 된 경위는 파서 이민족 왕 부호를 따라갔다고 되어 있고, 촉한에서는 이민족으로 구성된 정예부대 오부의 통솔을 맡는다. 부호 이외에도 같이 활동하는 두호, 원약 등도 파족 계열 인물들로 보인다.

이로써 왕평이 아예 이민족 출신이 아니냐는 설도 존재하지만 아버지 대부터 강족 혼혈이라는 이민족의 정체성이 수차례 언급되는 마초와 달리 아예 이민족 여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봐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만약에 이민족 부대에서 어렸을 때부터 성장해서 친밀하게 지냈다면 왜 문맹인지[17] 어느정도 설명이 되는 편이지만 기록이 미비하여 상상의 여지에 불과하다. 진삼 위연이 이 컨셉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면 기분 탓이다

4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중공방전서황의 선봉장으로 등장. 처음엔 서황에게 나아가서 자신이 길을 알려주겠다고 자청했고, 이에 서황은 왕평을 부장으로 삼았다. 헌데 성질 급한 서황이 배수진을 쳐서 유비군을 공격하려 하자 왕평은 '그건 지모가 없는 군대에나 쓰는 작전이며 지금은 군사가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닙니다'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서황은 그렇다면 왕평에게는 진채나 지키고 있으라며 자신이 직접 무작정 군사를 이끌고 배수진을 쳤고, 당연히 졌다. 그래놓고 본진으로 돌아와서는 왕평에게 '왜 강을 건너와서 도와주지 않았냐'라고 따졌고, 왕평이 "미리 위험성을 알려 드렸으며 자신이 출전했으면 이곳 진채도 빼앗겼을거다" 고 가만히 반박하자 그를 죽이려 들었으나 주위의 만류로 포기한다. 이에 왕평은 서황의 억지에 원한을 품고 유비군에 투항했다.

이후 남만 정벌에서 축융, 북벌에 종군하여 하후무를 생포한다. 그 유명한 가정전투에서는 정사의 기록대로 마속에게 간언하며 상당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다. 패주하는 촉군을 구하기 장합과 수십합을 겨루나 후퇴하고 위연의 지원군과 함께 동분서주하며 최소한 양평관을 구하는 허구의 행적이 가미된다. 이 후 제갈량 사후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는데 이 때 한정으로 하평으로 나온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삼국지연의를 포함해서 창작물은 왕평이 외가에서 양육되었던 일이 언급되지 않아서 왕평과 하평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하기 힘들다. 단,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하평이 나올 부분을 왕평으로 바꿔서 오류를 바로 잡았다.

사실 여러 정사의 중요한 촉한의 인물들이 병풍화된 와중에 왕평은 상당히 자주 나오는 편이다. 서황과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뛰어난 안목을 가졌다는 점을 부각하는 픽션의 에피소드가 추가되었으며 가정전투에서 마속에게 간언하며 그 뛰어난 안목을 다시 부각시키고 남만정벌이나 북벌에서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졌다는 점을 여러 차례 부각된다. 위연의 반란때도 왕평의 행적을 자세히 읽다보면 정사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긴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평은 조연으로서 자주 나올 뿐이지 왕평을 중심으로 하는 에피소드는 가정전투 이후 절단나서 가정전투에서의 부장으로의 이미지를 뒤엎을만한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왕평이 주인공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낙곡대전이 연의에서 짤려서 왕평전의 웬만한 내용이 연의에서 그대로 등장했음에도 가장 큰 전공이 짤리는 굴욕을 맛본다. 무력만해도 장합과 수십합을 겨루는 모습외에는 대부분이 허구퇴각이라 큰 인상을 주기 어렵다. 덕분에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무력이 70대 그래도 제갈량이 죽을 무렵에 믿을만한 제장중 하나로 꼽히고 허구의 에피소드마저 왕평만을 위해 가공되는 등 완전히 병풍화된 인물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대접이지만 좀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5 평가

"왕평은 충성스럽고 엄정했으며 장억은 식견이 뛰어나고 과단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자신의 장점에 의지하여 명성을 날리고 자취를 나타낼수 있었던 그들을 필요로 하는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

-『촉서』 「장억전」

"이때 등지(鄧芝)가 동쪽에 있었고 마충(馬忠)이 남쪽에 있었으며 왕평은 북쪽 경계에 있었는데 모두 명성과 치적을 드러냈다."

-『촉서』 「왕평전」

왕평은 뛰어난 명장으로 제갈량의 북벌 여러차례 종군해 중요한 임무를 맡으며 제갈량을 보좌했으며 제갈량 사후에도 자칫 잘못했으면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던 낙곡 전투도 수월하게 막아내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사실 왕평은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별개로 특출난 전략안을 보인 적이 없다. 제갈량의 북벌에서도 맡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야 할지 간언한 적이 없으며 최대 활약인 낙곡 전투도 이전에 확립되었던 방어체계에 의거해서 수행했었다. 이는 왕평이 문맹이라는 점과 밀접하게 관련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평은 군대에서 잔뼈굵은 인물답게 적재적소로 병력을 운용하는 법을 알았고, 특유의 뚝심으로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다. 가정 전투에서도 대패해서 전군이 패주했음에도 기만전으로 장합을 속여서 군사를 수습해서 돌아오고, 4차 북벌에서도 명장 장합이 이끄는 별동대를 막아내서 제갈량의 승리에 일조했다. 낙곡 전투에서의 활약은 평가란에 서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활약을 보였다. 이릉 대전에서 수많은 장수들이 죽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위나라의 항장인 왕평을 발굴했다는 점은 제갈량의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왕평은 강유의 북벌이 제대로 시작된 247-248년 무렵에 죽었다는 점이다.[18] 뚝심있는 전술가로써 마찬가지로 뛰어난 강유를 보좌할만한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왕평의 죽음은 큰 악재였을 것이다. 실제로 강유는 249년에 하후패가 투항하기 전까지 요화를 야전사령관으로 기용했으나 요화는 그리 특출난 전술가가 아니였다. 256년에 왕평을 승계한 호제가 기약을 어겨서 단곡 전투의 대패를 초래했다는 점은 왕평의 공백이 뼈져리게 느껴지게 한다. 263년의 한중방어선의 맥없는 붕괴 또한 마찬가지다. 후대의 입장에서도 왕평의 부재는 엄청난 아쉬움을 남기는데 당대의 강유는 어떤 느낌이었을까.[19]

6 미디어 믹스

왕평/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원래는 朴의 발음이 ""이지만, 「무제기」에 기재된 손성의 평론에 따르면 '부(浮)'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
  2. 『삼국지연의』에서는 서황과의 불화로 인해 투항했다고 서술하지만 이는 창작으로 정사에선 단순히 항복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3. 왕평이 문맹이라서 마속이 무시했다는 점은 추측에 불과하지 역사서에서 강조하는 점이 아니다. 『속후한서』와 『정사 삼국지』 모두 동일하게 왕평의 간언을 마속이 무시했다는 점만 서술한다. 다만 왕평이 문맹이라는 점은 왕평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사실이다.
  4. 『한진춘추』에서는 하평(何平)으로 기술한다.
  5. 만약에 『진서』에서 서술대로 제갈량의 본대가 1만의 병력을 잃을 정도의 대패를 당했는데도 장합이 왕평을 패주시키지 못했다면 이건 장합이 역대급 졸장이거나 왕평이 역대급 명장이라는 뜻밖에 안된다(...)
  6. 다만 일신의 용맹을 이유로 총사령관의 죽음으로 인한 사기저하와 후방 정치 문제를 무시했다는 점은 상당히 비판할만하다. 이는 후반부의 망발에 비해서 비교적 그럴듯하다는 말이지 실제로 그럴듯하다는 것이 아니다.
  7. 「위연전」에서는 하평으로 기록한다.
  8. 『촉서』 「위연전」에서도 하평으로 등장하는데 나관중이 연의를 서술하며 『정사 삼국지』를 많이 참조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9. 흔히 조상 일파의 뻘짓으로 치부하지만 조상 일파의 일원 하후현의 인척 하후패와 사마의 일파의 일원이지만 잔뼈굵은 숙장 곽회가 참전한 것은 그렇다 쳐도 딱히 높은 관직에 있지도 않고, 딱히 공적이 있지도 않은 사마소조차도 참전했다는 점은 낙곡 대전에 사마의 일파의 지분이 만만찮다는 점을 시사한다.
  10. 『위략』에 의하면 선봉은 하후패가 지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11. 당시 장완과 강유가 부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12. 실제로 263년의 촉정벌 당시 양평관이 장서의 배신으로 맥없이 빼앗기자 촉한군은 제대로된 방어를 조직하지 못하고 한중은 순식간에 종회에게 넘어갔다.
  13. 위연에서 왕평으로 이어진 수비전략으로, 촘촘하게 배치된 소규모 부대들이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면 후방에서 온 지원군이 이를 요격하고 그 사이에 수비군이 퇴로를 차단하는 방식.
  14. 강유가 공세적으로 수정한 방식이 바로 낙성과 양안관구까지 후퇴하는 방식으로서, 당시 양평관이 장서의 항복으로 종회에게 뚫리자 촉은 검각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강유가 음평교두와 양안관구에 대한 병력파견을 제안했음에도 무당의 점꿰를 이유로 은폐한데다가 장서의 배신 등이 겹쳐서 검각까지 뚫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강유가 방어선을 고쳤을 무렵에 한중방어선의 수장은 왕평같이 유능한 인물이 아닌 호제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15. 예전에 군대에서 쓰는 깃발을 말한다.
  16. 강유의 참전에 대해 『정사 삼국지』에서는 기록이 없지만 『위서』 「왕기전」에 기재된 주석중 하나에서 위의 보급로를 공략한 강유의 활약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한다.
  17. 어렸을 때부터 군대에서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비군 쪽에 들어오기 전까진 파족 인물들과 행동을 계속 같이한 것 정도로만 가능성의 여지를 남긴다.
  18. 그리고 249년엔 마충이 사망하고 251년엔 등지가 사망한다.
  19. 강유 시대에 남은 인원은 호제, 장익, 요화, 동궐, 그리고 강유 본인인데 사실 나이만 놓고 보면 대장군 강유가 제일 나이가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