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곡대전 | ||
날짜 | ||
244년 3월 ~ 244년 5월 | ||
장소 | ||
낙곡[1], 흥세산[2] | ||
조위 | 촉한 | |
지휘관 | 조상 | 왕평 |
참전 장수 | 양위 이승 등양 곽회 하후패 하후현 사마소 | 유민 두기 왕림 비의 강유 |
병력 | 10만 명 | 3만명 + @[3] |
피해 규모 |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음 | 불명 |
결과 | ||
촉한의 승리로 약 20년간 위나라가 촉나라의 공격을 수세로 일관하게 됨. |
목차
1 개요
서기 244년 조상이 이끄는 위군이 촉의 한중을 대규모로 공격한 사건이다.
2 당시의 상황
2.1 위
위 명제 조예는 239년에 죽으면서 조상과 사마의에게 차기 황제인 조방의 보좌를 부탁했지만, 조방의 출신 성분이 확실치 않은 데다[4] 나이도 어려 위 황실의 상황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조상은 처음에는 겸손한 태도를 취했으나[5]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는 한편 사마의를 최고위직이지만 실권은 없는 태부로 임명하여 사마의를 쩌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마의를 쩌리로 만들었다고 해도 조상은 어디까지나 낙하산에 불과했으며, 위나라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사마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상의 심복인 등양, 이승 등은 이러한 점을 걱정하여 촉을 정벌할 것을 조상에게 건의하였고 조상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다.
2.2 촉
234년 군정 양면의 최고 책임자였던 재상 제갈량이 죽으면서 촉은 위연의 반역 이외에도 이민족의 대규모 반란에도 시달리는 등 내우를 겪었지만 제갈량의 후임인 장완이 이를 잘 수습했다. 이후 장완은 대규모 북벌을 기획하기도 했으나 본인의 지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그로 인해 촉의 공세는 상당히 둔화된 상태였다.
3 전쟁의 전개
3.1 위군의 출병
조상은 제갈량이 죽은 후의 촉을 호구쉬운 상대로 보고 있었다.[6] 더군다나 한중에 주둔중인 병력이 불과 3만이라는 첩보까지 입수했기 때문에 싸우면 필승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244년의 출병으로 이어졌다.
조상은 10만의 군사를 동원했는데, 장안에서 징발한 군사가 7만이었고 대촉전에서 잔뼈가 굵은 곽회의 병사가 3만이었다. 하후현, 곽회, 하후패[7], 사마소[8] 외에도 자신의 가까운 측근들도 종군하게 했다. 사실상 위군의 정예가 모두 출전하는 올스타팀 격의 부대였다.
3.2 촉군의 대응
당시 한중의 방어책임자는 진북장군 겸 감군이었던 왕평이었다. 10만의 위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장수들 사이에서는 적을 깊숙히 끌어들여 천험의 요새인 양평관에서 막으면서 성도의 지원군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왕평은 고지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위군을 막을 계획을 짰다.
왕평의 전략은 제대로 맞아떨어져 위군의 진격은 크게 둔화되었다.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촉군의 방비는 철통과도 같아 위군의 공격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왕평은 밤을 틈타 소수의 병력으로 야습을 시도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않고 위군의 상황은 심각해져갔다.
3.3 위군의 고전
5월에 들어 위군은 출병에서 약 2달이 흘렀음에도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으며 심각한 보급 문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원정 총책임자인 조상은 위에 복속되어 있던 이민족인 강족과 저족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하도록 명했는데, 한중의 지리적 험난함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험악하여 자치통감과 조진전에 부속된 '조상전'의 묘사를 예로 들면, 군량 수송 중에 소, 말, 노새가 죽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울부짖는 백성이 길을 가득 메웠다고 서술되있을 정도다.[9]
게다가 이렇게 시간을 낭비한 사이 성도에서 출발한 비의가 이끄는 대규모 촉군이 한중까지 도착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위군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벼락이 떨어진 셈이다.
3.4 위군의 후퇴
다만 비의의 증원군이 한중에 진입하기 전부터 위군 조상의 진영에서는 참모들끼리 퇴각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전면적인 퇴각을 결심한 조상은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있었다. 게다가 이 비극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다름아닌 비, 큰 비가 몇일동안이나 지속되며 얼마남지 않은 식량이 모조리 썩어버렸고, 퇴각로에 있던 다리가 붕괴되버린 것이다. 여기에 강유가[10] 촉군을 지휘하여 퇴각하는 위군을 공격, 위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조상을 비롯한 수뇌부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장안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4 전쟁의 결과
4.1 위
자치통감의 기록에서는 잃고 죽은 자가 많았고 관중이 텅 비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진전에 부속된 조상전에서는 동관 오른편으로는 인적을 찾아 볼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위군은 심각한 인적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군량 수송에 동원된 강족과 저족도 심각한 피해를 입어 위나라에 강한 원한을 품게되었다. 이에 양위라는 자는 조상을 부추겨서 이딴 결과를 만든 이승과 등양을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위는 한동안 촉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무려 263년에 사마소가 정촉을 결심하기까지 약 20년간 위는 촉의 공격에 대해 수세로만 일관했다.
한편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조상은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한 원정이 크나큰 참극으로 마무리지어진 상황에서 본인만 살아남아 돌아왔음에도 처벌받기는 커녕, 하다못해 반성하기는 커녕 더욱 전횡을 일삼았다. 결국 5년 뒤인 249년 고평릉 사변을 통해 사마의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물론 측근에 이르기까지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멸족당했다.
4.2 촉
지병에 시달리던 장완이 246년 세상을 떠나면서 비의가 권력을 승계하지만, 비의는 북벌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낙곡대전의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후 253년에 비의가 암살당하고 강유가 북벌의 총책임자가 될 때까지 위와 촉 사이에 이와 같은 대규모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5 기타 창작물에서
촉한의 대승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친촉한 성향을 가진 삼국지연의에서 조예 사망과 조상 집권 후에 고평릉 사변으로 넘어가기에 낙곡대전 부분의 묘사는 생략된다.
만약 연의에 낙곡대전을 집어넣으면 역사적으로는 충실해지겠지만, 픽션적으로는 이상해진다. 촉군을 혼자 지탱하고 있는 것 같은 초인적인 지략가가 죽었는데 그 후의 전투는 오히려 대승을 거두고 위는 촉을 건드리지도 못하게 된다? 제갈량 신격화라는 나관중의 컨셉과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제갈량 사후를 책임지는 캐릭터인 강유의 본격적인 데뷔전으로 포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굳이 넣지 않을 이유도 없기는 하다. 기본적으로 연의는 제갈량 사후를 그다지 자세히 다루지 않는 편이므로, 분량 조절 문제나 연의를 쓰면서 참조한 자료상의 문제로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승상님께서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미리 계책을 남겨두셨지!"라고 해도 되고, 컨셉을 유지하면서 낙곡대전을 포함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같은 이유로 84부작 삼국지와 삼국 등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생략되었다.
5.1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6에서 독자 세력이 된 진의 스토리 모드에서 '촉 토벌전'이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조작무장은 사마소. 대장군 조상이 등애와 사마소의 진언을 무시하고 병량고 습격을 지시했다가 야습, 복병, 화계종합선물세트에 당해서 엉망이 된 위군을 수습하여 퇴각하는 것이 목표. 상냥한 왕원희와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진삼국무쌍7에서는 '흥세산 전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지휘관은 여전히 조상. 플레이어블 무장은 사마의가 보낸 사마사, 사마소, 가충, 장춘화. 당연하지만 사마 가문 사람들 모두 조상이 능력 없는 장군이고 지금 생각 중인 작전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전투 시작전부터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로 나온다. 특히 장춘화와 가충은 그 성격상 정말 작정하고 조상을 깐다(…).
걱정 그대로 시작하자마자 조상은 닥돌하다가 촉군의 계략에 걸려서 본진이 털리고 화계에 당하면서 위군은 대패,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짐덩어리 조상을 호위해서 탈출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승리 목표다. 탈출지점에 갈때까지 쉴새없이 나타나서 공격하는 촉군의 장수들은 덤. 장춘화나 가충으로 진행하면 탈출지점까지 가는 와중에도 조상을 까댄다(…).
진삼국무쌍6와 진삼국무쌍7에서 낙곡대전에서 조상을 격파한 왕평은 조상이 지시한 기습 지역인 군량고를 지키고 패배한 위군을 추격할 때 탈출 경로로 도착하기 직전에 강유가 퇴로를 끊는 것이 아닌 마대가 가로막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대가 총대장으로 설정되며, 마대를 격파해야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된다.
5.2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선 사마의가 원정에 앞서 '바보짓이다'라고 일축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에 사마사에게 '지금 조상이 하는 짓은 술잔에 술을 부어 구멍을 뚫으려는 짓이다'라고 하며 당장은 촉을 무너뜨릴수 없다고 한다.그리고 사마사는 부친의 술잔을 벽에 집어던져 박살내버린다
- ↑ 지금의 섬서성 주지현 서남.
- ↑ 지금의 섬서성 성고현 이북.
- ↑ 비의가 이끌고 온 원군이다.
- ↑ 조예의 슬하에는 4남 2녀가 있었으나 모두 요절했다.
- ↑ 모든 일을 사마의와 함께 논의하여 처리했고 사마의를 마치 아버지처럼 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 ↑ 이전부터 걸핏하면 촉을 치려고 했으며 사마의가 촉 정벌의 어려움에 대해 조언했으나 간단히 무시했다.
- ↑ 장안에서 자오도로 나아가는 본군의 선봉이 되어 싸웠다고 하는데, 230년에 벌어진 전투 또는 낙곡대전 중 어떤 전투에서 선봉으로 싸웠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토촉호군이 되어 원정군에 소속되면서 서쪽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낙곡대전에 참전한 것은 확실하다.
- ↑ 하후현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종군했다.
- ↑ 수차례의 북벌을 진행한 제갈량 역시 북벌 당시 보급 문제에 번번히 발목을 잡혔고 조엄 또한 한중으로의 수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유일하게 한중 수송에 대해 긍정적인 말이 적혀 있는 것은 두기로 5천 명을 보냈으나 한 명도 탈주하지 않았다는 기록 뿐이다.
덕분에 삼국지 11에서 특기는 잉여인 운반을 줬지 - ↑ 당시에는 비의 휘하.
- ↑ 병력이 많은 낙곡 쪽이 성공하면 움직이기로 결심하며, 사마의도 곽회의 이런 행동을 예측한다. 곽회는 이걸로 밥값을 한 것인데 어차피 이쪽은 조공인 만큼 강유의 병력을 붙잡고만 있어도 되고 주공인 조상 쪽이 승리하면 강유는 알아서 물러날 테고 아니라면 병력을 온전히 해서 후퇴하는 쪽이 백번 이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