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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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st Julius Röhm
1887년 11월 28일 - 1934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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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룀은 초기 나치당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돌격대(SA)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나치당 초기의 급진 사회주의 성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때문에 보수층의 지지를 잃거나 당에서 그가 잠재적 경쟁자로 떠오를 것을 우려하여 살해당하였다.

1 출생과 젊은 시절

룀은 1887년 11월 28일 뮌헨 태생으로, 아버지는 철도 관리관 공무원이었다. 1906년 바이에른의 막시말리안 김나지움을 졸업했고, 바이에른 제10 보병 연대 프린츠 루드비히(Prinz Ludwig)에 입대하였다. 1908년에 바이에른 뮌헨 사관학교를 나와 소위로 임관하였다.

2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룀은 서부전선에서 종군했으며, 1916년에는 바이에른 전쟁성에 임시 근무했다

로렌 지방[1]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베르됭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이 부상은 코 윗부분에서 시작해 윗뺨으로 총알이 관통한 큰 부상이었고, 이후 룀의 얼굴에는 큰 흉터가 남았다.

북부 프로이센의 귀족출신이 지배하던 독일제국군의 상층부와는 이질적인 남부 바이에른 평민 출신 장교였다. 이런 출신적 배경때문에 후에 그는 장교출신 답지 않게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 지배하는 국방군 지휘부를 증오하게 되고 이를 자신의 휘하에 놓으려고 했다. 또한 나치당 내에서 귀족과 자본가를 미워하는 좌파적인 성향도 여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3 1차대전 직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국방군은 10만으로 제한되지만, 룀은 여기에 남는것을 허락받은 것으로 봐서는 능력은 인정받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무렵 독일군은 군대 해체로 남게 된 무기를 민간에 넘겨서 준군사조직 민병대를 조직하려 했고, 룀은 대량의 무기를 모아서 비밀 무기고에 보관한 다음 여러 민병대와 향토군에 보급했다.

룀은 현역군인 신분으로 반공 민병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이어 나치에 가입했다. 그는 나치 창설기 멤버의 한명으로서 히틀러 당시 그는 공산당 조직과 싸우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고, 또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정치적 동료가 되었다.

1923년 11월 뮌헨에서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따라 뮌헨 폭동을 일으켰으나 시원하게 망했다. 룀은 현역군인으로서 여기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때문에 룀도 함께 체포되어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고 불명예 제대 처분을 당했다. 좌익의 이런 폭동 행위는 매우 중한 형벌이 내려졌으나, 우익에 동정적이었던 공권력의 성향때문에 히틀러 일당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나 룀이나 히틀러는 이런 솜방망이 처벌을 제대로 복무하지도 않았고, 당시 법원의 안이한 처사로 준법서약을 하고 즉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히틀러가 옥중에서 나의 투쟁을 저술하는 동안 룀은 불법화된 SA 대신 "프론트반"이라는 합법 조직을 만들었다. 나치당은 "민족 사회주의 자유당"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나섰고 룀도 의회에 진출했으나, 정쟁에 휘말려 그 자리를 금세 내놓고야 말았다.

1928년볼리비아 정부의 요청을 받아서 일시적으로 남미로 떠나, 잠시 군사고문직을 역임하였다.

4 돌격대 지휘관

1930년 9월 히틀러가 SA를 장악하였고[2], 덕분에 다음해 1월에는 룀이 SA 참모장을 맡게 되었다. SA는 룀의 주도로 나치당과는 독립한 준군사조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도 SA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돌격대의 지도자인 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룀은 당시 백만 명에 이르렀던 거대한 SA조직에 급진적인 사상을 주입하고, 측근을 지휘부에 앉혔다.

당시 SA는 당 인사 경호 임무를 SS에 넘겨주고 본격적인 정치깡패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나치당에 적대적인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을 두들겨 패고 다녔으며, 반대 의사를 표하는 학자, 언론인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당시 룀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SA는 노동쟁의에 자주 개입하여 노동자 편을 들었다. SA의 이런 행동으로 나치는 좌파 정당들의 지지기반을 잠식할 수 있었으나, 무분별한 폭력성과 과도한 음주, 그리고 룀 자신을 비롯한 SA 수뇌부의 동성애적 경향과 그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보수세력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리가 실업자와 불만분자로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돌격대에 들어오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돌격대의 수는 30년에는 7만이었다가 31년에는 17만명, 나치당 정권 장악 이전에는 무려 70만명에 도달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룀은 서로를 자네 또는 [3]라 칭했다. 다른 이들은 슬슬 히틀러를 총통 각하(mein Führer)라고 높여 부르고 있었으며, 오직 룀과 헤르만 괴링, 그리고 요제프 괴벨스만이 총통을 감히 라고 칭할 수 있었다. 심지어 룀은 히틀러를 아돌프라며 직접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5 나치당 내 분파 갈등

1933년 여러 보수 자본가 세력의 도움으로 히틀러가 집권하고, SA는 법적으로 경찰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다. 나치가 힘을 얻은 만큼 SA도 기고만장해져, 지방 관청에 들이닥쳐 행정을 나치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룀과 돌격대는 이제까지 해 오던 대로 독일을 더 크게 변화시킬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룀의 생각대로 독일을 바꿀 생각이 없었을 뿐더러 돌격대를 쓸 데 없어진 사냥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룀의 사상에 있었다.

그는 나치당의 사회주의 분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사회주의적인(Sozialistische), 노동자(Arbeiter) 등 사회주의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분파의 성향은 대체로 유대인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지배를 선호했다. 특히 제2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귀족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재분배하기를 원했고, 룀은 반동세력에 맞선 제2의 혁명을 주구장창 부르짖었다.

히틀러의 집권을 도운 자본가 세력은 이를 큰 위협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자본가들에게 제2의 혁명은 없다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돌격대의 출신 성분조차 바꿀 순 없었다. 상당수가 노동계급 출신인데다 전직 공산주의자가 득실거리는 이들은 스테이크[4]와 같았다. 집권한 히틀러가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 SA에 보답하지 않자 이들은 곧 실망하였다. 심지어 룀은 돌격대 지도자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히틀러의 정책을 비난하기도 하였다.[5]

더더욱 위험한 것은 국군(Reichswehr)을 바라보는 300만 SA의 시선이었다. 룀과 SA 수뇌부는 구 프로이센 귀족들이 주름잡는 국군을 아주 싫어했으며, 혁명정신이 떨어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취급했다. 때문에 룀은 국방장관이 되고, 군대를 SA에 합병하여 진짜배기 인민군을 창설하려 했다[6]. 당시 돌격대는 5개의 돌격대 상급 집단(군단에 해당)과 18개의 돌격대 집단(사단에 해당)으로 구성되어 독일정규군의 5배에 달하고, 지휘관들도 전직 군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려고 하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 이래의 깊은 역사를 가진 국군 수뇌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거리에서 쌈박질이나 하며 수뇌부라는 자들은 동성애나 저지르는 오합지졸들 따위에게 국군을 들어다 바칠 의사 또한 전혀 없었다. 때문에 군과 SA의 갈등은 깊어져 갔으며, 히틀러도 물론 국군 수뇌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를 느꼈기에 룀의 노선과는 갈라서게 되었다.

6 토사구팽의 서막

당시 독일의 대통령은 86세 고령의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이었다. 히틀러가 그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군부를 휘어잡을 필요가 있었고, 때문에 어떻게든 SA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이 때문에 룀은 히틀러에게 강하게 항의했고, 막무가내로 SA의 무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반란 기도처럼 보일 소지가 충분했으며, SA의 군부에 대한 타협 시도도 계속 결렬되고 있었다.

1934년 4월 11일, 나치와 군부는 힌덴부르크 사망 이후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히틀러는 SA 축소와 룀의 영향력 억제, 국방군의 지위 보장과 군비 확장을 대가로 차기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지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방군과 자본가들은 여전히 SA를 싫어했고, 6월에는 급기야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상급대장을 통해 SA와 국방군 간의 긴장이 지속될 경우 계엄령을 선포할지도 모른다는 최후 통첩까지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한낱 아첨꾼에 불과해 보이던 블롬베르크까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으며, 힌덴부르크 대통령 또한 이 경고를 확실히 하자 히틀러는 결국 룀의 처단을 결심하게 된다.

7 장검의 밤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를 매우 주저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 내에서 룀을 반대해 오던 괴링, 히믈러, 괴벨스 등은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게슈타포를 히믈러 휘하로 전속시켜 SA의 반역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캐내게 하였다.

히믈러의 SS와 그 휘하의 보안대(SD) 사령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룀이 프랑스에게 2000만 마르크를 받아 6월 24일 SA를 동원하여 히틀러 정권를 전복하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 이를 받아든 히틀러는 결국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괴링, 히믈러, 하이드리히 등은 이 동안 계속 살생부를 작성하였고, SS에 동원명령을 내렸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동안 룀과 동료들은 바트비제로 휴가를 떠나 있었다. 6월 28일 히틀러는 룀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를 위해 6월 30일까지 모든 SA지휘관을 바트비제에 소집할 것을 요구했고, 룀은 별다른 의심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운명의 30일이 밝자, 히틀러는 직접 바트비제에 도착하여 히믈러 휘하의 SS를 동원, 룀과 SA 지휘관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히틀러는 자고있던 에른스트 룀에게 "룀 너를 체포한다"라고 말했다.[7] 룀은 반역을 부정했지만 히틀러는 이미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체포된 후 다른 돌격대 간부들과 함께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보내진 룀은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돌격대 간부 6명의 총살형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후 친위대는 돌격대 수뇌부들을 뮌헨의 교도소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룀은 이 날 처형되지 않았는데 히틀러는 "룀의 그 동안의 공적을 생각해서 형을 면하게 해 주었다"라고 술회했다. 하지만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히틀러의 구명의지는 7월 1일 정오 힘러괴링이 반대했기 때문에 살려줄 수는 없었다

히틀러는 다카우 강제수용소장인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룀에게 자결기회를 주고 만약 자결하지 않으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3시경, 아이케는 부하인 부소장 미하엘 리페르트를 불러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있는 룀의 독방을 방문했다. 테오도어 아이케는 렘에게 "당신은 사형에 처해졌다. 총통은 당신에게 최후결단을 위한 기회를 그대에게 주었다"라고 선고하며 룀의 체포를 보고하고 그가 반역자였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는 나치당 기관지와 자결용으로 한 발의 탄환이 들어있는 권총을 두고 독방에서 나갔다.

그러나 한참 동안 기다려도 총성이 울리지 않았기에 아이케 일행은 다시 렘의 독방으로 들어갔다. 에른스트 룀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자살을 거부했고, 자신이 처형되어야 한다면 히틀러더러 직접 하라며 앞가슴을 내놓고 서 있었다. 이에 테오도어 아이케는 리페르트에게 룀을 쏘라고 명령을 내렸고 리페르트는 룀을 향해 총 2발을 쏘았다. 총에 맞은 룀은 마루에 쓰러지면서 나의 총통이여(mein Führer...)라고 외치면서 절규했다고 한다. 그러자 테오도어 아이케는 "당신은 그것을 빨리 말해야 했다"라며 이야기했고[8], 룀이 아직도 숨이 붙어있었기에 룀에게 다시 한 발을 더 가슴에 쏘아 그를 살해했다.[9]

SA 숙청의 표면적인 이유로는 반란음모 혐의가 씌워졌지만, 이는 처형 며칠 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6월 30일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으로 나치당 내의 좌익 계열은 일소[10]되었으며, 이를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11]이라 부른다.

초법적인 숙청과 집단 처형이었지만, 이미 돌격대의 평판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도 냉담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8 동성애

에른스트 룀은 동성애자였다. 그것까진 그렇다치는데 취향은 15세쯤 된 '어린 소년'을 좋아했다. 그는 이것이 자랑스러웠는지 자신의 성적 취향을 드러내는 것에 어느정도는 적극적이었고 히틀러도 알고 있었고 동성애자라는 비난에[12] "돌격대는 신사들의 무리가 아니라 군대라능" "개인의 사생활에 관심 없다" 드립으로 동성애를 쉴드치는 짓을 했다. 결국 룀을 숙청한 히틀러는 동성애자도 탄압하기 시작한다.

자기 애인한테 시까지 써줬다고...체포당할 때도 젊은 남자 애인 두 명이랑 벌거벗고 침대위에 있었다.

9 매체에서

히틀러: 악의 탄생에선 피터 스토메어가 역을 맡았다. 사진에 나온 뚱보와 다른 이미지에 당황하면 지는거다.
  1. 당시에는 독일령이었으나 전후에는 프랑스에 넘겨졌다.
  2. 이때 북독일의 돌격대 중 일부를 지휘하던 슈테네스가 히틀러의 방침에 반발하면서 돌격대가 흔들리자 당시 사령관이던 잘로몬 폰 페퍼를 해임하고 히틀러가 돌격대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조직관리나 행정능력은 지극히 낮았으므로...
  3. 독일어로 "Du". 이것은 꼭 낮춤말은 아니다. 관계의 상하가 아니라 멀고 친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에게도 du를 쓴다. 이것과 대비되는 Sie(당신)은 공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 결과적으로 히틀러를 du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친구처럼 매우 친한관계였다는 점이다.
  4. 겉보기에는 나치당의 상징색처럼 갈색이지만, 그 속은 공산주의자와 같이 붉은색.
  5. 이때 룀이 히틀러를 공개비판했다고 알려준 빅토르 루체는 장검의 밤 이후 돌격대 참모장이 되는 것으로 보답받았다.
  6. 재미있게도 이러한 군조직 관념은 19세기 독일내 진보진영이 이상시하던 민병대의 관념을 받아들인 것이며, 무장친위대 또한 이러한 사상적 영향 아래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7. 이 때 히틀러는 이제까지의 벗에게 대해 너(Du)란 2인칭 용어를 사용했다.
  8. 당시 룀은 히틀러에게 '너'(Du)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슬슬 괴벨스와 괴링을 위시한 측근들이 히틀러를 '총통각하'라고 부르기 시작하던 때였으나 룀은 히틀러를 총통이라고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9. 그러나 살해자가 아이케인지 리페르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0. 나치당 좌파의 영수인 그레고르 슈트라서도 이때 암살되었다.
  11. 장검의 밤 날에 죽은 사람들 중에는 힌덴부르크의 측근이던 슐라이헤어도 있었다. 즉, 나차당 좌파의 정리만이 아니라 보수진영중 나치당에게 밉보인 자들도 동시에 살해한 사건이다. 참고로 살해당한 사람 중엔 나의 투쟁 편집자도 있었다.
  12. 타블로이드에서 룀이 의사와 의료진료 기록을 빼돌렸다. "난 여자들이 더럽고 성적으로 관심없는데 자꾸 여자들이 나를 귀찮게 한다" 하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