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Traviata[1]
2015.03.13~03.17 해리슨 오페라 하우스 상연시 광고 이미지 |
1853년 라 페니체 극장에서 올려진 "라 트라비아타" 초연 홍보용 포스터[2]
1 개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오페라.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3]의 소설 춘희를 원작으로 했다.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53년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 오페라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 이 오페라는 국내에서 정식으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 이기도하다.[4]
이 항목으로 들어온 위키러들 중 다수는 축배의 노래를 알 것이다. 혹은 그 항목 때문에 들어왔던가.. 딴딴 딴딴딴 따라라라
2 이야기
라 트라비아타는 사실 베르디의 개인적 사정과 겹치는 오페라 이기도 하다. 그 개인적인 사정이 바로 이 오페라의 탄생 계기를 제공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첫 아내였던 마르게리타 베리치와 세 아이를 잃어버리고, 홀아비의 몸으로 살아가던 베르디는 한 동안 좌절을 겪다가 나부코에서 첫 히트를 거둔 후 명성을 쌓게되고, 뒤이어 에르나니, 맥베스[5], 루이자 밀러, 아틸라를 작곡하게 되는데, 역시 좋은 평을 얻어갔다.[6] 그 와중에 나부코 초연에서 아비가일레역을 맡았던 쥬세피나 스테르포니와 눈이 맞아서 동거에 들어갔지만 그 동거가 순탄치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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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세피나 스테르포니 (1815년 ~ 1897년)
지금도 그렇지만, 우선 당시 사회가 볼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쥬세피나를 만났을 당시 베르디는 이미 첫 번째 아내 베리치와 사별한 상태였긴 했지만, 베리치가 죽었어도 그녀의 장인은 살아있던 상황이라서 베르디가 그의 후원자였던 장인어른의 눈치를 봐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베르디가 아닌 쥬세피나한테 있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쥬세피나 스테르포니는 베르디와 만나기전에 테너 가수와 극장 지배인 사이에서 각각 아이를 하나씩 낳은 미혼모의 몸이었다. 미혼모의 몸이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게다가 작곡가 도니체티와도 애정 관계가 있었다. 그녀의 이런 복잡한 남자 관계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스폰서의 지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연예인 가장이라 할 수 있겠다.
http://olv.moazine.com/rviewer/index.asp
그래도 서로 사랑에 빠진 베르디와 쥬세피나 였던지라, 1948년부터 동거하여 1859년 4월 29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가까운 곳인 프랑스 중동부의 콜롱주-수-살레베(Collonges-sous-Salève)에서 정식으로 결혼하기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그 결혼이 정식화 되기까진 11년동안 다른이들의 눈치도 많이 살피고 살아가야 했던 것은 당연했다.
눈치 살피기 싫었는지, 베르디옹은 쥬세피나를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한 동안 거기서 임시주택을 마련하고 살게 된다. 다행히 파리에선 그런 눈치 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베르디와 쥬세피나가 동거를 하고 있었을 때, 파리에서는 이런 연극이 유행했다. 바로, 알렉상드르 뒤마[7]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멜로물 춘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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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뒤마 피스 (1824년 7월 27일 - 1895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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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의 대표 작가인 알퐁스 무하의 "동백꽃 여인" 포스터.
베르디와 쥬세피나는 그 연극을 보고 공감하게 되었다. 특히, 베르디는 너무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고급창부라는 이유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이뤄지지 못한 연극의 내용이 자신들의 상황과 너무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당시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에서 더욱 명성을 쌓던 베르디는 연극을 보자마자 더욱 의욕을 불태웠고, 뒤마 피스의 연극을 오페라화 하기로 결심한다.
연극을 보고 수년간 파리에서의 생활을 마친 베르디와 쥬세피나는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되는데, 컴백하자마자 베르디는 자신과 절친한 대본가 프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에게 파리에서 감상했던 뒤마 피스의 연극 내용을 오페라에 맞게 각색해달라고 의뢰한다.
베르디는 뒤마 피스의 연극이 정말 맘에 들었는지 작곡을 할 때도, 뒤마 피스의 원작에 충실한 재현을 하기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뒤마 피스의 연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는 '라 트라비아타'라는 제목으로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을 가지게 된다. 때는 1853년 3월 6일.
그러나, 전작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와는 달리 베네치아 극장에서 초연된 "라 트라비아타"는 이태리 오페라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라는 흑역사로 찍히고 만다. 그것도 초연하자마자....
우선, 초연 당시에 출연한 가수진들이 미스캐스팅이었다. "라 트라비아타" 초연 당시의 비올레타 역을 맡은 살바니 도나텔리는 결핵은 앓는 청순한 이미지의 여성 역과 전혀 맞지 않은 비대한 몸집이었고, 알프레도역을 맡은 당시의 테너 가수는 감기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전해지고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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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 초연 때 비올레타역을 맡았던 살비니 도나텔리 (Fanny Salvini-Donatelli, 1815년 ~ 1891년)
그러나, "라 트라비아타"가 이태리 오페라 역사상 최악의 실패가 돼버린 것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위에 적혀진 미스캐스팅도 한 몫하긴 했지만, 더 큰 요인은 오페라 배경과 당시 사회로써는 납득하기 힘든 스토리에 있었다.
"라 트라비아타"의 배경은 1850년대의 파리.
이 오페라 이전에 나왔던 거의 모든 유럽 오페라들은 빈첸조 벨리니의 노르마의 경우 로마가 갈리아 지방을 지배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있는 작품이고,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는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두 번째 아내 앤 불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구노의 파우스트의 경우 괴테의 원작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프랑스에서 전해지던 설화를 바탕으로 작곡된 오페라였다.
즉, 라 트라비아타가 나오기 이전에는 신화, 전설이나 역사물 희곡에서 따와 그것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가 많이 나왔다고 얘기하는것이 옳을 것이다.
허나,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삼았으니, 이는 당시로써는 최초의 현대 오페라를 작곡한 셈이 되었지만, 당시 이러한 오페라 배경은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라고 생각되었는지 관객들에게 알러지 반응만 일으켜 버렸다고 한다. 어찌보면 시대를 뛰어넘은 시도라 볼 수 있겠다.
또, 위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스토리에서도 고급창부와 부잣집 도련님의 멜로물이라는 것이 당시 사회로써는 걸리적 거리는 요소였던 것. 일단, 여자 주인공의 직업 자체가 고급창부 였다는거 자체가 당시 사회인들신사를 자칭한 이들에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10]
어찌되었건...이 두 가지 요인이 "라 트라비아타" 초연 실패의 더 정확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덕분에, 세계 언론은 "라 트라비아타"가 실패한 것에 대해 베르디를 아주 비꼬았는데, 이에 베르디 옹은 빡친 상태에서 거만하고 포스있는 말투로 "내 오페라가 틀리지 않았다, 이해를 전혀 못한 그 들이 틀려먹은 거다, 이 오페라가 다시 무대에 올려지면 후에 나를 대표하는 작품이 될테니 두고보라."라고 되받아쳤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초연에서 쓴맛을 본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를 몇 부분 수정하기 시작했다. 음악적인 부분을 약간 고치고[11] 배경도 1850년대가 아닌 루이 15세가 다스리던 1700년대 파리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가수진도 대거 교체했다.
그렇게 수정된 버젼의 라 트라비아타는 1854년 5월 6일 지금은 없어진 베네치아의 산 베네데토 극장에서 재공연을 가지게되고, 초연의 흑역사와는 달리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12] 그 후로 라 트라비아타는 파리, 런던, 뉴욕에서도 공연되어 갈채를 받았지만, 베르디는 이 성공에 대해 약간 아쉬움을 가졌다고 한다. 오페라의 배경이 자신이 원했던 '동시대성'이 먹혀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 들어서야 베르디가 원했던 1850년대 의상으로 공연되었지만, 이 역시 베르디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견이 대다수.
어찌되었건, 오페라 역사상 최악의 실패라는 흑역사를 가진 라 트라비아타가 현재까지도 극장에 자주 올려지는 명작이 되었으니 여러가지로 아이러니한 에피소드를 가진 오페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등장인물
- 비올레타 발레리 - 파리의 고급 매춘부 (소프라노)
- 알프레도 제르몽 - 시골 출신의 부르주아 청년이자 조르쥬의 아들 (테너)
- 조르쥬 제르몽 - 알프레도의 아버지 (바리톤)
- 플로라 베르부아 - 비올레타의 친구 (메조 소프라노)
- 안니나 - 비올레타의 하녀 (메조 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
- 듀폴 남작 - 비올레타의 후견인 (바리톤)
- 가스통 자작 - 알프레도의 친구 (테너)
- 그랑빌 박사 - 비올레타의 주치의 (베이스)
4 줄거리
5 "라 트라비아타"의 명반과 영상물
인기 레퍼토리인 만큼 음반과 영상물이 많이 나와있다. 문제는 명연과 졸연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어서 선택의 고민이 생길 수도 있는 법. 잘 고르도록 하자.
음반의 경우 토스카와 시몬 보카네그라, 메피스토펠레, 노르마와는 달리 딱히 '결정반'이라 불리는 것이 없다. 그 만큼 좋은 연주가 많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연주로 평가받는 음반들이다. 스테레오와 모노 모두 포함해서....
- 스테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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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DG반. 이건 예전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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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als 시리즈로 재발매한 버전. 시중에서 가장 구하기 쉽다
스테레오 음반중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것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반을 꼽을 수 있다. 클라이버의 지휘는 아래에 소개되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실황반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템포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음반의 매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1막 첫 부분의 살롱 장면과 2막 2장의 발레 부분은 그 만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거기다 담백하게 지휘해서 부담없이 전곡을 감상할 수 있다는게 챠밍 포인트.[13] 비올레타역의 일레아나 코투르바스는 아래에 소개되는 마리아 칼라스의 두 음반에 비하면 타오르는 극적 표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코투르바스의 비올레타는 칼라스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는 비올레타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칼라스가 유니크한 비올레타라면 코투르바스는 원작 춘희의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연상케 한달까? 원작을 생각하면 코투르바스 역시 싱크로율 높은 비올레타임은 틀림없다. 알프레도역의 플라시도 도밍고의 경우 듣는이에 따라 나이들린 울림이 강하겠지만, 도밍고가 많이 맡았던 배역이라서 그런지 심리표현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비올레타가 쓴 절교 편지를 보고 오열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 조르쥬 제르몽역의 셰릴 밀른즈도 아래에 소개되는 RCA 음반 보다 노련한 목소리 연기를 들려준다. 그의 시니컬하고, 궁상맞은 느낌의 목소리가 조르쥬 제르몽 이라는 캐릭터에 잘 맞아 들어가기도 하고...
- 모노
- 영상물
- ↑ '방황하는 여인'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이다.
- ↑ 여담이지만 얀치홀트에 의해 타이포그래피가 재정립되기 이전이라 꽤 글이 빽빽하다. 이 당시에는 가독성을 무시하는 조판이 흔했다. 광고나 포스터에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
- ↑ 삼총사로 유명한 알렉산더 뒤마의 친아들이다. 일명 소 뒤마.
- ↑ 물론, 일제 침략기 시절에 카르멘과 나비부인이 먼저 공연된 적이 있지만, 이것은 일본에 의한 공연이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정식으로 올려진 것은 아니다. 덧붙이자면, 국내에서 라 트라비아타가 최초로 공연된 것은 1948년 1월이며 부민관에서 했다고 전해진다.
- ↑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이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베르디옹은 셰익스피어 덕후(...)였다.
- ↑ 물론, 리골레토 나오기 전에 베르디는 졸작도 만들었다.(...) 조반나 다르코 라든가, 알치라 라든가....
- ↑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르 뒤마 페르의 아들의 뒤마 피스를 말한다.
- ↑ 원래는 동백꽃 여인이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이 맞다. "춘희"는 일본식으로 번역한 제목인데 원작 내용과 동떨어진 제목이라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다만 일본어에서 椿은 참죽나무가 아닌 동백을 뜻하는 글자로 쓰이니 일본 내에서라면 제대로 번역한 제목이 맞다.)
- ↑ 심지어 오페라의 결말을 장식하는 비올레타의 죽음 장면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기는 커녕 도다텔리의 비대한 몸집 탓에 웃음을 터뜨렸다고(...)
- ↑ 이와 비슷한 예로 조르주 비제의 카르멘도 집시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말이 많았었다. 그런데, 후세는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인기 레퍼토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 ↑ 2막 2장을 약간 손질했다고 한다.
- ↑ 물론, 이 성공에 대해 빈정거리는 여론도 있었지만, 베르디는 이를 무시하고 공연을 계속 이어갔다고 한다.
- ↑ 이에 비해 줄리니반은 지휘 템포가 느려서 느끼하다는 지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