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Ludwig Bormann 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1]
(1900년 6월 17일 ~ 1945년 5월 2일)
갈색의 배후자.[2]
1 개요
마르틴 보어만은 나치당의 고급 당료로 나치당의 당의장(Parteikanzlei, 영어로는 Party Chancellery, 부총통으로 번역되기도 한다.)과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를 겸임했다. 시간이 갈수록 히틀러를 구워삶아 그는 히틀러의 최측근이 되었으며, 히틀러는 원래 좀 괴팍하고 니트적인 성격이라 공식적인 문서로 행정을 지휘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런 즉홍적이고 갑작스러운 히틀러의 지시사항을 문서화하는 일을 보어만이 맡아하면서 급격히 떠올랐다. 나치 후반기로 가면 헤르만 괴링이나 하인리히 히믈러보다도 더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고, 잠재적 후계자로서 이들과 권력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멸망한 베를린 전투 이후 행적이 묘연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생존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유골이 발견되어 총통방공호를 나와 소련군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죽었다고 추정된다. 이외에도 그의 최후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2 생애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에서 집배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징집되어 포병연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실전경험은 없다.[3] 제대 후 부동산 관리인이 되었고, 전역군인으로 이루어진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Freikorps)에 가입했다.
이후 1924년 루돌프 회스[4]와 함께 자유군단에 있던 "배신자"를 처단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다. 이후 나치당 간부의 딸과 결혼해서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는 보어만의 결혼증인을 서 주었고, 이후 보어만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가신 노릇을 하게 되었다. 부부는 사이가 좋았던지 이후 그 둘은 10명이나 자식을 낳는다. 그러나 보어만은 아내 이외에도 애인이 많았기에 모든 자식들의 친부가 아닐것이라고도 의심받았다. 패전 후 일가족들은 남 티롤로 탈출했는데 아내 게르더가 1946년에 암으로 사망해 아이들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1927년 보어만은 정식으로 나치당에 가입했고, 당내에서 승진을 거듭해 1933년에는 전국감독관(Reichsleiter)이 되었다. 1933년에는 국회(Reichstag)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후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나치당이 일당독재체제를 수립하자, 그는 갑자기 툭 튀어나온 권력자가 되었다. 루돌프 헤스의 비서로 일하다 점차 실권은 보어만으로 넘어갔고 헤스는 무능하고 음모론에 빠져서 요상한 짓이나 하던 별볼일 없던 인물이기 때문에 히틀러의 신임은 진작부터 보어만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1년 5월, 총통 대리인[5]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비행기를 몰고 영국에 착륙하여 단독으로 강화 협상을 하려는 기행을 벌이다가 영국 당국에 체포되었다. 헤스의 기행으로 당의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보어만은 이 자리를 노리는 여러 유력인사(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히믈러, 알베르트 슈페어 등등)들과의 복잡한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이 자리를 차지했다. 한때는 이 사건으로 인해 루돌프 헤스의 부관이였던 보어만도 공범자로 의심을 사기도 했는데 1941년 5월 11일 10시 경에 루돌프 헤스의 부관 두 명이 히틀러가 머물고 있던 오바잘츠베르크의 대기실로 허둥지둥 달려와서는 즉시 히틀러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는데, 그들은 히틀러에게 전하는 그의 상관 루돌프 헤스의 편지를 갖고 있었다, 그 두명의 부관을 들어가게 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집무실 문 앞에 서 있었는데 슈페어가 증언하기를 그때 문 너머에서 갑자기 신경질적인 절규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곧이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히틀러는 그의 측근을 불러서 "보어만을 불러들여! 보어만은 어디있는 거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보어만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분 뒤에 보어만은 비행기를 타고 사라져버린 루돌프 헤스를 비판하며 자신의 상관이 반역자라고 욕설을 퍼부어댔고, 자신은 헤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항변하면서 자신이 헤스 대신에 부총통 자리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고참당원들은 히틀러에게 보어만의 부총통 계승을 극력 반대해 결국 보어만은 부총통의 이름을 바꾼, 관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보어만은 권력을 손에 넣기 시작했고 그는 히틀러의 후계자 후보군으로 떠오르게 된다. 주로 히틀러의 사생활이나 돈줄을 맡으면서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았는데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나서 결혼한 부부에게 나의 투쟁을 2부 증정하는 등 해서 독일 내에서만 천만 부 이상을 팔아치워서 돈을 엄청나게 긁어 모았다.(해외까지 고려하면 수백만부가 더 팔렸다.) 그 덕에 히틀러는 나라에서 월급을 안 받는다고 '선언'해서 청렴결백하고 솔선수범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그 밖에 재벌들이 상납한 돈까지 관리하면서 '총통 전용' 시리즈인 별장 미술품 건축물과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 용돈과 사치품[6][7]은 보어만의 돈 관리에서 나왔다.
이 자리와 함께 겸직한 총통 비서라는 직함(총통 대리인 직함은 차마 못 꿰찼다)으로 니트 생활의 히틀러가 꺼리는 서류작업을 처리하면서 호가호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히틀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사실상 자신의 명령을 히틀러의 이름으로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 마치 십상시나 차지철 같은 일을 한 것이다. 격무에 신경쓰기 싫어하는 히틀러 자신도 성실하게 보이는 보어만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고, 보어만 자신도 아첨에 상당히 능해서 히틀러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 서류작업이나 행정에 대해 무능을 뛰어넘어 무관심인 히틀러가 그냥 끄덕끄덕이나 '음 좋아.' 한 마디 한 걸 수십 장의 문서로 만들고 나치당 및 국방군 이하 행정부서까지 시시콜콜한 지시까지를 내리니 누가 총통인지 모를지경까지 되었다. 한편 그 와중에도 정적들을 교묘한 수법으로 히틀러에게서 멀어지게 했는데 가방끈이 짧고 의심이 많은 히틀러를 대신해서 보고서나 언론기사 또는 떠도는 풍문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의심많은 히틀러의 망상에 맞춰 해석 가공하고 예전 행적을 양념쳐서 파묻어 버리는 재주를 많이 보였다. 덕분에 나치당은 물론 국방군이나 다른 행정부처에서조차 공공의 적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신임은 여전해서 누가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보어만 까면 체제의 적' 드립을 치니 뒤에서나 욕할 뿐이었다. 자신도 이런 처지를 아는지 믿을건 히틀러의 신임뿐이라 (자신이 그랬던거처럼 잠시라도 누가 자리를 꿰찰까봐) 휴가도 안 가고 히틀러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는 히틀러의 모든 식사자리에 동석한 보어만은 히틀러에게 아첨하기 위해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금주 흉내를 내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몰래 고기와 술을 먹었다고 한다. 결국 히틀러가 전쟁에 신경쓰는 동안 내치는 모두 보어만이 맡아서 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당시의 보어만을 "실질적인 독일의 지도자"로 보기도 한다.
특이할만한 점은 그는 안티기독교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교회를 탄압했고, "나치즘과 교회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치 고관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접 학살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 폴란드에 있는 슬라브인도 하등인간으로 간주하여 모조리 노예화하거나 학살하려고 했다. 또한 아내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여배우와 바람 피는 걸 용인시키고 일부다처제에 찬성하게 만드는 요상한 짓을 했다. 당 간부 및 국방군 상부의 관계자들은 그가 히틀러에게는 굽신거리는 한편 부하에겐 냉정한 태도를 보였기에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인간성은 모든 나치 인사들이 싫어할 정도로 겉으로 친한 척하다가 뒷통수치는 걸로 유명했다, 그가 어찌나 싫었는지 헤르만 괴링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 "만약 히틀러가 좀 더 빨리 죽어 내가 총통이 되었더라면 가장 먼저 보어만을 제거했을 것이다"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게다가 히틀러 사무실의 여비서들을 시도 때도 없이 성적으로 건드려서 모든 이들이 역겨워했다. 이러니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패 이후, 보어만은 히틀러를 설득하여 정부, 당, 군의 최고 책임자가 참석하는 3인 위원회를 만들게 했다. 이 멤버는 정부의 한스 라머스, 군의 빌헬름 카이텔, 당의 보어만으로 이뤄졌다. 라머스와 카이텔은 실권이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였으므로 3인 위원회는 보어만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좋은 장치가 되었다. 이 3인위는 보어만의 야심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보어만과 히틀러 후계자리를 경쟁하는 괴링, 히믈러, 괴벨스, 슈페어 등은 보어만과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 그러나 이들은 합심하여 보어만과 대결하지 않고 서로도 경계했고, 보어만의 권력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그런 천하의 보어만도 점점 기울어지는 전황은 어쩔 수 없었다. 독일의 패색이 깊어지자 보어만은 권력욕을 잃었고, 1945년 3월에는 힘러에게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4월 22일, 보어만은 "총통께서는 현재 신경쇠약상태이시니 대신 그대가 지휘를 맡으라"라고 괴링에게 무전을 보냈는데 이것은 보어만이 정적제거를 위해서 취한 함정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괴링은 23일, 히틀러에게 지휘권을 요구하다가 히틀러에게 반역죄를 선고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물론 실행할 사람이 없어서 실행되지는 못했고, 하인리히 힘러가 외국과 협상하고 있다는 내용의 라디오 전파를 히틀러에게 들려주어서 힘러를 실각시킨 것 또한 마르틴 보어만이 한 짓이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침략해 온 독일군을 역관광시키며 독일로 쳐들어 온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했고(베를린 전투)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보어만도 총통방공호의 쥐새끼 신세였다. 보어만은 끝까지 히틀러의 옆을 지키며 히틀러의 구두 명령을 공식 명령으로 내리는 역할을 만들었다. 히틀러는 자살을 결심했고, 보어만은 괴벨스, 크렙스와 함께 히틀러의 유언장에 증인으로 서명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바실리 추이코프 대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은 5월 2일 독일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이날 보어만은 총통방공호를 나와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날 이후 살아있는 보어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운명에 대해 여러 설이 나돌았다. 남미로 탈출했다거나 또는 원래 소련 스파이였기 때문에 소련으로 사라졌다는 풍문도 돌았다.[8] 또 떡밥 제조기이자 천하의 개쌍놈 아돌프 아이히만은 보어만은 남미에 살아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연합국뿐만 아니라 후의 서독 정부도 그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추적했으나 그의 행적은 끝내 묘연했다.
그가 궐석한 가운데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는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질로 도망쳐서 나치 잔당들을 모아 재건을 꾀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라스트 바탈리온?
이후 1972년 베를린 근교에서 보어만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유골의 치아에는 청산가리 캡슐의 흔적이 있었다. 1998년 아들을 통해 받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보어만의 것으로 확정되었다. 베를린을 빠져나가다가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어만의 유해는 네오 나치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독일 정부에 의해 화장되어 발트해에 뿌려졌다. 하지만 현재도 유골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근거로는 베를린 전투 당시에는 수십만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매장되었기에 그 속에서 보어만의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하며, 대표적인 것으로 뼈에 묻어있던 흙이 유골이 발견된 지역의 흙이 아니라고 (유골이 발견된 지역은 노란 모래흙인데 뼈에 묻어있던 흙은 붉은 진흙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하면서 딴곳에 묻혔다가 이장된 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고, 또 보어만의 유골치아에서 발견된 아말감은 전후 치과치료에서 행해진 흔적이기에 인골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여담으로 보르만의 동생이던 알베르트 보어만(1902~1989)도 히틀러의 비서로 일했고 형과 똑같이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형과 끊임없는 암투를 거듭했다고 한다. 형제가 쌍으로 딸랑이
3 매체에서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히틀러를 죽이는 것으로 등장한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히틀러가 발광해서 심복인 자신에게도 독설을 퍼부어대자 열이 받쳐있는 상황이었는데, 히틀러의 비밀이었던 유대인 혈통을 알고 있던 악역 아세틸렌 램프가 "이 벙커에는 유대인이 한 명 있다.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라면서 히틀러의 암살을 지시한다. 보어만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막 자살하려던 히틀러를 찾아가 명예롭게 자살하도록 내버려두라는 히틀러를 굳이 총으로 사살한 뒤 자살한 것처럼 꾸며두고 도주한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단편집 '솔저 블루'에서는 베를린을 탈출한 후 아르헨티나 정부와 교섭하여 아르헨티나의 벨트너-555라는 비밀 구역에서 네오 나치 군대를 거느리고 전 세계에 분쟁을 조장하는 흑막으로 암약한다고 알려져서 주인공 솔저 블루 3인이 그를 암살하러 잠입하나... 보어만은 다 죽어가는 노인네 신세였고 모든 흑막은 히틀러의 정신을 옮겨담은 슈퍼컴퓨터 히틀러 2세였다. 보어만은 주인공에게 제발 자기를 죽여달라고 애원하여 죽임을 당하고, 히틀러 2세도 주인공이 폭파시켜 버린다.
필립 K. 딕의 대체역사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뒤를 이어서 제3제국의 제2대 총통이 된다.[9]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고 만다. 사실 작품 초반부에 걸쳐서 마르틴 보어만 총통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계속해서 나온다. 마르틴 보어만이 사망하게 되면서 헤르만 괴링, 파울 요제프 괴벨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0],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등이 총통의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승자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
왼쪽부터 마르틴 보어만, 요제프 멩겔레, 하인츠 골드풋, 그리고 기타 쌍십자당 장교 순이다. |
- ↑ 보르만이라고 알려진 자료가 많은데 보어만이 정확한 발음이다.
- ↑ 바로 위 사진에도 나와있듯이 언제나 갈색 제복만 입고 다녀서 붙여진 별명이다.
- ↑ 1918년 18세때 자원입대해서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장교 당번병으로 잠깐 있다 종전했다 한다.
- ↑ 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 되는 인물이다. 부총통 헤스와는 다른 인물.
- ↑ 총통 대리인이라고 해서 별다른 실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치당 내에서만 대리인일 뿐이고 그마저도 진작부터 실권이 없었다.
- ↑ 1942년부터 히틀러의 타자수로 일했던 트라우들 융에는 에바 브라운이 같은 옷을 입는걸 본 적없다고 증언했다.
- ↑ 보어만은 에바 브라운을 '마님' 모시는 돌쇠처럼 모셨지만 정작 브라운은 말을 섞는것 조차 싫어할 정도로 보어만을 혐오하였다고 한다. 보어만 역시 에바 브라운을 현실감각이 없다고 사석에서 비웃었지만 둘 다 서로 받아먹을 건 사양 않고 다 받았다.
- ↑ 독일군의 소련정보 전문가이자 서독 시절 정보국장을 역임한 라인하르트 겔렌 장군은 보어만은 소련 스파이가 확실하며, 그가 전후에 소련에 살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자기 회고록에 남겼다.
- ↑ 초대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는 매독과 치매로 인해서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 ↑ 원래 역사에서는 1943년에 암살당했지만 이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암살을 모면하고 살아남았으며 하인리히 히믈러를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