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아스 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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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전설이던 현역시절. 현재까지 마지막 독일인 발롱도르 수상자.


바이에른 뮌헨의 단장으로 재직했던 시절.

마티아스 잠머
(Matthias Sammer)
생년월일1967년 9월 5일
국적독일
출신지동독, 드레스덴
신체 조건180cm
포지션리베로, 스위퍼, 중앙 미드필더
유소년팀디나모 드레스덴 (1976 - 1985)
클럽디나모 드레스덴 (1985 - 1990)
VfB 슈투트가르트 (1990 - 199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2 - 1993)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3 -1999)
스태프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수석코치 (2000)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감독 (2000 - 2004)
Vfb 슈투트가르트 감독 (2004 - 2005)
독일축구협회 기술이사 (2006 - 2012)
FC 바이에른 뮌헨 단장 (2012 - 2016)
국가대표23경기 6득점(동독)
51경기 8득점(독일)
통합 74경기 14득점
1996 Ballond'or
수상
마티아스 잠머
2위
호나우두
3위
앨런 시어러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대 감독
베른트 크라우스
(2000)
우도 라텍
(2000)
마티아스 잠머
(2000~2004)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
(2004~2006)

1 소개

독일의 전 축구선수.

진정한 최후의 리베로

동독 축구의 가장 큰 업적,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최고의 레전드인 동시에 이제는 증오의 대상. 현재까지 마지막 독일인 발롱도르 수상자로 요약되는 선수.

2 커리어

통일되기 전 동독의 중심지역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마티아스 잠머는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클럽 디나모 드레스덴의 유스팀에서 축구 커리어를 시작한다. 아버지 클라우스 잠머는 디나모 드레스덴의 감독이었는데, 1985년 성인팀에 데뷔한 잠머는 뛰어난 기량으로 디나모 드레스덴을 이끌었고, 어린 시절부터 동독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등 팀의 주축으로 성장해 나간 잠머는 1989년, 1990년 연속으로 이 디나모 드레스덴을 동독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독 국가대표에서도 20경기 넘게 국가대표경기를 소화하고 있었다.

그의 커리어에 변화가 온 것은 1990년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 통일 독일의 초기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 때문에 동독인들이 크게 고통받아야 했고 동독의 명문 디나모 드레스덴도 분데스리가팀의 재력을 앞세운 공세에 한계를 느껴야 했다. 결국 잠머는 통일 직전 UEFA컵 4강전에서 소속팀을 이기고 결승에 오른 분데스리가 VfB 슈투트가르트의 제의를 받고 슈투트가르트로 옮긴다. 슈투트가르트에서 2시즌 활약한 잠머는 1990~91년 정식으로 동독리그와 통합된 분데스리가의 우승을 이끈뒤, 이탈리아 명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다. 하지만 인터밀란에서의 1992~93시즌은 이탈리아 적응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 이탈리아 생활을 포기하고 독일로 돌아온다.

독일로 돌아온 잠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팀에 몸담게된다. 당시 도르트문트를 지휘한 감독이 바로 명장 오트머 히츠펠트이다. 히츠펠트의 리베로 시스템에 최적화된 그는 리베로로 전향하게 된다. 히츠펠트 감독이 부임하고 스테판 샤퓌자, 카를 하인츠 리들레 투톱과 떠오르는 신성 라스 리켄이 공격을 지휘하는 도르트문트의 후방을 책임진 잠머는 맹활약을 펼쳐 나가면서 강호이자 명문팀으로 거듭나게된다. 결국 도르트문트는 1994-95시즌에 무려 32년만의 감격적인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도 우승하면서 분데스리가 2연패, 떠오르는 강호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6-97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파죽지세로 올라와 4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물리치고 결승에서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유벤투스 FC와 만나. 무릎이 좋지 못한 상태였지만 출장을 강행한 잠머의 수비와 리들레,라스 리켄의 골로 3-1 승리, 팀의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끈다.

마티아스 잠머의 커리어 최전성기는 유로1996이다. 2년전 미국 월드컵에서 최악의 삽질로 녹슨전차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독일 대표팀은 1994년 월드컵 한국전에서 관중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퇴출된 팀의 카이저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잃고 중심없이 휘청이고 있었다. 당시 잠머는 에펜베르크의 파트너로 중앙미드필더로 뛰었으며 그때까지 팀의 핵심이었던 로타르 마테우스는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로 대표팀과 멀어졌고 이렇게 중심없이 표류하던 전차군단을 다잡은 인물이 바로 서독 출신 주장 위르겐 클린스만과 마테우스의 리베로 자리를 계승한 동독 출신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 이 환상의 조합은 2년전의 치욕을 뒤로한채 조별리그에서 클린스만 두 골, 잠머 한 골로 러시아를 3-0 으로 대파하여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고. 8강전에서는 떠오르던 강호인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4강을 이끈뒤 4강에서 잉글랜드, 결승에서 체코를 꺾고, 독일은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다. 90년 월드컵 우승 후 6년 만의 메이저 트로피이며 통일 독일 첫 우승 트로피.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1996년 유럽최우수선수상 발롱도르 투표에서 잉글랜드의 간판 스타 앨런 시어러, 브라질의 호나우두까지 1표 차이로 제치면서, 독일 선수로는 마지막으로 발롱도르 위너가 된다.

하지만 잠머는 30대로 접어들면서 무릎에 항상 부상을 달고 사는 유리몸이 되었고 이때문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부상으로 승선조차 하지 못한다.[1] 급격히 체력관리와 부상관리에 어려움을 겪은 잠머는 32세의 나이인 1999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유니폼을 벗게 된다. 결국 잠머의 조기 은퇴로 세대교체에 또다시 실패한 전차군단은 94년 월드컵때 들었던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을 다시 듣게 되었고, 98년 프랑스 월드컵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게 0-3 완패를 당한뒤, 디펜딩 챔피언으로 참가한 유로 2000에서는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별리그 최하위 탈락이라는 수모를 받게 된다.

잠머는 선수 유니폼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영전했으며, 다음해인 2001~02시즌에는 도르트문트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끄는등 4년동안 팀의 최상위권을 이끌었고, 04~05시즌 슈투트가르트 감독을 거쳐서 독일축구협회 기술고문을 거쳐 바이에른 뮌헨의 스포츠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현역시절 뮌헨의 유니폼을 단 한번도 입지 않았지만, 은퇴 이후 뮌헨에서 일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다.

3 플레이스타일

원래 미드필더 출신으로 세련된 테크닉과 넓은 시야를 겸비했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할 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마테우스의 국가대표 은퇴이후 리베로로 포지션을 옮긴 뒤에는 훌륭한 판단력을 살려서, 절묘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당대 최고의 리베로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4 지도자 시절

1999년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99/00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강등위기에 처하자 리그 경기 5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급하게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이 소방수로 임명된 우도 라텍 감독과 함께 남은 5경기 동안 2승 2무 1패로 리그 11위를 기록, 팀을 1부리그에 잔류시켰고 시즌 종료 후 우도 라텍에게 감독직을 넘겨 받아 2000/01 시즌 도르트문트 감독으로 임명된다. 전 시즌 리그 11위권에 머물렀던 도르트문트를 곧바로 리그 3위로 끌어올렸으며 2001/02 시즌에는 얀콜레르,마르시우 아모로소, 에웨튼의 삼각편대를 앞세워 바이어 04 레버쿠젠FC 바이에른 뮌헨을 극적으로 따돌리고[2] 5시즌만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UEFA 컵 에서는 준우승을 차지 한다. 2002/03시즌에는 초반 5경기에서 1승 4무를 기록하며 무패를 달렸지만 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리그 중반 로스톡, 뉘렌베르크, 하노버 같은 반드시 잡아야 할 하위권팀들에게 무승부 등 발목을 잡히면서 리그 3위에 만족했야 했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리그 1,2위는 챔피언스리그 직행, 3위는 챔피언스리그 3차예선부터 출발하였는데 2003/04시즌 챔피언스리그 3차예선에서 탈락하며 UEFA 컵으로 추락하였다. 재정적인 문제를 겪고 있던 도르트문트 였기에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여 고액의 TV 중계권료를 확보하는게 최우선이었지만 챔피언스리그 진출실패로 무산되었고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며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2003/04시즌 초반 1군 스쿼드 중 11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며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할 판이었다. 당시 리그 초반 부상당한 선수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모로조(무릎 부상), 얀 콜러(폐렴), 오토 아도 (십자인대), 프링스(십자인대), 콘세이산 (금섬유 파열), 로시츠키 (맹장 수술), 구이 데멜 (십자인대), 메첼더 (아킬레스건), 페르난데스 (발목 부상), 에바니우손 (십자인대), 데데 (무릎 부상)>

주전 11명중 4명이 십자인대, 2명이 무릎부상 이라는 FM같은 게임이라도 뒷목을 잡을만한 부상릴레이가 이어지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분전하여 리그 6위로 끝마친다. 다만 팬들사이에서도 잠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잠머에게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경질된 지 얼마 안 되어 또 다른 친정팀인 Vfb 슈투트가르트의 감독으로 펠릭스 마가트감독의 후임으로 임명된다. 슈투트가르트는 알렉산드르 흘렙, 케빈 쿠라니, 안드레아스 힌켈, 필리프 람 같은 당시에는 어린 유망주들이 포진되어 펠릭스 마가트의 지도아래 분데스리가의 돌풍을 이끈 팀이었는데 잠머는 부임 이후 빠르게 팀을 수습하며 리그 준비에 나섰다. 하지만 잠머의 베스트 11 위주의 기용 고집으로 다른 벤치 선수들과 불화를 겪으며 팀워크가 저해되었고 리그 막판에 부진을 겪어 리그 5위를 기록하여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잠머는 1년 만에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잠머의 후임으로 온 감독은 조반니 트라파토니.

그 이후 2006년 독일 축구협회의 기술이사로 5년계약을 맺으며 주로 11 ~ 18세 유소년팀을 담당하며 유소년들에게 스포츠 과학으로 새롭게 체계를 만든 독일축구협회의 트레이닝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또한 요아임 뢰브 감독이 이끄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술적인 부분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2012년 FC 바이에른 뮌헨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지금까지 활동중이다. 단순히 사무실 업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티아스 잠머도 감독 출신인 만큼 훈련장과 홈&원정 경기 등 선수단과 항상 동행하면서 선수단을 체크하다 2016년 질병으로 인하여 사임을 하게되었다.

5 기타

독일의 레전드급 선수라면 다 한번씩은 거칠 바이에른 뮌헨을 선수시절 단 한번도 거치지 않은 안티 바이에른이다. 특히 도르트문트 팬들에겐 레전드. 하지만 선수생활을 마치고 나서 스포츠 디렉터 자격으로 바이에른 뮌헨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결국 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현재는 칼 하인츠 루메니게 사장과 함께 앞장서서 도르트문트를 견제하며 비난하고 도르트문트의 선수 이적에 간섭하고 있다. 당연히 친정팀 팬들 입장에선 클럽의 전설적인 선수가 다른 팀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친정을 괴롭히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

6 우승 경력

6.1 선수 시절

6.2 감독 시절

  •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0/01 - 2003/04)
    • 독일 분데스리가 (1) : 2001/02
    • DFB-Liga Pokal 준우승 : 2003
    • UEFA 컵 준우승 : 2001/02
  1. 이때문에 잠머를 대신해 마테우스가 37살의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컴백했다.
  2. 도르트문트의 승점이 70점, 레버쿠젠은 69점, 바이에른 뮌헨은 68점이었다. 최소 한경기만 무승부를 기록했어도 뒤집힐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3. 동독 축구리그
  4. 동독 FA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