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 |
생년월일 | 1964년 7월 30일 |
국적 | 독일 |
출신지 |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괴핑엔 |
신체 조건 | 183cm, 76kg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소속 클럽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81~1984) VfB 슈투트가르트 (1984~1989)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9~1992) AS 모나코 (1992~1994) 토트넘 핫스퍼 FC (1994~1995) FC 바이에른 뮌헨 (1995~1997) UC 삼프도리아 (1997~1998) 토트넘 핫스퍼 FC (1997~1998) (임대)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 (2003) |
지도자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4~2006)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2008~2009) 토론토 FC 기술고문 (2010)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 ) |
국가 대표 | 108경기 47골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 ||||
우베 란 (1993) | → | 위르겐 클린스만 (1988) | → | 토마스 헤슬러 (1989) |
안드레아스 쾨프케 (1993) | → | 위르겐 클린스만 (1994) | → | 마티아스 잠머 (1995, 1996) |
1995 Ballond'or | ||
수상 조지 웨아 | 2위 위르겐 클린스만 | 3위 야리 리트마넨 |
금발 폭격기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루디 푈러 (2000~2004) | → | 위르겐 클린스만 (2004~2006) | → | 요아힘 뢰프 (2006~ )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로타어 마테우스 (1990~1996) | → | 위르겐 클린스만 (1996~1998) | → | 올리버 비어호프 (1998~2000) |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감독 | ||||
오트마르 히츠펠트 (2007~2008) | → | 위르겐 클린스만 (2008~2009) | → | 유프 하인케스 (2009) |
1 소개
현행 독일어 표기법을 따르면 위르겐 클린스만이라 적는데, 1990년대 현역 선수로 뛸 당시엔 국내 팬들에게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통했다. 지금도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기억하는 팬이 많으며, 사실 어지간한 축구 매니아가 아닌 이상 그냥 클린스만이라고 안다. 그도 그럴 것이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선 3차전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환상적인 터닝 발리 슛을 날려 전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장본인이니...그 날 2골을 기록했다. 유르겐이든 위르겐이든 하여간 클린스만.[1]
별명은 황금 폭격기(Golden Bomber)와 다이버(Diver). 프리미어리그 시절 페널티킥 유도를 위해 넘어지는 연기를 잘해서 영국에서는 별명이 "diver"이다. 그런데 막상 저 별명을 전해들은 클린스만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고, 토트넘 시절 골을 넣을 때마다 팀원들과 함께 다이빙을 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런던에 다이빙을 배우기 좋은 곳이 어디냐"라는 엄청난 드립까지.
1990년대를 장식한 무수한 스타 플레이어 가운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레전드 스트라이커였지만, 묘하게도 인지도가 2% 떨어진다.[2] 그러나 이는 인지도를 해외 / 현시점으로 확장했을 때 얘기고, 당대에는 1990년대까지 극강을 자랑하던 리즈 시절의 독일 국가대표 내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독일 축구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라는 걸출한 공격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의 은퇴 이후 스트라이커의 부재로 인한 공격력 부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기도 했고.[3] 어쨌거나 역대 독일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계보에서 당당히 우베 젤러, 게르트 뮐러, 칼 하인츠 루메니게, 루디 푈러를 잇는 한 축으로 불리는 위대한 선수였다.
현역 시절의 스타일은 득점기계. 머리, 발 등 축구에서 사용가능한 부위는 일단 갖다대고 득점을 노리는 악착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골대 앞에서 득점을 주워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일단 공을 잡았다 하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위협적인 공격수였다. 드리블이나 스피드, 제공권, 킥력 모든 면에서 준수했던 전천후 스트라이커. 전형적인 클래식 스트라이커의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발재간도 준수한 공격수로서 보다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유형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피지컬로 상대를 누르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최전방 원톱보다 세컨톱으로 많이 기용되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클린스만을 가장 돋보이게 했던 위협적인 무기는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다이렉트 슛이다. 투톱 파트너에게 수비수들이 몰리면 그 틈을 타서 크로스나 패스가 건네지는 순간 최소한의 터치로 날리는 슈팅은 일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커리어 내내 발리나 다이빙 헤딩과 같은 멋진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4] 극단적인 수비로 일관하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의 유럽무대에서 이러한 클린스만의 능력은 더더욱 빛을 발했다.
클린스만의 커리어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독일 축구 그 자체다. 객관적으로 보면 도저히 우승을 노릴 만한 팀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토너먼트만 나갔다 하면 꾸역꾸역 이겨서 우승해 버리는... 그리고 그 중심에 항상 클린스만이 있었다. 팀의 존망이 달린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냅다 골을 넣어버리는...흠좀무
여튼 실력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지만 문제는 인물이나 캐리어 자체가 기이하달까...
상당히 독특한 행보를 보여줬던 선수였다. 그 문제는 바로 역마살. 위 목록에서 얼핏 보이듯이 여타 전국구 골잡이들과 달리 특정 팀을 대표하는 선수라는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디에고 마라도나 하면 누구나 SSC 나폴리를 떠올리지만, 클린스만에겐 이런 면이 없었다.[5]
저니맨 생활 덕분에 클럽 커리어는 명성보다 초라하다. 보통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등을 노리며 에이스 급들은 리그별 최강팀으로 옮기지만 클린스만의 커리어를 보면 슈투트가르트, AS모나코, 토튼햄 핫스퍼, 삼프도리아 등 중하위권 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초창기 슈투트가르트 때의 경우도 보통 선수들은 시작은 중위권팀에서 해도 경력이 쌓이면 리그 강팀에서 쭉 활동을 이어가지만 클린스만은 전성기 때 인테르를 떠나 AS 모나코로,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줬다. 덕분에 우승 기록은 별로 없다.
대신에 그는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서독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건 올림픽 대표팀으로 참가한 경험이 있다.
2 선수 생활
1994 FIFA 월드컵 미국 조별예선 3차전인 대한민국전에서 터닝 슛을 작렬한 후 세레머니 장면이다.
클린스만은 8살부터 축구를 시작해서, 1982년 슈투트가르트 킥커스(Stuttgart Kickers)라는 2부리그 팀에서 처음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재능을 인정받아 1984년 분데스리가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뛰게 된다. 이후 5시즌 동안 156경기 79골을 넣었다. 거의 경기당 0.5골을 기록한 셈. ㅎㄷㄷ 이어 훌쩍 이탈리아로 건너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옮겨 3시즌 103경기 36골[6], 또 훌쩍 프랑스 리그의 AS 모나코 FC로 옮겨 2시즌 65경기 29골을 넣는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클린스만은 또 훌쩍 떠나는데... 이 독일 병정이 선택한 리그가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일단 까기로 작심하면 인종차별조차 서슴치 않기로 악명높은 훌리건들이 모인 영국 팬, 게다가 하필 영국과 독일은 축구판에서 한일전 못지 않은 앙숙이거늘...
1994~1995 시즌 토트넘 핫스퍼 FC는 AS 모나코 FC에서 이적료 20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클린스만을 영입했다. 사실, 클린스만이 처음 토트넘으로 왔을 때는 클린스만을 향한 토트넘 팬들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었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잉글랜드를 탈락시킨 주범(?)이기도 했고, 헐리우드 액션이 너무 심하다는 편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만 30살이던 클린스만은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헐리우드 액션 셀러브레이션을 펼쳐서 토트넘 팬들의 시선을 끌더니 연이은 득점 행진으로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치면서 단숨에 토트넘을 대표하는 골잡이로 떠올랐다. 이 시즌에서 클린스만은 21골을 터뜨린 것을 포함하여 모든 대회에서 30골을 넣었다. 그리고 축구기자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다.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공식 기록은 불과 1시즌 동안 41경기 21골을 넣으면서 일약 토트넘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게리 리네커[7]의 뒤를 잇는다는 찬사까지 들었지만... 다음 시즌 훌쩍 독일로 떠났다. 지못미 토트넘.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2시즌 동안 65경기 31골을 넣으며 여전히 녹슬지 않는 기량을 선보였고, 또 다시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서 1997~1998 시즌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다. 다만, 이 때는 1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토트넘으로 다시 임대를 갔었다. 삼프도리아에서는 8경기 2골, 토트넘에선 15경기 9골.
클린스만이 토트넘 팬들에게 진정한 레전드로 인정을 받은 것은 이 짧은 1년을 보낸 뒤,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긴 뒤 삼프도리아를 거쳐서 다시 되돌아온 1998년 토트넘에서 보여준 활약 때문이었다. 토트넘 팬들은 위기에 빠진 팀을 구해줄 것이라면서 클린스만을 열혈하게 환영했다. 클린스만의 유럽 리그 은퇴 시즌이 된 이 시기에는, 토트넘 팬들에게 클린스만의 이름을 영원히 각인시킨 시간이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삼프도리아에서 임대로 다시 토트넘으로 합류한 클린스만은 반복된 패배로 인해서 강등권으로 쳐진 토트넘의 구세주가 되었다. 클린스만이 합류한 1997/98 시즌 중반, 토트넘은 10월의 시작과 함께 이어진 패배의 그림자가 불러온 강등의 기운에 허덕이고 있었다. 11경기에서 무려 8패를 당하면서 강등권으로 추락해버린 토트넘은 시즌 도중 감독까지 경질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고, 많은 전문가들이 1977년 이후, 토트넘이 20년만에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될 가능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8년 1월 17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와의 홈 경기에서 결승 골(1-0)을 터뜨리면서 한 달만의 승리를 안긴 클린스만은 남은 시즌 6경기에서 (최종 3경기 연속골을 포함) 모두 골을 넣었으며, 그 경기에서 팀은 4승 2무의 호성적을 냈다. 뭐니뭐니해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남게 된 경기는 강등권 팀들간의 혈투인 37라운드 AFC 윔블던 원정 경기였다. 클린스만은 이 경기에서 혼자서 4골을 몰아치면서 토트넘의 6-2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토트넘은 극적으로 잔류를 확정했고, 클린스만은 현재까지도 토트넘 팬들의 레전드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토트넘의 레전드, 감독 제의받다."라는 신문 기사도 나왔었고, 실제로 토트넘에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끝나고 감독직 제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클린스만은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결국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결심한다. 그리고 또 훌쩍 떠났다. 이번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완전히 이주했다.
한동안 축구계를 떠나 미국에서 조용한 삶을 누리나 했는데, 40세가 된 2003년 미국 오렌지 카운티 블루 스타 팀에 등장, 8경기 5골을 기록한다.
3 감독시절
은퇴 후 미국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던 도중 독일 국가대표팀은 유로 2004에서 2무 1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탈락한다.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녹슨 전차군단'이란 비아냥을 듣던 독일 대표팀이었으나, 아득바득 독일답게 토너먼트에서 성적을 냈지만 끝내 한계에 부딪힌 것. 그러자 독일 축구협회는 루디 푈러를 경질하고 발빠르게 클린스만을 대표팀 감독에 선임한다. 6월 23일 독일이 탈락했고 클린스만이 감독직을 맡은 날이 7월 26일. 어느 나라의 축구협회와 대조되는 축구 행정이다
젊은 클린스만 감독은 일단 지휘봉을 잡자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는데, 당시 독일 축구계와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사건으로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던 올리버 칸을 내치고 옌스 레만을 주전 골키퍼로 내세운 것을 비롯해 잇달아 반감을 살만한 조치를 내렸다. 캘리포니아 오렌지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생뚱맞게 쏼라쏼라 미국인 체력코치를 데려오더니 선수들의 기초 체력을 따져가며 노땅들을 갈구지 않나, 게르만 정신을 부정하듯 당시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이자 독일과 가나의 혼혈 공격수 다비드 오동코어를 전격적으로 대표팀에 발탁해 독일 축구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8] 순혈주의를 고집하던 당시의 독일 국가대표팀에 흑인 선수가 뛴다는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화제거리이자 이슈였다.[9][10]
많은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이 이끄는 신형 전차군단은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3위를 차지한다. 비로서 클린스만은 감독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제 2의 축구인생을 시작하나 싶었는데... "아 집에서 좀 쉴래"하더니 사임하고 또 훌쩍 떠나버렸다(...).
클린스만이 사임하자 독일 축구협회는 곧바로 클린스만을 보좌했던 수석코치 요아힘 뢰프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는데 클린스만의 공백은 당시에도 없을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클린스만은 대표팀 감독 취임 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독일 대표팀의 개혁을 주도했으나 선수들의 사기와 팀 케미스트리, 트레이닝 방법 등에만 열중하였지 전술적인 부분은 뢰브 수석코치가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었다. 주제 무리뉴나 라파엘 베니테스, 펩 과르디올라처럼 자신이 모든걸 맡아서 하는 감독도 있는가 하면 알렉스 퍼거슨이나 프랑크 레이카르트처럼 전술적인 부분은 수석코치에게 상당 부분 일임하는 감독도 있는데 그 반면 클린스만의 경우 아예 그런 부분은 뢰브 수석코치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필립 람의 경우 국가대표와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클린스만을 겪어봤지만 클린스만이 하는 말이라곤 "넌 골을 넣어야 한다. 이길수 있다" 따위의 사기진작 밖에 없었다고 한다.
독일 대표팀 감독직 사임 후 2년뒤인 2008년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임명 되었다. 당시 FC 바이에른 뮌헨은 챔피언스리그에서 강호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한때 잘나갔던 구단 중 하나로 추락하고 있었는데 독일 대표팀의 개혁을 이끈 클린스만에게 이번에는 바이에른 뮌헨 개혁의 키를 맡긴 셈. 트레이닝에는 큰 관심을 보여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부임시 데려온 미국인 체력 코치만 무려 4명으로 전술적인 모습 보다는 트레이닝 방법에 열중했다. 이것은 클린스만의 평소 전술 철학과 맞닿아 있는데 클린스만은 "전술의 발전은 더 이상 없고 앞으로 트레이닝 방법이 성과를 가를것이다" 라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까지만 하더라도 바이에른 뮌헨의 전술은 라인을 적당히 내린뒤 강력한 압박을 시도 해서 볼을 탈취 한 뒤 그야말로 한방의 패스로 승부를 결정짓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후반부, 그리고 펠릭스 마가트 재임시절에 한계를 드러냈다. 바이에른 뮌헨 수뇌부는 이런 팀을 개혁해주길 바랬으나.. 클린스만이 보여준건 그저 공격 라인만 높였을 뿐 세부 전술은 오트마르 히츠펠트와 펠릭스 마가트의 전술과 다를바가 없었다. 결국 2008/09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FC 바르셀로나와의 원정경기에서 0:4완패를 당하며 탈락했고 동시에 리그 에서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오자 부임 1년도 안되어 해고 당했다. 다만 성적 뿐만 아니라 FC 바이에른 뮌헨 전통의 훈련과 팀 세션을 개혁하면서 상층부와 의견 충돌도 한몫했다.
FC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고 휴식을 취하던 클린스만은 2010년 10월 메이저리그 사커 팀 토론토 FC 자문역으로 취임했고 9개월 뒤인 2011년 7월 30일,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간 관계로 미국 생활이 길었기 때문에 미국 축구계 사정에도 밝은 데다가, 감독으로서 월드컵 3위를 차지한 경력까지 있는 만큼 미국은 꺼낼 수 있는 최상의 카드를 꺼낸 셈이다. 미국은 이미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16강까지 달성했는데, 그 이상을 노린다는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2011년 클린스만 감독 취임 후 23승 6무 8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더군다나 미국을 꺾은 그 한 팀은 바로 브라질(!!!) 또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1:0으로 이기기까지 했고 2013 골드컵에서 파나마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조별리그 추첨에서는 영 지못미스러우면서도 묘한 대진이 걸렸다. 자기 입장에서 조 편성 힘들게 나오는거야 북중미 팀들이 늘 겪는 숙명이니 그렇다 쳐도, 첫 상대 가나를 제외한 다른 유럽 두 팀이 독일과 포르투갈. Aㅏ... 게다가 독일은 자신이 선수로서 족적을 남긴 조국임은 물론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 4강을 이끌었을 떄 수석코치로 자신과 함께 일하고 후임 감독까지 된 요아힘 뢰프가 여전히 감독으로 있어서 묘한 대진이 연출되었다. 독일과 포르투갈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강팀이고 가나도 무시 못하는게 아프리카에서 축구 강국인데다가 2010년에 미국을 탈락시킨 팀이다. 만약에 미국이 2014년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면 미국 축구팬들 사이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경기 가나전에서 조지 알티도어의 초반 햄스트링 부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버저비터 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지난 2번의 월드컵에서 당한 빚을 갚았다. 두번째 경기 포르투갈전에서는 이른 시간 선취골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2골을 몰아넣으며 역전승 일보직전까지 갔으나 종료 직전 동점골을 먹으면서 아깝게 2-2 무승부. 조국인 독일과의 3차전에서는 1-0으로 패배했으나 포르투갈과의 골득실 싸움에서 이기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6강전 벨기에를 상대로 1:2 패배를 당해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조별 본선과 16강에서 보여준 끈끈한 조직력과 물러서지 않는 화끈한 공격력에 사람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클린스만은 지도자로서 한단계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 내에서도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는 등 클린스만의 대표팀 감독 임명은 성공적으로 돌아간 셈. 축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다기사
2015년 2월 아스톤 빌라 FC가 강등권에 쳐지게 되자 11일 경질된 폴 램버트의 후임 감독 물망에 오르고 있으나 미국축구협회에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대회까지 클린스만 감독과 계약을 연장했기 때문에 그가 아스톤 빌라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결국 아스톤 빌라의 지휘봉은 팀 셔우드 감독이 가져갔다
2015년 골드컵에 앞서 독일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친선경기에서 완승을 거두어 2013 골드컵에 이어 2회연속 우승 확률이 상당히 높아졌으나 되려 4강에서는 자메이카에게 3,4위전에서는 파나마에게 패배하여 4위에 머물렀다.
클린스만의 미국 감독직 전망은 마냥 밝은것만은 아닌데 클린스만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2014 브라질 월드컵 16강 성과는 과대평가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4월드컵과 2010 월드컵에서도 16강을, 2002월드컵에서는 8강까지 진출한 적이 있으므로 2014 월드컵 16강은 큰 성적도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2015 골드컵에서는 한 수 아래라고 평가받은 자메이카와 파나마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했다는 점, 그리고 2017 컨페더레이션스 컵 출전권이 달린 2015 CONCACAF Cup[11] 2:3으로 패배했을 뿐 더러 압도적인 점유율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지적한다.
게다가 가끔 미국 축구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유럽에 진출했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마이클 브래들리, 클린트 뎀프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선수 선발에 있어서도 미국 출신 선수 보다 유럽에서 활동은 하지만 유럽에서 외면받는 미국계 선수들을 적극 등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축구협회와 마찰을 빚고 있다. 그리고 미국 축구 올림픽 대표팀의 경우도 기술위원장의 권한을 내세워 잘 하고 있는 전임감독을 갑자기 해임하고 자신의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발탁시켰으나 오히려 2016 올림픽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1,2부리그는 뿐만 아니라 대학 리그같은 아마추어 리그까지 하나하나 직접 관람하고 2부리그 격인 NASL(북미 축구 리그) 에서 활동 중인 선수나 대학 축구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를 적극 발탁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나 이런 선수들에게 까지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가 아닌 유럽 리그 진출을 적극 권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 축구협회와 MLS 사무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4 기타
같은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또 다른 선수이자, 함께 힘을 합쳐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우승을 일궈낸 철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심각한 불화를 겪기도 했다. 쉽게 말해 마테우스가 불이라면 클린스만은 얼음, 피차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할 타입이었다. 지금도 축구 팬들 사이에선 마테우스가 독일 일간지 빌트와 죽이 맞아서 클린스만을 까댄 것으로 유명한데(...), 결국 유로 1996에선 둘이 대판 싸웠고 마테우스는 대표팀에 불참했다.[12] 그러나 1998년 두 사람은 월드컵 무대에서 다시 동료로서 뛰게 되고, 그냥 노장도 아닌 회춘한 노장인 두 사람은 녹슨 전차군단의 쓸쓸한 몰락을 맛보고 대표팀을 떠나게 된다.
여담으로 댈러스의 코튼볼 경기장에서 열렸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최종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닥뜨려 전반전에 2골을 기록했다. 흠좀무한 터닝 슛으로 대한민국을 침묵에 빠뜨린 주인공(...)
당시 전반을 클린스만의 2골과 리들레의 득점으로 3-0으로 마쳤지만, 후반전을 시작하고 나서 황선홍과 홍명보의 합작으로 20분 만에 대한민국이 2골을 터뜨려 3-2로 따라붙었다. 후반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거의 걸어다니는 수준이었던 독일 선수들에 비해, 대한민국 선수들은 2골을 넣은 후 맹렬한 기세로 독일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결국 3:2로 독일의 승리로 끝났지만, 클린스만 본인은 훗날 당시 경기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그 때 5분만 더 있었다면 우리가 졌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클린스만은, 10년 후 2004년에 다시 만난 대한민국에게 1:3으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여담이지만 홍명보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후 인터뷰에서, 현역에서 상대해 본 공격수 중 가장 어려웠던 선수로 클린스만을 꼽았다. 브라질의 호나우두도 잘하긴 했지만, 클린스만만큼은 아니었다고.
부친인 故 지크프리트 클린스만 (Siegfried Klinnsmann)이 제빵사라서, 지금까지도 언론에서 종종 "빵집 아들"로 수식된다. 지금도 클린스만의 가족들이 슈투트가르트의 보트낭(botnang)에 빵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인도 선수시절 초창기에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 그리고 이 빵집은 미네이랑의 비극이 벌어지자 브라질을 철저히 능욕하고…
미국에서 꽤 살고 있다 보니, 독일인 치고는 영어 발음이 매우 부드럽다. 보통은 독일어 특유의 딱딱한 발음을 벗지 못해서 미국 등지에서 유머 소재로 쓸 정도인데, 클린스만의 영어 인터뷰를 들어보면 꽤 자연스러운 편이다.
2004년 12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올리버 칸까지 출전한 독일을 대한민국이 이동국의 발리슛으로 3:1로 완파하며 클린스만 감독까지 놀라게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5 선수기록
5.1 리그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1/82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독일 2.분데스리가 | 6 | 1 | 0 | 0 | - | - |
1982/83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독일 2.분데스리가 | 20 | 2 | 2 | 1 | - | - |
1983/84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독일 2.분데스리가 | 35 | 19 | 2 | 2 | - | - |
1984/85 | VfB 슈투트가르트 | 독일 분데스리가 | 32 | 15 | 4 | 2 | 2 | 0 |
1985/86 | VfB 슈투트가르트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16 | 6 | 4 | - | - |
1986/87 | VfB 슈투트가르트 | 독일 분데스리가 | 32 | 16 | 1 | 2 | 4 | 1 |
1987/88 | VfB 슈투트가르트 | 독일 분데스리가 | 34 | 19 | 1 | 0 | - | - |
1988/89 | VfB 슈투트가르트 | 독일 분데스리가 | 25 | 13 | 4 | 2 | 8 | 4 |
1989/90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31 | 13 | 4 | 2 | 2 | 0 |
1990/91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33 | 14 | 4 | 0 | 12 | 3 |
1991/9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이탈리아 세리에 A | 31 | 7 | 5 | 1 | 1 | 0 |
1992/93 | AS 모나코 | 프랑스 리그앙 | 35 | 19 | 0 | 0 | 4 | 0 |
1993/94 | AS 모나코 | 프랑스 리그앙 | 30 | 10 | 0 | 0 | 10 | 4 |
1994/95 | 토튼햄 핫스퍼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 41 | 21 | 6 | 5 | - | - |
1995/96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2 | 16 | 1 | 0 | 12 | 15 |
1996/97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15 | 4 | 2 | 2 | 0 |
1997/98 | 삼프도리아 | 이탈리아 세리에 A | 8 | 2 | 0 | 0 | 1 | 0 |
1997/98 | 토튼햄 핫스퍼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 15 | 9 | 3 | 0 | - | - |
2003 |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 | USL[13] | 8 | 5 | 0 | 0 | - | - |
5.2 A매치 기록
연도 | 출장 | 골 |
1987 | 2 | 0 |
1988 | 8 | 2 |
1989 | 4 | 1 |
1990 | 15 | 6 |
1991 | 4 | 0 |
1992 | 13 | 2 |
1993 | 10 | 6 |
1994 | 14 | 11 |
1995 | 9 | 6 |
1996 | 14 | 7 |
1997 | 7 | 2 |
1998 | 8 | 4 |
합계 | 108 | 47 |
5.3 우승 경력
- FC 인테르나치올레 밀라노 (1989/90 - 1991/92)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 : 1989
- UEFA 컵 (1) : 1990/91
- FC 바이에른 뮌헨 (1995/96 - 1996/97)
- 독일 분데스리가 (1) : 1996/97
- UEFA 컵 (1) : 1995/96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87 - 1998)
- 1988 서울 올림픽 동메달
- 1990 FIFA 월드컵 우승
- 유로 1996 우승
- 1993 US 컵 우승
- 개인
- 서독 올해의 축구 선수상: 1988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 1994
- FWA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토트넘 홋스퍼)
- IFFHS 올해의 세계 최다 득점 선수: 1995
6 감독기록
- 독일 국가대표팀 (2004 - 2006)
- 2006 FIFA 월드컵 : 3위
- 미국 국가대표팀 (2011 - )
- 2014 FIFA 월드컵 : 16강
- 2013 CONCACAF 골드 컵 우승
- ↑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04년 12월 1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독일의 A매치에서 독일이 대한민국에게 최초로 졌을 때의 감독이 클린스만이었다. 스코어는 3:1로 대한민국의 완벽했던 승리. 대한민국의 득점은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이 했다. 독일은 전반에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보러가기
- ↑ 이는 다이버 논란과 더불어 후술되는 역마살로 인한 끊임없는 이적에서 기인한다.
- ↑ 물론 2002 월드컵에서 루디 푈러 감독이 눈여겨본 폴란드산 헤딩기계가 혜성처럼 출현하고, 이후 애국자가 나타나면서 이런 걱정은 싹 사라져 버렸지만.
- ↑ 일례로 1998년 월드컵 이란전에서 같은 팀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반사적으로 다이빙 헤딩한 적이 있는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일이라 당시 축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천히 돌려보면, 골포스트맞고 튕겨나오는 공을, 쇄도하던중에 만나, 왼 발로 왼쪽으로 점프한, 다이빙헤딩..
- ↑ 클린스만의 강력한 동료이자 원쑤인 마테우스도 따지고 보면 비슷하다. 뮌헨글라드바흐, 바이에른, 인터밀란 어느쪽이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지만 레전드라고 하긴 참 어정쩡하다. 그나마 꼽자면 바이에른이 어울릴듯 하지만... 둘다 독일의 레전드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듯?
- ↑ 이 때, 오렌지 트리오가 건재하던 AC 밀란을 상대로 스쿠데토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로타어 마테우스와 안드레아스 브레메와 함께 게르만 트리오로 불리기도 했다.
- ↑ 영국의 스트라이커. 토트넘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 3년간 있었다. 1986년 월드컵 득점왕. 그보단 "축구란 단순하다. 22명이 공을 쫓아 90분간 뛰다가 언제나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이란 말로 유명하다.
- ↑ 당시 오동코어는 대표팀 경력이 전무한 상태여서 그 여파가 더 컸다.
- ↑ 사실 2002 FIFA 월드컵 당시 루디 푈러 감독이 가나에서 귀화한 흑인 공격수 게랄드 아사모아를 발탁하긴 했지만, 클린스만이 벌인 잇단 개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
- ↑ 앞서 언급된 다비드 오동코어나 게랄드 아사모아 말고도 21세기 들어서 폴란드계 출신의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 표트르 트로쵸프스키나 터키계인 메수트 외질 등 이민자 2세 출신 선수들이 독일 대표팀에 즐비한 만큼 이제는 대표팀 순혈주의를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 있다.
- ↑ 13골드컵 우승 팀 미국과 15 골드컵 우승팀 멕시코의 단판승부로 승자가 17 컨페더레이션스 컵에 진출
- ↑ 이 당시 독일에게 있어 클린스만은 대체 불가 자원이었지만, 수비수로 발롱도르까지 거머쥔 걸출한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로 인해 마테우스는 대체가능한 노장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잠머가 1998년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은퇴하게 되면서 마테우스가 재발탁된다.
- ↑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위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