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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에펜베르크 (Stefan Effenberg) | |
생년월일 | 1968년 8월 2일 |
출생지 | 독일 함부르크 |
신장 | 188cm |
포지션 | 미드필더 |
별명 | Der Tiger |
소속팀 |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7 ~ 1990) FC 바이에른 뮌헨 (1990 ~ 1992) ACF 피오렌티나 (1992~1994)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94 ~ 1998) FC 바이에른 뮌헨 (1998 ~ 2002) VfL 볼프스부르크 (2002 ~ 2003) 알 아라비 (2003 ~ 2004) |
지도자 | SC 파더보른 07 감독 (2015 ~ 2016) |
국가대표 | 35경기 3골 |
2001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 ||
슈테판 에펜베르크 |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 ||||
토마스 헬머 (1997 ~ 1999) | → | 슈테판 에펜베르크 (1999 ~ 2002) | → | 올리버 칸 (2002 ~ 2008) |
Der Chef (지배자).
1990년대 말 ~ 2000년대 초 유럽을 지배했던 전설적인 중원 사령관.[1]
1 개요
독일 역사상 최고의 레지스타
은퇴한 독일의 축구선수. 함부르크에서 출생. 전통의 명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데뷔했으며, 축구인생의 절정기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보냈다. 1998/99~2000/01 분데스리가 3연속 제패와 2000/2001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끈 굴지의 중원사령관이자 팀의 주장이었다. 어린 시절, 집 앞에 있는 담벼락에 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킥 연습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훗날 에펜베르크의 정교한 킥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국가대표로 모습을 드러낸 경기가 많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명성에 비해 국내에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축구선수로서의 업적이나 기량적인 측면의 재조명보다는 주로 거칠었던 언행이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인터넷에 떠도는 에펜베르크 어록은 대부분 부풀려지거나 과장된 내용들이 많다. 축구웹진 '아이러브사커'의 분데스리가 필진이었던 김진환 씨에 의하면 "인터뷰 내용을 의역하는 부분에 있어서 에펜베르크의 독특한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해 실제 발언보다 부풀려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마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같이 실제로 발언한 적 없는 말이나 다른 의미로 한 말이 부풀려져도 축구 팬들이 아무 이상없이 받아들일 정도의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로타어 마테우스 이후 바이에른의 중원사령관 라인의 계보를 이어 70년대 이후 팀의 제 2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주장이었으며, 이후 이 라인으로 이어진 선수로는 미하엘 발락, 마르크 반 봄멜, 그리고 바이에른의 3번째 전성기를 이끈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있다.
90년에 바이에른으로 이적했으나 당시 바이에른이 딱 FC 할리우드라고 불리며 부진이 시작될 때였고, 두 시즌만에 특유의 성질머리 때문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이후 ACF 피오렌티나와 고향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성장하며 드디어 98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돌아온다.
이적 직후 중원에서 팀의 중심이 되며 본인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분데스리가를 우승했고, 챔스에서도 인테르, FC 바르셀로나와 안드리 셰브첸코를 필두로 한 돌풍의 팀 디나모 키예프 등 당대의 쟁쟁한 상대들을 모조리 꺾으며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그 유명한 캄프 누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어 맨유에게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르고 말았다.
99-00 시즌에도 조별리그에서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이끌고 라울 곤잘레스, 페르난도 이에로, 호베르투 카를로스, 페르난도 레돈도, 스티브 맥마나만, 이케르 카시야스 등이 포진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멋진 프리킥골을 비롯해 두 경기 모두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조별리그에서 무려 홈 4-1, 원정 4-2의 스코어로 털어버렸지만 4강에서 다시 만났을땐 1승1패를 거뒀으나 합계에서 3대2로 밀려 결승진출에 실패했고, 리가와 포칼을 더블 우승한 것에 만족해야했다. 이 시즌 전반기 종료 후 로타어 마테우스가 바이에른에서의 커리어를 마쳤으며, 에페가 그의 뒤를 이어 주장직을 맡게 되었다. (98-99시즌부터 마테우스가 고령이라 매 경기 출장하는게 아니었기에 이미 올리버 칸과 더불어 간간히 주장완장을 차긴 했다.)
그리고 2000-01 시즌, 필사의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이겨내고, 마지막까지 피터지는 우승레이스 경쟁을 한 샬케 04도 함부르크 SV와의 시즌 마지막라운드 인저리타임의 드라마틱한 골로 제치며 극적인 리가 우승을 달성해 72, 73, 74년 이후 다시한번 바이에른의 3연속 리그 우승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이어 챔스에서도 아스날 FC를 1승 1무로, 2년전 결승에서 아픔을 안겨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4강에서 다시한번 한 끼 식사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결승진출에 성공한다. 특히 2차전 홈경기에서는 에페가 경고 누적으로 결장해서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으나 당시 갓 데뷔한 오언 하그리브스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를 거두며 어렵지않게 결승행에 성공했다.
결승 상대는 작년 준우승팀 발렌시아 CF. 에페는 페널티킥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승부차기에서도 깔끔하게 카니자레스 골키퍼를 무너뜨리며 바이에른의 25년만의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이후 01-02시즌은 리가, 포칼, 챔스 모두 2% 부족하게 3위, 4강탈락 등으로 무관에 그쳤고, 에페는 바이에른의 세대교체 바람에 맞아 차기 시즌 VfL 볼프스부르크 이적을 택했다. 이후 볼프스부르크와 중동팀 알 아라비에서 한 시즌씩 뛴 후 선수 커리어를 마감한다.
에펜베르크의 스페셜. 로이 킨이나 사비 알론소, 안드레아 피를로에 꿇리지 않을 당시 롱패스의 대명사였다.
2000/2001시즌 챔스 MVP에 선정되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레전드 로이 킨과 함께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놓고 경합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였다. 단 플레이스타일은 로이 킨보다 좀더 전략적이고 정교했으며, 처진 위치에서의 플레이메이킹에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지금의 사비 알론소가 딥라잉 플메의 대명사라고 한다면 90년대~2000년대 초까지의 정상급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는 에펜베르크였다. 바이에른의 전설들 중 전설들만 오른다는 명예의 전당에 딸랑 6시즌 뛰었는데도 올라간걸 보면 분명 보통 양반은 아니라는걸 알 수 있다(..) [2]
하지만...
2 카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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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펜베르크를 정말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 인상적인 성격으로 특유의 지랄맞은 성질머리 때문에 올리버 칸조차도 에펜베르크의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주눅들었을 정도다.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로이 킨도 챔스 8강과 조별리그에서 상대할 때 모두 그와 성깔머리로 대적할 상대라면 그나마 미하일로비치나 칸토나 정도?? 에펜베르크를 통제할 수 있는 감독은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명장 오트마르 히츠펠트 뿐이었다.
기존에 어떤 위키러가 "헌데 비쥬얼과 언행이 터프한 선수였지, 정작 폭력적이거나 비신사적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다."라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디에고 코스타급으로 필드에서 시비도 잘 텄고, 거친 몸싸움과 보복태클도 전혀 서슴지 않았다. 유투브에서 영상 몇 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99-00 쾰른전 홈경기에서는 상대팀의 계속된 거친 태클에 분노해 상대팀 감독 멱살을 잡고 깽판친적도 있다.
하지만 오트마트 히츠펠트는 에펜베르크에게 필드 위에서의 모든 권한을 일임하는 등 에펜베르크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성에 비해 국가대표전 성적은 35경기 3골로 두드러지 않으며 활동기간도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3 국가대표 영구 퇴출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 참가, 조별예선 마지막 상대 한국을 맞아 전반에만 3-0으로 앞서지만 후반에 와서 한국이 그야말로 미친듯이[3]독일 진영으로 뛰어들어 전차군단이라는 독일이 제대로 공격조차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4] 관객들은 독일 선수들에 대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 때 에펜베르크는...
자신에게 야유를 하는 관중들에게 법규를 시전 하였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미국 월드컵이다.
당연히 즉각 교체당한뒤, 강제귀국조치에 처해졌다. 그 후 에펜베르크가 빠진 독일 대표팀은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8강에서 불가리아[5]에게 패하고 짐을 싸야했다. 결국 이 사건 때문인지 에펜베르크는 다시는 국제무대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만약 에펜베르크가 그 지랄맞은 성질머리만 아니어서 유로나 월드컵 같은 국제무대에 계속 출전했다면 독일의 암흑기 94~2000의 국제무대 성적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풍문이 있다. 특히 필드 위의 에펜베르크는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대를 이을 카이저, 강력한 보스기질과 리더쉽,카리스마를 가진 선수였기 때문에 에펜베르크의 영구 퇴출에 논란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 축구는 저 시기에 비운의 천재 스위퍼 마티아스 잠머가 이끌던 유로 1996 대표팀의 우승을 제외하고는 그 위상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성적을 냈었다 (94월드컵 8강, 98월드컵 8강, 유로 2000 예선 광탈(...). 특히 98월드컵 땐 처음으로 출전하였던 크로아티아에게 3:0으로 떡실신 당한건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 다른 유럽국가와의 A매치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며 녹슨 전차라는 불명예스러운 예명을 가지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런 독일의 극심한 부진이 이어진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은 바이에른 뮌헨의 중흥기였다는 점.. 실제로 유럽대항전에서 이 시기는 3M의 시대(맨체스터, 마드리드, 뮌헨)라 불릴 정도로 뮌헨이 챔스 4강을 밥먹듯이 나갔다. 저 셋이 붙어 서로를 꺾는팀이 빅이어를 들던 시절이었다. 1998-2002 에펜베르크의 지휘를 필두로 한 클래시컬한 뮌헨 조직적인 공격과 피지컬로 찍어누르는 플레이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으며, 중요한 순간마다 세트피스에서 득점이 빵빵 터지며 화력을 더했다.[6] 물론 에펜베르크가 국대에 없는것도 제일 컸지만, 뮌헨의 핵심 플레이메이커 메멧 숄은 메이저 대회 직전만 되면 부상당해 결장당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카르스텐 얀커는 국대에서는 그 떡대플레이가 그닥 안 통했던 것도 있다.
녹슨 전차라는 예명은 독일이 2006년 월드컵이 끝나서야 비로소 사라지게 된다. 2002년 월드컵은 독일이 준우승이라고 찬양하기엔 결승전 이전의 대진이 너무 좋았다. 16강전 파라과이, 8강전 미국, 준결승전 한국 사실상 한국이 독일의 천적들을 다 없앴다. 이탈리아, 스페인 지금은 아니지만 포르투갈까지 개최국이 월드컵을 갖지 못할 바엔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테다아앗!!. 결승전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진짜 그나마 독일의 상대다웠던 상대는 같은 조별리그였던 아일랜드 정도. 그런데 아일랜드도 사실 독일의 전력에 비해 약간 아래였는데 비기고 말았다.(...)
2001년 나이트클럽에서 여성을 폭행하거나, 팀 동료 토마스 스트룬츠(스트룬츠도 뒤스부르크,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했고 독일 국가대표 미드필더로도 뛴 선수이다.)의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결국 스트룬츠는 바이에른 뮌헨을 떠났다. 에펜베르크는 자신의 부인과 이혼하고, 스트룬츠와 이혼한 불륜상대와 재혼했다.
4 주옥같은 독설
입도 거칠어서 실로 주옥같은 독설들을 많이 날렸다.
다음은 에펜베르크의 독설들.
1. "피구? 그가 누군가? 잘 모르겠다."
(00-01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루이스 피구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 잘 알겠지만 이 당시 루이스 피구는 포르투갈과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로서 크랙형 윙어의 대명사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그가 누군가? 잘 모르겠다.' 라고 말하는거나 똑같은 패기(..)
2. "지단과 솔라리가 내 앞에서 잔재주를 부릴때 그 다리를 분질러 놓고 싶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 종료 후)
3. "리즈나 발렌시아같은 풋내기들과 뛰느니 이게 낫다."
(00-01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고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 당시 리즈는 말그대로 리즈 시절의 리즈로 챔스 4강에 연거푸 진출하는 돌풍의 팀이었고, 발렌시아도 역시 못지않는 강호였다.
4. "발렌시아? 세리에A에 있는 팀 이름인가?"
(00-01 챔피언스 리그 발렌시아와의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기자에게)
- 위에 말했듯 발렌시아는 팀의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99-00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한 팀이었다.
5.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은 나를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
(에펜베르크의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거론하는 기자에게)
6. "누군가 나를 발로 한 번 찬다면, 난 뒤돌아 그 놈을 두 번 걷어 찰 것이다."
7. "그는 마치 수염난 계집애 같았다. 놈의 따귀를 갈기고 싶었다."
(00-01 챔피언스리그 8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 종료 후 데이비드 베컴의 플레이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 중원에서 계속된 충돌로 감정도 격해졌고, 특히 충돌 후 일어나서 베컴이 악수를 청했으나 '저리 꺼져'라는 식의 손짓으로 쿨하게 거절한 장면은 압권 그 자체.
8. "그들이 내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식탁 앞에 와서 욕을 한다 해도 상관없다."
(1.FC 뉘른베르크와의 분데스리가 경기 종료후, 상대팀 팬들의 야유에 화답)
이래서 한국에서의 별명은 미친 호랑이.(...)
그래도 더러운 성질머리와 입에 비해서 시합에서의 플레이는 깔끔했다면 모르겠지만, 경기중에 거친 몸싸움이나 보복 태클도 서슴지 않았으며 분데스리가 최다 옐로카드 수집(109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입만 잘 털었던 게 아니라 그라운드에서도 미쳐 날뛰었다는 뜻.그래도 누구처럼 고의로 부상을 입히진 않았다. 다만 고의로 태클을 아름답게 걸었을 뿐.
미하일로비치, 로이킨 등등 한 성깔 한다는 선수들도 에펜베르크 앞에서는 조용한 플레이를 펼쳤다.
5 은퇴 후
은퇴후에도 칼 하인츠 루메니게 바이에른 사장의 디스에 '그의 조언따윈 필요없다'라고 쿨하게 씹는 등 늙어서도 여전하다. 근데 그냥 감독들이 흔히 날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팀의 레전드의 말이었다는거(...)
은퇴 후 위에서 말한 불륜 상대와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도자 커리어를 쌓는 길과는 거리를 뒀으며 성질 머리를 보면 도저히 구단에서 오퍼를 넣었을것 같지가 않다. TV해설가로 활동을 하며 가끔 현역들에게 독설을 쏴주곤 했다. 그러면서 틈틈히 자선활동, 특히 학대아동에 대한 지원과 개발 도상국 지원의 일환으로 태국 등 각국에 축구 학교를 개설하는 사업에 참여했으며 2012년 지도자 라이센스를 드디어(!!) 취득했다.
피파 온라인 3 2차 월드 레전드에 추가되어 국내 非 바이에른 뮌헨 팬들에게도 인지도가 조금이나마 생겼다, 콜네임은 미친 호랑이
2015년 10월 13일 2.분데스리가의 SC 파더보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선수생활 은퇴 후 11년만에 필드로 복귀.
2015년 10월 16일, 브라운슈바이크와의 경기에서 치룸과 함께 2:0 완승을 거뒀다. 한 경기만 보고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선수시절 전술 이해도가 보통이 아니었던 덕에 전술을 짜는 능력도 뛰어난 듯 하다. 그리고 이후 경기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2연승을 달렸으나.. 이후 13경기에서 6무 7패를 기록하며 13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하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에펜베르크가 부임하기 전 2승 1무 7패라는 최악의 성적이었던것을 감안하더라도 에펜베르크의 성적은 별 다를게 없는 성적이었고 5개월동안 총 15경기 2승 6무 7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결국 2016년 3월 3일자로 경질되었다.
6 경력
-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87/88 – 1989/90, 1994/95 - 1997/98)
- DFB 포칼 (1) : 1994/95
- DFB 슈퍼컵 (1) : 1990
- ACF 피오렌티나 (1992/93 - 1993/94)
- 이탈리아 세리에 B (1) : 1993/94
- FC 바이에른 뮌헨 (1990/91 - 1991/92, 1998/99 – 2001/02)
- 독일 분데스리가 (3) : 1998/99, 1999/00, 2000/01
- DFB-포칼 (1) : 1999/00
- UEFA 챔피언스 리그 (1) : 2000/01 / 준우승 (1) : 1998/99
- UEFA 슈퍼 컵 준우승 (1) : 2001
- DFB-리가 포칼 (3) : 1998, 1999, 2000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1991 - 1994, 1998)
- 유로 1992 준우승 (1) : 1992
6.1 개인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7/88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15 | 1 | 0 | 0 | - | - |
1988/89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29 | 3 | 2 | 0 | - | - |
1989/90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29 | 6 | 3 | 0 | - | - |
1990/91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9 | 6 | 1 | 0 | 8 | 1 |
1991/92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3 | 10 | 1 | 0 | 4 | 1 |
1992/93 | ACF 피오렌티나 | 이탈리아 세리에 A | 30 | 5 | 0 | 0 | - | - |
1993/94 | ACF 피오렌티나 | 이탈리아 세리에 B | 26 | 7 | 0 | 0 | - | - |
1994/95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30 | 7 | 5 | 2 | - | - |
1995/96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31 | 7 | 2 | 1 | 6 | 2 |
1996/97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29 | 1 | 2 | 0 | 3 | 2 |
1997/98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독일 분데스리가 | 28 | 8 | 1 | 0 | - | - |
1998/99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31 | 8 | 6 | 3 | 12 | 4 |
1999/00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7 | 2 | 5 | 0 | 11 | 2 |
2000/01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20 | 4 | 0 | 0 | 10 | 1 |
2001/02 | FC 바이에른 뮌헨 | 독일 분데스리가 | 17 | 2 | 4 | 0 | 7 | 1 |
2002/03 | VfL 볼프스부르크 | 독일 분데스리가 | 19 | 3 | 2 | 0 | - | - |
2003/04 | 알 아라비 | 카타르 스타즈 리그 | 15 | 4 | 0 | 0 | - | - |
6.2 개인 수상
- 유로 1992 베스트 일레븐
- ESM 선정 올해의 선수: 1999
- UEFA 클럽 올해의 선수 : 2001
- ↑ 98/99~2002/03 바이에른 뮌헨에 딸랑 4시즌 있던 동안 3시즌을 챔스 4강에 진출했고, 우승/준우승 한번씩에 인터컨티넨탈겁 우승, 1999,2000,2001 분데스리가 연속우승을 기록한 바 있다. 98/99, 99/2000시즌 델보스케의 레알마드리드를 그야말로 털어버리는 경기력은 아직도 팬들의 뇌리에 박혀있다.(00-01시즌 4강전은 경고누적으로 2차전에 결장했고, 2승을 거두긴 했으나 지오반니 에우베르와 메멧 숄의 공이 컸다. 1차전은 가히 올리버 칸의 인생경기였을 정도로 유효슛도 많이 허용했다.) 3M의 시대에서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희대의 라이벌리를 형성했다. 대표적으로 그라운드에서 가장많이 맞붙었던게 데이비드 베컴, 로이 킨, 페르난도 이에로 등.
- ↑ 게다가 91~93년때는 에페는 적응도 잘 못했고 팀도 매우 부진했었다. 사실상 98~2002 단 4년간의 활약과 그 압도적인 포스로 무려 바이에른 뮌헨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레전드라고 할 수 있겠다.
- ↑ 이전버전에선 비기기만 해도 16강 갈 수 있다는 말이 써있었으나 잘못된 말. 94년은 예선때는 승리시 2점이었으나(도하의 기적참조)본선부터 승리시 승점이 3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2무하고서 독일과의 경기를 앞둔상황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오히려 6개조 조3위팀중 4자리를 두고 다투는데 먼저 경기를 치른 A조에선 조 3위인 미국이 1승 1무 1패, B조에선 러시아가 1승 2패지만 마지막 카메룬전에서 6-1대승으로 승점은 3무랑 같은 3점에 골득실이 7득점 6실점인 +1로 유리했기 때문에 3무면 필연적으로 골득실이 0이 되니 비겨도 쉽지 않을거란 기사가 나왔으면 나왔지.
- ↑ 농담이 아니라 진짜 실제상황이었다. 후반 시작하고나서 얼마 못가 2골을 기록해 스코어는 3-2로 순식간에 좁혀졌고 독일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져 거의 걸어다니는 반면 한국 선수들은 맹렬하게 독일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오죽하면 위르겐 클린스만이 후일 당시 시간이 5분만 더 있었다면 우리가 졌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 ↑ 당시 불가리아의 에이스였던 흐리시토 스토이치코프는 바르셀로나의 핵심적인 선수였으며, 이 해 불가리아를 4강으로 이끈 공으로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 ↑ 당시 메멧 숄은 지금의 안드레아 피를로와 비슷한 폼의 프리킥을 구사하는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였고, 에펜베르크야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간접프리킥 키커였다. 직접프리킥도 꽤 위협적인데, 대표적인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무너뜨린 30m 땅볼프리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