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마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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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루넝 감독
볼프강 펠릭스 마가트 (Wolfgang-Felix Magath)
생년월일1953년 7월 26일
국적독일
출생지아스펜부르크
포지션MF
경력빅토리아 아스펜부르크(1972 - 1974)
1.FC 자르브뤼켄(1974 - 1976)
함부르크 SV(1976 - 1986)
스태프 경력함부르크 SV (1986 - 1988, 단장)
1.FC 자르브뤼켄 (1988 - 1990, 단장)
위르뎅겐 (1990 - 1992 , 단장)
브레머하펜 (1992 - 93, 코치)
함부르크 SV (1993 - 1995, 수석코치)
함부르크 SV (1995 - 1997, 감독)
1.FC 뉘른베르크(1997 -1998, 감독)
SV 베르더 브레멘 (1998 - 1999, 감독)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99 - 2001, 감독)
VfB 슈투트가르트 (2001 - 2004, 감독 겸 단장)
FC 바이에른 뮌헨 (2004 - 2007, 감독)
VfL 볼프스부르크 (2007 - 2009, 감독 겸 단장)
FC 샬케 04 (2009 - 2011, 감독 겸 단장)
VfL 볼프스부르크 (2011 - 2012, 감독 겸 단장)
풀럼 FC (2013 - 2015, 감독)
산둥 루넝 (2016- , 감독)
국가대표 경력47경기 5골

함부르크 SV의 전성기의 주역

1 소개

볼프강 펠릭스 마가트(Wolfgang-Felix Magath)

1953년 7월 26일생으로 미국계 독일인으로 A매치는 서독 국가대표 출신으로 43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었다. 선수 시절 주요경력으로 함부르크 SV에서 10년을 뛰며 3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하는 등 함부르크 SV의 전성기와 함께 했으며 특히 1982-83년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함부르크의 우승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1].

선수 은퇴 후, 여러 클럽에서 단장직을 겸하기도 했으며 슈투트가르트 시절에는 유망주들을 이끌고 분데스리가 준우승, 바이에른 뮌헨 시절에는 2시즌 연속 더블, 볼프스부르크 시절에는 깜짝 리그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분데스리가소방수, 사담(...)[2], 쾰릭스, 독일의 라니에리[3]

2 선수 커리어

함부르크 SV의 황금기를 이끈 레전드
빅이어획득의 주역

선수 초창기에는 아스펜부르크와 자르브뤼켄 같은 하위 리그의 팀에서 활동했지만 1976/77시즌, 함부르크로 이적하여 10년 동안 팀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여 명선수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10년 동안 306경기에 출장했으며 46득점을 하여 미드필더로서 쏠쏠히 공격에도 가담한 편. 특히 1982/83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팀을 유럽 정상으로 올려놓기도 했다. 10년 동안 함부르크에서 3차례의 분데스리가 타이틀과 유러피언 컵UEFA 컵 위너스 컵 각각 1회 우승, UEFA컵 준우승 등의 기록을 세우며 함부르크 SV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국가대표에도 43경기에 출전하며 82년, 86년 월드컵에 2회 연속 으로 출장하였고 유로 1980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월드컵 참가 후 무릎 부상으로 인해 33살의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된다.

3 감독 커리어

감독계의 저니맨

사실 펠릭스 마가트는 은퇴 후 곧바로 지도자 수업을 받은게 아니라 프런트에서 단장으로 활동했다. 자신의 친정팀인 함부르크 SV를 시작으로 자르브뤼켄, 위르딩겐에서 6년 동안 단장직을 겸임하던 펠릭스 마가트는 1992년 브레머하펜의 코치로 영입되며 지도자 코스를 밟기 시작하고 1993년 함부르크의 수석코치로 임명되고 2년 뒤 1995년, 함부르크 감독으로 승격된다. 1995/96 시즌, 팀을 UEFA컵으로 이끈 마가트는 그러나 1996/97 시즌 리그 1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경질된다.

그 뒤로 1997/98시즌 2부 리그에 있던 1.FC 뉘른베르크 감독을 맡아 2부 리그 3위를 기록하며 뉘른베르크를 분데스리가로 승격하는 업적을 이루었으나 구단주와의 의견 차이로 인해 1년 만에 바로 그만 두고 베르더 브레멘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한 시즌만에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 [4]

여기까지 보면 뉘른베르크를 승격시킨 것 외에는 별 볼일 없는 감독이라는 이미지겠지만, 브레멘에서 경질된 이후 1999/00 시즌 분데스리가에서의 강등 위기에 놓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감독을 맡아 소방수 역할로서 팀을 강등권에서 구출해낸다. 그러나 칭송도 거기까지... 다음 시즌 또 다시 막장 성적에 팀이 6연패를 하자 경질당한다.이거 독일의 라니에리인데?[5]

그러나 소방수 감독으로서 강등권 위기의 팀을 구해내며 명성을 얻은 마가트는 2001/02 시즌 강등권에서 악전고투하던 VfB 슈투트가르트 감독이 된다. 이 때부터가 마가트의 전성기. 슈투트가르트 프런트로부터 단장직 겸임이라는 권한까지 얻어낸 마가트는 그 후 '마가트 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흘렙, 티모 힐데브란트, 케빈 쿠라니 등의 선수들과 바이에른 뮌헨의 필립 람을 임대로 영입해 오며 팀을 구축시켰고 2002/03 시즌 리그 준우승을 차지해버렸다!

부진한 팀의 감독을 맡아 리그 준우승에 챔피언스 리그 진출까지 해 버렸으니 네임벨류가 슬슬 쌓여가고, 03-04시즌에도 지난날과는 다르게 팀을 4위까지 끌어 올려 놓고서 2004/05 시즌, 당시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부진한 성적에 실망한 분데스리가끝판왕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6]

빠방한 지원에 전권을 위임을 받은 마가트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우승컵을 모으기 시작했다. 부임한 뒤 2004/05, 2005/06시즌 리그와 DFB-포칼을 휩쓸며 2년 연속 더블의 성적을 기록한 명감독의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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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가 좋았지...

그러나 2005/06시즌 이후 팀의 에이스인 미하엘 발락이 첼시로 이적하고 제 호베르투마저도 팀을 떠나게 된다. 마가트는 급하게 반 봄멜을 데려와 공백을 메꾸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중원의 실종으로 인해 마카이, 피사로 등이 예전과 같이 제대로 공을 공급받지 못하여 공격에서 해맸으며,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은 아예 라인을 깊숙히 내린 후 역습 한 방을 노리는 방식으로 전술을 바꾸었으나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내놓지 못 하며 지지부지한 성적을 보여주게 된다.

여기에 선수들의 줄부상과 호흡이 맞지 않는 수비진, 발락과 제 호베르투가 팀을 떠났으나 마치 있는 선수마냥 취급하는 식의 전술로 인해 2006/07시즌 중반, 팀은 리그 4위로 밀려났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바이에른 뮌헨 프런트에 의해 경질된다.[7]

2007/08시즌, 전권을 위임받는다는 조건으로 VfL 볼프스부르크 감독 겸 단장이 된다. 07-08시즌 5위로 팀 순위를 끌어올린 마가트는 08-09시즌에 포텐이 폭발했다! 에딘 제코, 그라피테, 미시모비치의 삼각 편대를 앞세워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이 우승은 팀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볼프스부르크의 유일한 리그 우승이다.
http://cfile5.uf.tistory.com/image/132F77284A77029FDBFFF7
모기업 빵빵하지, 권한 막강하지, 어린 선수도 잘 키웠지, 뭐 하나 후달릴 게 없는 볼프스부르크 생활이었지만 1년 만에 FC 샬케 04로 떠나버린다. 사실 샬케가 좀 더 크고 역사도 유구한 구단이긴 하다.2년 차에서 무너진다는 전적이 있으니 전설일 때 물러나려고 했나?

샬케에선 라울 곤살레스클라스 얀 훈텔라르를 영입해 전 시즌 제코-그라피테와 같은 영혼의 투톱을 꿈꾸었으나 절반의성공만 거두었다. 그리고 4년짜리 계약 기간의 반도 못 채우고 2011년 3월 16일 경질되었다. 막판 훈신의 1000분 무득점 기록을 보기전에 잘려서 다행인가... 그리고 베르더 브레멘 때와 똑같이 마가트가 경질된 뒤 샬케는 포칼을 우승했다.

샬케에서 경질된 마가트는 감독과 단장직을 겸임하는 조건으로, 리즈시절을 보냈던 볼프스부르크에 돌아와 강등권에 허덕이던 팀을 구해냈다. 그러나 볼프스부르크에서도 부진을 겪자 2012년 10월 해임되어 1년 넘도록 쉬었다.

2014년 2월 14일, 풀럼 FC 감독을 새롭게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해외 구단 감독이 되었다. 계약기간은 1년 6개월. 하지만 풀럼이 20위, 꼴등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1달 동안 1승 1무 3패를 초라한 전적을 세우며 결국 강등이 확정되었다. 챔피언십에서도 1무 6패의 환상적인 성적을 거두며 꼴찌로 내려앉은 끝에 2014년 9월 18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전체적으로 종합해오면 95년부터 11년까지 함부르크 SV, 1.FC 뉘른베르크, VfB 슈투트가르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FC 바이에른 뮌헨, FC 샬케 04, VfL 볼프스부르크 등의 8개 팀에서 1부 리그 승격 한번, 분데스리가 우승 3번, 준우승 1번, UEFA 인터토토컵 우승 1번, DFB-포칼 2번, 리가포칼 1번의 우승을 기록한, 커리어만 보면 나름 괜찮은 감독이다.

2016년 6월에 산둥 루넝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4 성향

마가트는 감독이 가장 위에 있어야 한다는 주의로 언제나 팀내 전권 위임을 요구하는 감독이다. 훈련 방식은 정신력과 강도 높은 체력훈련, 그리고 쌍팔년도식의 희한한 규율들[8]이 많다.

자기한테 대든 선수는 절대 쓰지 않으며, 자기 말을 잘 듣는 충실한 선수 위주로만 기용하는 성향이 있어 개성 강한 선수들과 갈등이 잦고, 자기가 하란대로 충실히 하는 선수들을 좋아해 아시아권 선수들을 좋아한다. 대표적인 예로 구자철[9]하세베 마코토, 오쿠보, 알리 카리미, 하오준민, 우치다 야쓰토 등등 감독 부임시절 다양한 아시아선수들을 많이 영입했다.

별명인 '쾔릭스'(Quälix, 이름 "Felix"와 괴롭히다 라는 뜻을 지닌 "quälen"의 합성어), 사담[10] 그런 별명이 선수들한테 불리는 거 보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더블 스쿼드를 선호하는 정책 역시 많이 까이는 편인데, 선수 오타쿠라고 불릴 정도로 한 포지션에 다량의 선수를 사는 짓을 많이 한다. 이래서 구자철이 피봤다. 그리고 구자철이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되고 대활약을 펼치는 바람에 한국에서 욕을 더 얻어먹었다.[11] 11-12시즌 겨울이적시장에서 300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선수들을 잔뜩 사왔고, 그 전에도 중앙 미드필더만 8명을 두는 정신 나간 짓을 벌이기도 했다.

FC 샬케 04팬들은 특히 더 이를 가는데 구단의 재정난이 심각했음에도 1500만 유로를 들여 훈텔라르를 사오고, 방만한 재정낭비로 챔피언스리그에서 반짝 성적은 일으켰지만, 리그에서 14위라는 실망스런 성적으로 경질되고는 한다는 소리가 날 경질하려면 내가 벌어준 UEFA 챔스리그 상금 전부 내놔라! 하면서 소송을 걸어버린 사건으로 샬케팬의 금지어다. 물론 흐지부지 되고 끝났지만. 사실 방만한 스쿼드와 훈의 영입 등은 당시 훈이 부진했기에 문제였지만 자신에게 반대하는 선수는 가차없이 처내는 그 성향 덕택에 주급 좀되는 노장들이 팍팍 갈려 나갔기 때문에 저 놈이 안 그래도 재정 안 좋은데 돈 더 썼다는 비난은 좀 그렇다. 본인 말마따나 상금도 팍팍 따 냈고 훈텔라르는 결국 성공적인 영입이 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강등권에서 허덕이는, 당장의 성적이 중요한 팀이나, 유소년들 자원이 뛰어나거나, 전권 위임을 해 줄 신뢰있는 구단주가 있으면 좋은 성적을 내나, 그 성적이 단기간에 머물고, 이리저리 팀을 옮기면서 반짝 성적을 일으켜 주는 소방수 감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어느 시점까지만 해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으나, 슈투트가르트 시절 이후, 그리고 특히 볼프스부르크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거둔 이후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게 되어 본인의 방식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오만함이 원죄인 이유를 잘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

한국에 종목은 다르지만 비슷한 감독이 있다. 바로 김성근. 양 감독 문서를 번갈아가면서 보면 비슷한 점이 꽤 많다. 하지만 마가트는 김성근처럼 팀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미치진 않으며 순수한 스포츠인으로 정치질과도 거리가 멀다. 일단 더블 스쿼드 선호로 선수 혹사가 없고 말 잘듣는 어린 선수들을 잘 기용하다보니 팜을 메마르게 하지도 않는다. 팀 내에서 방귀 좀 뀌는 노장들을 쳐내니 주급이 폭등하지도 않는다. 김성근은 팜 작살, 선수혹사, 페이롤 폭등이 전부 따라온다. 그런 면에서 김성근과 정말 비슷한 감독은 마틴 오닐이다.[12]

5 기타

아버지가 푸에르토리코계 미군이었다. 마가트가 어렸을 적에 독일을 떠나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기 때문에 굉장히 싫어했으나 성장 후 만나서 감정을 어느 정도 푼 모양. 그 이후로 아버지의 이름인 펠릭스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전엔 볼프강 마가트였다. 현재는 볼프강-펠릭스 마가트지만 일반적으로는 펠릭스 마가트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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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독일인 아니랄까봐, 맥주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경기장 외에서의 모습을 보면, 맥주 한 잔을 들고 찍은 사진이 많기도 하고, 선수들이 자신한테 장난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감독이지만, 유일하게 넘어가는게 우승 후의 맥주세례.

6 기록

6.1 선수시절

6.2 감독시절

  • 바이에른 뮌헨 (2004/05 - 2006/07)
    • 독일 분데스리가 (2) : 2004/05, 2005/06
    • DFB-포칼 (2) : 2004/05, 2005/06
    • DFB 리가포칼 (1) : 2004
  • 볼프스부르크 (2007/08 - 2008/09, 2011/12)
    • 독일 분데스리가 (1) : 2008/09
  1. 당시 HSV에게 패해 준우승을 한 팀은 미셸 플라티니가 이끌었던 유벤투스로, 1:0으로 패했다.
  2. 사담 후세인의 사담 맞다. 워낙 지도하는 스타일이 독불장군 스타일이라 사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3. 각각 이탈리아와 독일의 소방수로 유명한 감독이다. 물론 취소선에서 대충 눈치챌수도 있는것이 라니에리가 레스터 시티를 우승시킨 이후엔 대우가 천양지차가 되었다. 그런데 마가트도 우승권에서 노는 수준까진 아니었던 볼프스부르크의 감독으로 우승을 한 걸 생각하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4. 이후 브레멘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토마스 샤프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샤프 감독은 강등권 탈출과 포칼 우승이라는 업적을 1주 만에 달성한다.
  5. 첼시 FC, AS 모나코, 레스터 시티 FC를 거쳐간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와 참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명성있는 팀이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위기에 빠지면 단기감독으로 들어가 어느정도 성적을 내지만, 장기적으로 감독을 맡으면 알 수없는 부진으로 경질. 그러나 마가트 쪽은 우승을 많이 해서 라니에리보단 평가가 좋으...려나? 참고로 2015-2016 시즌 라니에리 감독의 레스터 시티는 EPL 우승을 해냈다.
  6. 지금은 사라진 인터토토컵 우승도 한 번 했지만 이 대회는 UEFA과 무관한 토토복권 주관 대회로 우승팀이 여러 팀인 말뿐인 우승대회라서 의미가 그다지 없다. 여담으로 이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진 팀은 3번의 우승을 기록한 VfB 슈투트가르트이다.
  7. 이 때 바이에른은 리그 4위로 지금과 달리 분데스리가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이 3장만 배정되었기 때문에 유로파행...그리고 바이에른은 다음 해 분노의 영입을 시전하였습니다
  8. 훈련장에서 헤드폰 꼈다고 벌금을 먹이거나, 경기장 자기 전술에 반대하는 움직임 보였다고 벌금을 먹이기도 했다.
  9. 다만 구자철은 마가트가 오기 전에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자신이 경질 되기 직전에 영입한 선수였다.
  10. 당연히 사담 후세인에게서 따온것(....)
  11.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이적 당시의 독일 기사에 따르면 마가트는 구자철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앞의 임대 이적 제시를 거절했었고 기회도 점차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으나 워낙 그 포지션에 선수가 많아 제 자리에서 풀타임을 뛸 수가 없으니 폼이 올라오지를 않았다. 결국 바이에른 뮌헨과의 중요한 경기에서 골대 앞 결정적인 찬스를 트레핑 실수로 무산시키는 모습을 보고는 결단을 내리고 임대를 보냈다고 한다.
  12. 팀 재정 전혀 생각안하는 씀씀이, 더러운 성질, 심한 뒤끝, 선수 보내버릴때 교묘한 언플, 쓸놈쓸, 유스 키우는데 무관심, 베스트 멤버만 주야장천 돌리다 시즌 후반에 DTD까지 비슷한 점이 정말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