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 ||
제1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1917년 10월 23일 ~ 1917년 10월 27일 | ||
장소 | ||
프랑스 말메종 시, 엔 강 | ||
교전국 | 독일 제국 | 프랑스 제3공화국 |
지휘관 | 폰 뵌 에리히 루덴도르프 | 필리프 페탱]] 파울 메스트르 |
결과 | ||
프랑스군의 결정적 승리 | ||
병력 | 7개 사단 | 6개 사단 |
피해규모 | 18000~50000 명 | 12000~14000 명 |
1 개요
종합전술의 시초.
프랑스 전차사단의 대활약 겸 독일 제국 몰락의 첫 단추.
포병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려준 사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 독일 제국군 간의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독일은 서부전선에서의 승리 기회를 완전히 상실 했으며, 훗날의 백일 전투와 함께 독일군에게 프랑스군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된 전투였다. 독일군의 프랑스군 공포증은 전후에도 계속되어 전간기 한동안 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눈치를 보면서 군사행동을 조심스레 하는 일까지 이른다. 독일의 프랑스군 공포증은 제 2차 세계대전시기 프랑스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나서야 비로소 끝나게 된다.
여하튼 다시 1차대전으로 넘어와서 프랑스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말메종 고지를 공격하게 된 이유는 첫째. 니벨 공세에 대한 치욕을 씻기 위함이였고, 둘째. 독일군의 서부 방어선을 무력화할 생각이였기 때문이였으며, 셋째. 1917년 4월 6일부터 전쟁에 가담한 미군이 본격적으로 대규모로 오기 전까지 혹시 모를 독일의 공세 능력을 약화시킬 선제공격이였으며, 마지막 넷째. 영국군과 미군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고, 승전 후 최고지분을 가질 목적이였다.
2 전개
아무 생각없이 진행된 로베르 니벨의 니벨 공세와는 달리, 말메종 공세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움직였다. 일단 프랑스군은 10월 23일 밤, 독일군이 한창 피곤할 틈을 노려 평상시와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가행했다. 독일군도 그 정도의 포격은 평상시에도 항상 있었던 수준인지라 별로 신경쓰지 않고 방심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프랑스군은 포격의 강도를 세 배나 높였다. 평상시에 보지 못한 수준의 엄청난 포격의 화력에 독일군은 우왕좌왕했고 제데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
또 하필 23~24일 날은 독일군 진영 쪽에 먹구름과 안개가 잔뜩 끼여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바람까지 무섭게 독일군 참호 쪽으로 불어댔기 때문에 독가스도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이미 간파한 프랑스군을 독일군 참호를 향해 엄청난 양의 염소가스와 머스타드 가스를 살포하였고, 독일군은 치명타를 입었다.
포격을 계속되었으며 포병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프랑스 보병들은 안전하게 몇 시간만에 3km를 돌파할 수 있었다. 평소 참호전이 1~3km 돌파하는 데에 며칠 간이나 걸리면서 아무 의미없는 소모전이나 했었던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견딜 수 없게 된 독일군이 도주하자 프랑스군은 더 확실히 독일군을 괴멸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투입했다. 생 샤몽, 슈나이더를 비롯해 당시 신개발되었던 경전차이자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전차였던 르노 FT-17이 최초로 투입된 전투가 바로 이 전투이다.
하지만 전투 첫날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왜냐면 포병의 격렬한 포격으로 포탄구덩이가 너무 크고, 너무 많이 생겨 전차가 포탄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의해 격파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안습 심지어 말메종 전투 때에 총 68대 의 전차가 동원되었는데, 그중 40대가 전투 첫날 그런 식으로 별 성과없이 격파되었다. 이뭐병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군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반대로 독일군에겐 전혀 재기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기습적인 포격과 보병 공격으로 무너진 독일 제국군의 떨어진 사기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프랑스군은 남은 18대의 전차만으로도 충분히 남은 독일군 진지와 참호를 주워담으로 진격했다. 전차, 장갑차, 포병, 기관총, 그리고 화염방사기 등으로 중무장한 프랑스군은 속전속결 진격했고, 2년 동안 전혀 무너지지 않았던 말메종 요새는 고작 4일 만에 프랑스군 수중으로 떨어졌다.ㅎㄷㄷ 이 공세로 프랑스군은 니벨 공세 이후로 떨어졌던 자신감을 회복했고, 독일을 보다 동쪽 엘레트 강까지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3 그 이후
이 전투는 가히 포병과 보병, 그리고 전차와 장갑차를 거두로 한 기갑부대의 종합적인 전술이였다고 봐야 한다. 거의 성공적인 종합전술의 시초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전투 이후, 전차를 잘 활용하기만 하면 전투에서 얼마나 큰 효과를 볼 수 있는지 모든 참전국이 톡톡히 깨닫게 되었고, 이 사례는 종전 이후 여러 나라들이 더욱 전차 개발에 혈안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FT-17은 모든 전차의 아버지가 되어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FT-17의 형태를 본따 전차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독일군은 그들이 자랑하던 3중 참호 요새가 고작 4일 만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앞으로 연합군의 공세를 어떻게 막아낼까 노심초사하며 고민하게 만드는 사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슬슬 독일 내에서 승리를 자부하는 독일 군부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된 사건 중 하나였으며, 또한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독일 제국은 전쟁에서의 승리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렸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이 전투는 독일군이 프랑스군보다 더 많은 사단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프랑스군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었던 첫 전투인데, 프랑스군 사망자는 최대 1만 4천명까지 집계되는 것에 비해 독일군은 최대 5만 명 가량 사망하였다고 집계되기도 한다. 이 정도의 피해는 당시 독일 제국군이 감당하기는 너무 어려운 피해였다.
이후 독일 제국군 최후의 공세인 루덴도르프 대공세 때에 잠시 말메종 요새를 다시 탈환하기도 하나, 이미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은 말메종 요새에 대한 공략법을 터득한지 오래였고, 독일 제국군 전체에 대한 공략법도 터득한지 오래였다. 백일 전투 당시 프랑스군은 또 한번 말메종 요새를 탈환하였으며, 독일군은 완벽하게 괴멸되었고 결국 패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