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드라마)

SBS 월화 드라마 (10시)
작별#s-3모래시계
(본방송)
장희빈
SBS 드라마 스페셜(10시)
사랑은 없다모래시계
(본방송)
다시 만날 때까지
SBS 드라마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모래시계
(재방송)
옛 사랑의 그림자
SBS 주말 특별기획
아름다운 그녀모래시계
(재방송)
삼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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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시퀀스.[1]

1 개요

SBS라는 신생 듣보잡 지방방송사를 KBS, MBC에 이은 대한민국 제 3 방송사로 키워 준 1등 공신. 그리고 동시에 정동진역도 자랐다

1995년 1월 10일부터 동년 2월 16일까지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2]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뒤에 5.18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YH 사건 등을 묘사한 첫 드라마이며, 실제의 사건들과 등장인물들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대본과 거장의 연출력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극적으로 그려냈다.

2 제작과 인기

개국 초창기에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던 SBS가 사활을 걸고 제작한 작품이다. 일단 MBC의 김종학 PD를 삼고초려끝에 스카웃했고, 여기에 여명의 눈동자에서 김종학 PD와 호흡을 맞췄던 송지나 작가와 음악을 맡은 최경식까지 영입했다.[3] 감독의 전작이라고 할수 있는 여명의 눈동자에 출연한 배우들 중에 김종학 감독이 싹수를 봤거나 작품에 꼭 필요한 배우들을 데려왔다. 박근형, 정성모, 박상원, 고현정이 그런 배우들. [4] 또, 최민수, 박상원 등 경쟁사인 MBC의 간판 스타들을 통으로 빼오고 이정재, 이승연같은 신인들도 발굴하여 출연시켰다. 손현주도 최민수 부하로 등장. 후반부에 박상원 처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피에타조민수. 누가 알았으랴ㄷㄷㄷ 이중에 연기대상만 최소 다섯 명ㄷㄷㄷ이외에도 김보성의 젊은시절 모습이나, 김을동, 홍경인, 김정현, 김영애, 김영옥 등의 배우와 지금은 작고하신 중견배우분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드라마 팬들에게는 좋은 배우개그 거리.

2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4회 편성으로 방영되었다. 이는 스타 연기자들을 장기간 계약할 수 없었던 점, 동시간 방영하는 타 방송사들의 드라마를 완전히 누르기 위한 의도로 비롯되었다. [5] 결과 평균 시청률 46%를 기록하였다.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때는 최종회로, 64.5%를 기록하였다. [6] 신이 난 SBS는 기자를 모래시계 방송 시간에 서울 거리에 내보내 거리 모습을 보여주면서 '모래시계 보려고 다 집에 가서 서울 시내가 한산합니다' 식의 자화자찬 뉴스를 내보내기도 했다. 기자 : 나도 봐야되는데 입소문으로만 들려오는 모래시계 전설을 들은 지방 비디오 대여점들이 불법녹화 비디오테이프를 들여오는 일도 있었으며, SBS의 이름이 지방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SBS 프로덕션과 당시 외국 게임 유통으로 유명했던 동서게임채널이 공동으로 인터액티브 장르의 동명의 게임을 출시하려 했으나, 어른의 사정 덕분에 나오질 못 했다.

한편, 이 작품은 50부작으로 기획됐던 월화드라마 작별이 2회 이후의 연출자 교체, 세 딸들의 지나친 버릇없음과 시끄러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장용(극중 홍수탁 역)의 인간관계 등이 겹치며 시청률이 기대에 못 미쳤고 설상가상으로 같은 시간대의 MBC TV 미니시리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인기 돌풍 탓인지 한때 시청률이 하락세를 보였지만 94년 늦여름을 고비로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나 SBS는 <작별>을 49회로 조기종영할 방침이었으며 <모래시계>는 1994년 12월 첫 회가 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작별>을 예정보다 빨리 끝내고 내보내기로 했던 <모래시계>가 정치깡패 폭력을 정면으로 다뤄 당장 방송하기 어렵게 되자 SBS는 사극 장희빈을 <작별> 후속 월화드라마로 방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장희빈>이 캐스팅 문제로 어려움을 겪어오자 SBS는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하여 <작별>을 1994년 12월 끝내는 한편 <모래시계>를 먼저 방송하기로 했는데 SBS 측은 95년 1월 초에 내보내는 방안과 지역민방 개국에 맞춰 4월 봄 개편 때 방영하는 두 가지 방안을 검토했으나 월화드라마 <작별>이 94년 12월 말 끝난 데 이어 후속작 <장희빈> 기획이 늦어진데다 수목드라마 사랑은 없다가 부진을 면치 못하자 방송사 전반의 분위기를 일신한다는 차원에서 연초 방영(월~목 4회)을 결정했다.

3 사회에 준 영향

드라마를 가장 잘 보지 않는다는 20~30대 남성이 모래시계를 보기 위해 귀가를 서두르는 통에 '귀가시계'라는 별칭이 붙여졌으며 직장에서도 모래시계가 방영하는 날에는 야근, 회식이 중지되었다고. 이 말은 불금따위는 개나 줘 버렸다는 말이다. 평일 중 모래시계 안 하는 날이 금요일 뿐이니..

모래시계를 방영했을 당시 TV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소문도 있다. 설마 집에 TV가 없어서 모래시계 하나 보려고 TV를 샀겠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모래시계가 방영되던 시간대에 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유흥업소는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난리법석이었다. 그래서 술집에서도 TV를 사다 놓고 입구에 '모래시계 방송 중'이라는 문구를 써놓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가게에 TV가 없으면 일찍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주인도 모래시계를 보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습게도 실제 모래시계도 당시 많이 팔렸다. 제목 덕분에...

극중 보디가드 역인 이정재 덕에 검도 도장은 때 아닌 전성기를 맞았다. 미팅에 나온 남학생들이 벙어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이정재의 인터뷰로는 데뷔초라 연기를 못해서 대사가 줄었다는데, 캐릭터 자체가 한마디도 없다가 한마디 할때마다 명대사라...사망씬에서 전미가 울었다

강원도에 엄청난 관광 수익을 가져 오기도 했다. 특히 정동진역은 모래시계 버프를 제대로 받은 사례인데, 폐역도 검토되던 역이 모래시계에 한 번 나온 일로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혜린의 정동진역 체포씬은 드라마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이 드라마는 뭐가 날리는 씬에서 명장면이 많다...혜린 머리카락이라든가, 태수 어머니 스카프라든가, 태수유골이라든가 고만해) 그 당시 아무 것도 없었던 정동진에 카페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모래시계 때문. 정동진 근처 땅값이 몇십배 올랐다. 드라마 이듬해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인기가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그 사건의 작전반경 속에 있는 정동진이 뉴스에 너무나 자주 나오다보니 인지도를 더 끌어올려서, 두 사건으로 인해 정동진역은 지금도 강릉 최고의 관광지로 거듭났다. 그리고 지역난개발 사례로 수능문제에 실렸다... 보충바람

청소년에게 부적절한 내용이 포함된 이 드라마를 본 일부 국딩들이 우왕ㅋ굳ㅋ하며 조폭 흉내를 내고 장래희망이 조폭이라고 말해서, 조폭미화물이라는 물의가 일기도 했다.

모래시계는 5.18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TV 드라마로, 계엄군의 진압과 당시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그려내어 이를 오해하거나 사건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모래시계는 우연히 광주에 내려왔다 사태에 휩쓸린 태수와 군복무 중 계엄군으로 차출되어 진압부대에 들어온 우석을 통해 당시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다. 당시 광주에는 SBS가 송출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촬영 소식을 듣자 광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엑스트라에 참여했으며, 광주광역시도 시내 주요도로를 촬영 장소로 제공했고[7] 광주 기독병원 등 실제 5.18 당시 주요지역이 실제로 등장한다. 중간 중간에 실제 80년 당시 광주의 영상도 삽입되어 있다.

나름 연기력이 있던 최민수가 이미지와 연기력이 한동안 고정된 것이 바로 이 작품 때문이기도 하다. 최민수에게는 양날의 칼인 셈. 최민수의 터프가이 이미지를 굳혀버린 것이 이 작품으로, 이 이미지는 노인 폭행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라 한동안 활동을 중단한 후의 복귀작인 단편 드라마 <아버지의 집>에서야 비로소 간신히 떨쳐버릴 수 있었다. 정체되어 있던 연기력도 그제서야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또한 최민수가 마지막 사형집행 직전에 박상원에게 했던 대사 "나, 지금 떨고 있니?"는 당시 여러가지 패러디에 쓰일만큼 유명한 대사로 남았다.

작가 감독의 전작인 여명의 눈동자에서 고현정은 생짜 신인에 조연이었으나 모래시계 캐스팅시에는 작별, 두려움 없는 사랑, 엄마의 바다 등으로 메인 여주급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모래시계로 혜린이라는 드라마 여주 사상 희대의 캐릭터를 남기고 레전설이 되…려는 순간, 결혼을 발표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ㄷㄷㄷ 심은하, 이영애의 신비주의는 까놓고 보면 이것이 시초라 보는 기자들이 많다.

배경음악으로 쓰인 러시아의 유명 가수 이오시프 코프존이 부른 백학 역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매우 유명해졌다. 다만, 저작권상으로 완전히 협의가 되지 않았는지 OST 앨범에는 원곡 대신에 "이연"이라는 타이틀의 리메이크 연주곡이 수록되었다. 덕분에 원곡이 수록된 이오시프 코프존의 앨범이 국내에서 꽤나 잘 팔리기도 했다.

여담인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수구꼴통단체인 한국논단에서는 5.18 반란을 미화하고 계엄군을 모독하는 좌빨 드라마이니 뭐니 신나게 욕했다. 여명의 눈동자도 그렇게 욕하며 비난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이뭐병.

다음은 98년 재방송 당시 결방과 시간대 변경 사항이다.

  • 1월 28일 - 설날 특선영화 흑협 편성 때문에 결방됐고 다음 날 9~10회 연속 방영
  • 2월 19일 - 9시부터 <나가노 동계 올림픽> 중계 때문에 10시 45분에 방영됐고 9시 일일극 지평선 너머는 10시에 방송
  • 2월 21일 - 8시 50분부터 <나가노 동계 올림픽>중계 때문에 11시에 방영됐으며 주말극장 아름다운 죄는 10시에 방송
  1. 피아노 선율을 활용한 연출과 이탤릭 명조체 등 화면의 미장센에서 당시 일본 민영방송 드라마의 트렌드가 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모래를 불어 흩날리는 듯한 연출 자체는 이전부터 한국 방송에서도 자주 쓰던 연출법으로, 대표적인 것이 KBS 일일드라마 '울밑에 선 봉선화' 오프닝. 그 외에 APIS 만년필 CF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 기법이다. 참고로 여명의 눈동자 음악을 맡은 최경식이 여기서도 음악을 맡았다.
  2. SBS의 지역민방들이 신설된 후 수도권에 있지 않아 방송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1998년 1월 14일부터 1998년 2월 22일까지 모래시계를 재방영(수~목, 토~일)하기도 했다. 당시에 SBS는 이를 위해 별도의 시사회를 가지기도 했다.
  3. 김종학 감독은 3년 뒤 송지나 작가 없이 '백야 3.98'이라는 작품을 만들었으나 최민수, 이병헌, 심은하, 이정재란 초호화 캐스팅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3.98이라는 농담이 회자됐을 만큼, 처절하게 망했다.
  4. 최재성의 경우는 태수 역으로 물망에 올랐고 감독도 출연제의를 강력하게 했지만 이미 권투에 푹 빠져 있던 본인이 거절했다.
  5. 이 의도는 들어맞아, 결국 당시 MBC에서 방영했던 "까레이스키"는 2.4%라는 굴욕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KBS에서 방영한 인간의 땅, 장녹수, MBC에서 방송된 아들의 여자도 고전했다. 드라마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방영시기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방증한 케이스.
  6. 드라마 방영 당시 SBS는 수도권에서만 방송되었는데, 시청률 조사기관인 미디어 리서치 코리아사(現AGB 닐슨 미디어리서치)는 서울지역 300가구에서만 시청률을 집계했다. 지방에선 시청률 집계가 시작되지 않았다. 단, 지방이라도 위성방송수신기를 달거나 지역RO(일명 중계유선방송)에 가입하면 SBS를 볼 수 있었다.
  7. 단 금남로 시위장면은 금남로가 아닌 계림동 부근 (계림초에서 광주고등학교 사이)에서 촬영됐으며, 광주시외버스터미널 장면도 항쟁 당시에 위치한 대인동 터미널이 아닌 광천동 지금의 유스퀘어에서 촬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