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대공국

러시아의 역사
История Росси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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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화국
소련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연방
모스크바 대공국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국기국장[1]
1283년 ~ 1547년
위치동유럽
수도모스크바
정치체제전제군주제
국가원수Veliky Knyaz(대 공작)
언어러시아어
민족러시아인
국교러시아 정교
통화루블
성립 이전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국명 개칭루스 차르국

1 개요

중세 말기에 설립된 키예프-루시 계열의 제후국 중에 하나로 여러 제후국들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해당하는 제후국이었지만 결국 키예프-루시 계열의 제후국을 모두 통합하고 차르러시아(Tsardom of Russia)을 수립하며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국가이다.

2 몽골 제국과의 관계

'솔까말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라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알려져있으나.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단 주장은 러시아/역사 항목에도 나와 있듯 몽골의 정복을 너무 좋은 쪽으로 해석한 주장이다. 몽골이 러시아에게 가져다 준 영향은 좋은 것만 있지 않고 나쁜 것도 차고 넘친다. 키예프-루시 계열 공국과 동슬라브 문화권의 중심지로 인구가 수만에 달했던 키예프부터 죽은 사람을 위해서 울도록 열려진 눈은 아무 곳에도 없었200여채의 집들만이 남았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써 살아가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철저히 파괴당하거나 학살당했으며, 이후 240년에 이르는 몽골의 지배로 이전까지 러시아를 지배하던 도시국가의 연합체는 아예 소멸당했다. 애초에 키예프 루시 국가 중에서 후발주자인 모스크바 대공국이 두각을 드러내 러시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몽골 제국이 다른 러시아 공국을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때 몽골 제국의 세금 수취 대리를 자처함으로 어느 정도 세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의 지배가 남긴 피해는 당연히 막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일단 문화적인 측면에서 몽골의 침입 이전 러시아는 동로마 제국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할 것은 없는 상황이었다. 설령 하드파워에서 서유럽 국가를 뛰어넘지 못하더라도 소프트파워로 넘어가면 충분히 뛰어넘었다. 중세 유럽의 중화라고 불리는 프랑스가 생산력만큼은 러시아계 공국들을 압도했지만 엄연히 이건 문화적 수준과 별개의 문제다. 긴 시간 동안 가장 생산력이 높았던 국가는 다름 아닌 중국인데 그렇다고 중국이 전 세계 다른 모든 국가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했던가?

프랑스 왕 앙리 1세와 결혼한 키예프 대공녀 안나(1024~1075)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집은 음침하고, 성당은 초라하며, 풍습은 혐오스러운 야만적인 나라라 평가할 정도. 키예프의 공주이니 주관적인 평가로 받아들여도 만약 러시아가 프랑스보다 현저히 떨어졌으면 감히 저런 말이 나왔을까? 당장 러시아는 동로마의 우월한 문화를 존중했다. 어쨌든 몽골 제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갈려나간 이후 러시아는 격심한 퇴보를 겪었으며 이 시기 서유럽에게 추월당한 문화적 흔적은 18세기쯤 이르러서야 그럭저럭 만회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몽골의 침략이 남겨놓은 문화적 피해를 수습하는데 수백 년이 걸린 꼴.

정치적 세력에서조차 몽골 제국에게 정복당했던 후유증은 상당했다. 러시아가 동방(시베리아)으로 확장한 이유 자체가 겨우 수습한 국력 따위로 서쪽의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을 상대하기란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력한 경쟁자가 없는 빈 땅을 향해서 확장한 것이라 봐야 한다. 무엇보다 이전 시대까지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루테니아 지역이 몽골의 정복 이후 자연스럽게 이탈했다.

루테니아는 서방 가톨릭 국가의 영향권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의 발상지인 키예프 역시 반쯤은 서유럽의 영향권으로 들어갔다. 당장 현 시점에서 키예프를 수도로 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서방에 가까워지려는 노선을 취하는 중임을 생각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루시족의 정착 이후 수백년에 걸쳐 개발했던 알토란 같은 영역을 날려먹고 대신 동쪽에서 새로운 영역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가 된 셈인데... 이를 두고 단순히 영토 크기가 넓어졌으니 몽골 덕분에 대제국 러시아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루시 지역이 다시 열강으로써 모습을 드러낸 것은 17세기 후반 표트르 1세 시대 일이다.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났음에도 그 후유증에 200년간이나 허덕거리다가 표트르 대제라고까지 불리는 유능한 왕이 등장하여 겨우 체제와 국가를 정비한 것. 이걸 몽골 덕분 이라고 보는 것은 좀 지나치다.

정리하자면 몽골의 정복 이후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한 차례 박살나고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현재에 이르는 대제국 러시아의 기틀이 생겨난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개편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수습하는데 걸린 수백년의 기간 동안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이 별 관심을 기울일 가치도 없는 시시한 국가로 전락했었다. 이를 두고 '몽골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니냐'고 말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전근대적 신분질서가 일소된 것은 일제 강점기6.25 전쟁 덕분이 아니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의 참상 속에서 한국 사회의 기존 구조가 한 차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근대적 신분질서가 힘을 잃은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한국이 잃은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것을 과연 일제김일성의 덕을 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몽골이 없었어도 러시아는 충분히 강대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걸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러시아 비하이며 또한 몽골 찬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3 역사

원래 모스크바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일부분이었으며 러시아 내에서도 그다지 비중없는 도시 중에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1263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지배자이자 블라디미르 대공[2]이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야로슬라프 3세가 그 뒤를 잇게 되면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아들이자 2세에 불과했던 다닐 1세에게 가장 가치없는 모스크바의 땅을 수여하면서 내쫓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모스크바에도 당시 키예프-루스 계열에서도 왕가로 불리던 류리크 가의 인물이 모스크바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모스크바 공국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닐 1세의 40년 통치기 동안에는 딱 한 차례 콜롬나 지역을 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대외적인 활동이 없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 모스크바는 1238년 몽골족의 침공으로 한 번 불탔고 1293년에는 아예 도시 전체가 탈탈 털리는 사태까지 빚어져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시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몽골의 위협을 피해 숲에 보호를 받고 강을 끼고 있는 조금 더 안전한 지역으로 도시를 옮기면서 어느정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다닐 1세 사후 그의 아들인 유리가 모스크바 공작위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작위를 계승한 유리는 서쪽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면서 동시에 모든 러시아 제후들의 종주권을 지니고 있던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과 친하게 지내면서 러시아 제후들 사이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하였다. 심지어는 우즈베크 칸의 여동생과 혼인을 맺기까지 했는데 그 결과 칸은 유리에게 블라디미르 대공이란 작위를 인정해주었다. 그 결과 유리는 노브고로트 공화국을 비롯한 북서부 지역의 키예프-루시 계열 제후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지를 얻게 되었다.

유리의 뒤를 이은 이반 1세도 아버지를 따라 칸에게 열심히 비비면서 대공작위를 계속 유지하였고, 더불어 모든 러시아 제후국들이 칸에게 바치는 공물과 세금을 걷어들일 수 있는 권리를 따냈다. 덕분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 공물과 세금을 적당히 삥땅치면서(…) 한층 더 자신들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이후 이반 1세의 계승자들은 동슬라브권 통합에 힘썼다. 한편 이 시기부터 역시 같은 지역에서 세력확장을 꾀하던 리투아니아 대공과 라이벌 관계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잘나가던 모스크바 대공국도 1350년 흑사병의 창궐로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공작가가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타격이 더 컸다. 결국 9세의 나이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가 모스크바 공작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공위도 수즈달 공작에게 빼앗겼고, 리투아니아와 무슬림 유목민 등에 둘러싸여 자칫 잘못하면 멍석말이를 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와 적극 협력하면서 세력을 안정화시켰고 킵차크 칸국에 대항하여 러시아의 독립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드미트리는 러시아 정교회의 공권력(…)을 자청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러시아 제후들을 설득하였고 그 결과 결성된 러시아 제후 연합군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 칸이 이끄는 킵차크 칸국을 관광태우는 쾌거를 얻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칸에게 종속된 관계를 청산할 수 있고 드미트리는 돈스코이별명을 얻으며 러시아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하지만 1382년 토흐타미쉬 칸이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역관광당하는 바람에 다시 칸에게 예속된 위치로 돌아갔다.

이 사태로 인해 러시아의 독립이 다소 늦춰지게 되었지만 러시아인들에게 몽골과 맞서 싸워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세워주웠다. 게다가 킵차크 칸국이 티무르 제국에게 털리고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하자, 드미트리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국을 계승한 바실리 1세는 대놓고 칸에게 바칠 공물과 세금을 쌩까기 시작했다. 더불어 리투아니아 대공의 사위가 되어 스몰렌스크를 흡수하면서 발생할지 모르는 마찰을 방지하였고, 동쪽의 니즈니 노브고로트와 북쪽의 볼로그다를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게다가 다른 강력한 경쟁자였떤 제후국들이 계승권 투쟁 등으로 분열되어 가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손쉽게 러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바실리 1세를 계승한 바실리 2세가 반란으로 폐위되어 잠시 대공위를 놓고 혼란기를 겪기도 하였고, 카잔 칸국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포로로 끌려가 장님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굳건히 대공위를 지키면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바실리 2세의 아들인 정치, 군사,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이반 3세가 대공위를 물려받았고, 노브고로트 공국을 비롯한 다른 러시아 제후들을 갈아버리거나 복속시키면서 통합하였다. 더불어 명목상이긴 해도 지속되고 있던 타타르와의 예속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여 통일되고 독립된 러시아의 국가를 완성시켰다. 더불어 이반 3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에 팔라이올로기나와 혼인한 명분을 앞세워 제3의 로마를 자청하였고, 스스로를 차르라 선포하여 모든 러시아의 군주임을 선언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이란 명칭은 이반 3세의 계승자인 바실리 3세와 이반 뇌제 통치기까지 이어졌으나, 이반 뇌제가 1547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아닌 차르국 러시아(루스 차르국)를 선포하면서 러시아란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1. 비잔티움 제국의 쌍두독수리 문양으로 1472년부터 사용.
  2. 당시 러시아 제후들 중에서도 킹왕짱이란 의미를 지녔던 작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