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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터키어 | مراد رابع (Murād-i rābi‘) |
터키어 | IV. Murat |
생몰 | 1612년 7월 26일? 7월 27일? ~ 1640년 2월 8일 |
재위 | 1623년 9월 10일 ~ 1640년 2월 8일 |
1 개요
금연왕이 될 거야!
이 양반을 한줄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본인이 유목제국의 대칸에 걸맞는 개인적 무력과 용병술을 지녔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전사 술탄. [1]
오스만 제국의 제17대 술탄. 아흐메트 1세와 쾨셈 술탄의 아들이며 대표적인 혐연가로 유명하다. 흡연가들의 사신이라 카더라 또한 과감한 개혁가로 유명했는데, 특히 무능한 술탄들이 줄줄이 즉위하면서 문란해진 오스만 제국의 법 체계를 바로잡기 위해 법을 정비했으며 그 법을 어기는 자는 가차없이 처형했다고 한다. 아래에 나오는 커피나 담배 이야기도 그렇고, 처형하는 걸 꽤나 즐겼던 인물인 모양[2]. 1612년 7월 26일 ~ 7월 27일에 오스만 제국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3년 9월 10일, 무스타파 1세가 강제 퇴위[3]당하면서 즉위하였다. 그가 겨우 11살 나이였지만 즉위할 때 내란에 개입된 혐의로 재상 레제프 파샤를 처형하며 왕권강화에 집중하였고 반정 음모자들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벌어지자 손수 군대를 이끌고 철저하게 뭉갰는데 다른 건 몰라도 군사적 지휘에서 상당히 유능했다고 한다[4]. 또한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해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 타브리즈와 하마단을 정복하고 바그다드를 되찾는 등 상당한 전공을 올렸다[5]. 그 밖에도 무굴 제국과도 한판 붙을까 했지만 당시 무굴 제국 술탄 자항기르[6]가 정치적,군사적으로 상당히 유능했기에 지금 맞붙다가 양 측이 엄청난 피해를 본다고 하여 그냥 참았던 적도 있다[7].
군사적인 지휘 말고도 정치적로도 꽤 유능하여 여러 개혁정책을 취했으며 건축학에 흥미가 커서 건축가들을 우대하고 여러 건축 제작에 참여하며 이름을 남겼다. 악랄한 폭군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정치적 역량이나 업적을 보면 폭군이나 암군은 아니었다[8].
하지만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게 담배를 유달리 증오했기에 이 점으로 폭군같이 알려졌다. 그만큼 담배를 매우 싫어하여 부하들을 변장시켜 이스탄불 및 전국 각지에 잠복시켰다고 한다. 적발된 자들은 사형으로 처벌하였는데 처음부터 무조건 죽이진 않고 경고와 같이 막대한 벌금을 먹이며 처음은 봐줬다. 하지만 또 걸리면 그땐 처형시켰는데 약 3만명이 담배를 피운 이유로 사형당했다. 야사에 의하면 무라트 4세가 애용하던 철퇴로 직접 여러번 걸린 흡연자 머리를 으깨어 깨부숴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어쨌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귀족이든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자들은 모두 사형시켰다. 이에 대하여 담배를 개인적으로 싫어한 점도 있었지만 1633년에 있던 이스탄불 대화재가 담뱃불으로 인한 원인도 있었다고 한다. 이 화재로 엄청난 인적,경제적 피해를 봤기에 더더욱 악랄하게 금연 정책을 이뤘다는 분석도 있다. 금연정책 자체는 그렇다 쳐도 무라트 4세가 폭군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는 비단 담배 뿐만 아니라 술에다가 심지어 커피까지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9]. 이 와중에서 커피는 애초에 이슬람권에서는 아침 기도를 드리기 위해 복용하고, 많은 사람들이 술 대신 마신 깊은 전통과 인기를 자랑하는 기호품이었으니 말 할 것도 없고, 금주 정책 또한 엄청 욕 먹었던게 당장 자기 신민들은 술 좀 마시고 담배 좀 폈다고 머리통을 박살내는 주제에 무라트 4세 본인은 상당한 주당이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기독교, 무슬림 신민들에게 공평하게 어그로를 끌어 제국을 통합시키려는 애민의 군주 당시 오스만 황제들의 흔한 취미였던 궁중 터키어로 쓰인 시들을 보면 '흐르는 강물이 포도주가 된다 해도, 짐의 잔을 다 채울 순 없으리라.' 라든가 '술이 참으로 악마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짐이 다 마셔버리겠노라' 라는 소리들을 써놨다 이봐요 아저씨. 객관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질과 업적만 따지면 폭군이라 부르는 건 지나치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 밑에서 백성노릇 해먹기는 더럽게 피곤했던 양반이었던 것 자체는 확실해 보인다.
그야말로 외국인도 용서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프랑스 대사관은 쌩판 씹고 대사관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10]. 관리를 보내 경고하면서 금연을 대사관 안에서도 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를 무시하자 군대를 보내 대사관 안으로 들어가 담배피던 대사관 직원을 잡아 귀를 자르고 프랑스로 추방하게 했다. 당연히 프랑스국왕 루이 13세가 대사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선전포고냐고 분노했는데 무라트 4세는 한마디로 답변했다.
"대사관 직원이기에 특권으로 죽이지 않고 귀로 봐줬던 거요. 프랑스의 명예를 생각한 일인데 왜 이리 분노하시오?"
때론 부하들이 매수당한 거 아닌지하여 자신이 거지로 분장하고 거리에 직접 나가 거리를 둘러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향수가 제법 인기를 끌었는데 담배를 피운 다음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또는 향수 대신에 레몬즙으로 담배냄새 지우는 관습이 이 당시에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터키에서 많이 뿌리는 콜로냐(kolonya)라는 레몬 향수는 이때 생겨났는데 이것 또한 담배냄새를 지우고자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들은 흡연 사실을 적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손이나 입가에 레몬향수를 뿌렸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도 꾸준히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 있었던 것.
사실 무라트 4세가 흡연자들을 이렇게 잡아들였던 이유의 이면에는 마약이 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담배 피우는것을 가장하고 뒤에서는 마약을 흡입하는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를 보다 못한 무라트 4세가 철퇴를 내렸다는 것.
그 밖에 커피도 싫어하여 카흐베하네(카페)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흡연가로서 사형을 시킨 적은 있지만 커피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오고간다. 커피를 마셔서 10만명 이상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담배와 달리 커피는 그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 게다가 당시 오스만 제국이 아랍과 북아프리카 커피 원두를 독점하여 유럽 수출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와중[11]에 이런 금지 정책이 반발도 심했기 때문이다[12].
하지만 커피 금지령도 사실인지라 반발이 심했다. 담배와 커피는 오스만 제국에서 다양한 계층이 즐기던 기호품이었던 반면에 무라트 4세는 이슬람에서 금지하던 술을 즐겨마시던 애주가였기에 무함마드가 금기시하는 술을 처먹는 주제에 그동안 문제시하지 않던 담배와 커피를 금기시하는 악마라는 비난에 처했다. 그것도 그 당시 술이라고 해도 그래도 무함마드도 즐겨마신 대추야자술은 음료로서 술이 아니라고 이슬람 종파에 따라 즐겨 마시기도 하고 문제시하지 않았지만 무라트 4세는 이슬람권에서 이브리스(악마)가 건네준 타락의 상징인 포도주를 유달리 즐겨마셨으니 신학자들이나 보수층에서 미치도록 분노했음은 당연했다. 더 웃긴 건 이런 비난에 이 양반이 한 변명이 예술이란 거다.
"포도주가 너무나 악마이기에 짐이 그걸 모두 마셔서 백성들이 그걸 못 마시게 하며 보호하는 것 뿐이다"아니, 좋지 않은가
사람 기호품 가지고 황제란 양반이 수도에서 시민들을 족치고 있는데 막상 본인은 저런 개드립이나 치고 있으니 군주로서의 능력 자체는 아무리 좋아도 당장 신민들이 좋아할만한 지도자상이 아니었다는 건 확실하다. 게다가 정복과 팽창으로 일구어낸 대제국의 황제 답게 훌륭한 군사적 능력을 가진거 자체는 좋은데, 17세기 중반이면 오스만 제국도 이미 역사가 350년 가까이 됐고, 지도자 개인의 무력을 통한 카리스마로 굴러가는 유목 제국에서 한자리에 눌러 붙어 체계적인 법전과 훈련 된 관료들의 법치로 돌아가는 정주민의 법치 제국으로 변신한 지 이미 한참 지난 때다[13]. 그리고 무엇보다 술탄들이 먹고 살았던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의 동로마 시절 부터 물려 받은 뿌리 깊은 세련되고 세계시민적인 도시 문화가 어디 간 것도 아니고, 이 시점에서 술탄이 수도에서 매일 보던 제국의 핵심 엘리트 가운데 적어도 절반 가량은 말타고 노략질하며 활 쏘던 아나톨리아 튀르크족이 아니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발칸 반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14]. 즉 아무리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는 하더라도 이들의 기본적인 문화적 성향은 '노략질하며 활 쏘던'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15세기 초반이라면 몰라도 17세기 중반의 황제란 작자가 콘스탄티니예 시가지에서 말타고 활쏘며 사냥대회 열고 유목민 코스프레하는걸 동시대 신민들이 좋게 생각했을리가 없다. 결국 이런 저런 동시대 수도의 문화적 조류에 반대되는 본인의 개인적이고 상당히 작위적이기까지 한 성향을 강제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능력 자체는 뛰어났지만 인기는 없었던 경우다. 무라트 4세의 치세보다 백년 전 사람이긴 하지만 마키아벨리를 인용하자면 전형적인 두려움에 기반한 존경은 받아도 사랑은 받지 못한 군주상이다.
결국 음주가 문제가 된건지 1640년 2월 9일, 28살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일찍 죽어서 후계자가 없었기에 아우 이브라힘 1세가 술탄으로 즉위했다. 이브라힘 1세도 담배를 싫어하여 형의 금연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그는 술을 싫어하고 커피를 즐겨마셨기에 커피 금지정책을 폐지했다. 그리고 이브라힘 1세가 1648년 33살 나이로 병사하고 그 뒤를 이어 재위한 메흐메트 4세는 골초였기에 그는 제위하자마자 담배 금지령을 없애고 당연히 흡연율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 관련 문서
(영어 위키백과)Murad IV
(네이버 지식백과-사물의 민낯)담배
3 관련 항목
- ↑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오스만 황제들이 주로 내세웠던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와 시리아, 이집트 장악 이후 역시 내걸기 시작한 이슬람교의 칼리파로서의 권위 말고도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징기스칸과의 연관성 또한 강조하며 전통적인 유목 제국의 칸위 또한 주장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들 중에서 크림 한국의 칸은 가장 상석을 차지했다
- ↑ 다만, 쉴레이만 대제의 아버지이자 이쪽도 명군이라고 할 만한 인물인 셀림 1세도 그랬다.
- ↑ 무스타파 1세는 재위 1년만에 강제퇴위당해 별궁에 갇힌 채로 살다가 1639년 48살로 사망했다.
- ↑ 60킬로그램에 달하는 둔기를 한 손으로 휘둘렀고 50킬로그램짜리 대검도 애용했다는데, 오늘날에도 톱카프 궁전 박물관에 그가 쓰던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또한 맨손 격투에도 등해, 여럿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덧붙여, 오스만 제국의 역대 술탄 가운데 몸소 전장에 나가 군대를 지휘한 것은 무라트 4세가 마지막. 참고로, 무라트 이전에 몸소 군대를 지휘한 술탄은 쉴레이만 1세다.
- ↑ 본 항목에는 아래에 나오는 커피와 담배 이야기가 길게 쓰여 있지만, 그런 에피소드보다는 이런 쪽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백여년만에 몸소 지휘봉을 잡은 술탄이었고, 그 전공도 적지 않았으니까.
- ↑ 인도 역사상 대왕으로 추앙받는 악바르 대제의 후계자이다.물론 악바르에 가려진 점도 있지만 역시 그 후계자답다는 평이 많다. 무라트 4세가 제대로 본 건데 이 때 무굴제국과 전면전 벌였더라면 오스만 제국은 더 일찍 쇠퇴했으리라는 분석이 많다.자항기르는 1627년 죽었지만 뒤를 이은 샤 자한도 꽤 유능했다. 참고로 샤자 한은 그 유명한 타지마할을 만들게 한 군주이다.
- ↑ 이후 무라트와 샤 자한은 사절을 통해 문화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 샤 자한은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들을 파견해주기를 요청. 이에 무라트는 두 명의 건축가를 파견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우스타드 이사(Ustad Isa)가 수석 건축가로서 타지마할 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 ↑ 어려서 즉위한 탓에 십수년간 정권을 농단하던 관료들과 외척들을 손수 척결하고 황권을 강화한 것 하나만으로, 평가할 가치가 있다. 위에서 이름만 나온 무스타파 1세를 비롯, 이 시기의 다른 술탄들에 비하면 오히려 오래간만에 명군이 나왔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
- ↑ 원칙적으로 무슬림들은 음주를 하면 안되지만 오스만 황실이 기원한 튀르크계 유목민들 자체가 한지에서 오랜 기간 추위에 노출되는 삶을 사는 만큼 음주에 너그러운 편이었고, 오스만 지도부가 유목 생활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받아 들이고, 포도주가 생필품인 유럽과 깊게 외교적,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하다 보니 오스만 제국의 음주 정책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널널한 편이었고, 바예지트 1세나 셀림 2세 같이 당장 본인들이 앞장서서 주당이었던 술탄들도 많았다. 당장 술 구하기도 매우 쉬웠던게,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 인구의 절반이 그리스인이었던 시절이라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리스인 동네에 가서 술을 마시면 그만이었다. 다만 술 취한 사람에 대해 좋지 않게 바라보는건 이슬람교나 정교회나 마찬가지라, 만취한 상태로 술집에서 뻗었다가 깨어나보니
새우잡이어선이나 갤리선(...) 노예가 되어있는 모습도 흔했다고 한다. 술집 주인과 동네 깡패들이랑 이런식의 인신매매 커미션도 흔했다고. - ↑ 관련이 있는가는 불명이지만, 당시 프랑스는 백여년 동안 오스만 제국과 우호조약을 맺어온 나라였다. 처음에는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황가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동맹을 체결했으나 합스부르크 황가가 한물 가자 오스만과의 군사동맹은 통상조약으로 바뀌었고, 프랑스가 가장 활발하게 무역하던 나라가 오스만이었다. 즉 동맹국 버프(?)를 믿고 쌩깐 것이었겠지만, 무라트에게는 동맹국이라고 봐주는 건 없었다
- ↑ 1697년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에게 중립을 지켜주는 조건으로 준 선물이 바로 커피 원두였다! 루이 14세는 엄청 좋아하면서 선물을 받아들였을 정도인데 당시 커피 원두는 무지 비싼 기호품이었기 때문이다. 오스만군 침략을 겨우 막아낸 오스트리아에서도 오스만군 전사자들 시체를 뒤져 나온 커피 원두를 서로 가지려다가 방금 전의 전우가 서로 칼을 뽑아들고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 ↑ 한편, 카페를 금지시킨 건 커피를 싫어했다기보다도 카페가 정치적으로 불온한 세력들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근대 유럽에서도 카페나 술집 등에서 혁명을 논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하면, 방법이 조금 과격하긴 해도 경계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 한편 당시 이스탄불의 커피숍들은 대부분 예니체리들에 운영되고 있었고, 그들의 중요한 부수입이자 때때로 반란의 근원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예니체리들을 경계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설도 있다.
- ↑ 물론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는 없지만, 오스만을 '정주민의 법치 제국' 으로 바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흐메트 2세다. 그의 치세에 데브시르메 징집자들이 처음으로 재상직에 오르는 등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제가 마련되었고, 관습법이 처음으로 성문화되었다. 쉴레이만 대제가 입법자라고 불리지만, 그는 없던 법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문법이든 관습법이든 이전 황제들의 법이나 명령을 상당히 참고했다.
- ↑ 이전 버전에서는 비잔틴 제국이나 발칸 반도의 귀족들이 문화적 문화적 자부심을 가지고 비잔틴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스만 제국의 지배층이 되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꽤 곤란한 표현이다. 우선 문화적 자부심을 느끼자면 튀르크 문화와는 다른 문화가 유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런 게 있었을까? 건축물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고, 쉴레이만 대제를 필두로 한 여러 황제들이 제국 전역의 솜씨 좋은 예술가들을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불러들여 후원한 결과 비잔틴 문화와 튀르크 문화, 이슬람 문화가 서로 뒤섞이게 되었다. 한편 비잔틴의 후예라는 부분을 살펴보면,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인만 골라서 등용한 것도 아니고 세르비아나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은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지만 저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이라면 혹시 모를까, 세르비아인이나 불가리아인이 스스로를 비잔틴 제국의 후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할 것이다. 또 그리스인들도 비잔틴 제국의 후예라고 생각했을지는 의문인데, 오늘날의 한국인 가운데 '우리는 조선인의 후손' 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혹 있겠지만 '나는 조선 사람'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