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칸국

(크림 한국에서 넘어옴)
킵차크 칸국의 계승 국가
백장 칸국이흐 칸국 · 아스트라한 칸국 · 카잔 칸국 · 크림 칸국 · 카심 칸국
청장 칸국노가이 칸국 · 시비르 칸국 · 우즈베크 칸국 · 카자흐 칸국
크림 칸국
Qırım Hanlığı
국기국장
1430년~1783년
위치크림 반도 북부
수도바흐치사라이
정치체제칸국,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언어크림 타타르어
오스만 터키어
민족크림 타타르인
터키인 등
종교이슬람
성립 이전킵차크 칸국
테오도로 공국
멸망 이후러시아 제국

1 개요

Crimean Khanate. 1430년, 킵차크 칸국의 시조인 칭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의 동생의 후손인 하지 기레이가 세운 나라. 1771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보낸 러시아 군대가 정복할 때까지 하지 기레이의 가문이 통치했다. 크림 칸국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남부와 크림 반도 인근을 지배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림 타타르족이 바로 크림 칸국의 후예이다. 중세 몽골 시절 타타르 부족의 후예이기도 하다.

2 역사

크림 칸국의 주민들 일부는 크림 반도에 세워진 도시에 정착해 살았으나, 칸국의 구성원인 타타르(투르크계 민족)족들 대부분은 여전히 선조들처럼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들의 선조는 원래 몽골 고원의 일원들이였다. 칭기스 카한이 몽골을 통합 후, 그들은 장남 주치를 따라 서진하여 킵차크 한국으로 이동했다. 오늘날 그들은 크림 타타르인들이 되었다.

하지 기레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하지 기레이의 여섯 째 아들인 멩글리 기레이는 제노바 인들과 손을 잡았다가 크림의 도시인 카파로 쳐들어온 오스만 제국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하는 속국이 될 것을 맹세했고 그 덕분에 잡힌 지 2년 후에 풀려났다.[1]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글리 기레이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그 이유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족들이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이 그들을 상대할 때, 조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 의존한 결과, 크림 칸국은 다른 형제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각각 러시아에게 멸망당할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2] 크림 칸국의 위상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얼마나 높았는지,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와 Simon Montefiore 의 Prince of Princes: The Life of Potemkin. London, 2000 에 따르면 오스만의 왕통이 단절될 경우 제국의 술탄위를 기레이의 가문이 이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기레이의 가문이 로마와 동로마에 이어 국제적으로 황제의 가문으로 인식되는 징기스칸의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일은 없었지만 참조 그만큼 크림 칸국의 위상이 높았다고 보면 되겠다.

1571년, 크림 칸국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기습하여 크렘린 요새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약 10만 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를 깨뜨린 원흉은, 러시아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즉 부동항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 발트 해에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흑해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흑해 북쪽 해안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했던 것. 이에 신하국의 멸망을 좌시할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투르크 전쟁(줄여서 러-투전쟁)의 시작이다.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패배. 영토 일부를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3]. 크림 칸국의 마지막 칸 샤힌 기라이는 서구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 등 근대 국가로의 발돋움을 꿈꿨다.참조

하지만 1783년, 러시아는 '독립국' 일 터인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한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조약 위반이라며 러시아에 항의했지만,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항의에 총칼로 답변. 이에 1787년부터 1792년까지 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역시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고, 그로써 오스만 제국은 또다시 영토를 러시아에 할양함은 물론 크림 칸국의 영토가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족으로 마지막 칸이었던 샤힌 기라이의 최후 또한 좋지 않았다. 1783년 러시아군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1787년까지 감금당하다가 이후 감금에서 풀러나 태어났던 에디르네로 돌아오지만 이내 러시아 군을 끌여들였다는 죄목으로 오스만 정부에 의해 채포되어 이스탄블로 끌려가 같은해 로도스에서 참수되고 만다.

근데 러시아로서는 나름대로 이게 생존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 부동항이고 뭐고 떠나서 크림 칸국의 주요 약탈지가 우크라이나 혹은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특히 약탈 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예였는데, 오스만 혹은 아랍에 공급되는 백인 노예의 상당수는 크림 한국이 강제로 잡아온 러시아인 노예였다. 이들의 등쌀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방비를 위해 방책을 세우는 등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으며, 연인원 백만 명 이상이 노예로 잡혀갔을거라는 추정도 있다. 싸그리 안쫒아낸게 용할 지경이다.

이후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들은 제정 러시아 정부와 중간관리자로 파견한 타타르스탄 카잔의 타타르 관리들 사이에서 이중으로 시달리며 19세기에 들어 몇차례 대대적으로 고향에서 시베리아나 카프카스, 오스만 제국령으로 강제 추방 당하다가 20세기 들어와 러시아 혁명도 지나고 스탈린시절에 위험 민족으로 낙인 찍혀 아예 민족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며, 이 와중에서 1/4 정도가 굶거나 얼어 죽는 큰 비극을 겪었다. 소련이 망한 이후에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타향살이[4] 하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유로마이단돈바스 전쟁을 겪으며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꿀꺽 하면서 다시 위태로운 상황이다. 당장 가시적인 폭력을 동반한 박해를 다시 시작했다는 확증은 없지만, 일단 우크라이다 중앙 라다(의회)에서 크림 타타르인들을 대표하며 쿠릴타이 의장이었던 무스타파 체밀레프는 터키에 출장 가 있는 사이 러시아가 집어먹은 크림 공화국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가 떨어지며 졸지에 망명객이 되어버렸다. 카잔아스트라한에 살던 타타르인들은 이반 뇌제가 잔인하게 정복하긴 했지만 차차 러시아 제국 내에서 대우도 좋아지고 어느 정도 자치권도 인정 받았으며, 이는 현대 러시아에서 존중하는 반면, 크림 타타르인들은 워낙 근대까지 지속적으로 러시아와 싸워와서 특별히 더 미운지 계속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박해하는 모양세이다.

3 군사 및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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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림 칸국의 수도였던 바흐치사라이(현재 크림 공화국)에 남아있는 칸의 궁전. 바흐치사라이는 크림 타타르인 비중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크림 칸국의 주민들인 타타르족들은 평상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군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때가 오면, 급히 소집되었다. 그들은 옛날 몽골 제국의 군사들처럼 십진법에 따라 조직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각자 코스(kos)라고 불리는 열 명의 분대에 속했고, 각각의 코스에 타타르인들은 소집이 되면 자신의 말과 호루라기, 해시계, 송곳, 부싯돌, 바늘을 포함한 장비들을 스스로 장만해서 갖추고 나타나야 했다.

이 코스들은 모여서 백 명, 천 명, 혹은 만 명까지의 부대가 되었다. 종군할 때, 타타르 병사들은 오로지 기장이나 분말 상태가 된 고기와 마늘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들은 또한 행군하다가 심하게 다치거나 죽은 말의 고기를 작게 잘라서 자신이 타는 안장 밑에 넣어두었다가, 따뜻해지면 날로 먹기도 했다.[5] 자신들의 조상처럼 그들도 굶주림과 추위를 견뎌내는 강인한 전사들이었다.

크림 칸국의 칸들은 천 명이 넘는 수행원을 거느렸고, 궁정의 대신들과 하급 귀족들은 그보다 적은 수의 수행원들을 보유했다. 이 수행원들은 직업적인 군인과 비슷한 것으로, 출정을 위해 전 백성들에게 징집된 국민을 보강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칸에게 직접 충성한느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족을 통치하는 부족장이나 귀족에게 충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림 칸국의 칸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귀족과 부족장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크림 칸들은 몽골제국의 대칸들처럼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칸이 이끌 때의 병력은 8만이나 그 이상에 달했다. 칸의 형제인 칼가들은 5만 명을 거느리고, 칼가의 부장인 누르 알 딘은 4만 명을 지휘했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의 공격은 영토를 얻기 위한 정복이 아니라, 대부분 약탈을 위한 것으로서 그들의 병력은 그보다 더 적었다.[6]

대부분의 타타르 군대는 활과 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이지만 화승총을 가진 병사들도 있었다. 칸은 6백 명의 총병을 20개 중대로 나누었고, 출정한 경우에는 그만큼을 다시 모집했다. 총병은 두 발로 걸어다니며 싸웠지만, 이동시에는 대부분 말에 타서 기동성을 높였다.

타타르인은 출정할 때, 개인당 최소한 말 세 필은 가져와야 했다. 프랑스인 여행가인 기욤 보플랑은 그가 직접 크림 칸국을 방문하여 목격한 1630년대, 자신의 책에 크림 타타르인들의 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 그들(타타르족)이 바크마테스라고 부르는 말은 몸체가 길고 추하게 생겼으며, 야윈 데다 갈기는 무성하고 꼬리는 길게 땅까지 늘어졌다. 그 대신, 속도가 빠르고 이동 중에는 지치지 않아서 자신을 태우고 있는 기수를 온종일 속도를 늦추지 않고 나를 수 있었다. 또, 겨울에 눈으로 덮인 땅에서도 나뭇가지나 식물의 싹, 짚 등 먹을 수 있는 먹이들을 발굽으로 눈을 헤쳐 찾아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타타르인들이 작고 야윈 바크마테스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플랑에 따르면 부유한 타타르인 족장들은 투르크와 아라비아에서 들여 온 좋은 말들과 경주용 말까지 따로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별다른 갑옷이나 투구를 걸치지 않았지만, 부유한 타타르인들은 투구를 쓰고 사슬 갑옷을 입었다. 라멜라 아머나 브리건딘(사슬 갑옷) 같은 갑옷 대신에 사슬 갑옷을 사용한 것은 서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타타르인들의 주요 무기는 합성궁이었고, 보플랑에 따르면 각자의 타타르 병사들은 18개에서 20개까지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휴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의 몽골인들이 최소한 40개에서 60개의 화살이 들어간 화살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그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합성궁 이외에도 타타르인들은 굽은 기병도와 허리에 찬 단도, 또는 굽은 단도와 창과 방패를 휴대했다. 드물었지만 권총이나 화승총 같은 화약 무기도 소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타르인들은 화약을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생산된 화약들은 오스만 제국에 수출했다. 그들은 총기의 느린 장전과 연사 속도 때문에 총보다는 활을 더 선호했다.

귀족들은 자기 말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죽으로 만든 긴 양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보통 크림 칸국의 말들은 발굽에 편자를 박지 않았다. 그래서 타타르족은 눈으로 말발굽을 보호할 수 있는 겨울에 원정을 떠나기 좋아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눈이 없는 건조한 겨울에는 원정을 하지 않았다.

타타르족은 강의 폭이 아무리 넓어도 강을 건널 수 있었는데, 병사들은 갈대로 뗏목을 만들어 그 위에 장비들을 놓고, 말꼬리에 묶어서 말들을 주인들의 인도하에 강 건너편으로 헤엄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칸과 귀족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타타르족은 전원이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고 느린 병참로가 없어서 진격 속도가 굉장히 빨랐는데, 1689년 카플란 기레이가 거느린 타타르 군대는 늪이 많은 지형에서 엿새 동안 190킬로미터를 진군했다.

타타르의 말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기수가 말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소변을 보지 않았다. 군대의 정지 신호와 행군 신호는 모두 호루라기로 내렸다. 타타르 병사들은 밤새 엄밀하게 망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기습하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장소가 좁은 곳이나 강어귀의 수로가 아니라면 그들을 패배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약탈이 끝나면 타타르 병사들은 약탈한 물건을 수레나 말에 싣고 다시 본국으로 귀환했다.
  1. 오스만 복속의 대우는 상당히 좋았던편으로 동전을 주조하고 고유의 문장과 법을 사용하는등 독립이나 다름없는 자치를 누렸으며 칸은 제국의 재상위이자 술탄 다음으로 2인자 취급을 받았다. 후에 칸의 반란으로 위치가 강등되기는 하였으나 재상과 동급이 된것뿐이었다.
  2. 물론 그 대가로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 크림 칸국은 군대를 보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크림 칸국이 보낸 타타르 기병대는 오스만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3. 다만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칼리프를 겸했고 크림 칸국은 이슬람 국가였기에, 종교적인 영향력은 남았다.
  4. 공교롭게도 고려인들과도 강제 이주 당한 지역이 비슷했다
  5. 이것이 타르타르 스테이크의 원조이다고 한다.
  6. 주요 약탈 대상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밑 그들에게 복속된 코사크 족이었다. 단 코사크 족은 크림 칸국에 대한 약탈원정을 여러번 벌이기도 했다. 솔직히 사회경제적인 실질적 생활상의 역사적 발전으로선 타타르와 코사크는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끊임 없이 닮아가며 서로를 만들어 준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동유럽 스텝 초원의 막장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