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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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보리밭같은 머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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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白石, 1912년 7월 1일 ~ 1996년 1월)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와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1]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2]

1 개요

한국시인, 작가. 평안북도 정주 출생이다. 일제강점기인 청년기에 문인으로서 활동하였다.

본명백기행[3](白夔行)이라 알려져 있다.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4]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의 석을 빼와서 썼다고 한다.

과거에는 월북 작가라 해서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 수교한 이후로는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 시의 끝판왕.

2 생애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1 오산학교 시절

1924년 그는 오산 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현재의 오산고등학교(서울)이다.)[5][6]로 진학한다. 어릴 적 장난꾸러기 같던 시절과는 달리 백석은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다. 오산학교 재학생들의 문학에 대한 열정에 영감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7] 이에 백석도 예외는 아니었고 백석은 학과 수업뿐만 아니라 문학 수업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동기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학과 공부에만 치중하는 학생들을 속된학생들로 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백석은 학과 성적도 상위권에 속했다.[8]

독립운동가 조만식도 당시 오산고보에 재직 중이었는데 [9] 백석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아는 백석은 성적이 반에서 3등 정도였으며 문학에 비범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했다. 회화도 썩 잘해 선생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백석은 용모도 준수했지만 나이가 어린 편이었다.(나이가 어렸지만 용모도 출중하고 재주가 비범했다)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고 친구가 거의 없었다.
(후략)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 의전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를 되려고 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한동안은 기회를 얻기 위해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 방응모의 지원을 받아 사범대학 대신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 등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는 청산학원[10]의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한다.

2.2 청산 학원 졸업 이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서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당시 《사슴》의 가격이 2원이었는데, 다른 시집과 비교하였을 때 2배가량 더 비싼 가격이었다고. 그때 쌀 가마 가격이 13원, 고급 양복이 30-40원이었으니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경성문화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내어, 나중에는 구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시인 신경림 씨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하게 되었을 때 매일 품에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몇 번이고 읽고 다녔고 [11] 윤동주의 경우 아무리 찾아봐도 시집을 구할 수 없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적고 다녔다고. 고향이었던 평북지역 방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2.3 여생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북한에서 문학활동을 한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는데 1959년 무렵에 문인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당하고, 1962년 이후로는 아예 북한 문단에서 사라졌다. 그는 그의 선배 김소월의 시처럼 삼수갑산 중[12] 삼수로 가서 평생을 살았다. 1996년 타계하기까지의 반평생에 대해서는 남한에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6년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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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이때가 고난의 행군 때라 노령에 제대로 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여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13] 기사

북한에서 쓴 글을 보면 북한 공산당(정확한 명칭은 조선노동당)을 찬양하는 시를 쓴 것이 많다.[14] 그런데 별로 충격일 것도 없는게, 북한 정권 아래에서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게 워낙 뻔하니까... 정권 단위로 압박하면 개인이 그걸 견뎌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다만 그의 사상까지 정권에 굴복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건 우리 소견은 아니다. 참고로, 그런 체제 찬양시들을 읽어보면 이게 문장은 백석이 맞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백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퀼리티가 낮다. 서정성을 나타내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에서도 결국은 당이 어떻고 하는 구절을 집어넣어버렸다. 역시 강요로 작품을 뽑아낼수는 없는 듯. 링크 아동문학 평론에서는 '사상'만이 아니라 문학성 자체에 대해서도 중점을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정황상 바로 그 직후에 정권 산하 문인단에서 숙청[15]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3 문학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서북방언을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16]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위꼴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백석의 시 <국수>를 읽고 나서 국수가 땡겨서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음식'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 풍속, 생활 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여우난 곬족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 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 고무, 고무 딸 이녀, 작은 이녀
열 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기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구손이하고 ,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4 대표작

5 여담

  • 당시 백석이 살던 동네는 집성촌 이었는데 백인제, 백낙준과 친척이었다. 백인제는 다름아닌 의사양반(...)
  • 당시 말 한 필이 오원 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이 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17].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 번 비교해보자.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별 헤는 밤 - 윤동주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통영을 아주 좋아했던 시인. 통영에 사랑하는 여인인 란이 살았기 때문이다.
  • 여성관계를 찾아보자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거론된다.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18]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이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또는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우리나라의 '영희' '주희' 등과 같이-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 백석의 연애 상대로 김진세(백석의 제자)의 누이, 란(蘭), 자야(子夜)라고 불렸던 기생 출신 김진향 씨가 있다. 본명이 김영한으로 진향은 기명(기생의 호칭). 자야 여사가 호기심에 함흥 시내 번화가로 나들이 갔다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히라다 백화점 책방에서 문예춘추, 여원, 자야오가라는 책을 사가지고 와서 백석 시인에게 보였는데 그때 지어준 이름으로 자야는 백석 시인과 김진향 여사 사이에만 통하는 애칭이 되었다. 여담으로 자야는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 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해서 지금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어 있다.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나.'라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 시인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 바로 백석 평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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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신성록이 백석을 닮았다. 해당 사진은 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 더 많은 사진 트와이스 다현도 백석을 닮은 것 같기도
  •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면 다음 사이트들을 참조할 것.사이트1사이트2 사진자료는 여기에서 참조할 것.
  •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정말 잘 생겼다. 일단 고흐의 보리밭같은 머리스타일만 어떻게 하면.... 키도 큰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게다가 이 분은 근 100년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 생긴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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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년 수능특강 문학에 실렸다. 응앙응앙 부분에서 많은 학생들이 뿜었다. 과연 이걸 수능에서 마주쳐도 뿜을 수 있을까..
  2. 2015년 비상 고2 국어 교과서에 등장.
  3. 이 이름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4.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야 여사와 함께 지내던 청진동으로 시골에서 부쳐 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연(白基衍)이라 씌여 있었다(내사랑 백석 P. 113~114).
  5. 이전 편집 버젼의 오산중학이라는 명칭은 오산고보가 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난 뒤의 명칭이다. 백석 재학 당시 교명은 ‘오산고보’였다.
  6. 참고로 화가 이중섭은 백석의 후배이다. 물론 1929년에 입학했기 때문에 서로 알았을 리 없었겠지만.
  7. 김소월 시인이 백석의 선배였다. 백석보다 6년 앞서 오산고보에서 재학했던 김소월을 김억이 교사로 지도했었는데, 1939년 소월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백석이 김억을 직접 찾아가 그의 습작노트를 받아왔다고..나중에 백석은 <여성>이라는 잡지 에 소월의 습작 <제이 엠 에스>를 지면에 싣게된다. 흥미로운 것은 소월이 백석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간접적인 영향이 되었지만, 백석이 선배의 방식을 그대로 담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월은 민요의 4/4조 운율을 시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백석은 이 보다는 오히려 시의 서사적 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8. 독립운동가가 설립한 학교 답게 일본어 교육에 신경쓰지 않아 일본어 성적은 낮았다고 한다. 이로써 체조에는 소질이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제외하면 15과목 모두 우(75점~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평균성적이 아닌 ‘우, 양, 가’로 등수를 매기다 보니 평균점수가 높았음에도 전교 등수가 낮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오산학교의 인원이 50명 내외였는데 이 중 10등 안에 들면 중상위권이었기 때문.
  9. 1915년 백석의 입학 당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장을 맡게 되었다
  10.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한국의 서강대 정도의 지위를 가지는 학교이다.
  11. 안타깝게도 나중에 박정희 정권 치하 집이 압수수색 당했을 때 책 40권을 압수당했는데 그 중에 《사슴》이 있었다고 한다..
  12.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삼수갑산은 김소월의 시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무척 외진 곳이다. 실제로도 산으로 둘러싸여 무척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
  13. 참고로 그와 청산학원(일본 유학) 당시 동기였던 아시히 시로는 아직도 생존해 있다. 지못미.
  14. 남한에서 구할 수 있었던 글들이 <백석문학전집(전 2권, 서정시학, 2012년)>에 수록되어 있다.
  15. 꼭 죽이는 것만은 아니고 1970년대 이후 사상문제로 협동농장으로 보내지는 것도 포함한다. 장성택 읽어보면 알기 쉬울지도. 물론 그는 말년에 정말 죽음으로 숙청당했지만.
  16. 당대에 이야기시를 구사한 시인으로는 임화 , 이용악 , 백석이 있었다. 단편서사시라고 하기도 한다. 김동환 의 <국경의 밤>은 서사시다.
  17. 어떤 의미에서는 표절 아닌가 싶을 지경인데, 윤동주의 시들중 상당수는 습작시이고 윤동주는 자신의 시를 시집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시'는 윤동주가 죽은 다음에 전에 써놓았던 시들을 긁어모아서 출판한 것이라서 습작들도 모조리 섞여 있다.
  18. 백야-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