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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의 눈 나 좀 보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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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화나 있을 때 찍은 거고 평소는 요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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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개그짤 미국 쪽에선 합성 필수요소
괜찮게 나온 짤 duck face
목차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전 다롄 시장, 전 충칭시위원회 서기. 범죄자.
薄熙來 (박희래)
중국 공산당 원로이자 정부의 재정부장을 역임한 보이보(薄一波)의 아들이며, 혁명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 파벌의 일원으로 아버지 보이보는 이른바 8대 원로의[1][2] 한 사람이라 태자당 중에서도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3] 180cm가 훨신 넘는 장신의 훈남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집안좋고, 학벌좋고, 얼굴까지 잘생긴 공산당의 엄친아. 나이도 2013년으로 예순넷이나 되는데 동안이다.
2 일생
2.1 문화대혁명
이 시기에는 홍위병 조직의 하나인 연동(連動)의 멤버였다. 연동에서는 "뿌리가 붉으면 곧은 싹이 나온다", "아버지가 영웅이라면 아들은 호걸,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은 바보" 등의 혈통론(;;;)을 선전했었다. 사회진화론 돋네. 사회주의랑은 반대노선 아니었냐? 그래서 문화대혁명 당시 아버지가 반동으로 몰려 자신의 '반동혈통'으로 출세길이 막힐 뻔하자 홍위병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두들겨 패 갈비뼈 두 개를 부러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들겨맞으면서도 속으로는 '제대로 정치인의 자질이 있구나'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혈통론 맞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4][5]
38세의 보이보(1908-2007).장수하여 아들 보시라이가 그 덕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보시라이 본인도 아버지의 후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데[6], 밑에서 이 사람의 결혼 생활이 포함된 사건을 보면 이런것도 유전인가 할 정도로 닮았다.
문혁시절엔 정상적인 교육기관이 기능을 정지했었고, 보시라이는 이 시기에 대학도 안가고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2.2 결혼과 이혼, 재혼
이때 같은 혁명공신 리쉐펑의 딸 리단위와 중매로 결혼한다. 이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보시라이는 뒤늦게 베이징대학에 들어갔다.[7] 이 결혼은 6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는데, 이유는 보시라이가 대학을 다니면서 리단위의 오빠의 부인의 동생(그러니까 큰처남댁의 동생) 구카이라이(谷開來)와 눈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미 보시라이와 리단위는 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이혼했다. 아들 왕즈는 다른 여자에게 간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성을 어머니를 따라 리 씨로 바꿨다고 한다.
2.3 출세
어쨌든 구카이라이는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고, 보시라이는 태자당으로 공산당에 들어가 출세길에 올랐다. 보시라이를 출세로 올린 것은 다롄 시장이었다. 이때 보시라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많은 깡패들을 잡아 소탕했고, 반부패운동도 벌여 부패 공무원을 추방했다. 거기다가 시의 미관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다롄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미항으로 꼽힌다. 때문에 보시라이는 퇴임할 때 다롄 시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았으며, 이때의 공적으로 차세대 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 한국도 자주 방문하는 등, 지한파 중국 정치인으로 꼽혔다.
이 당시 다롄 시민들은 축구, 패션, 그리고 보시라이를 다롄의 3가지 보물로 일컫기도 했다.
이때 다롄 공안국장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을 심복으로 두게 되는데, 왕리쥔은 지나치게 저돌적인 성격이었고, 그 덕분에 보시라이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무리수 때문에 많은 적을 두게 되었다. 이런 관계는 후에 악연으로 끝난다.
2.4 충칭 시위원회 서기 / 상무부장
이런 공적으로 랴오닝 성 성장을 역임했고, 이후 세계최대의 도시[8] 충칭 시위원회 서기로 승승장구했다. 이와 함께 로펌을 설립한 부인도 남편이 공산당의 고관이라는 배경에 힘입어 사업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외동아들을 12세부터 영국의 해로 스쿨(Harrow School)에 유학보낼 정도였다.
2004년에는 중앙정부의 상무부장에 임명되어 2007년까지 중앙정부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중국은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다.
2006년 뭄바이에서 인도 공화국 총리 만모한 싱이 "미래는 아시아의 시대가 아닌 자유의 시대"라 중국을 에둘러 까자 다음날 "데모할 자유는 민주주의가 아니다"음?이라는 위엄찬 말로 인도를 공격하며 "민주주의 논쟁"을 일으켰다. 항목 참조. 또 같은 해 중국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중국 제품과 식품은 안전하다"라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기도 했다.
2.5 창홍타흑
이후, 충칭 시위원회 서기로서 보시라이는 창홍타흑(唱紅打黑)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화와 함께 무너져가고있던 공산당 문화의 부흥을 외쳤다. 이에 앞장선 것이 몽골계 심복 왕리쥔이었다.
'타흑'이란 부패한 자를 몰아낸다는 뜻으로 1500명이나 되는 부패·폭력 범죄자를 체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탈법이나 편법이 판쳤다는 잡음이 심하게 일었다. 가령 재력가를 고문하여 재산을 상납하게 하고 중죄인으로 처리해버리는 식으로 축재를 했다고 전해진다. 전임자의 측근도 비슷하게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창홍'은 이른바 唱红歌, 读经典, 讲故事, 传箴言라고, 옛 경전을 읽히고 공산당 문화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으로, 공산당의 선전가를 부르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물론 문자 메시지며 마이크로 블로그 등을 통해 옛 경전의 글귀나 명언 등이 널리 퍼졌다. (공산당 선전과 관련된 문구가 있었던 건 말 할 것도 없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광고가 충칭 지역 방송에서 금지되었는데,[9]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2011년부터 지역 방송국에서 광고를 빼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과 관련된 프로를 틀도록 지시했는데, 관계자들이 '광고가 다 팔렸다'라며 반발했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고 한다. 지도자로써의 싹수가... 빨갛다 (홍콩 SCMP)
또 보시라이는 사회주의적 가치인 분배를 강조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해서 가난한 중국 서민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를 위해서 저가 임대주택을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이것을 '충칭모델' 나아가 '차이나 컨센서스'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포퓰리즘"적인 정책, 즉 민중의 인기를 얻고 공산당의 지도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보여져 정적들의 경계를 샀다.
2.6 왕리쥔 사건
그런데 갑자기 2012년 3월 초, 보시라이는 그동안 타흑창홍을 지휘하던 측근인 왕리쥔을 공안부장에서 해임하고 문화담당 부시장으로 발령냈다. 이는 표면상 승진이었으나 실제로는 실권없는 자리로의 좌천이었다. 이 직후 왕리쥔은 청두 시 미국 영사관을 통해 망명을 시도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말이 많은데, 중앙정부에서 보시라이에 의심을 품고 조사하기 시작하자, 보시라이는 이를 왕리쥔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이를 위해 좌천시켰다가 결국 불안을 느낀 왕리쥔이 망명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왕리쥔은 중국의 기밀정보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으며, 보시라이가 자신을 떨쳐버리려한 것에 분통을 터트려 망명하려했다는 의혹이 널리 퍼졌다.
그렇지만 백악관의 지시로 왕리쥔의 망명은 거부되었고[10], 보시라이는 왕리쥔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치부가 낱낱이 밝혀져서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얼마나 급했던지 보시라이는 외교적 무례는 물론 자신의 관할 지역을 넘는 것 역시 신경쓰지 않고 70대의 충칭 공안차량을 청두로 보내 청두 미 영사관을 포위해버렸다.
당연히 미국측은 미쳤냐며 노발대발했고, 놀란 중앙당에서도 급히 쓰촨성 공안병력을 출동시켜서 충칭시의 공안병력과 대치하게 된다.시빌 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결국 보시라이의 충칭 공안병력들은 철수했고, 이 시점에서 보시라이의 운명은 결정난 것이었다. 왕리쥔은 국가안전부[11]에 연행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된 후에 보시라이의 치부를 까발리기 시작했다.
2.7 몰락
보시라이는 이러한 의혹들이나 자신이 부패혐의의 조사대상이라는 의혹을 부정했다. 하지만 결국 3월 8일, 원자바오 총리가 직접 담화에서 보시라이의 이름을 거론하며 실명 비판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함으로서 보시라이는 치명타를 입었다.
중국 정계에서 문화대혁명은 하나의 금기인데, 비록 현재 주류 세력인 덩샤오핑 계열이 반문혁을 모토로 하고 있기는 하나 문혁을 지나치게 까고 부정하기만 하면 기존의 극좌 세력들이 반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문혁을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라고 규정하여 그의 과오 중 하나에 포함시키긴 했지만 그 이상의 과격한 평가나 파고들기는 하지 않은 채 적당히 거리를 둔 것이다.
헌데 원자바오의 발언은 보시라이의 타흑창홍이 곧 "인민을 선동하여 중국 공산당의 체계를 망가뜨리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행위라고 매우 극단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중국 정치권이 문혁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혁을 좋게 평가해서가 아니라 까고 싶지만 까기에는 부담이 너무 커서일 뿐임을 고려한다면 답이 나오는 문제로, 보시라이는 한 순간에 문혁급의 대형 사고를 친 범죄자로 찍혀 거의 모든 직책과 권력을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
3 몰락의 분석
외부의 관측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가 대중운동으로 권력을 강화하려 하는 보시라이의 행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고 한다. 게다가 보시라이는 앞에서는 반부패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엄청난 재산을 빼돌리고 100명이 넘는 정부를 두는 등의 엽색행각을 벌였음이 들통나서 더욱 위기로 몰렸다. 빼돌린 재산으로 볼때는 사형[12]에 해당하여 보시라이는 차세대 권력 바로 앞에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 했다.
거기다가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아들인 보과과는 영국 명문 해로우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인재인데, 파티나 여자에 탐닉하는 등의 행각을 벌여 안그래도 위태로운 아버지의 위신을 더욱 땅에 떨어뜨렸다. 후에 하버드 교지인 더 크림슨에 "남들이 내가 돈이나 배경으로 여기 입학했다고 하는데, 나는 공부 잘했음"이라는 글을 기고하는 드립을 치기도 했으나...[13][14]
2012년 4월 결국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이후로 별다른 변동이 없던 중국 정치계에서 불어닥친 폭풍이었다. 이젠 같은 태자당으로 꼽히던 시진핑마저도 보시라이를 보호하지 않고 쳐내게 되었다. 다만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태자당 내에서는 정적 같은 관계로 평가되기도 한다.애초에 문화대혁명 중에 죽도록 깨진 시진핑이 골수 홍위병 종자 보시라이를 좋게 볼 리가 없지 않나
3.1 드러나는 비리와 부패
게다가 사설 도청조직을 운용하여 주석인 후진타오를 도청하려 했다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을 벌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한국으로 치면 일개 도지사가 대통령을 도청한 셈.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도 저 정도로 대형 사고를 치면 절대 무사하지 못한다.
3.2 구카이라이의 살인 및 도덕적 타락
또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체포되었는데,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 부부와 가까운 사업가였으나 최근 이권으로 다투고 있었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청산가리로 독살하고 보시라이는 그것을 은폐하는데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충칭의 한 호텔에서 구카이라이의 부하들이 헤이우드에게 강제로 청산가리를 먹였다고 한다. 헤이우드를 죽인 이유는 헤이우드가 보시라이 일가의 재산을 빼돌리는데 일익을 담당했는데, 중앙정부가 헤이우드를 조사하면 자신들의 치부가 모두 나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시라이가 지배하는 충칭의 공안국은 헤이우드의 시신을 검시도 하지 않고 자살로 결론을 내서 서둘러 화장했다고 한다. 헤이우드는 전직 MI-6 요원이었으며, 이때문에 영국 정부에서는 헤이우드의 죽음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중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보시라이의 비리혐의가 포착되어 일련의 사건이 벌여졌다고 한다.
게다가 헤이우드와 구카이라이가 불륜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보과과가 영국에 유학갔을 무렵 아이를 뒷바라지한다고 영국을 장기방문해서 헤이우드와 호텔에서 동거했다고 한다. 남편은 100여 명이 넘는 정부를 두고, 아내도 맞바람에, 엄청난 부패혐의까지, 참으로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와 내연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는 다롄 방송국 여자 아나운서 장웨이제[15]를 남편 보시라이의 묵인 하에 납치 살해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현재 장웨이제는 2000년대 초 이후 장기 실종 상태로 행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이외 인체의 신비전에 나온 임산부 시신 중 하나가 장웨이제와 비슷해 보인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6] 다만 해당 전시회에 나온 임산부 시신이 장웨이제의 것이라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고[17] 이외 다른 물증도 전혀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이라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4 결과
2012년 8월 결국 판결이 나서 구카이라이는 사형에 2년 집행유예형[18]이 확정되었고[19], 충칭시 서기 자리를 빼앗긴 보시라이는 재판을 앞두고 있다. 그가 받은 돈의 액수가 워낙 커서 당적 박탈과 함께 20년에서 무기징역은 감수해야 한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보시라이의 인생은 사실상 끝났다, 부패사건만 드러나지 않았어도 5세대 지도 체제에서 서열 7위, 실질적으로는 3~4위 정도는 떼어놓은 당상이었고 더 출세할 수 있었지만 부패 때문에 몰락했다.
2013년 구카이라이 재판이 일단락 된 이후 보시라이에 대한 재판도 열렸는데, 부부가 법정에서 자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서로 불리한 증언을 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보시라이는 구카이라이가 문제가 된 왕리쥔과도 내연관계였다고 폭로하고,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부패행위를 증언하는등 법정에서 콩가루 부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다만 위에 언급한 장웨이제 사건에 대해서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고 별도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2013년 9월 결국 보시라이는 부패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후 항소도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물론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도 모두 몰수. 보시라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보시라이는 시진핑과 리커창에 버금가는 위치였으나, 이제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다만 앞으로 수감생활을 할 고위층 전용 감옥은 호텔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듯. 중국에서는 어지간히 죄질이 나쁘면 거의 무조건 사형이고 대신 나머지는 형량을 가볍게 하는 구조라 무기수도 15~20년이면 출소가 가능한 관계로 훗날 어떻게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보시라이의 나이도 2014년 기준으로 65세로 이제 적은 편이 아니라 사실상 정치적 활동은 끝이 났다.
그의 형량은 이후 고위급 인물의 정치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의 상한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저우융캉도 역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5 여담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는 덩샤오핑 시절 부정부패 혐의를 받았던 장쩌민을 구해준 바가 있다. 장쩌민은 이후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중국의 지존의 위치에 올랐고, 생명의 은인인 보이보에게 자신이 반드시 보시라이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장쩌민 시절에 보시라이가 잘나가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 아마도 이렇기 때문에 보시라이에게는 극형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버지가 건국의 1등공신인데다가 아무리 물러났지만 장쩌민은 상하이방의 후견인이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3대 계파인 보시라이가 속한 태자당과 상하이방 모두 보시라이를 적어도 최악에서는 구할 것이라고 예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뻔뻔함은 태자당과 상하이방조차 질리게 했는지 결국 그는 2013년 9월 22일 무기징역 및 정치적 권리 종신 박탈을 선고받았다. 사실상 사회로부터 영구적으로 격리된 셈. 그래도 중국 기준으로는 100% 사형감인 그가 아내 구카이라이처럼 사형 집행유예도 아니고 그냥 무기징역을 받은 점을 볼 때 보시라이가 얼마나 거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김용옥의 주장으로는 반대로 보이보가 장쩌민을 숙청하려고 했어서 안 좋게 봤다고 한다.
인터넷 검열이 심한 중국에서는 네티즌들은 보시라이라는 이름 대신 그의 엽색 행각을 풍자한 '보치라이(勃起来)- 발기하다'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아니면 불후선생(不厚[20]先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시진핑 정부 들어서, 전임 상무위원이었던 저우융캉이 비리혐의로 무기징역을 받는등, 고위층이 연루된 중국의 부정부패는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한때 중국 슈퍼 리그의 명문팀 다롄 스더 서포터들이 제일 존경했었지만 현재는 제일 증오하는 인물이다. 이 작자덕택에 다롄 FC=>다롄 완다=>다롄 스더로 이어지는 역사속에 중국 슈퍼 리그 초창기부터 중국 최고의 명문팀이 되었지만, 후에 빵에 들어가면서 이분의 돈줄역할하던 스더그룹 쉬밍회장도 잡혀가고[21] 동시에 스더그룹까지 몰락하면서 다롄 스더 축구팀도 같이 몰락, 끝내 같은 연고팀 다롄 아얼빈에 흡수당했기 떄문.- ↑ 8, 90년대 중국 공산당을 이끈 여덟 명의 원로를 말하며 덩샤오핑, 전 국가주석 양상쿤, 역시 전 국가주석 리셴녠, 저우언라이의 아내이며 혁명의 여성 원로인 덩잉차오 등이 포함된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니 보이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 8대 원로는 사람에 따라 조금식 다르게 말해지기도 하는데 보이보는 덩샤오핑, 양상쿤, 천원 등과 함께 어떻게 따져도 8대 원로에 반드시 포함되는 거물이었다.
- ↑ 태자당과 대비되는 파벌로 공청단, 상하이방파가 있으며, 전 주석이었던 후진타오와 장쩌민은 각각 공청단, 상하이방이다. 후계 주석으로 낙점된 시진핑은 태자당에 속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한 인물이 양쪽에 걸쳐있기도 하다. 위의 구분과는 별도로 공산당 지도급 인사들 상호간의 관계는 천차만별이라서 체계를 갖춘 정파보다는 인맥에 바탕한 느슨한 연대 정도로 보는게 좋다.
- ↑ 차라리 두려움에 제 한몸 살고자 연극으로서, 생존수단으로 그랬다면 정당화라도 되련만, 이 시기 홍위병 엘리트들은 그래도 이런 미친 짓거리를 막으려고 시도를 할 정도의 양심과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이런
모범을 보인패륜 직후에 앞장서서 다른 '반동' 출신 홍위병들을 공격했다. 미친거다. - ↑ 그러나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히면 가족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부러 다른 가족을 보호하려고 오버했다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박해를 견디다 못해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홍위병들이 건물 밖으로 내던졌다는 설도 있다) 평생 불구자로 지낸 것을 봐도, 차라리 홍위병에 가담해서 아버지를 팬 게 오히려 보신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 ↑ 보이보의 비서와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다. 보이보는 멀쩡한 전처와 이혼하고 바로 비서와 결혼했다.
- ↑ 문화대혁명시 대학은 문을 닫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고서야 제대로 입학생을 모집한다.
- ↑ 면적은 8만 2천 제곱km로 남한의 80%. 인구가 4000만에 가깝다. 거의 나라 하나급이다...
- ↑ 그러나 전국 단위 국영방송이나 타 지역 위성 방송에서 틀어주는 광고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 ↑ 실제로 저런 상태에서 외국 현지공관에서의 현지인의 망명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과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외교 관례상 허용되는 일이 아니다. 예외적으로 1989년 천안문 6.4 항쟁때 미국 대사관으로 도피한 이들은 미국과의 교섭 끝에 국외추방 형식으로 망명을 허가했다. 이 경우는 인권문제이기 때문에 부각 될수록 중국이 불리해서 그렇게 해결 될 수 있었다는 견해가 많다. 왕리쥔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자국 내에서 범법 의혹을 받고 있는 입장상 해당 망명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정말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 망명 항목 참조.
- ↑ 한국의 국가정보원 같은 기관이다.
- ↑ 중국에서는 부패정도가 일정액수를 넘으면 사형선고를 한다.
- ↑ 옥스퍼드 시절 보과과는 정학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하버드 진학을 꿈꾸던 보과과가 담당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에 합격을 하였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 A-Level에서 올A를 받은 수재임은 분명하나, 이후 대학생활에서 삐뚤어진 생활을 하였음에도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 붙은건 여러모로 다른 요인이 보과과의 하버드 합격에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 된다.
사실 A-level은 A*이 가장 높은 등급인데다 그 조차도 한국의 1등급보다 받기 널널해서 수재라 평가하기도 뭣하다 - ↑ 사실 하버드 같은 경우는 세계각국의 명문가 자제들은 입학이 일반인에 비해 매우 쉬운 편으로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학교명예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넣어주는 경우가 많다.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미국의 대학입시가 꼭 한국보다 더 공정한건 아니다. 아들 부시도 예일대에서 학점 2.3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입학했다. 그리고 예일대와 하버드대 최악의 망신이 되었다.(...)
- ↑ 영문 위키와 중국어 위키에도 정확한 출생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아는 위키러가 추가바람. 다만 1998년 구카이라이의 압력으로 다롄방송국에서 해고된 뒤 완벽하게 행방불명된 것은 분명하다.
-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4년 7월 20일 방영분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 ↑ 애시당초 임신했다는 것 자체도 단지 소문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다. 일단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고, 추가 증인도 나오지 않고 있다.
- ↑ 즉 수감중 별다른 사고를 안치면 자동적으로 2년후 무기나 장기징역으로 감형하는 것
- ↑ 이것도 논란이 많다. 살인범을 사형에 처하는 게 원칙인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면하려면 정말 누가 봐도 우발적인 살인이거나 정상참작의 여지가 극히 커야 하는데 구카이라이는 그 반대로 명백한 계획살인에다가 선처의 여지도 없었다.
- ↑ 엷을 박(薄)의 반대가 두터울 후(厚)
- ↑ 쉬밍회장은 2015년 12월 수감도중 사망한다.